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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사도행전 7:37-43
지금까지 스데반은 이스라엘의 역사적 사실들을 이야기했습니다. 이제 본문부터는 그 내용을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에게 적용하고 있습니다. 즉 단순히 역사를 되짚어 보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역사적 사건을 현실과 연결해서 그 연관성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이 모세를 우러러보며 존경한다고 떠들지만, 사실은 모세를 거절했던 조상들과 똑같이 불신앙의 죄를 범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 그토록 대단한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결코 바보가 아닙니다. 당시 최고의 지성을 자랑했던 그들은 그 사회에서 가장 유능한 지도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세상의 유일한 구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메시지를 고의적으로 거절했습니다. 나아가 그들은 그 메시지를 전했다는 이유로 한 사람을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모든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는 복음의 메시지를 완전히 오해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이 구원의 메시지를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아주 고집스럽게 복음의 메시지를 거절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생명을 구원하는 이 복음의 메시지를 그토록 강렬하게 거절하고 있을까요? 사람들은 왜 여전히 산헤드린의 권력자들과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시대와 환경이 사람들을 이렇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 이렇게 만드는 것일까요?
스데반은 설교에서 이 문제에 대해 아주 명백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복음을 거절하는 이유는 단순히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좀 더 가르치고 권면하거나 서로 사랑하라고 호소하기만 하면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일이라면 지금까지 질리고 물릴 정도로 많이 해 왔습니다. 그러나 아무 소득이 없었습니다. 상황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 문제는 그만큼 뿌리가 깊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부분적으로만 잘못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다 잘못되어 있습니다.
감히 말씀을 드리지만, 이렇게 말하는 가르침이 세상에 또 있는지 찾아보십시오. 이것은 확실히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가르치는 중대한 메시지는 인간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타락했기 때문에 세상이 이 모양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타락은 전적인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타락은 어느 한 부분이 아니라 정신적인 기능과 신체적인 기능이 모두 타락했고, 존재 구석구석이 전부 타락했습니다. 이 사실을 스데반은 본문 3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하지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
본문에서 ‘복종하지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며’라는 표현은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세에 대한 불순종의 의지가 얼마나 강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세를 열 번이나 시험하고 불순종했었습니다. 히브리적 개념에서 열 번이라는 것은 단순히 수적인 의미에서 열 번을 이야기할 뿐만 아니라 완전하고도 철저하다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그만큼 그들은 철저하게 모세를 거절했습니다.
출애굽기 2장 23절 이하에 보면, 노예로 전락한 이스라엘 자손들의 삶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던가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짐작’이라는 단어를 쓴 것은 그들이 아무리 극심한 고통을 당했다고 해도 내가 직접 경험하지 않은 이상,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럴 것이라고 짐작만 할뿐이지 실제로 그것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출애굽기 2장 23절의 말씀만으로도 우리는 가히 그들이 당한 고통을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2장 23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여기에서 ‘탄식하며’라는 히브리어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무거운 고역이 더 이상 감당하기 어려운 육체적 한계에 다다랐음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부르짖으니’라는 말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더 이상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큰 소리로 ‘통곡하며’, ‘하나님을 찾게’ 되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부르짖다’는 단어는 창세기 4장 10절에서 하나님이 가인에게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라고 말씀하실 때 ‘호소하느니라’라는 단어와 같은 뜻입니다. ‘호소하다’는 단어의 히브리어 ‘차아크’는 인간이 피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생명의 위기를 느낀 절체절명의 순간에 부르짖는 외마디 호소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처지가 그러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랜 세월 동안 자유와 인권을 말살 당한 채 그 모진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에 비하면, 비록 광야의 생활이 여러 면에서 부족하고 불편하지만 애굽에서의 생활보다는 훨씬 나았습니다. 그들에게는 넘치는 자유가 있었고,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한 벅찬 소망이 있었습니다.
