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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구원하려고 내려오신 하나님!
사도행전 7:30-36
우리는 지금까지 모세의 이야기가 여러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출생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하나님의 구속사적 관점에서 살펴보았습니다. 나아가 40세가 된 그의 모습도 살펴보았습니다. 애굽 공주의 아들로 성장한 그는 장래가 촉망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대로 쭉 간다면 장차 애굽의 왕위를 계승할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그는 뭇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찬사를 받으며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는 그럴만한 충분한 자격과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에게 말을 거셨고, 그의 마음에 무언가를 심어 주셨습니다. 그의 앞길을 막아서시며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 택했노라 말씀하셨고, 그 백성들을 애굽의 속박과 종살이에서 이끌어내라고 명하셨습니다.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달은 모세는 그 말씀을 기꺼이 따르고자 했습니다. 그는 애굽의 왕궁에서 잠시 죄의 향락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길을 택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모든 희생을 감수하고 애굽의 화려한 궁궐에서 나와 극심한 고역과 학대 속에서 고통 받고 있던 자기 백성을 찾아갔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모세를 어떻게 대했는지도 살펴보았습니다. 성경은 “그들이 깨닫지 못하였더라”라고 했습니다. 생각이 어두웠을 뿐 아니라 마음은 그보다 훨씬 더 어두웠던 백성들은 모세에게 적개심을 드러냈습니다. 그들 중에 한 사람은 불과 며칠 전에 애굽의 감독관에게 심한 매를 맞다가 모세의 도움으로 겨우 어려움을 모면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같은 히브리 사람을 괴롭히는 자신을 방해하는 모세에게 앙심을 품고 모세가 애굽 감독관을 죽인 사실을 폭로해 버립니다.
그는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자기 백성들로부터 거절을 당했고, 겨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가서 그곳에서 양을 치는 목자로 40년 동안을 살았습니다. 그것도 40년 동안 자기 양이 아니라 장인의 양을 치면서 말입니다. “모세가 이 말 때문에 도주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 되어.”
광야는 거의 변화가 없습니다. 매일 똑같은 암갈색의 모래 광야만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오늘이 어제 같고, 어제가 오늘 같은 단조롭고 지루한 날이 계속됩니다. 광야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광야는 사람들이 거의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광야는 참으로 외로운 곳입니다. 때문에 광야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절망과 낙심과 분노와 두려움만 쌓여갑니다. 그런 광야에서 모세는 40년을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아마도 별 일을 기대하지 않았을 지루하고 단조로운 오후에 그는 자기가 치던 양 떼를 몰고 산 뒤편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참으로 지겨운 일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그는 놀라운 사건을 만나게 되는데, 본문 30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사십 년이 차매 천사가 시내 산 광야 가시나무 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
본문은 하나님의 인류를 구원하시는 방법이 계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절정과 극치는 당연히 우리의 구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30절이 가르쳐 주는 진리가 없었다면 기독교 또한 생기지 않았을 것이고, 모든 사람이 제멋대로 살고 있을 것입니다. 세상도 이렇게 존재하지 못하고 이미 오래 전에 썩어서 망해 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30절은 우리 모두를 구원해 주는 말씀이요, 우리에게 소망을 주는 말씀입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주어진 좋은 소식, 세상에 단 하나 밖에 없는 좋은 소식입니다. 한 마디로 복음 메시지의 핵심 그 자체입니다.
“사십 년이 차매 천사가 시내 산 광야 가시나무 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 여기에서부터 모든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자신의 계획과 목적을 모세에게 알리시고 그것을 시행하도록 그를 보내십니다. 그리고 위대한 출애굽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놀라운 구원의 말씀을 사람들이 거부하며 불쾌하게 여긴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을 구원하기 위해 다시 애굽으로 돌아온 모세를 어떻게 대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노예로 큰 곤경과 불행과 비참함에 빠져 있는 자신들을 구원하려는 모세를 배척했을 뿐 아니라 조롱하고 빈정거렸습니다. 심지어 저주하기까지 했습니다. 스데반은 바로 이 사실을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에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그들도 그 옛날 모세를 배척했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하늘의 높은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했을 뿐 아니라 조롱하고 멸시했습니다. 그리고 나무에 매달아 죽였습니다.
