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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위대한 영광을 바라보라!
사도행전 6:8-15
사도행전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은 마귀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무너뜨리기 위해 한 순간도 쉬지 않고 갖은 방법으로 일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행전의 예루살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충성되게 잘 감당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평화와 풍요의 시대에 신앙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우리들에게 참으로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들에게 참으로 시급하고 중요한 것은 기독교가 무엇이며, 교회가 전해야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에 대한 본연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외적인 시련과 내적인 시련에 번갈아 가면서 직면해야만 했습니다. 외적인 시련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데 주도적이었던 산헤드린의 권력자들로부터 온 것이었고, 내적인 시련은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사건이나 히브리파 성도들과 헬라파 성도들 간의 갈등 표출이었습니다. 마귀는 이와 같은 내․외적 시련을 통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분열시키고 무너뜨리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예루살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그와 같은 내․외적인 시련과 핍박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모여서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썼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는”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사실은 예루살렘 교회가 순탄한 가운데 부흥하고 성장했던 것이 아니라 갖은 시련과 핍박을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에 한 사람이 회개하고 돌이켜 그리스도인이 되는 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즉 예루살렘 교회의 교인들은 사도들이 전하는 메시지를 듣고 바로 다음날이면 잊어버리는 감정적인 반응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들인 후, 그 말씀에 온전히 순종했습니다.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그렇습니다. 기독교의 메시지가 요구하는 것은 바로 ‘이 도’, ‘이 복음’에 대한 전적인 ‘순종’입니다. 메시지를 들은 후 어느 한 부분만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버리는 것이 아니라, 선포되는 그 모든 메시지를 자신의 존재 전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독교가 전하는 메시지인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 이유는 이 복음으로부터 하나님의 능력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복음 안에는 모든 능력이 담겨 있습니다. 복음 안에 인생의 모든 답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바로 이 ‘복음’입니다. 사도들을 비롯한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이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고 이 복음을 전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시대에는 복음을 무언가 인간적인 메시지로 취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때로는 아주 형편없는 수준의 메시지로 축소시켜버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교회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도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오늘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의 핵심적인 본질을 놓치고 있습니다. 저들은 기독교가 전하는 복음의 메시지는 인류가 덜 발달했던 시대에나 필요한 것이었을 뿐 첨단의 과학이 발달한 오늘의 시대에는 맞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저들은 ‘현대화’, 혹은 ‘시대성’을 강조합니다. 기독교도, 교회도 오늘의 시대에 맞게 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가만히 귀를 기울여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대부분이 그런 이야기들이 아닙니까? 어떤 이들은 현대인의 지식을 강조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과거 성경에 기초한 설교는 오늘 우리의 시대에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 고리타분한 말을 듣기에는 현대인들이 너무 똑똑하고 성숙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기독교가 전하는 복음의 메시지도 오늘의 시대에 맞게 전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가 하면, 2,000년 전의 시대를 경험하지 못한 현대인들은 당시의 기독교적인 용어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늘의 시대에 맞는 용어로 바꾸어서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사실 요즘에는 국어 낱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젊은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인터넷에 보니까 이런 글이 올라왔습니다. “사흘 연휴라고 해서 4일을 쉬는 줄 알았다.” 이 사람은 “3일인데 왜 사흘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분이 계십니까?