애굽에서 절망 가운데 탄식하던 것에 비하면 광야에서의 불편함은 그야말로 지극히 작은 고난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광야에서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실로 개가 그 토했던 것을 다시 삼키고, 깨끗이 몸을 씻은 돼지가 다시 구덩이에서 뒹구는 것과 같이 그들은 그리워해서는 안 될 것들을 다시 그리워하는 어리석은 자들이었습니다. 결국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출애굽한 1세대는 모두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지금 스데반은 산헤드린의 권력자들과 유대인들을 향해 이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의 조상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인 모세를 철저하게 불순종했던 것처럼, 지금 당신들도 똑같은 방식으로 친히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불순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세를 거부하고 불순종했던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던 것처럼, 구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불순종하면 과거 조상들과 같이 멸망할 것이라는 사실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멸망은 단순히 육체적 죽음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옥에서의 영원한 멸망인 것입니다.
특별히 본문 39절에서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그 마음이 … 향하여’라는 말씀을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마음 안에서 돌이켰다.” 여기에서 강조되는 것은 바로 ‘그들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광야에 거했던 이스라엘 자손들이 위기의 때마다 모세를 원망하고 애굽을 그리워하며 돌아가고자 했던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조상들이 모세를 거부했던 이유, 그리고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이 예수님을 거부했던 이유, 나아가 사람들이 사도들과 스데반이 전하는 복음의 메시지를 거부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의 진정한 문제점, 불신앙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들의 마음에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마음’은 일반적으로 인격의 중심 그 자체요, 욕망이 일어나는 자리를 의미합니다. 사실 불신앙은 머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읽어보면 스데반이 말하고자 하는 진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마음으로 자주 다른 것을 갈망했으며, 다른 신들을 갈망했습니다. 그들은 완악하고 굳어진 마음으로 항상 무언가를 갈망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비극의 전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사실을 훨씬 더 분명하고 명확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마 15:19). 따라서 주변에서 우리들에게 영향을 주는 것들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들은 이미 우리 속에 있는 것들을 자극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딛 1:15). 그렇습니다. 깨끗한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합니다. 그렇지만 깨끗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변의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 반응하는 내 마음이 문제입니다. 결국 악한 것은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복음을 거절하는 이유도 그 마음이 악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가 하고 있는 것을 즐기고 있습니다. 마음에 지배를 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에게 그 조상들의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했다”라고 하면서 그들의 마음 상태를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점은 마음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복음의 메시지를 거부하는 궁극적인 원인은 보다 더 깊은데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타락한 인간의 ‘죄성’입니다. 타락한 이후 인간에게는 불신앙이 들어왔고, 그 불신앙이 하나님의 말씀을 고집스럽게 거절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몰라서 복음을 거부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사람들의 문제는 무지에 있는 것도 아니고, 정보의 부족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사람들의 마음이 죄로 인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전적으로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인과 관련된 가장 궁극적인 사실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사람은 ‘어리석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죄에 빠져 하나님께 반역하는 인간을 가리켜 가장 일반적으로 비난할 때 쓰는 표현이 바로 이것입니다. “어리석은 자!” 이런 어리석음은 주로 자신을 속이고 기만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이것이야말로 무엇보다 가장 비극적인 일입니다. 남을 속이는 것도 나쁜 일이지만 자신을 속이는 것은 정말 큰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태초에 하나님을 처음 거역하고 반역한 이래 계속해서 이런 짓을 해 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인간의 어리석은 모습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본문 40절과 41절의 말씀인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아론더러 이르되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애굽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던 이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고, 그 때에 그들이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
여기에 보면 인간의 엄청난 어리석음을 가장 완벽하게 보여주는 그림이 있습니다.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무슨 뜻입니까?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 22절에서 이것에 대해 결정적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인간에 대해 이 말씀보다 정확하게 규정하고 있는 말씀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21세기의 사람들에 대한 완벽한 묘사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삶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무슨 뜻입니까? 자신감이 넘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자신감에는 끝이 없습니다.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우주의 중심입니다. 인간의 두뇌가 우주에서 가장 위대합니다. 인간의 능력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심지어 오늘의 현대인들은 하나님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태도는 결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조상들도 정확히 그와 같은 짓을 했습니다. 그들은 시내산 밑에서 아론을 찾아가 강력하게 요청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신들을 만들라!”