스데반은 권력자들에게 옛 역사에 기록된 일을 그들도 똑같이 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슬프게도 모세 때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예수님 때의 산헤드린 권력자들이 했던 그 짓을 오늘의 현대인들도 똑같이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생명의 복음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자신과 가정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할 뿐 아니라 조롱하고 멸시하기까지 합니다. 나아가 돌팔매질을 하며 저주합니다. 모세 때나 예수님 때나 스데반 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결국 타락한 인간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역사가 그토록 가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조상들이 저질렀던 잘못, 태초부터 저질러 왔던 잘못을 계속해서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최고의 비극은 그들이 이 메시지의 가장 영광스러운 부분을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사람들이 거부하는 것은 단순히 지엽적이거나 부차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가장 심하게 반대하는 것은 복음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진리, 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구원의 진리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가장 심하게 놓쳐버린 요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에 관한 진리입니다. 복음의 메시지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는 온 우주만물을 만드신 분이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생각하시며, 행동하시는 지극히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이 “그 백성을 돌아 보사 속량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피조물인 우리는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대체 누가 무한하시고 절대 완전하신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그 정의상 우리의 이해를 완전히 뛰어넘는 분이십니다. 만약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분이라면 그는 하나님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분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 인간이 가공해서 만들어낸 수많은 우상들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성과 한계를 넘어서 계시는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의 언어를 쓸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식으로는 말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말로 하나님을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언어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면 그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우리가 이해할 수 있고, 알아들을 수 있는 우리의 언어로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생각과 이해를 돕기 위해 그런 방법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간의 언어 너머에 계시는 분이십니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드릴 수 있는 진솔한 고백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자신에 대해 몇 가지 사실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온 우주를 만드셨을 뿐 아니라 통제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려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가시나무 떨기를 통제하실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통제하실 수 없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전능한 분이십니다. 그에게는 모르시는 것이 하나도 없고, 못 이루실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고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우주의 심판자이시기도 합니다. 우주를 만드신 분이기 때문에 마땅히 심판하실 권리도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모세가 40년의 광야 세월에서 좌절과 실의에 빠져 소망을 잃고 거의 절망하려 할 즈음에 찾아오신 하나님에 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세에게 찾아오신 하나님, 430년의 종살이를 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찾아오신 하나님, 그리고 실망과 낙심에 빠져 살 소망을 잃어버린 우리 인생들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첫째,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때에 그의 자손들 75명을 애굽으로 이주시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애굽으로 이주시킨 것은 단순히 극심한 가뭄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가뭄은 그들을 애굽으로 이주시키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을 뿐입니다. 보다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그 언약을 성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애굽으로 옮기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430년을 보낸 후에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이끌어 올리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약속은 일찍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다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이르기까지 애굽에서 430년을 살았습니다. 430년이라는 세월이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 오랜 세월을 애굽에 살면서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하는 의식이 마음에만 희미하게 살아 있을 뿐, 실제 삶은 애굽인들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노예로 살았기 때문에 마음대로 회당에 모일 수도 없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노예생활로 대를 이어 살아왔습니다. 노예로 400년 넘게 살았으니 구원에 대한 신앙 자체가 사라졌습니다. 노예는 그 자손도 노예입니다. 자자손손이 노예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구원의 날이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습니다. 그저 노예로 사는 대로 살다가 죽는 대로 죽어갈 뿐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거기에 하나님께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저들을 잊어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출애굽기 3장 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보고, 듣고, 알았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고통과 슬픔과 부르짖음을 보셨고, 들으셨고, 아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8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여기에 보면, 하나님은 “내가 내려가서 … 그들을 건져내고 … 그들을 인도하여 … 그들을 데려가려 하노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34절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확실히 보고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그들을 구원하려고 내려왔노니.”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그저 보시고 아심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로 내려오십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내려오신 많은 사건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사람들의 죄악을 심판하기 위해 내려 오셨고, 시내산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시고 언약을 맺기 위해 내려오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정하신 때를 따라 그 백성에게 복을 주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내려오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를 관망만 하시고 인간들을 홀로 내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라 역사 가운데 깊이 개입하시는 행동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지 않다면 복음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아무런 소망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우리에게는 이 놀라운 복음의 메시지가 주어졌습니다.
