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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사도행전 7:1-2
일곱 집사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스데반은 ‘은혜와 권능이 충만’해서 백성들 가운데 큰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는 유대주의자들과 격렬한 논쟁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렇지만 유대주의자들은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는 스데반을 당해 낼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스데반을 넘어뜨리기 위한 세 가지 ‘공작’과 ‘조작’을 꾸몄습니다. 첫째로, 그들은 돈을 주고 사람들을 매수했습니다. 그리고는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고 소문을 퍼뜨리게 했습니다. 둘째로, 그들은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질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스데반을 잡아 가지고 산헤드린 공회로 끌고 갔습니다. 셋째로, 그들은 거짓 증인들을 세워서 고발했습니다.
사람을 매수해서 나쁜 소문을 퍼뜨리게 하고, 백성들과 유력한 사람들을 선동한 후에 거짓 증인들을 내세워 고발하는 방법. 우리들에게 뭔가 익숙한 방법이 아닙니까? 이것은 대제사장 가야바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서 취했던 그 방법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빌립보에서 귀신들린 여자 종을 고쳐주었을 때 주인들이 자신들의 돈벌이가 사라졌다는 사실에 앙심을 품고 사용했던 방법이기도 했습니다. 이와 같은 방법은 범죄한 아담 이후의 인간들이 즐겨 사용했던 방법입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 방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 방법은 똑같습니다. 외모는 변해도 속에 있는 죄악은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인간의 내면을 지배하고 있는 죄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은 거짓 증인들을 내세워 스데반을 산헤드린 공회에 고소했습니다. 스데반이 고소를 당한 이유는 신성모독죄와 모세의 율법을 비판한 죄, 그리고 성전과 성전 예배를 반대한 죄였습니다. 그렇지만 스데반이 고소를 당한 궁극적인 이유는 6장 14절에서 볼 수 있듯이 그가 그리스도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나머지 고소들은 이 안에 다 포함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예수와 그의 가르침을 믿는다는 이유로 어려운 곤경에 처했고, 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은 자신을 고소한 산헤드린의 권력자들과 유대주의자들을 향한 스데반의 설교입니다.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베드로를 비롯한 여러 사도들의 설교가 요약의 형태로 짧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의 설교는 무려 51절에 걸쳐서 길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스데반의 설교인 동시에 유언입니다. 스데반은 이 설교를 끝내면서 바로 끌려나가 돌에 맞아 순교를 합니다. 스데반도 이미 이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순교하게 될 것을 알면서도 해야 할 말을 담대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설교가 어떤 의미에서는 기독교 교리의 깊은 진리를 다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스데반의 설교가 갖는 의미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산헤드린의 법정에 서 있는 스데반을 향해 대제사장이 묻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냐?” 스데반을 고소한 고소인들의 말이 사실인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의 이 말은 어떻게 보면 스데반으로 하여금 자기를 변호할 기회를 준 것처럼 보여 집니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데 앞장섰던 대제사장 가야바의 교묘한 악의가 숨겨져 있습니다. 만약에 스데반이 이 물음에 “사실이다”라고 대답을 하면, 그를 신성모독으로 선고하여 사형에 처할 심산이었고, 반대로 “사실이 아니다”라고 대답하면 그를 거짓말하는 위증 죄인으로 몰아서 그에 상당한 형벌을 내릴 심산이었던 것입니다.
스데반은 이러한 악의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고소한 사람들의 흥분에 쌓인 격앙된 상태를 보았습니다. 그들의 편견과 폭력성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지나치게 감정에 치우쳐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진작부터 이를 갈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사나운 눈초리와 떨리고 있는 입술에 살기가 감돌았습니다. 스데반은 그런 자들을 향해 아주 정중하게 첫 마디 말을 뗐습니다.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처음부터 스데반을 처형하려는 목적으로 고발한 그들이 스데반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귀담아 들어볼 것을 간절히 부탁한 것입니다. “들으소서!” 이 말은 편견과 선입견에 사로잡혀서 격한 반응부터 나타내지 말고, 마음을 열고 차분하게 잘 들어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스데반은 이스라엘의 오랜 역사를 과거로부터 되짚어 오는데, 그것이 50절까지 계속됩니다. 그런 다음에 듣고 있던 자들에게 설교를 적용합니다.
