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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사도행전 7:3-8
혼돈과 타락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참으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잘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 잘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잘 믿는 것 이전에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르게 믿는 것입니다. 바르게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바른 신앙입니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들처럼 사람들이 자신들의 필요와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만든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에게서 시작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에는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신 분명한 ‘믿음의 도’가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가 전해야 하는 메시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붙잡아야 하는 신앙은 하나님이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인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정확한 기준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 쉽게 왜곡하거나 변질시키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탄이 최초의 인간이었던 아담과 하와를 넘어뜨릴 때 사용했던 계략이었습니다. 창세기 3장을 읽어보면 뱀인 사탄이 하와에게 찾아와서 미혹했던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교묘하게 왜곡하는 것이었습니다. 사탄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셨던 ‘그 말씀’과 전혀 다른 말로 미혹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그렇게 했다면 아담과 하와는 사탄의 미혹에 넘어가지 않았을는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너무나 쉽게 알 수 있을 만큼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도적으로 교묘하게 왜곡해서 하와로 하여금 잘못된 판단을 내리도록 했습니다. “비슷하지만 결과는 전혀 다른 것!” 이것이 피조물 가운데 가장 똑똑한 사탄이 아담 이후로 지금까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미혹하는데 사용했던 계략이었습니다.
대체적으로 사람들은 그 내용이 비슷하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정경’이라고도 하는데, ‘정경’이라는 말의 ‘캐논’은 ‘표준’, ‘척도’, ‘잣대’를 의미합니다. ‘표준’이나 ‘잣대’는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바꾸거나 왜곡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표준’이나 ‘잣대’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행위에 정확 무오한 잣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거나 변질시키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잣대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하와를 미혹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가장한 사탄 자신의 말입니다. 사탄은 언제나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교묘하게 왜곡시켜서 우리를 미혹하고 혼돈에 빠뜨리게 합니다.
이것은 성도들을 미혹하는 이단들의 속성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만약에 이만희의 신천지나 박옥수의 구원파와 같은 이단들이 처음부터 성경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른 메시지를 가지고 접근한다면 씨알도 먹히지 않고 거부당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단들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탄이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여 우리에게 다가오듯이 처음에는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그 복음의 메시지를 가지고 다가옵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한두 가지의 다른 메시지를 살짝 던져서 우리들을 혼돈에 빠뜨리게 합니다.
갈라디아 교회에 가만히 들어왔던 거짓 교사들이 했던 것도 그러한 방식이었습니다. 그들은 갈라디아 교회의 교인들에게 복음을 왜곡시켜서 혼돈에 빠지게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복음을 왜곡시켜서 그리스도인들을 넘어뜨리려는 행위는 초대교회로부터 지금까지 계속 되어져 왔습니다. 사탄은 그렇게 함으로써 기독교 신앙의 기반을 통째로 흔들어 버리려고 합니다. 오늘날에는 대표적인 것이 종교다원주의입니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구원이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모든 사상과 가르침이 결국에는 인간 구원으로 통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다른 복음이 있다고 가르치는 자들은 하나님을 모독할 뿐 아니라 성경을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무엇보다 사도 바울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 즉 복음을 왜곡시키는 자들을 향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 앞에서 무서운 범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거짓된 가르침에 미혹되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에 간교한 계교를 가지고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아다니는 사탄으로부터 승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범죄한 아담과 하와가 눈이 밝아진 후에 가장 먼저 한 행동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여기에서 ‘치마로 삼았더라’라는 표현을 히브리어 원어로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그러자 그들 자신을 위하여 치마를 만들었다.” 