“사십 년이 차매 천사가 시내 산 광야 가시나무 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이 전하는 하나님은 여러분을 염려하시며, 여러분에게 관심을 갖고 계시며, 여러분에 대한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우리의 삶에 개입하시고 간섭하십니다. 더 강한 단어를 써 보겠습니다. 그는 우리의 삶을 ‘뚫고’ 들어오십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리석은 이스라엘 자손들처럼 그것을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을 떨쳐버리려고 애를 쓰며, 온갖 방법으로 그를 치워버리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계속해서 우리에게로 돌아오십니다. 우리 멋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간섭하시고 돌연히 개입하시며 찾아오십니다. 이것이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우리 밖에 계신 하나님이 행동하시고, 우리를 찾아와 일하십니다. 구약성경을 읽어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그렇게 하셨던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계속해서 이스라엘 자손을 찾아와 붙잡아주시고 간섭하시며, 적들을 물리쳐 주십니다. 그들과 교제하시며, 범죄하고 타락한 그들을 새롭게 하기 위해 잠시 바벨론에 포로로 보내셨다가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면 그들은 벌써 오래 전에 땅 위에서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들의 역사 또한 종지부를 찍었을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언제나 찾아오시고 행동하십니다.
“사십 년이 차매.” 사람들은 이 말씀 앞에 이런 질문을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대체 왜 40년이나 기다리신 것일까요? 좀 더 일찍 개입하시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요?” 이 질문에 저는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오직 아는 것은 그 40년이 우리가 제정신을 차리는데 유익한 기간이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왜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을까요? 왜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자마자 보내지 않으셨을까요? 저는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이유는 인간의 한계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지혜와 철학과 과학으로 이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오랜 세월의 시간을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리석은 벌레와 같은 존재임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 때를 미루실 때가 아주 많습니다. “사십 년”을 미루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때에 행동하실 뿐 아니라 자신의 방법대로 행동하십니다. 하나님께는 하나님만의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홀연히 여러분을 만지시며 여러분의 삶에 간섭하십니다. 여러분은 왜 이 자리에 오게 되었을까요? 왜 저와 같은 하찮은 사람의 말을 듣느라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일까요? 여러분은 그 이유를 알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의 찾아오심에 있습니다. 그가 홀연히 나를 만지시고 간섭하시며 뚫고 들어오십니다.
40년이 흘렀습니다. 그 40년은 자신들의 지도자요, 해방자인 모세를 알아보지 못하고 거부해 버린 가련한 이스라엘 자손들이 비참하고 불행한 노예로 살도록 정해진 기간이었습니다. 그들은 잔인한 적, 무서운 감독들의 손에 무력하게 잡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이러한 처지는 죄악과 마귀의 손에 잡혀 있는 우리 각 사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노예였습니다. 노예로 태어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는 술 취함과 음행과 같은 죄악의 노예일 뿐 아니라 정욕의 노예이며, 질투와 시기와 악의와 악독과 원한과 미움의 노예입니다. 우리 각 사람은 죄와 어둠의 노예로 태어났습니다. 무력한 노예들인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짓고 있는 개인적인 죄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그 죄의 노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 8:34). 이것이 모든 인간들이 처해 있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얼마나 놀라운지!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철저하고 지독한 종살이를 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친히 찾아오십니다. 구원은 완전히 하나님 편에서 하시는 일입니다. 복음은 우리 스스로 구원하라고 권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조롱하는 말입니다. 복음은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도 구원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압니다. 따라서 복음은 행동하시는 하나님, 일어나 찾아오셔서 유일한 구원의 방법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설명이자, 선포입니다.
저는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방식과 시기와 그 모든 일을 하시는 방법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 일이 어디에서 일어났습니까? ‘광야’에서 일어났습니다. 이 사람 모세를 보십시오. 그토록 빛나는 재능과 자질을 자랑했던 사람이 일개 평범한 목자로 전락하여 40년을 광야에서 지냈습니다. 자신이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으며, 장차 어떤 사람이 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얼마나 자주 했겠습니까?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노예생활을 하는 백성들에 대한 생각은 또 얼마나 자주 했겠습니까?
