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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백성을 돌보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
사도행전 7:20-29
유대인의 최고 법정기관인 산헤드린이 스데반을 앞에 세워놓고 재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나사렛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과 세상의 구주로 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스데반이 모세의 율법과 모세를 부정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스데반이 성전과 성전의 예배와 의식들을 모두 부정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의 제자들과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러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율법과 구약의 모든 의식들을 성취하셨다고 말했습니다. 즉,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약의 모든 표상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기 때문에 성전과 번제를 비롯한 모든 제사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가르쳤습니다.
스데반도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설교를 통해 이 사실을 입증해 나갔습니다. 산헤드린의 권력자들과 유대인들은 단지 역사만 오해했던 것이 아니라 율법의 목적과 성전의 기능도 오해했습니다. 무엇보다 나사렛 예수와 그분의 의미를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눈이 멀어 보지를 못했고, 그 결과 “항상 성령을 거스려” 행동했습니다. 스데반은 이런 사실들을 유대인들이 자랑스러워했던 역사적 인물과 사건들을 징검다리처럼 놓아 가며 입증하려고 했습니다. 먼저 아브라함을 언급했고, 그 다음에 요셉을, 그리고 모세를 언급했습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에 스데반이 전하는 설교를 통해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미리 정해 놓으신 그 목적을 따라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행하시는 역사가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가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애굽 왕위에 오르매.” 이 말씀은 모든 상황을 여기까지 주관해 오신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는 두 가지의 대비되는 상황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최고조로 번성했을 때였습니다. 일흔다섯 명이라는 극히 적은 사람으로 애굽에 내려갔던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출애굽을 할 시점에 200만명 이상이라는 거대한 민족으로 번성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는 이스라엘이 환난과 절망의 늪에 빠져 가던 때였습니다. 이 사실을 성경은 ‘그때’,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애굽의 왕위에 올랐다는 사실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애굽의 새 임금은 교활한 방법을 써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아예 씨를 말려버릴 작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한 불행한 상황을 놓고 이런 질문을 던지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왜 이런 방식으로 행동하셔야만 했는가? 다른 방법은 없었는가?”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바로와 애굽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고난을 당하도록 허용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대답은 간단합니다. 그것은 이렇게 하셔야만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실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애굽에 거주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 백성들을 어떻게 해야 구원해 낼 수 있었을까요?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은 이들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영원히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애굽에서 거대한 민족으로 번성하여 그곳에서 잘 살고 있습니다. 자연히 큰 의문이 생겼습니다.
“어떻게 해야 이들이 자기들 땅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이 엄청난 질문에는 두 가지 요소가 담겨져 있습니다. 첫째는, 이스라엘 자손들 스스로가 가나안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인하지 못할 사실이었습니다. 그들은 요셉 때 애굽으로 내려왔고, 애굽의 높은 지위에 있었던 요셉으로 인해 그 나라에서 가장 비옥하고 좋은 땅을 정착지로 받아 번성해 왔습니다. 모두가 그 땅에서 별 어려움 없이 평탄하게 잘 살아왔습니다. 때문에 만일 그대로 내버려둔다면 그들은 대대로 애굽 땅에 눌러 앉기 십상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애굽을 떠나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것이 첫 번째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하나님의 백성이었지만 세상에서의 번영이 그 사실을 잊어버리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해 거룩한 제사장 나라를 세우려고 하셨지만, 그들은 모든 면에서 애굽화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 요소는, 바로의 막강한 권세와 힘이었습니다. 그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했을까요? 어떻게 해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의 방해를 뚫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까요? 이 의문에 대한 답은 한 가지 뿐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백성들에게 개입하셔서 무슨 일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 백성들의 상황을 몹시 불행하게 만들어 한시 바삐 그 나라를 빠져나가고 싶게 만드셔야 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 상황을 그냥 내버려두셨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았을 것이고, 바로에게 반기를 들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이 애굽에서 빠져나가기를 갈망하도록 의도적으로 그 상황을 만들어 가셨습니다.