우리가 스데반의 설교를 살펴보는 이유는 이 메시지가 오늘 우리의 상황에 너무나 들어맞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고통의 세상, 혼돈의 세상, 죄와 수치의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세상이 고통에 처해 있을 뿐 아니라 각 개인이 저마다 고통 가운데 신음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크고 작은 문제와 어려움을 안고 있습니다. 우리가 맞닥뜨려 있는 상황에 대처할 수 있게 해 주는 교훈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그것은 바로 기독교 복음입니다. ‘복음’은 말 그대로 ‘good news’, ‘좋은 소식’입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친히 계시로 온 인류에게 주신 가장 놀랍고, 복되고, 기쁜 소식입니다. 우리는 이 소식을 세상에 전하라는 주님의 분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교회와 우리들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그러나 비극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이 고통과 비참함 가운데 있으면서도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할 구원의 복음을 배척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복음에 등을 돌리고, 복음과는 어떤 모양으로도 관계를 두지 않으려고 합니다. 심지어 복음을 비웃고 조롱합니다. 이 세상은 2천 년 전 산헤드린의 공회원들이 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복음에 대항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세상이 복음을 배척하는 이유가 사도행전의 본문에 기록된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이 스데반을 체포하여 법정에 세웠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이 도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렀습니까? 스데반은 어느 누구에게도 해를 끼친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오직 선한 일을 하고, 귀신 들리고 병든 사람들을 고쳐주는 기적을 행했을 뿐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스데반을 체포한 이유였습니다. 그들은 큰 기사와 표적을 행하는 사도들을 시기하여 옥에 가두었듯이, 똑같은 이유로 스데반을 체포해서 법정에 세웠던 것입니다.
그들은 스데반에 대해 거짓 증인들을 세운 후에 거짓 고소를 하게 했습니다. 그들은 스데반을 법정에 세워서 유죄 판결을 이끌어낼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성을 잃어버린 그들이 얼마나 독한 감정을 쏟아냈는지 주목해 보십시오. 7장 54절에 가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오늘날 사람들은 항상 냉정하고 차분하고, 가장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이유를 가지고 복음을 비판하고 있는 줄로 생각합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에 대한 비판은 어김없이 편견과 충동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단순히 반대에만 그치지 않고 반드시 경멸과 냉소를 던집니다. 때문에 저는 복음을 거부하고 비판하는 태도에는 새로운 것이 전혀 없다고 힘주어 말하고 싶습니다. 복음을 비판하는 것이 무슨 지적이고, 이성적인 사람들의 행동으로 생각하지만 그것은 실상 가장 어리석은 자들의 태도입니다.
그렇다면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이 안고 있었던 문제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자신들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데 있었습니다.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판단과 행동에 조금도 잘못된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선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저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신앙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의 지도자요, 백성들의 지표가 될 만한 종교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적어도 세리와 죄인들처럼 살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스데반은 그들에게 큰 결핍이 있고, 그 결핍을 채워줄 분은 자신들이 얼마 전에 십자가에 못 박은 나사렛 예수 한 분뿐임을 암시한 것입니다. 이것이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을 격분하게 만들었습니다.
둘째는, 자신들의 역사와 종교를 잘못 이해한데 있었습니다.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전통과 역사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이 자신들의 조상이며, 자신들은 그의 후손임을 크게 자랑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언제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라는 조상들에 관한 말이 입에서 떠날 날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역사의 참된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순전히 편협된 민족성과 정치 위주로 이해를 했던 것입니다.