스데반은 말합니다. “그 때에 그들이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 그들은 신을 원했고, 신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스스로 그럴만한 역량이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금으로 멋지게 신을 만들어냈고, 그 신을 경배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종 되었던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을 노골적으로 거절했습니다. 물론 그들은 이런 짓을 하는데 아무 주저함도 없었습니다. 문제는 이것이 모든 인간들의 실상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바위나 나무, 금․은으로 신을 만들 때 주저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인간은 모든 신을 모시는 만신전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신들마다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그와 똑같은 짓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똑똑한 머리로 새로운 신들을 만들어 세웠습니다. 이 신들에게는 진노도 없고, 공평함도 없고, 의로움도 없습니다. 이 신들은 인간에게 벌을 주지 않습니다. 오직 사랑과 쾌락만 있을 뿐 다른 요소는 하나도 없습니다. 한 마디로 이러한 신들은 인간이 자기 필요에 의해 조작하고 만들어낸 허상들입니다. 그리고는 자기들의 손으로 만든 그 물건을 신이라고 떠받들어 숭배합니다. 이러한 사실이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생각이 허망해진 인간은 마음이 어두워졌고, 그 결과 스스로 지혜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데반은 본문 37절에서 이렇게 선포하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본문은 신명기 18장 15절을 인용하는 말씀인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이 말씀에서 모세는 자기와 같은 선지자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 위에 세우실 것이라고 예언을 합니다. 여기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모세는 이 예언을 하면서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라고 명령합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의 한글개역에서는 그 내용이 빠져 있습니다. 그렇지만 영어성경 KJV성경에서는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에 해당하는 문장을 포함해서 번역했습니다. 베드로도 사도행전 3장 22절에서 같은 구절을 인용해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스데반도 바로 이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본문에서 기억해야 하는 것은 마지막에 나오는 네 단어입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스데반은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세상의 구주라고 전하다가 체포되어 심문을 받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모든 전도자들, 사도들과 그 밖의 그리스도인들도 똑같은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렇지만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은 그것을 믿지 않았을 뿐 아니라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이 지금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은 모세의 가르침을 거역하는 것임을 왜 모르느냐? 모세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예언하면서 그의 말을 들을 것을 촉구했다. 그런데 너희는 듣지 않을 뿐 아니라 전하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있다. 우리는 모세가 명한 바로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 메시지의 핵심이자 중심입니다. 기독교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목적은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으라고 촉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스데반이 취한 입장의 요점입니다. “예수의 말을 들을 것인가, 말 것인가?” 이것은 참으로 중대한 문제입니다. 산헤드린의 권력자들도 이 질문을 받았고, 지금 우리 모두도 이 질문을 받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들을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왜 그의 말을 들어야 합니까?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들어야 하는 궁극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우리는 우리의 필요 때문에 그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때때로 복음을 전하는 우리들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왜 예수를 전합니까? 왜 나한테 그 말을 들으라고 하는 것입니까?” 여러분은 이 질문에 뭐라고 대답하십니까? 저의 대답은 이것입니다. 다른 것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부터 바라보십시오. 우리의 상태가 어떻습니까? 모두가 알다시피 우리는 도처에 어려움과 문제와 불행과 긴장이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입니까? 우리는 바로 이 질문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여기에서 출발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에게서 출발해야 합니다. 물론 어리석은 부자와 같이 “나는 괜찮다”라고 말하는 사람들, 현실의 삶에서 충분히 만족하고 있으며 스스로 자신의 삶을 꾸려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메시지에서 들을 말이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누가복음 5장 31절과 32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무지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가장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서 전적으로 무지합니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오늘 현대인들의 가장 큰 비극입니다. 오늘의 사람들은 과학적으로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해 떠들고 자랑합니다. 그렇지만 정작 자신들이 훨씬 더 중요한 것들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물론 인간이 과학적으로 크게 진보했다는 것은 저도 알고 있고, 여러분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알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인간은 어떤 존재입니까? 