그러니까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후에 가장 먼저 했던 행동은 ‘하나님을 위하여’라는 자리에 ‘자신들을 위하여’로 대체시켜 버린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된 인간은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삶으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에서 우리는 두 가지의 중요한 교훈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사탄이 하나님의 말씀을 복잡하게 왜곡시켜서 인간들을 미혹하고, 그 미혹에 넘어가 타락한 인간은 철저하게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삶으로 변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타락의 시작이요, 타락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 됨의 출발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정말 구원받기를 원한다면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복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상상만 해도 무섭고 두려운 현실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영원한 지옥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부터 스데반의 긴 설교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스데반의 설교에는 기독교의 복음이 온전하게 제시되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복음의 진술을 ‘영광의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높고 높은 곳에 계시는 초월적인 ‘영광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우리들을 직접 찾아오시는 행동하시는 하나님, 이것이 기독교 복음의 출발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결코 인간과 인간의 필요에서 출발하지 않습니다. 영광의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성경도 ‘태초에 하나님이’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의 목적도 인간의 필요를 충족하는데 있지 않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의 영광을 높여드리는데 있습니다. 우리의 유익과 행복은 그 이후의 부차적인 것입니다. 분명히 말씀을 드리지만 구원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의 복음은 인간 중심의 삶에서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기로 결단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 안의 모든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고 곁길로 나갔습니다. 타락한 인간들은 하나님 중심의 창조 질서를 인간 중심의 문화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우상으로 바꾸었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할 뿐 아니라 그 마음이 더 완악한 상태로 떨어져서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 이런 세상을 구속하려는 계획을 세우셨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자신을 위해 한 민족을 세워서 당신의 계획을 이루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래서 때가 되었을 때 영광의 하나님이 메소포타미아에 살던 아브라함을 찾아오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통해 당신의 원대한 구속의 계획을 구체적으로 실행해 나가십니다. 이것이 복음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게 되면 복음의 메시지는 항상 부르심의 형식으로 온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스데반의 설교에서 눈의 띄는 것은 하나님의 그 부르심이 항상 ‘개인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이르시되.”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어느 민족이나 가문을 부르시지 않고 한 사람, 한 개인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개인과 더불어 시작하십니다.
복음은 우선적으로 한 나라나 한 공동체를 향한 전체적인 메시지가 아닙니다. 복음은 궁극적으로 한 사람을 향한 개인적인 메시지입니다. 우주를 창조하시고 유지 보존하시는 영광의 하나님께서 한 사람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셨고, 그에게 개인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깨닫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한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제가 강단에서 전하는 설교도 언양영신교회 공동체 전체를 향한 메시지가 아니라, 저와 여러분 한 개인을 향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그 한 사람은 단지 말씀을 듣는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그 사람은 스스로 거룩하게 변화되었을 뿐 아니라 그를 통해 그 시대와 사회를 변화시켰습니다. 세계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시기는 언제나 개인구원을 강조했던 평양대부흥운동을 비롯한 대부흥운동이 일어난 직후였습니다. 한 사람을 복음으로 변화시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할 때 그들은 자신들이 처한 현실 속으로 들어가 상황을 바꿔놓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주로 사회와 정치 상황에 대해서 말했던 그 시기에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사람이 줄어들면서 교회가 왜소해졌을 뿐 아니라, 사회에서의 영향력이 축소되었고, 그 시대는 타락해 갔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 시대의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비극적인 현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여러분에게 묻고자 하는 것은 오늘의 시대적 상황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이 어떠한지, 여러분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진심으로 여러분에게 묻고자 하는 것은, 여러분 자신은 복음 앞에서 과연 어떠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부르신 복음 앞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 이런저런 비판을 하기는 쉽습니다. 좋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 질문이 메소포타미아와 같은 세상에 사는 여러분에게 던져지는 개인적 질문입니다. 영광의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찾아오셔서 여러분에게 직접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영광의 하나님께서 메소포타미아에 살고 있던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셔서 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떠나라’는 명령입니다.
본문 3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네 고향을 떠나라. 네 친척을 떠나라. 네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
‘떠나라’는 명령은 3절에 이어 4절에서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이 과거의 그릇된 생활방식을 버리라는 명령입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에서 떠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복음의 부르심 가운데 첫 번째 부분입니다.