요즘에는 철학적인 용어나 학문적인 용어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할진대 ‘삼위일체’, ‘예정론’과 같은 기독교적 용어는 더더구나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인들이 이해하기 쉬운 용어로 바꾸어서 사용하던가, 아니면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딱딱한 기독교 교리나 성경이 아니라 요즘의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에 관심을 갖고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영화나 노래, 드라마, 아니면 심리학이나 경제와 같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취향을 찾아서 그것을 주제로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현대인들은 기적적인 요소들을 믿지 않는 과학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에 복음의 대안으로 21세기에 맞는 새로운 주제의 메시지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아주 그럴듯하게 들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이런 메시지의 현대화, 메시지의 시대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한 가지의 공통점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것은 그들이 복음의 위대함을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복음을 무언가 왜소한 것, 평범한 것, 쉽고 값싼 것으로 변질시키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복음의 본질을 완전히 왜곡시키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복음은 결코 하나님의 능력이 될 수 없습니다. 이들에게 기독교의 복음은 수많은 여타의 다른 종교들이 전하는 것과 같은 부류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복음은 세상의 다른 종교들과 같이 인간들이 고안해서 만들어낸 이론이나 사상이 아닙니다. 복음은 유다서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계시로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입니다. 그러므로 이 복음은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복음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출발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서 출발하면 당연히 앞서 이야기한 사고방식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 시대에 맞는 새로운 메시지나 새로운 방법론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복음을 우스꽝스럽게 흉내 낸 거짓 복음이며, 가짜입니다. 그것은 복음에 대한 모욕으로까지 느껴집니다. 저는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이 일로 장차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대 앞에서 책망 당할 것이 두렵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적인 노력을 중단하고, 참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을 더욱 깊이 믿고 의뢰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 세상에 복음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의롭다 함을 얻고 구원받는 길은 오직 복음 밖에 없습니다. 문명과 과학과 지성이 발달할수록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것은 복음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똑똑하다고 자칭하는 오늘의 인간들이 만들어 가는 세상을 한 번 보십시오. 지성과 이성과 과학이 인류를 어떻게 파괴하고 있는지를 보십시오. 방탕하고 타락한 인간들의 추악한 모습들을 보십시오. 결국 복음만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해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간의 죄와 죽음, 영생의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이 복음을 붙잡고, 이 복음만을 전적으로 신뢰하면서 영원한 천국을 향해 믿음으로 정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복음이 강력한 반대에 부딪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일을 통해 복음의 핵심적인 본질, 그러니까 복음의 위엄과 영광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본문은 어떻게 복음의 위엄과 영광을 보여주고 있을까요? 6장은 사도들이 사용한 방법에 대해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그들이 진리인 말씀을 선포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또한 스데반이 공회원들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과의 논쟁에서 본문 10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사도들과 스데반은 기독교의 복음을 말하고 가르치고 설명했습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이런저런 장치나 세상적인 오락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직 기독교 메시지만 강조했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메시지인 복음만이 사람을 살리고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신약성경 전체의 주장이기도 합니다. 나아가 기독교 역사에서 신실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했던 한결같은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들은 시대적인 상황이 힘들고 어려울수록 더욱 말씀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시대적인 상황에 맞추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들과 시대의 문제를 성경에 맞추어보고,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살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성경의 말씀에 마음과 귀를 열었고, 그 말씀으로 모든 포로됨과 억눌림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은 온갖 포로됨과 억눌림과 갇힘으로부터 온전한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8장 3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모든 사람들은 사회적인 어려움과 인생의 수많은 문제들로부터 자유하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사람을 자유하게 합니까? 심리적 경험입니까? 아니면 명예나 물질의 부요함입니까? 절대 아닙니다. 사람을 자유하게 하는 것은 오직 이 진리, 이 말씀뿐입니다. ‘이 진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대속적인 죽으심으로 우리의 죗값을 완전히 지불하셨다는 십자가 복음을 말합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그렇습니다. 이 진리, 사도들이 전한 이 복음 외에 사람을 진정 자유하게 할 수 있는 것은 해 아래 아무것도 없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이 자유는 영원하고 참된 자유입니다. 이 자유는 세상이 줄 수 없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이 복음의 진리를 믿음으로 알게 된 사람은 참된 자유를 누리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참된 자유가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이 자유를 얻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합니다. 인간에게 참된 자유가 필요하다는 말은 역으로 인간에게는 참된 자유가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함으로 모든 인간은 죄의 노예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은 사탄의 권세에 붙잡혀 죄와 사망의 노예가 되어서 종노릇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각양 죄와 불의를 밥 먹듯이 행하며 살아갑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진노와 영원한 영벌의 심판을 피하지 못할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그래서 현명한 사람들은 이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벗어나고자 온갖 애를 써 왔습니다. 그렇지만 결국은 사도 바울이 절규했던 그 고백 앞에 설 수밖에 없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세상은 결코 진리를 알지 못합니다. 따라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없듯이 죄의 노예가 된 사람에게서 출발하면 안 됩니다. 그러한 행동은 인생들에게 오히려 더 큰 절망의 굴레를 씌우는 결과를 가져다 줄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주어야 하는지를, 죄의 노예가 된 사람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이 진리, 이 복음입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며 죄와 사망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것은 이 진리, 이 복음입니다.