내가 앓고 있는 질병들을 치료받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렇지만 그 병을 치료받은 후에도 나는 여전히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대체 어떤 존재입니까? 제가 알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삶이란 무엇입니까? 삶의 목적과 목표는 무엇입니까?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죽음이라는 궁극적인 문제도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죽음을 떨쳐낼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죽음을 생각하기 싫어한다는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바로 그 점에서 사람들이 어리석다는 것입니다. 대체적으로 사람들은 사실에 직면하기를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죽음은 절대적인 현실입니다. 우리는 전쟁이나 그 밖의 문제들을 놓고 논의를 합니다. 물론 그렇게 미리 논의하고 대비하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그리고 전쟁과 같은 끔찍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도록 만반의 대비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죽음은 어쩌다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일이 아니라 반드시 일어날 일입니다. 아무도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은 때가 되면 반드시 죽음 앞에 직면해야 합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가혹한 현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경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처럼 죽음이 가까이 왔을 때에야 자신의 죽음에 대해 무지했다는 것과 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탄식하며 절망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셨습니까? 우리의 죽음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대체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요? 죽은 자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그리고 그들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우리는 이런 것들에 대해 너무나도 무지합니다. 정말이지 아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과 죽음 이후에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너무나도 분명하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의 말을 들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그분 외에는 어느 누구도 우리를 도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께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광야에서 장정만 5천명이 되는 굶주린 무리들을 먹이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베푸신 놀라운 기적을 보고 열광하면서 외쳤습니다.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모세가 예언했었고, 본문에서 스데반이 이야기하고 있는 바로 ‘그 선지자’입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을 억지로 붙들어서 자기들의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직설적으로 진리를 말씀하셨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사실 항상 듣기 좋은 말만 들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실재와 문제의 핵심을 다루는 말을 듣기 싫어합니다. 이 사실을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데, 요한복음 6장 66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님은 무리가 떠나가는 것을 보시고 열두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물으셨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그러자 베드로가 성령의 감동을 받아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자신들은 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고 누구에게로 가겠느냐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다 겪어보았고, 그들의 말도 이제껏 들어왔기 때문에 그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다 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는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에서 참으로 중대하고도 궁극적인 문제와 질문들에 직면할 때 곧바로 도달하게 되는 결론은 세상은 여러분을 도와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이런 주제에 대해 해줄 말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철학을 이야기합니다. 예, 철학 책들을 읽어보십시오. 그것이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에 대해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철학자들은 추측만 할 뿐 그 이상은 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답을 모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에 대해 고린도전서 1장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한 마디로 철학이 우리를 도와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철학뿐 아니라 종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종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종교들은 인간들이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때문에 세상의 종교들이 제공해 줄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이런저런 방법으로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 어떤 ‘절대적인 것’에 몰두하라고 말해 주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 알아서 절대적인 것, 혹은 절대적인 존재를 찾아가라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종교들은 인간들이 스스로 도달할 수 없는 길을 만들어놓고 그 길을 스스로 알아서 걸어가라고 합니다.