“떠나라!”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이 명령이 아브라함에게 무엇을 의미했는지를 압니다. 아브라함은 메소포타미아에서 태어나 거기에서 자랐습니다. 그곳이 그의 삶에서 가장 큰 배경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와 가문이 여러 세대 동안 그곳에 뿌리를 내린 채 살아왔습니다. 메소포타미아의 우르라는 곳은 말씀을 드렸듯이 우상 숭배가 만연한 곳이었습니다. 우르 사람들은 달을 신으로 숭배했습니다. 아브라함도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달 숭배가 그의 삶의 본질적인 부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거기에서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아브라함 자신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아브라함을 대신하여 그 명령을 수행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동조를 받을 수도 있지만, 그 시작에 있어서는 자신만의 외로운 결단이 필요합니다. 아브라함이 버리고 떠나야 할 것은 세상에서 철저한 분리를 나타냅니다. 이것은 다른 누군가가 아닌 아브라함 스스로가 결단해야 할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떠나라고 하신 곳은 절대적인 삶의 보금자리였습니다. 지금처럼 치안 유지가 잘 되지 않았던 고대 유목민 사회에서 고향과 친척을 떠났다가 낯선 이방 땅에 들어가는 날에는 쥐도 새도 모르게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죽으면 그것으로 그만인 것입니다. 위험하기 짝이 없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이 떠나라고 하신 고향과 친척, 아버지의 집은 아브라함이 지금까지 누려왔고, 현재 누리고 있는 사회적 유대와 경제적 기반 등 각종 기득권과 편안한 생활을 상징합니다. 당시 우르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발전시켰던 곳이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시각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그러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이러한 것들을 과감하게 버리고 떠나도록 명령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곳이 바로 인간이 중심이 되어 우상을 섬기며 타락한 메소포타미아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오늘날 우리들에게 맞게 옮기면, 현세적인 인생관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가장 먼저 요구하는 것은 언제나 이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세상적인 삶에 관해 여러 방식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세상적인 삶을 “육신의 정욕대로 살고, 육신과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하는” 삶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추구했던 삶이요,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삶이요, 모든 나라 모든 민족의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고향과 친척’입니다.
이러한 삶은 현세에만 관심이 있을 뿐 그 너머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자기 나라와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 자기 가문과 자기 친척에서 생기는 일들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인간의 자부심과 세상의 영광에만 갇혀 있습니다. 세상은 본래 이런 상태로 진행되어 왔지만 오늘날은 그 정도가 유난히 심합니다. 베드로는 “마지막 때에 조롱하는 자들이 나타나 진리를 비웃고 그들이 생각해 낼 수 있는 모든 악을 행한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시대가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성경이 현세의 삶에 관해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를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이끌리는 삶입니다. “음란과 더러운 짓과 정욕과 악한 욕망과 지나친 욕심”이 가득한 삶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합니다.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이 달을 숭배할 때 우리는 돈을 숭배하고, 집을 숭배하고, 쾌락을 숭배합니다. 이런 것은 모두 동물적이고 본능적이고 세상적이며, 육체의 영역에 속하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이런 종류의 삶을 유업으로 물려받았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에 살 때도 그랬고, 지금의 우리도 여전히 그렇습니다. 따라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란, 이러한 삶에서 떠나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생각에는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에서도 얼마든지 신앙생활이 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는 것이 별스럽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내가 있는 안주의 자리, 탐욕과 쾌락이 넘치는 세속을 좇는 자리에서 떠나지 않고는 진정한 신앙은 불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잊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인 됨의 신앙생활의 출발은 이러한 현세적인 삶에서 떠남에 있습니다.
나아가 현세적 삶은 거짓 희망에 매달린 삶입니다. 현세적 삶에서 이것만큼 비극적인 면이 없습니다. 현세적 삶은 고통의 삶이요, 실패의 삶이요, 전쟁과 아픔과 공포가 뒤섞인 삶입니다. 세상은 때때로 이런 현실에 휘둘립니다. 끔찍한 전쟁의 참상들 앞에서 잠시 숙연해지면서 평화를 이야기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입니다.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 또 다시 전쟁과 파괴를 멈추지 않습니다.