이것은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중요한 교훈을 가르쳐줍니다. 사실 이것이 이 세상에 사는 우리 모두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현실에 안주하고 싶어 합니다. 한 세상 평온하게 살다 가고 싶어 합니다. 이러한 우리의 심리를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흔들어 깨우시고, 때로는 어려운 환경에 몰아넣으심으로 거기에 미련을 두지 않고 나오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데리고 나오셔야 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을 고통스러운 상황에 몰아넣으심으로써 그들이 고통과 공포에 떠밀려 “제발 밖으로 나가게 해 달라”고 부르짖도록 하셔야 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은 바로에게도 어떤 일을 행하셔야 했습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계속 노예로 붙잡아 두고 싶어 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공짜로 부려먹을 수 있는 아주 요긴한 존재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셔서 그들을 억압하게 하시고, 그들을 말살하려는 생각을 갖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결국 애굽의 종살이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경위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는 이러한 함축적인 요소들을 다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드렸듯이 출애굽은 구약적 표상입니다. 이 사건은 훗날 일어나게 될 크고 위대한 사건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그 위대한 사건을 바라보십시오. 사람이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해야 세상과 육신과 마귀의 노예 상태에서 건짐을 받게 될까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과 화목하여 사귐을 갖고, 복음에 따르는 복을 누릴 수 있을까요?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모세가 태어나기 직전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한 상황이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시적인 눈앞의 현실만을 바라보아서는 안 됩니다. 눈을 들어 내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이 어떤 목적에 닿아 있는가를 바라보셔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을 우리에게 기울이고 계신다면 현실이 어떻든 그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틀림없이 여러분을 구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만큼 어리석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끌어내리실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건강을 취해 갈 수도 있고, 파산을 당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또 다른 어떤 고통스러운 상황으로 몰아넣으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은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실 만큼 우리를 너무나도 뜨겁게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참으로 걱정하고 안쓰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아무 어려움도 겪지 않고 인생을 평탄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대체적으로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간절함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지도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찾지도 않습니다. 무엇보다 이런 사람들에 대해 히브리서 12장 8절은 이렇게 말씀하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지 않고 편안함 가운데 안주하는 것이 결코 좋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친아들은 잘못했을 경우에 바른 교육을 위해 아버지가 징계를 하지만, 사생자는 관심이 덜하여 방치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징계의 현장 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실체를 직면하게 됩니다. 따라서 징계란 사랑의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입니다. 잘하는 이들에게는 더 잘하도록 격려의 차원에서 연단하시고, 그릇 행하는 자들은 그 길에서 돌이키도록 교정의 차원에서 징계하십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라는 말씀에는 지금까지의 모든 상황들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로서는 최고의 번영기를 누리던 때였고, 반면에 환난과 절망의 늪에 빠져 전멸 당할 급박한 위기에 처한 결정적인 순간의 때였습니다. 그와 같은 현실적 상황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할 수도, 의지하지 않을 수도 있는 기로의 순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상황에서 출애굽기 2장 23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참으로 다행인 것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때 탄식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 20절은 이렇게 말씀을 하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의 아버지의 집에서 석 달 동안 길리더니.”