심지어 그들은 성전과 성전예배를 대하는 태도도 잘못되어 있었습니다. 성전을 생각하는 그들의 태도는 매우 교만했습니다. 오직 예루살렘 성전만이 예배할 장소이며, 그곳을 떠나서는 아무 데서도 합당한 예배를 드릴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이며, 자신들만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고,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계시를 맡아 가지고 있다고 자랑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껍데기만 남은 위선적인 신앙, 건물과 형식의 종교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이 자신들이 그토록 자부하던 성전뿐 아니라, 심지어 자신들의 역사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책망한 것입니다. 이것이 산헤드린 권력자들의 심기를 건드렸던 것입니다. 감정이 상한 그들은 스데반의 어떤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에도 여전합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기에 가장 어려운 사람은 이미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나는 그리스도인이다”라는 생각만큼 그리스도인이 되는데 큰 장애가 없습니다. 자신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은 이미 하나님과 화목했다고 단정하기 때문에 그만큼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져 있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하나님을 믿고 살아왔다. 나는 한 번도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나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며 늘 기도하고 있다.” 물론 그들이 빠짐없이 교회에 출석하고, 특정 형식의 예배를 드리고, 선한 생활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교만한 태도가 문제입니다. 이렇게 자부하는 사람들은 기독교의 본질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유대교는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주신 메시지를 정반대의 것으로 변질시켰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세계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자신들의 죄책과 비참함을 바라볼 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던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스스로 “괜찮다, 문제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은 혹여 그런 것이 필요해도 자신은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이 외적이고 기계적이며, 형식적인 것으로 굳어 버렸습니다. 신앙이 인격으로 발휘되지 않습니다. 신앙을 삶으로 실천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지옥에 관해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참된 복음을 듣게 되면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마음의 불편함을 느낍니다. 때문에 강단에서 죄와 윤리와 심판을 전해서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런 생각은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안고 있던 문제를 그대로 따르는 것일 뿐입니다. 오늘의 우리는 기독교 복음을 제도화된 종교로 고착시켜 버렸습니다. 워낙 심하게 변질시켜서 원상을 제대로 식별하기조차 어렵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장차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무서운 책망을 피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을 열고 스데반의 설교를 들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처한 상황은 스데반이 책망하고 지적해 주어야만 했던 그때의 상황과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스데반은 우리들을 향해 요청합니다.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집중해서 귀를 기울여 들어 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라도 선포되는 말씀 앞에 잠잠히 인내하며 들음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지니고 있는 지적 역량을 다 동원해서 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생명을 살리는 구원의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독교의 복음은 인간이 생각해 내거나 고뇌하는 가운데 만들어진 사상이 아닙니다. 인간이 이론화하거나 철학적으로 설명해 낸 것도 아닙니다. 복음에는 새로운 어떤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이 사실을 유념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편견과 선입견을 버리고 모든 관심을 집중해서 들어야 합니다. 싫든 좋든 복음 앞에 설 때는 그렇게 되도록 준비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될 때 내딛는 첫 걸음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설교를 들을 때 가져야 하는 마음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스데반이 자신을 고소한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을 향해 전하고자 했던 복음의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그리고 우리가 들어야 하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들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들으라는 것입니다.
본문 2절은 스데반이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을 향해 전한 복음의 첫 진술인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스데반은 복음의 첫 진술에서 ‘영광의 하나님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의 출발은 언제나 ‘하나님’입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은 결코 인간과 인간의 문제와 인간의 사상으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오늘의 현대인들은 항상 자신들로 시작해서 자신들로 끝마칩니다. 항상 자신들이 중심을 차지하고, 모든 것이 자기 주위를 돌아가게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이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스스로 그리스도인임을 자부하는 사람들조차도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조차도 하나님은 항상 후순위이고, 자신이 가장 중요한 앞자리에 차지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오늘의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하나님에 관한 연구를 인간에 관한 연구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에 대해, 인간과 더불어 시작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 일일 뿐 아니라, 하나님을 모욕하는 짓입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된 인간은 본래 살아 계시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로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과 멀어졌을 뿐 아니라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낼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차선책으로 위안을 받고자 금과 은과 나무와 돌들로 우상을 만들어서 신으로 섬겼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인간들이 자신의 생각과 희망을 투영해서 상상력으로 만든 것들입니다. 그것들은 실재하지 않습니다. 우상은 거짓 것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 우상들에게 포로가 되어 지배를 당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결코 그러한 우상과 같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스데반은 하나님을 가리켜 ‘영광의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영광’이라는 단어는 장엄함과 위대함을 뜻합니다. 경의로움과 놀라움을 뜻합니다. 권능을 뜻합니다. 그러나 ‘영광’이라는 단어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세계와 인류 위에 초월적으로 구별되어 계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땅에 붙어서 수평의 세계만을 바라봅니다. 인간과 인간이 안고 있는 문제들만 우리 눈에 들어옵니다. 그런데 복음은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살지 말라!”고 말합니다. “눈을 들어 위를 보라. 고개를 들어 초월적이신 영광의 하나님을 바라보라.”
이것이 바로 복음의 시작입니다. 복음은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하나님, 모든 것을 심판하실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맨 앞에 모시고, 하나님과 더불어 시작해야 합니다. 그런데 교만한 인간은 하나님을 맨 앞에 모시려고 하지 않습니다. 세상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도 하나님을 행위적으로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심정적으로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믿기는 하지만, 하나님을 자신의 삶의 맨 앞에 모시려고 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똑똑한 오늘의 현대인들은 하나님이 없이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인간 사회가 하나님을 떠난 상태에서도 번영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거짓과 사기와 탐욕으로 가득한 사람들이 세상에서 더 잘 나가는 경우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것이 오늘의 현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안고 있는 가장 큰 비극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인간은 자기들끼리 내버려두면 절대로 서로 사랑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여러분의 삶의 맨 앞에 모십시오. 그리고 영광의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복음은 ‘영광의 하나님’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단지 높고 높은 곳에만 계시는 초월적인 분이라고 한다면 우리들에게는 아무 희망도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하나님을 믿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와는 전혀 관계를 맺지 않는 그저 초월적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단지 우주를 창조만 하셨을 뿐 아무 것도 하지 않으시는 역사의 방관자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의 하나님은 결코 복음, 기쁜 소식이 될 수 없습니다.