사도들은 이 복음의 메시지를 신뢰했습니다. 이 메시지는 모든 인생은 다 죄인이며, 예수님께서 그러한 인생을 대신하여 죽으셨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죄인을 의롭게 하시기 위해 그가 부활하셨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사람이 죽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각각 영원한 천국과 지옥으로 가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세상은 이러한 진리를 알지 못합니다. 그것은 세상이 거짓의 아비인 마귀로부터 난 인본주의적 비진리에 억눌려 있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보십시오. 이 세상에는 마치 진리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거짓인 비진리들이 얼마나 많이 난무하고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신천지를 비롯한 이단들이 퍼뜨리는 거짓된 사슬에 포로가 되어 사망의 그늘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비진리에 현혹되어 참 진리를 외면함으로써 참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유일한 구주이심을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런데 사도들은 이 진리, 이 복음을 알았습니다. 모든 인간들이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 진리에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인간이 죄와 사망의 종노릇하는 속박으로부터 해방되는 유일한 길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기독교가 전하는 이 진리, 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오직 이 복음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위협과 핍박에도 전혀 위축되지 않고 담대하게 이 복음의 메시지를 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똑똑한 현대인들은 딱딱한 성경적인 설교보다 적당한 유머가 있는 강연을 더 좋아합니다. 그래서 교회 강단에도 사람들을 웃겼다가 울리는 코미디언과 같은 꾼들이 점령하고 있습니다. 20세기의 위대한 설교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교회에서 이런 강단꾼들을 멀리해야 한다고 경고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복음의 본질이 왜곡되고 희화화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의 현대인들이 무엇을 좋아하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현대인들에게 정말 중요한 문제는 그들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원하는가가 아니라 그들에게 참으로 무엇이 필요한가 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은 바로 이 복음입니다. 그리고 이 복음을 듣고 깨우쳐서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진리를 선포하라는 부르심, 복음의 선포자가 되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사명을 주시면서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똑같은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세상 사람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판단하는 주체는 사람들 자신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정말 무엇이 필요한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진리,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배워야 합니다. 그 길만이 자신이 살고 가족과 세상을 살리는 유일한 길입니다. 사도들이 복음의 위엄과 영광을 위해 사용한 첫 번째 요소가 바로 진리인 복음을 중단 없이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생명을 구원하는 이 복음을 쉬지 말고 전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둘째는, 그들은 이 복음의 메시지를 권능 있게 전했다는 것입니다.
본문 8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본문에서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백성들 가운데서 큰 기사와 표적을 행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10절은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사도들과 스데반이 복음을 더욱 활발하고 능력 있게 전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복음에는 세상에서의 정치인들이나 영업사원들이 물건을 판매하는 것과는 본질적인 차이점이 있습니다. 정치인들이나 영업사원들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애를 씁니다. 어떤 상품을 팔든지, 아니면 표를 얻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수준에 맞추어서 가려운 데를 긁어주는 지혜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것이 영업의 기술입니다.