“그때에 모세가 났는데.” 여기에서 ‘때’는 헬라어로 ‘카이로스’인데, 이것은 시간에 있어서의 결정적인 어떤 순간을 의미합니다. 즉, ‘카이로스’는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과 죽음의 때, 구원과 심판의 때, 하나님에 의해 정해진 때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모세가 태어나던 ‘그때’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때”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서 모든 상황이 완전히 반전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행동하시는 하나님께서 친히 개입하시고 일을 시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메시지입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분께 부르짖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개인과 세상의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께서 친히 개입하시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죄에 빠져 저주와 사망에 얽매여 있는 인간에게는 결코 소망이 없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절망의 순간에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친히 개입하기 시작하십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전하는 복음입니다. 기독교의 메시지는 어떤 일이나 상황에 대한 좋은 권면이나 권고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 백성들을 돌아 보사 속량하셨다는 선언이요 선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세상은 결코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철저히 하나님께로부터만 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렇게 선언하는데, 로마서 5장 6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직 도덕적으로 무기력한 상태에 계속 머물러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때는 우리가 사랑 받을 만한 가치가 전혀 없었던 때였습니다. 성경은 그와 같은 우리의 처지를 한 마디로 이렇게 말씀합니다. “경건하지 않은 자.” 그러니까 우리는 본래 영적으로 완전히 무능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사람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인간이 처한 상태를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아담 안에서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본래적으로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의 준엄하신 진노의 굴레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죄의 삯인 영원한 멸망을 향해서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때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써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이 크고 높으신 사랑 앞에 온 세상이 모두 일어나 “할렐루야! 하나님을 찬양하라!”라고 외쳐야 마땅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세상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애굽과 같은 속박과 감금과 노예 상태에서 속수무책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이것이 모든 인류가 처해 있는 비참한 상황입니다. 스데반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모든 인간은 영적 애굽에서 노예로 절망 상태에 처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최고의 번성함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하나님을 찾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애굽의 화려한 문명에 취해 철저히 세속화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때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이스라엘 자손들을 탄압하기 시작합니다. 아예 씨를 말려버릴 작정으로 태어난 사내아이들을 다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그때 그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개입하셨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일어나 개입하시고 일하지 않으셨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역사를 마감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가 태어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위대한 구속의 역사를 이루어 가셨습니다. 전능하신 은혜의 하나님이 친히 일어나 일하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어떠한 형편과 처지에도 불구하고 일하십니다. 우리가 아무 자격이 없고 오히려 지옥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음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일어나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영원한 사랑과 자비와 긍휼입니다. 우리가 죄사함과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하심 때문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마음에 꼭 남겨 두고 싶은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아무런 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아무도 보호해 줄 사람이 없이 철저히 예속되어 살아간 노예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이 크고 위대한 사건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이 백성들을 바로의 손아귀와 노예의 속박과 멍에에서 건져내어 해방시키시고, 그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메시지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선언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을까요? 바울의 대답은 이것입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께는 결코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구원하실 수 있다는 사실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능력이시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우리에게 이 놀라운 구원의 복음을 주신 하나님께 전심으로 감사와 찬송을 올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지난 주일에도 말씀을 드렸듯이 모세는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표상이었습니다. 따라서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인 모세를 통해 기독교의 복음에 담긴 지극히 영광스러운 몇 가지를 간단하게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첫째,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보낸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때에 모세가 났는데.” 여기에서 ‘그때’는 바로와 애굽 사람들에 의한 학대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요, 가련한 이스라엘 자손들이 비참한 노예생활 속에서 신음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전적으로 무능하여 스스로는 자신의 구원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절망하고 있을 바로 그때에 하나님은 모세가 태어나도록 하셨습니다.