현대 세계에 몸담고 있는 오늘의 시국이 처한 상황을 보십시오. 현대 인류는 극심한 혼돈에 빠져 있습니다. 지난 20세기에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으로 수백만 명의 소중한 생명들이 희생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여전히 전쟁을 멈추지 않고 온갖 종류의 치명적인 살상무기들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힘으로 현실을 개선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은 전혀 다릅니다. “일어나 거기에서 떠나라!” 왜 이렇게 말씀하십니까? 이 세상은 죄악과 저주의 땅이요, 멸망의 성읍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멸망의 성읍에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이런 말을 좋아하든 않든 상관없이 이것이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영광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은 “네가 살고 있는 곳은 멸망의 성읍이다! 이곳에서 떠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자, 기독교 복음이 오늘날 저와 여러분을 향해 외치는 경고입니다. 우리는 이 경고의 메시지를 들어야 합니다.
둘째는, ‘가라’는 부르심입니다.
메소포타미아에 살던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은 부정적인 말씀으로만 끝내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의 나머지 부분을 살펴보십시오.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본문에서 ‘가라’는 헬라어 원어는 ‘come here’, ‘이리 오라’는 뜻으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떠나라”는 회개의 명령 다음에 “오라”는 따뜻한 권유의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까지 읽어야 온전한 복음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세상에 심판을 고지하고 선포하실 뿐 아니라, 자비로운 초대도 하십니다. ‘떠나라’고 명령하신 하나님께서는 ‘오라’고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인자한 분이신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디로 가라고, 무엇을 하라고 부르시는 것입니까? 3절에 보면,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이때 아브라함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8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본문에 보면 아브라함은 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도 모르면서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시니 떠났습니다. 어쩌면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아브라함은 자신이 지나왔던 그 길을 헤아려 보았을는지도 모릅니다. 우르에서 하란까지의 거리가 약 970km에 달합니다. 그리고 하란에서 가나안까지의 거리는 약 700km입니다. 여러분이 이 거리를 걷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자동차가 있던 시대도 아닙니다. 길이 잘 닦여 있던 시대도 아닙니다. 더구나 온 식구와 수많은 양 떼를 다 거느리고 가야 합니다. 솔직히 어디인지 모르니까 가지, 이것을 알면 갈 엄두가 나겠습니까?
그렇지만 아브라함은 철저히 자기 지식의 판단을 포기하고 떠났습니다. 이 사실을 성경은 ‘믿음으로 순종하여 나아갔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아브라함은 ‘영광의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믿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순종과 믿음이 없이는 결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셔서 부르실 당시에 그가 달을 신으로 숭배하는 이교도였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세상 상태와 아브라함 자신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그 지경으로 전락한 원인이 인간의 반역과 죄 때문임을 말씀하셨습니다. 메소포타미아의 현실과 아브라함의 상태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찾아주시기 전까지는 아브라함도 역시 그 사실을 알지 못했고,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전적으로 믿었습니다.
그런 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인류를 향한 구원의 목적과 계획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이 위대한 구원의 과정에서 처음 조상이 될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갈대아 우르에 살고 있던 아브라함을 불러내셔서 그를 통해 새로운 민족을 일으킬 계획이었습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 민족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이신 구주가 나시도록 할 작정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가라는 그곳을 향해 순종하여 믿음으로 갔습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나오라. 그것이 상징하는 모든 것에서 나오라.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라. 그리고 내가 너를 위해 예비한 곳으로 가라!”