그렇지만 복음의 방법은 이러한 정치인들이나 영업사원들의 접근법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정치나 판매의 성공 여부는 인간의 재능과 설득력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의 설득력으로는 아무것도, 그 어떤 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타고난 영업사원이라고 해도, 논쟁하는 기술이 거의 완벽한 경지에 다다른 웅변가라고 해도 영혼을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복음에는 영혼을 구원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권능입니다.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했기 때문에 ‘기사와 표적’을 행하는 권능도 충만했고, 말의 권능도 충만했습니다. 보십시오. 한쪽에는 자칭 똑똑한 무리들이 포진하고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단 한 사람이 그들과 맞서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똑똑한 무리가 이 한 사람을 당해 내지를 못했습니다. 대체 무엇을 당해 내지 못했을까요? 본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그렇습니다. 그 권능을 당해 내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을 전하는 방법은 세상 사람들의 지혜나 방법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능력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방법은 결코 통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아덴에서 전도에 실패했던 것도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 사람의 지혜로 전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몸소 경험하고 깨달았던 베드로도 수년 후에 베드로전서 1장 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 전까지는 아무런 사역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위대한 겁쟁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한 이후 그들은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고, 수천 명을 회심시켜 주께로 돌아오게 했습니다. 베드로는 이 사실을 기억하고 성령의 능력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서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에도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서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은 “사람들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할까?”라는 질문을 던진 후에 “바로 그것을 제공하자”라고 말함으로써 그 영광을 축소시키지 않습니다. 복음의 방법은 오직 진리에 있습니다. 성령에 있습니다. 다시 분명히 말씀을 드리지만, 이것은 초자연적인 복음이며, 초자연적인 메시지입니다. 복음이 복음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복음이 지금까지 수많은 놀라운 일들을 할 수가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복음을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당시 로마제국의 수도 로마에는 내로라하는 뛰어난 철학자들도 적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곳은 종교와 사상이 다양하게 보급되어 있는 국제 도시였습니다. 그리고 철학이나 과학 등에 익숙했던 로마인들의 눈으로 보기에 십자가의 도는 너무나도 어리석은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강한 자가 곧 진리였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그 로마에 편지를 쓰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복음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적극적인 고백입니다. 그가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복음의 능력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철학이라든지 사상, 이념 따위는 고작해야 인류의 삶을 어느 정도 개선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렇지만 복음은 인류를 온전히 구원하는 유일한 처방입니다. 바울은 복음의 가치와 위력을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복음의 능력에 대한 바울의 지식은 사변적인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체험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핍박과 환난에도 위축되거나 굴복하지 않고 복음을 능력 있게 전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독교의 복음은 인간이 만들어낸 가르침도 아니요, 단순한 철학도 아닙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친히 계시로 주신 진리이며, 성령을 통해 역사하게 하시는 구원의 메시지입니다. 오직 성령만이 사람에게 빛을 비추어 주실 수 있습니다. 오직 성령만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복음은 구원이고, 능력인 것입니다. 마귀가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는 것을 부지런히 방해하는 까닭은 죄로 죽었던 자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복음의 폭발적인 능력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주님께 부르짖음으로써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지 않는 한, 이 세상에 희망은 없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그렇습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성령의 권능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성령의 권능을 받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런데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사도들의 이러한 방법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전도도 마치 상품을 팔듯이 사람들의 눈높이에 맞추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상대방의 처지와 감정과 판단을 헤아려서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는 방법에서 전도를 해야 한다고 합니다. 교회 강단에서 전하는 메시지도 교인들이 듣고 싶어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아서 그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것이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죄나 윤리, 심판, 종말과 같은 자극적인 설교는 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위대한 복음을 싸구려 복음으로 만드는 짓입니다. 복음의 위대한 메시지를 축소시키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령이 주시는 능력 대신에 인간의 방법과 수단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어리석은 짓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우리는 그리스도인에 대해 너무 값싼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도행전 6장 한 장만 읽어보아도 그리스도인이 사실상 어떤 사람들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초자연적이고 기적적인 능력과 관련된 사람들이라는 것을 발견합니다. 능력이 그들을 충만하게 채웠고, 그들을 완전히 변화시켰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지금 피상적인 결단을 내리거나, 여기저기 약간씩 고쳐 나가는 일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런 일도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인 현상에 불과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독교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가르쳐 주신 기독교는 거듭나는 것입니다.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새롭게 창조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독교입니다. 