모세가 예수님의 완벽한 표상이 되는 것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도 ‘그때’와 비슷한 시기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당시의 상황은 세상이 죄와 비참에 눌려 있었고, 악한 행위가 사방에서 성행하고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3장에는 예수님이 오셨을 그때의 시대적 정황이 기록되어 있는데, 1절과 2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여기에 보면, 당시 세상을 통치하던 여러 사람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학자들은 본문에 열거된 이 사람들만큼 심한 불한당들을 한 자리에 모아 놓은 예를 다른 데서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했습니다. 그때는 가장 혼란스럽고 부패한 통치자가 다스리던 암흑의 시기였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모세가 태어났을 때 그를 죽이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애굽의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태어난 모든 사내아이들을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복음서들을 펼쳐서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의 정황을 읽어보면 비슷한 상황이 전개됩니다.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헤롯을 찾아갔을 때, 헤롯은 박사들이 말하는 일이 자신의 왕위와 왕조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들을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모두 죽일 것을 명령합니다. 헤롯의 이러한 행위는 모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급속한 인구 증가로 위기의식을 느꼈던 바로가 갓 태어난 이스라엘의 사내아이들을 다 죽였던 사건을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사건이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여러분과 제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큰 전쟁터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누가 누구와 싸우는 전쟁터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과 하늘의 군대가 사탄과 지옥의 군대와 대치하고 있는 전쟁터입니다. 우리는 양 진영이 치열한 영적 전쟁을 벌이고 있는 전쟁터에서 살고 있습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교회와 성도들을 넘어뜨리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강구합니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과 예수님을 공격하던 사탄은 아직 멸망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는 날이 갈수록 더욱 거세게 성도들을 공격합니다. 그것은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탄은 오늘도 저와 여러분의 천국 길에 수많은 함정과 장애물들을 설치해 놓고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영적으로 미숙한 어린아이들이며, 역사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눈이 먼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탄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늘 깨어서 경건의 훈련을 해야 합니다.
둘째, 모세는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스라엘 자손들을 돌아볼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본문 23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나이가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나더니.”
여기에서 ‘돌아보다’라는 단어는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깊은 동정심과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방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90세가 되도록 아이를 낳지 못하던 사라를 방문하셨고, 고역과 압제로 절망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을 방문하셨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을 가졌다는 것은 애굽 궁전에서만 생활하던 그가 비참한 현실 속에 살아가고 있는 동포를 방문하여 자세히 살펴볼 마음을 갖게 된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어보면 ‘돌아보다’라는 이 단어는 예수님과 관련해서 참으로 중요하게 사용된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즉, 누가복음 첫 장에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일과 관련해서 이 단어가 쓰인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는 진리를 깨달았을 때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누가복음 1장 68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돌아보다’라는 단어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학자들은 신약성경에서 ‘돌아보다’라는 단어가 항상 ‘돕거나 구조하거나 건져내려는 목적’을 함축한다는데 의견이 일치합니다. 그 돌아봄의 목적은 풀어주고, 해방시키고, 고치고, 자유롭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가랴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시고 속량하셨다”라고 외친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모세에 관해 듣게 되는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모세는 애굽 공주의 아들로 궁전에서 풍족하게 자라났습니다. 그리고 높은 지위에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에티오피아 등지에서 화려한 전공을 세운 대단히 유명한 장군이었다고 합니다. 오늘의 본문 22절은 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라고 말씀합니다. 언변이 탁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성경의 처음 다섯 권을 집필한 저자입니다. 사실을 체계 있고 정확하게 전하는 역량으로 미루어 보건대, 지혜와 사고력과 판단력이 뛰어난 사람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모세는 장래가 유망한 사람이었습니다. 장차 왕위를 계승할 가능성이 있었고, 애굽의 제1인자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존경과 찬사가 끊이지 않았고, 그는 그것을 받아 누리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뜻밖의 일이 벌어졌습니다. 어느 날 불현듯 자기 백성, 곧 이스라엘 백성을 돌아보려는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자신이 그들을 찾아가면 왜 찾아왔는지 그들이 알아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탄탄대로를 포기하고 자기 백성을 돌아보고 구원하는 길을 택한 것입니다. 이것은 빌립보서 2장에 기록된 말씀의 희미한 표상입니다. 빌립보서 2장 5절과 6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예수님께서는 본래 이런 분이셨습니다. ‘예수’라고 불린 분, 베들레헴의 누추한 마구간에서 연약한 아기로 태어난 분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분은 본래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셨습니다.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셨습니다. 성부와 성령과 더불어 영원한 영광 가운데 계시던 분이었습니다. 그분에 관하여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3).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만물을 붙들고 계시며, 권세와 영광과 지혜와 모든 것이 영원무궁합니다. 예수님의 표상이었던 모세가 자기 백성을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했듯이, 빌립보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2장 7절과 8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것이 구원의 본질적인 메시지입니다. 모세는 자신을 자기 백성들과 동일시했습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음에도 그는 그들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스스로 가난하게 되었고, 박해를 받았고,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어야 했습니다. 조금만 달리 생각했다면 굳이 당하지 않아도 되는 고난이었습니다. 애굽 공주의 아들로 계속 남았으면 정반대의 길을 걸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스데반은 왜 모세의 이야기를 꺼냈을까요?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스데반을 심문했던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은 하나님의 영광된 자리를 버리고 우리를 돌보시고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가난하게 되셨고, 박해와 심문과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심의 이 원리를 주목하십시오.