사랑하는 여러분, 이 부르심이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말씀의 문자 그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집과 고향을 떠나야 할까요? 그런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 부르심을 현대의 언어와 상황에 놓고 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관점을 완전히 바꾸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철저한 변화를 요구하시고, 그리로 부르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 사람들의 삶과 사뭇 다릅니다. 달라야 합니다. 둘 사이에는 공통되는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어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철저히 변화하는 것입니다. 흑암의 왕국에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 빛의 나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고방식을 갖는 것을 뜻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때로는 떠나라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모험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갈대아 우르를 떠났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자산을 정리하고 고향과 친척을 떠나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신 땅으로 갔습니다. 그는 동으로 가야 할지, 서로 가야 할지 주저하지 않고 떠났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고, 진리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더 이상 자신과 자신의 행위와 판단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만 온전히 의지하고 자신을 드렸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우리는 가나안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라고 해서 아브라함이 거저 얻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10년을 믿어도 변화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을 거저 얻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를 보십시오. 창세기 12장 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하시면서 이렇게 약속을 하셨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그런데 아브라함이 처한 현실과 상황은 하나님의 말씀과는 정반대였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 약속을 하실 그때에 그에게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네 자손을 땅의 티끌처럼 많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지만 정작 그들에게는 자식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삭이 태어날 것이라고 약속하실 때 아브라함은 아흔아홉 살이었고, 사라는 아흔 살이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현실이었습니다. 한 마디 더 할까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땅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지만, 정작 사랑하는 아내가 죽었을 때 그에게는 시신을 묻을 한 평의 매장지도 없었습니다. 이 상황을 본문 5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발 붙일 만한 땅도 유업으로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그와 그의 후손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이것이 아브라함이 직면한 현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알고 있는 현실,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 모든 상식과 인간적인 지식이 정반대되는 상황이었습니다. 분명히 떠나라고 하시면서 땅도 주시고, 자식도 하늘의 별처럼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오랜 세월이 흘러도 현실은 손바닥만한 땅도 주시지 않았고, 후사를 이을 자식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왜 그 말씀을 믿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영광의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영광의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그대로 받았고, 그 말씀에 붙잡혔습니다. 이 위대한 일이 비록 현실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게 보일지라도 자신을 통해 이루시겠다는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을 그의 중심에 두었고, 그것이 이루어질 것을 믿었습니다. 그는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 외에는 아무것도 두지 않았습니다.
대개 이쯤 되면 사람들은 아브라함과 같은 사람을 향해 어리석은 사람, 무책임한 사람 등의 수식어를 붙여서 비난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결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감상적인 사람도 아니었고, 즉흥적인 판단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오늘의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바라보는 시각이기도 합니다. 저들은 그리스도인들을 감상주의에 휘둘려 툭하면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인 줄 압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과 거리가 멉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아브라함은 가장 이성적이고 계산적인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이전에 먼저 영광의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지금의 현실을 다 이해할 수 없지만, 이 말씀을 하신 분이 영광의 하나님이심을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비록 지금은 모든 것이 다 이해되지 않으나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께서 하라고 말씀하시는 일을 기꺼이 행하리라고 결심한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단계입니다. 이러한 태도가 건강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듭니다.
하나님은 아무 목적도 없이 아브라함을 메소포타미아 우르에서 불러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그곳에서 불러내셔서 새로운 삶, 위대한 삶, 영광스러운 삶을 살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17장 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어느 날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행하여’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 거하듯이 하나님 앞에서 항상 살라는 뜻이고, ‘완전하라’는 말씀은 흠잡을 것이 없게 마음을 하나로 모아 철저하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 행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생애에 나타난 위대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그의 생애가 하나님 중심적이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찾아오셔서 말씀하신 후에 중대한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짊어지고 살아온 모든 문제들이 결국 자신의 생각대로 자기중심적인 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생긴 것들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고향과 친척을 떠나라고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자신을 찾아오셨을 때 이제는 하나님께 중심을 두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본질적인 생활 태도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세상 중심적이거나 자기중심적입니다. 세상 중심적이든 자기중심적이든 뿌리는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범죄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위하여’ 자리에 ‘자신들을 위하여’로 대신한 결과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 중심적이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사는 사람이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우리 각 사람을 부르시는 위대한 부르심이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 친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우리의 의롭다함을 위해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향해 “내게로 오라”고 초대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왜 그리스도를 따라가야 합니까?”라고 묻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세 가지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주께서 여러분에게 떠나라고 말씀하시는 이 세상이 얼마나 큰 오류와 악에 빠져 있는지, 얼마나 소망이 없고 쓸모없는 것인지를 생각하십시오. 둘째, 장차 여러분이 천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나눌 생명이 얼마나 의롭고 영광스러운지를 생각하십시오. 그러나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십시오! 이 복되고 영광스러우신 하나님의 아들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요, 특권입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는 멸망의 도성에서 나와 새로운 나라의 백성, 사랑의 아들의 나라의 백성이 되라는 부르심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여기서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 길은 하나님께서 내미시는 복음의 메시지를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떠나라”고 말씀하실 때 그 음성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오라”고 부르시는 초청에 믿음으로 응답하십시오. 그리하여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영광의 나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기 위해 중단 없는 여정을 해 나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