그런데 일개 양을 치는 목자로서 그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인생을 허비했고, 그 모습 그대로 죽을 것이 분명했습니다. 이런 상태가 40년간 계속되면서 그는 사실상 모든 것을 포기하고, 소망도 거의 버렸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처음에는 이런 생활이 길지 않으리라고, 곧 돌아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40년이 흐르면서 그 소망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소망을 잃기 시작했습니까? 누군가를 사랑하며 수년간 기도해 왔지만, 그가 나아지기는커녕 더 나빠지는 것 같아서 소망이 사라지고 있습니까?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의 처지는 결코 절망적이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행동하시는 하나님, 개입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소망을 다 잃어 버렸을 때, 죄에 굴복했을 때, 수치심에 휩싸여 있을 때, 몸부림 쳐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생각이 들 때, 나뿐 아니라 남들도 그렇게 생각할 때, 하나님이 다시 찾아오십니다. 나도 나를 포기하고, 세상도 나를 포기했을 때라도 하나님은 나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렇습니다. 누더기를 걸친 모습 그대로, 수치스러운 모습 그대로, 궁핍한 모습 그대로, 크게 낙심한 모습 그대로 가만히 서 있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찾아오십니다. 그는 이미 여러분을 위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와 죽임을 당하시고 무덤에 묻히시고 음부에까지 내려가신 분이십니다. 그는 여러분이 서 있는 바로 그 자리로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붙잡아 주시며, 여러분을 일으켜 세워주시고, 넉넉히 이기게 해 주십니다. 이 놀라운 구원의 복음을 믿음으로 붙잡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둘째,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스데반이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은 과거에 노예로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에게는 아무 소망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비록 그들은 하나님을 잊어버렸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향한 당신의 약속을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네 씨가 복의 근원이 되리라. 만백성을 구원하게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려 가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웠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찾아오셨고, 구체적으로 행동하셨습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은 약속에 참으로 신실하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환경, 모든 어려운 일, 모든 불신앙에 상관하지 않으시고 당신께서 약속하신 것을 완전히 다 이루십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태어나게 하시고, 그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내신 것도 그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세를 거부했습니다. 그들이 모세를 어찌나 싫어했던지 죽일 수만 있다면 아주 기꺼이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시려는 계획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40년 후에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 그리고 나서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본문 34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내 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 받음을 내가 확실히 보고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그들을 구원하려고 내려왔노니 이제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하시니라.”
우리가 본문의 말씀에서 깨닫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잊어버리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 역사를 익히 알고 있었던 모세는 이 말씀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를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시며,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지금 세상은 곤경에 빠져 있습니다. 그 모든 원인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세상을 완벽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를 짓고 반역함으로써 무질서와 혼란이 들어왔고, 불행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상태 그대로 내버려두셨다면 지금 우리는 이렇게 존재하지 못할 것이고, 세상도 오래 전에 곪아서 사라져 잊혀버렸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나마 이렇게 존재하고 있는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이 여전히 세상에 관심을 가지고 세상을 염려하시며, 전 우주를 구속하기로 굳게 맹세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셨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처음 약속하셨고, 아브라함과 그 아들 이삭과 또 그 아들 야곱에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새롭게 약속하시며 그 약속을 상기시키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은 아무런 목적도 없이 그냥 우연히 흘러가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목적에 따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흘러갑니다. 그런데 정작 세상은 그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주를 구속하시고 구원할 목적과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그는 불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때와 동일하신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나아가 그 말씀하신 바를 반드시 실행하시는 참으로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자신을 ‘여호와’라고 부르시며 그 이름으로 모세에게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여호와’는 “나는 나다”라는 뜻입니다. 이 이름 속에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사람은 수시로 변합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도 변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홀로 영원히 변하지 않습니다. 말라기 3장 6절에 보면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허락 하에 많은 일들이 일어나도록 허용하시지만, 결코 그 목적을 잊지는 않으십니다. 그가 하신 약속을 잊지 않으시고, 때가 되면 반드시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결코 변하지 않으시며 변할 수 없는 하나님이 만유 위에 계시며, 그가 약속을 지킬 것을 맹세하고 서약하셨다는 사실을 아는 것보다 더 큰 위로는 세상에 없습니다.