모세는 애굽의 통치자로서 왕궁과 영광과 권력을 누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노예로 박해받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그것을 다 포기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함께 하고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의 모양을 취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순히 인간이 아니라 거기서 더 낮아지셔서 종이 되셨습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므로 시험을 받을 수 없으셨는데도 불구하고, 인간으로서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 사실을 히브리서 2장 1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이 진리를 세상은 눈이 멀어 바라보지 못하고, 배척하고 참람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은 겸손히 자신을 낮추시고, 지극히 낮아지셔서 죄인들이 퍼붓는 온간 비방과 욕설과 조소를 묵묵히 참으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러한 일을 하셨습니까?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돌아 보사 속량”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이 왜 하늘의 영광을 버리셨습니까? 그토록 순결하신 분이 왜 험한 세상에 오셔서 세리와 죄인과 창녀들과 섞이셨으며, 타락과 악행을 대면하셨으며, 그토록 심한 고난과 고초를 당하셔야만 했습니까? 대답은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모세에게 미리 표상으로 나타났습니다. 모세는 자기 백성의 형편과 그들이 당하는 고난을 목격하고는 그들을 돌아보아 구원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스데반이 전하고자 했던 복음의 메시지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더럽고 낮은 땅에 오신 이유는, 저와 여러분을 돌아 보사 구속하시고, 자유하게 하시고, 노예상태에서 건져 주시고, 여러분이 돌아가야 할 땅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셋째,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모세를 멀리하고 배척했습니다.
여러분은 모세가 이처럼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자기 백성을 돌아보았을 때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눈여겨보았습니까? 본문 27절과 28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 동무를 해치는 사람이 모세를 밀어뜨려 이르되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 네가 어제는 애굽 사람을 죽임과 같이 또 나를 죽이려느냐 하니.”
한 마디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뭔데 우리 일에 간섭하는 거요? 우리는 당신을 원치 않소.”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달려들었습니다. 있는 그대로 폭로해 버리겠다고 협박했습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모세는 애굽인을 살해한 죄로 처형당할 것이 뻔했습니다. 결국 그는 살기 위해 도망을 쳐야 했습니다. 그렇게 도망친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평범한 목자로 지냈습니다. 애굽 공주의 아들이자 앞날이 보장되었던 사람이었는데도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를 이해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와 그의 모든 생각과 말을 배척했습니다.
이러한 모세의 생애는 예수님을 보게 하는 희미한 표상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했습니다. 심지어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사 53:3).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은 과거에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배척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척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비극이요, 인류의 비극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감사하게도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배척과 조소와 멸시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자기 백성들을 마침내 구원해 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미련하고 악한 행동과 눈먼 상태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모세를 배척한 까닭에 훨씬 더 모진 고생을 해야 했지만, 그럼에도 그들을 종 되었던 애굽에서 건져냈습니다. 감사하게도 우리도 역시 이스라엘 자손과 다를 바 없는 어리석고 미련한 자들임에도 하나님은 구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님을 통해 구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본래 하나님이셨던 예수님은 우리의 처지를 돌아보시기 위해 영광된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의 죄를 친히 다 짊어지시고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에서 모두 담당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죽으신 일을 생각하고 진심으로 감사하며 찬송을 드린 적이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죄사함을 받아 하나님과 화목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 놀라운 구원의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참으로 감사와 찬송함으로 믿음의 풍성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