기독교의 복음이 온 인류에 기쁜 소식이 될 수 있는 것은 초월적이신 영광의 하나님이 죄와 사망의 늪에 빠져 있는 우리 인간을 친히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역사는 인간이 하나님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영광의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아오신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행동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영광의 하나님께서 자신을 직접 우리들에게 계시해 주신 사건,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이 사실을 스데반은 이렇게 설교합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그렇다면 영광의 하나님이 찾아오신 곳이 어디입니까?
본문에서 스데반은 영광의 하나님이 메소포타미아에 살던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셨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본문에서 주목해야 하는 단어는 바로 ‘메소포타미아의 아브라함’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처음 찾아오신 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인 가나안도 아니고, 거룩한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도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바로 메소포타미아였습니다. 그렇다면 스데반이 왜 메소포타미아에 살고 있던 시절의 아브라함을 상기시키면서 설교를 시작했다고 보십니까? 그것은 기독교의 복음을 제시함에 있어서 지극히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은 메소포타미아에 거할 때 갈대아 지방의 ‘우르’라고 하는 지역에서 살았습니다. 당시 우르 사람들은 달을 신으로 숭배했습니다. 이교도들의 종교의식에는 다양한 등급이 있고, 그들이 숭배하던 신들도 다양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랑의 신이나 전쟁의 신 따위를 섬기는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달과 태양과 별들을 섬기고, 정령숭배자들은 나무와 돌과 시냇물 따위에 혼령들이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의 증언에 의하면 그때 아브라함도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 모든 인간과 세상의 상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구약성경을 통해 세상에 관해 많은 것을 배웁니다. 가인이라는 사람이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혀 동생 아벨을 살해한 이야기를 읽습니다. 창세기 6장 5절에는 대홍수 이전의 세상 상태가 두렵게 묘사되어 있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이것이 노아 홍수 이전의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의 상태입니다. 세상은 오늘날도 여전히 그런 상태에 있습니다. 또한 구약성경에는 소돔과 고모라의 역사와 그 도시에 가득하던 죄악과 타락에 관한 기록이 실려 있습니다. 그것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의 상태입니다.
신약성경으로 눈을 돌리면 로마서 1장 후반에 죄에 빠진 인간의 실태를 적나라하게 기록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와 자연과 선지자들을 통해 자신을 계시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하나님을 멀리합니다. 심지어 사람들은 자신들의 지혜를 의지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세상의 상태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세계와 대한민국과 울산과 모든 도시들이 처해 있는 현실입니다. 저마다 세련되고 지식과 학문이 발달했음에도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상태는 성경에서 말씀한 바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뒤지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런 죄악된 행위들을 자기들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일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두둔하기까지 합니다. ‘세상과 더불어’ 사는 것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한 마디로 메소포타미아에서 이교에 발을 담근 채 사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우상을 숭배하며 살아갑니다. 더러는 돈을 숭배하고, 명예를 숭배합니다. 더러는 쾌락을 숭배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을 숭배하기도 합니다. 돈, 곧 물신(物神)이 이교도들이 숭배하던 신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세상이 우상숭배로 넘쳐납니다. 이것이 복음을 배척하는 우리의 세대가 직면한 현실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종교를 신봉하고 살아가지만,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과 같은 세상적인 것들이 그들이 섬기는 신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메소포타미아에 몸담고 사는 아브라함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세상은 질병이 널려 있는 곳입니다. 고통이 있는 곳입니다. 재난과 사고가 다반사로 일어나는 곳입니다. 전쟁과 공포와 기근과 전염병이 끊이지 않는 곳입니다. 우리는 지금 죽음의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메소포타미아에 사는 아브라함.” 이 표현에는 인간과 세상이 처한 현실이 예리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브라함 당시에도 그랬고,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이런 탄식이 절로 나옵니다. “어떻게 손을 쓸 길이 없습니까? 우리에게는 소망이 전혀 없는 것입니까? 위로 받을 길이 전혀 없습니까?” 아닙니다. 있습니다. 이 문제에 직면하여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그것은 바로 복음입니다. 믿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세상 사람들은 진화론을 주장하면서 온 세계가 우연에 의해 존재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세상이 원시적이고 미개한 상태에서 점진적으로 상승해서 현대 문명으로 진화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정반대로 가르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완전하게 창조하셨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분명하게 말씀을 드리지만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원래의 상태는 완벽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신 직후에 그 모든 것들을 바라보시고 좋아하셨습니다. 그때는 불완전한 것이 없었고, 고통도 없었습니다. 질병도 없었고, 전염병도 없었고, 죽음도 없었습니다. 아무런 문제도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낙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오늘날과 같은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까?