셋째,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십니다.
본문 34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내 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 받음을 내가 확실히 보고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그들을 구원하려고 내려왔노니 이제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미디안 광야에서 목자로 양을 치던 모세에게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나타나셔서 말씀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내가 확실히 보고”라는 말은 “내가 보아 왔고 또 보고 있으며”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라고 말씀하십니다. 영원 전부터 살아 계신 하나님, 우리 같은 존재가 전혀 필요하지 않으신 하나님, 우리 없이도 얼마든지 사실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우리에게 지대한 관심을 갖고 우리를 염려하시며 지켜보고 주목하고 우리의 소리를 귀 기울여 들으신다는 것은 거의 믿어지지 않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는 구원의 위대한 드라마를 설명해 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세상을 ‘굽어보셨고’, 죄악이 자신이 창조하신 사람들의 원래 모습을 어떻게 망가뜨려 놓았는지를 보셨습니다. 그는 주목하여 보셨으며,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죄가 인간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를 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죄가 무슨 짓을 했습니까? ‘괴로움’을 만들어냈습니다. 이 말에 담긴 뜻은 ‘억압’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사실 때 사람들을 돌아보시며 “목자 없는 양 같음”을 보셨다고 했습니다. 그 당시 목자 없는 양들은 근동 지역을 떠돌아다니며 난폭하고 광포한 개들의 습격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양들은 어디로 가야 필요한 양식을 얻을 수 있는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목자 없는 양들은 사냥감이 되어 개들에게 쫓겨 다니느라 헐떡거렸고, 먹지 못해 비쩍 마른 채 기력을 잃고 쇠약해졌습니다. 이것이 ‘괴로움’이라는 말에 담긴 온전한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죄와 폭정과 속박에 인간이 그렇게 괴로움을 당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는 우리가 모두 노예로 태어나 욕망과 충동과 정욕에 휘둘리며 사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육신의 욕망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정신의 욕망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정신의 욕망이 육신의 욕망보다 훨씬 더 심각할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이런 욕망에 사로잡힌 노예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물론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모릅니다. 그들은 스스로 자유롭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모든 인간들이 직면하고 있는 비극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세상을 굽어보셨으며, 이러한 비참한 현실을 보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죄는 종살이라는 괴로움만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비참함이라는 괴로움도 만들어냈습니다. 하나님은 그 모습만 보신 것이 아니라 탄식하는 소리도 들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두려움과 아픔과 절망과 고통의 모든 것을 보시고 들으시며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을 구원하려고 내려왔노니 이제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이것이 모세에게 주신 메시지입니다. 또한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그런데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은 이 메시지를 거부했고, 지금도 사람들은 여전히 이 구원의 메시지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마음을 활짝 열고 우리에게 주시는 이 복음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하늘 높은 보좌에 계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잊지 않으셨으며, 버리지 않으셨고,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괴로움과 불행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내려오셨습니다. 구약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이 다양한 방식으로 계속해서 내려오셨던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의미하는 바를 알고 싶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벽하게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원을 보십시오. 모세에게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자신의 독생자를 이 세상이라는 애굽으로, 고통과 수치와 속박과 괴로움과 곤경의 땅으로 보내셨습니다. 단 하나뿐인 아들을 우리의 삶이라는 애굽으로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자발적으로 우리의 삶이라는 애굽으로 내려오셔서 우리의 모든 짐과 문제들을 나누셨습니다. 그가 그렇게 하신 것은 죄와 사망의 노예에서 우리를 구원하여 해방시키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죄인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거저 구원을 베풀어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자신과 화목하게 하시며, 그 자녀들에게 허락하시는 모든 약속을 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을 믿으며, 그를 전심으로 의지하고, 그에게만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삶을 살아드리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평안과 안식과 만족을 누리며, 죽어서는 영원한 영광으로 하나님을 뵙는 자리로 나아가는 복된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