이 외에 기독교를 정의할 말은 없습니다. 우리는 기독교 신앙을 축소시켜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 되겠다고 결심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이 친히 여러분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이 무시했던 본래 배운 것이 없는 보잘것없는 갈릴리 출신의 어부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성령은 누구라도 새 사람으로 만드실 수 있습니다. 진리를 더 알고자 하는 갈망과 욕구를 만들어내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 하나님은 도덕적으로 나약한 자를 취하여 강하고 능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습니다. 성령은 사람들을 변화시키며, 편견을 없애고, 원수를 형제로 만듭니다. 그리하여 사람들로부터 ‘칭찬 듣는 사람’으로 만듭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으로서는 이 모든 일들을 다 하실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와 사도들에게 역사하셨던 성령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들 가운데 동일하게 역사하십니다. 저와 여러분도 성령으로 충만해져서 그 은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령의 다스림을 받고, 성령으로 거듭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교회는 처음부터 생존을 위해 싸워야 했습니다. 세상은 기독교의 복음을 처음부터 끝장내려고 했습니다. 우리는 사도들이 어떻게 체포되어 옥에 갇혔는지, 어떻게 위협받고 복음 전파를 중단하라는 명령을 받았는지 살펴보았습니다. 교회는 탄생하는 그 순간부터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기독교를 없애려 드는 세상과 맞닥뜨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이후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역사에서 교회가 패배한 듯이 보이는 시기와 시대가 있었습니다. 세상과 육신과 마귀가 승리하고 교회는 힘없고 나약한 소수만 남은 듯이 보이는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기독교를 정복했다고 생각했던 때가 아주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지금까지도 사라지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는 더욱 흥왕하여 갈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이 반드시 존속되며 승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공중의 권세를 잡은 사탄이 사람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하는 현재로서는 승리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습니다. 더구나 코로나가 세상을 덮으면서 오늘의 교회 현실은 더욱 암담합니다. 교인들조차 신앙이 코로나에 걸려 버렸습니다. 교회 역사에서 위기가 아니었던 때가 없었지만 오늘의 시대는 그야말로 위기 중의 위기입니다. 분명히 세상과 어둠의 권세가 성공을 거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저는 믿습니다. 세상과 마귀는 끝났다고 선언하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의 복음은 역사하며, 마침내 승리하여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을 완성시킬 것입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이미 그 대답이 6장에 나와 있습니다. 교회가 반드시 승리하는 이유는 교회가 하나님의 진리와 말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교회와 성도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반드시 승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악이 승리하면 하나님이 패하시는 것인데,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이기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하고, 전지전능하시며,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뜻 가운데 악이 잠시 승리하게 내버려두실 때가 있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잠시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때문에, 이 복음의 메시지가 갖는 성격 때문에 최종적인 승리는 확실히 우리의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에 반드시 승리하십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놀라운 진술에 주목해 보십시오. 15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지금 스데반은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은 스데반을 처단하기 위해 모여 있습니다. 그런데 그 원수들의 눈에도 스데반의 얼굴에서 광채가 나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 얼굴에 영광이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스데반 자신이 빛을 낸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빛이 스데반의 얼굴을 통해 나타난 것입니다. 스데반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으로 인해 스데반의 얼굴이 광채로 가득 찼으며, 그 광채는 거짓 고소자들과 악의에 가득 차 있는 산헤드린 공회원들을 압도할만한 위엄이었습니다. 스데반의 적들은 복음의 위대한 영광을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어떤 권세에도 정복되지 않는 복음의 능력이요, 영광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잠시 후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대 앞에서 산산이 부서질 것입니다. 그들의 종말은 최종적이고 영원한 파멸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원수들에게 대항할 테면 대항해 보라고 하십시오. 그들은 처음부터 하나님께 도전했고, 지금도 계속 도전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복음을 반대했습니다. 그 후에는 로마인들이 일어나서 반대했습니다. 현대에는 공산 세력과 모든 악의 무리, 지옥의 무리가 풀려 나와 이 복음, 이 메시지를 반대하고 복음을 진멸하려고 했습니다. 지금은 물질주의와 인본주의, 개인주의로 포장해서 복음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지옥문이라 해도,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라는 이 선포를 이길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 복음의 능력이 보이십니까? 오히려 여러분은 자신이 성령의 능력과 상대하고 있음을 느낀 적이 없습니까? 성령께서 스데반 안에서 이들을 상대하셨을 때 이들은 도저히 당해 낼 수가 없었습니다.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답변을 찾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혹여 여러분도 그러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은 이 복음의 능력을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이 복음의 영광과 위엄을 본 적이 있습니까?
다시 묻습니다. 사람들이 여러분을 보고 놀라움을 표시할 때가 가끔 있습니까? 여러분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처럼 보인다고 말할 때가 있었습니까?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찾아와서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까? “당신의 삶의 비밀이 무엇입니까? 당신에게 나타나는 평안과 평온의 근원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해야 나도 그것을 얻을 수 있을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다른 모든 문명들의 영광이 지나갔듯이 21세기와 그 문명의 모든 영광도 지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로 단번에 주신 이 복음은 우리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영원할 것입니다. 이 복음의 지혜를 인정하고, 성령께 굴복하십시오. 그리하여 초대교회가 전한 바 복음의 영광과 능력을 우리 모두가 경험하며 깨달아서 세상에 힘 있게 전하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