성경에 그 답이 있습니다. 그것은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천사인 마귀의 미혹을 받아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인간은 하나님을 거역했으며, 죄를 범했고, 그로써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복음의 첫 번째 진술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자들을 비롯하여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가운데 마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마귀가 있다고 분명하게 믿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마귀의 존재를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마귀를 배제하고서는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세상의 상태를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예수께로 나오십시오”라는 진술과 더불어 시작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인간이 마귀의 시험에 넘어가 죄를 범하고 타락함으로써 세상이 저주와 죽음의 상태에 떨어지게 되었다는 사실로부터 시작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기본 도리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는 복음의 기본 도리에서 출발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타락한 세상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이 물음에 대해 성경은 아주 분명하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세상이 원래는 완벽한 상태로 창조되었으나 인간이 타락함으로써 이 지경이 되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세상과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여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이 세상의 창조주요 주인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후에 손을 놓고 가만히 계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보존되고 유지되도록 끊임없이 일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손을 놓으시면 세상과 온 우주는 대 혼돈에 빠져서 그날로 붕괴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세상을 다스리시고, 심판하시는 영원한 재판장이십니다. 그리고 여러분과 제가 사는 이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여 있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면 복음을 절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복음을 배척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있기에 인간이 타락했을 때 낙원에서 쫓겨났습니다. 그 이후로 인간에게는 고통과 문제들이 쌓이고 쌓였습니다. 인간은 영적으로 죽었고, 하나님을 뵐 수 있는 직접적인 길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타락해 가다가 마침내 노아의 대홍수로 심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오늘날의 이 세상도 역시 그때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온 세상이 신음하며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개인과 개인이, 나라와 나라가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난리와 기근이 끊이지를 않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죄가 곪을 대로 곪아터져 악취가 진동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인간의 죄 때문에 생긴 결과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끝났다고 한다면 우리들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랬다면 이 세상은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기 훨씬 오래 전에 멸망하고,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이 세상에 아직도 희망이 있는 것은 영광의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여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영광의 하나님은 노아를 찾아오시고, 아브라함을 찾아오시고, 모세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저와 여러분을 찾아오셔서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메소포타미아에 살고 있던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을까요?
그것은 세상을 포기하지 않았음을 말씀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고 있었음에도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을 따라 지은 인간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영광의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지만,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여전히 이 세상과 인간들에게 지대한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이 사실이야말로 우리들에게 유일한 소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들만 남겨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너희끼리 알아서 하라”고 하시거나, “너희 죄 가운데 곪을 대로 곪으라”고 하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우리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복음인 구원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지극히 큰 영광 가운데 계시고, 인간과는 무한히 구별되시는 영광의 하나님께서 인간이 처한 상황을 불쌍히 여기시고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계획을 알리시려고 아브라함을 찾아오셨습니다. 불순종하고 타락한 인간은 영원히 저주와 멸망을 받아야 하지만,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내버려두실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비참함을 보셨고, 저들의 탄식과 신음을 들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은혜와 자비와 긍휼과 사랑을 주체하실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무한하신 당신의 사랑으로 세상을 구속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광의 하나님께서 메소포타미아에 살고 있던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이유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속의 계획을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께서 철저히 주도하십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행동하시는 영광의 하나님께서 직접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아브라함도 우리와 똑같이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이 전혀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주권적인 선택과 은혜로 아브라함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당신의 뜻을 알려주시고, 그를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으로 삼으셨습니다. 나아가 그를 통해 모든 나라와 모든 민족, 모든 백성들이 복을 받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스데반은 메소포타미아 시절의 아브라함에서부터 설교를 시작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의 세상과 교회가 이렇게 된 것은 영광의 하나님을 부인할 뿐 아니라, 하나님 대신에 인간 중심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기독교의 복음은 영광의 하나님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마땅히 영광의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시작이요, 올바른 신앙생활의 출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찾아오신 영광의 하나님을 삶의 맨 앞자리에 모시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믿음의 여정을 계속해 나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