이것이 그들이 제공할 수 있는 것의 전부입니다. 그러나 그마저도 그것이 참인지조차 입증해 주지를 못합니다. 그저 하나의 이론을 제시할 뿐입니다. 그들의 종교들은 하나같이 비관적이고 절망적이며, 우리가 던지는 인생의 궁극적인 질문들에 대답을 주지 못합니다. 과거 대구에 있는 사찰의 어느 비구니를 제 수업에 초대를 해서 한 시간 동안 학생들에게 포교해서 불자로 만들어 보라고 했더니, 이 분이 한 시간 내내 한숨만 쉬다가 마지막에 이런 말로 끝냈던 기억이 납니다. “여러분, 불교는 정말 힘들고 어렵습니다. 석가모니 이래로 부처가 된 분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것이 세상 종교들의 실상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이를 수 없는 허상을 만들어놓고 그 길을 혼자서 걸어가라고 합니다. 결국 세상 종교들은 우리의 궁극적인 문제들을 도와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까? 우리가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말을 들어야 할까요? 그 대답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이들은 모두가 우리를 실망시켰기 때문입니다. 온 세상이 우리를 실망시켰고, 저 자신도 저를 실명시켰습니다. 저도 제 인생의 궁극적인 질문들에 대답을 줄 수가 없습니다. 실로 예수 그리스도, 그분 외에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우리를 돕거나 거들어주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의 말을 들어야 하는 세 번째 이유는, 그가 우리를 위해 구원을 완성하시고 초청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의 모습을 보며, 우리를 부르시는 그분의 소리를 듣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마태복음 11장 28절과 29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여기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이 삶의 힘겨운 현장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다. 잠자리에 누워서도 무거운 삶의 짐을 벗지 못하여 신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우리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아십니다. 아실뿐만 아니라, 우리들을 향해 “다 내게로 오라”고, 그리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친 자들에게 최고의 선물은 진정한 ‘쉼’이 아닐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주시는 쉼은 현재적인 ‘쉼’도 되지만, 궁극적으로는 천국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쉼’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초청을 직시해야 합니다. 여러분 앞에 명백한 사실이 있고, 역사가 있으며, 외면할 수 없는 현상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권위를 가지고 계신 분이신가를 보십시오. 스데반이 말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가 예수를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에게 권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에게 몇 주 전에 나사렛 예수를 못 박아 죽임으로써 그를 거절한 것이야말로 비극적인 잘못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고 우리는 왜 그의 말을 들어야 합니까? 모세는 왜 그의 말을 들으라고 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 자신이 주장하신 유일무이한 권위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그런가 하면 그는 자신에게 죄 사함의 권세도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는 누구이십니까? 도대체 무슨 근거로 어둡고 무지하고 실패한 세상 한복판에 서서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무슨 권한으로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 대답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자신이 구약성경에 기록된 모든 예언의 성취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스데반과 사도들, 그리고 교회가 선포했던 복음의 메시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기에서 좀 더 나아가십니다. 우리가 그의 말을 들어야 하는 보다 궁극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한 번은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학식이 높은 랍비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니고데모를 향해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책망하시면서 자신을 가리켜 ‘하늘에서 내려온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본래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써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이십니다.
성경을 읽어보십시오. 성경에서 예수님은 “내가 온 것은 …”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내가 태어났다”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요 8:2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결코 자연스럽고 평범하게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방문자로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래 하나님이셨던 예수님은 죄와 사망의 권세에 노예가 되어 영원한 저주와 멸망 가운데 있는 우리 인생들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베들레헴의 악취가 나는 마구간에서 가장 무력하고 가난하게 태어났습니다.
그는 여러분과 저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바로 그것을 주시려고 한 인간으로써 당할 수 없는 모멸과 수치와 조롱과 멸시를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끝내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그가 그렇게 하셔야만 했던 이유는 전적으로 우리를 위해서였습니다. 우리의 무지와 실패, 우리의 완전한 무력함 때문에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는 악취가 나는 깊은 웅덩이에 빠진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이시며,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시며, 그것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보십시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는 능력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십시오. 그리고 그가 하시는 말씀을 들으십시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에 반응했던 두 부류의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세리와 죄인들로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와 기쁘게 들었습니다. 반면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시비를 걸며 조롱했습니다. 결국 사회에서 버림을 받았던 세리와 죄인들은 예수님의 친구가 되었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반면에 자기 의에 빠져 똑똑하고 경건하다고 생각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께로부터 ‘외식하는 자들’이라는 심한 책망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그의 말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께서도 이후에 계속해서 여러분 속에 역사하면서 같은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그의 말을 들으라!”
하나님께서는 옛적에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때가 되었을 때에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에는 성령께서 사도들과 교회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교회에서 선포되는 그 힘 있는 소리를 들었습니까? 제발 들으십시오. 그리고 그 말씀을 믿음으로 붙잡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이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넘치도록 능히 하실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지켜주시고,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