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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그들을 버려두셨으니!
사도행전 7:42-50
우리가 계속해서 살펴보고 있는 스데반의 설교는 산헤드린 공의회에서 재판을 주재하던 대제사장의 요구를 받고 행한 법정 진술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단순히 법정의 진술을 넘어서 기독교 복음의 본질을 다루고 있는 매우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스라엘 자손에 대한 스데반의 설교에 관심을 갖는 것은 이들과 이들의 행동, 그리고 이들에게 일어난 일이 인류 전체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 중요하고도 객관적인 교훈을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성경에 나오는 역사는 앞서 예언된 역사일 뿐 아니라 그 역사 자체가 곧 예언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자손이 했던 대로, 또는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이 했던 대로 따라 하기를 고집할 때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를 명확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스데반이 가르치고 있는 원리들을 바르게 이해할 때에만 인류의 과거 역사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오늘의 세상에서 살고 있는 우리의 상황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의 세상이 직면하고 있는 상황을 보십시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과 바로 전에 일어났던 일들을 보십시오. 지난 20세기에 일어났던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이 땅에서 일어났던 6․25동족상잔이라는 비극들을 보십시오. 나아가 현재 러시아가 일으킨 우크라이나 전쟁과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현상들을 보십시오. 그리고 저 앞에 불안하게 다가오고 있는 그림자를 보십시오. 원래 이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신 아름다운 세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이 모양이 된 것입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세상이 이렇게 된 원인을 놓고 하나님의 이름을 올려놓고 조롱하듯이 비난합니다. “정말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전능한 신이라면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도록 내버려두는 것인가? 왜 막지 않는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자신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평소에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자신들의 자유와 자유의지를 마음껏 자랑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삶과 미래를 결정지을 수 있는 인간의 자유를 믿으며, 찾아오시고 행동하시는 하나님을 거부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보았을 때 기독교의 하나님은 자신들의 자유를 가로막는 난폭한 훼방꾼에 불과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의 삶에 뚫고 들어와 간섭하는 것을 굉장히 싫어합니다. 하나님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불평하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막상 자신의 삶에 어려운 문제가 닥치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공격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조차 싫어하고 거부했습니다. 그런데 개인의 자유를 그토록 자랑하던 그들이 막상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면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로 다 돌려버립니다. 문제는 자기들이 육체의 욕망을 따라 마음대로 다 저질러 놓고 그 책임을 하나님께 떠넘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이성과 자유의지가 전혀 없는 목석(木石)으로 만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에게 이렇게 할 수도 있고, 저렇게 할 수도 있는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만 주신 것이 아니라 동시에 그 자유에 따르는 책임도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아담과 하와에게는 스스로 선악과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지만, 동시에 그 선택 다음에 되어지는 일에 대한 책임도 져야 했습니다.
“세상이 왜 이 모양인가?” 이 질문에 대해 스데반은 아주 분명하게 그 대답을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거부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세상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탓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의 핵심은 사람들이 마음으로 그렇게 계획할지라도 결국에는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행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하나님을 거역하고 제 갈 길로 간다고 할지라도 행동하시는 하나님께서 그 인간의 삶으로 뚫고 들어오셔서 간섭하시고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이것이 스데반이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스데반이 전하는 이와 같은 메시지는 성경이 한결같이 주장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완벽하게 만드셨고, 인간도 완벽하게 만들어 그 완벽한 세상 가운데 두셨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그 대답은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불순종했고 반역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유를 가지고 “내가 책임지겠다”라고 하면서 주제넘게 나섰습니다. 이것이 타락입니다. 이처럼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벌을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인간의 반역과 타락으로 인해 이 땅이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지금 자연과 피조세계의 모습은 하나님이 지으신 원래의 모습이 아닙니다. 타락의 결과로 찔레와 가시와 질병이 생겨났습니다. 이런 것들은 원래 세상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일은 인간이 어리석음과 자만에 빠져 하나님을 반역하고 모독한 결과 마귀의 노예, 죄악의 노예로 붙잡힌 것입니다. 이 점에서 인류의 역사를 조감할 때 발견하게 되는 사실은 하나님을 반역하고 떠난 인류의 역사는 대부분 불행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즉 인류의 역사는 분열과 싸움, 각종 질병과 전쟁, 지진과 재난, 역병과 죽음의 역사입니다. 원래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전부 인간의 죄에 대해 하나님이 내리신 형벌의 일부입니다. 인간은 마귀의 노예로 붙잡히면서 불행해졌습니다. 공중의 권세를 잡은 마귀가 ‘이 세상 신’이 되었습니다. 그가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욕심과 욕망과 정욕과 죄악의 포로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하나님은 그것도 통제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죄와 악을 통제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죄 가운데 있는 인간에게 무제한의 자유와 활동범위를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죄와 악을 통제하시며 그것이 인간에게 끼치는 영향을 통제하십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남용할 때마다, 특별히 교만해지고 악해질 때마다 하나님은 행동을 하십니다. 스데반이 설교에서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시대를 보십시오. 인류 역사에서 최고로 발달한 과학과 문명으로 현대인들은 가장 화려하고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매일 눈부시게 발전하는 과학은 인간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들이 우주를 통제할 수 있으며, 자신들이 할 수 없는 일은 하나도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조롱하고 비웃고 있으며 무시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인간이 이렇게 행동할 때 하나님은 어김없이 스데반이 설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방식대로 행동을 취하십니다. 그 내용이 본문 42절인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외면하사 그들을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두셨으니 이는 선지자의 책에 기록된바 이스라엘의 집이여 너희가 광야에서 사십 년간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
사랑하는 여러분, 이 말씀에 주목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외면하사 그들을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두셨으니.” 한 마디로 말해서 이스라엘의 패역함에 하나님은 얼굴을 돌리시고 그들이 타락할 대로 타락하도록 버려두셨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말을 지독하게 듣지 않으려고 했다는 말씀을 읽었습니다. 스데반은 39절에서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모세에게 복종하지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
이것은 타락한 이기적인 인간의 전형적 모습입니다. 가만히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론을 찾아와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고 요구했던 시점이 언제였습니까? 모세가 산에 올라간 지 40일이 되어 가는 시점이었습니다.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그들이 아론에게 찾아와서 한다는 말이 이것입니다.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모세는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보십시오. 지금까지 자신들을 인도하던 지도자 모세가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하나님의 호출을 받고 산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40일이 다 되었는데도 깜깜 무소식입니다. 그가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 알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최소한 인간의 도리라고 한다면 지도자 모세를 위해 금식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든지, 아니면 모세의 시체라도 찾기 위해 구조대를 뽑아서 산으로 올려 보내든지 …. 모세를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해야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이 한다는 것이 고작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는 것입니다. 저들이 아론을 향해 내뱉는 말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 ‘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들을 탓하거나 비난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도 실상은 그들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스데반이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에게 했던 그대로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이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습 그대로 오늘의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것은 전형적인 교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바벨탑을 쌓으려고 했던 교만한 인간의 속성을 그대로 드러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똑똑해서 신들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금으로 신을 만들고 그 신을 숭배하며, 자신들을 여기까지 인도해 주신 하나님을 외면하고 등을 돌렸습니다. 그 결과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외면하사 그들을 … 버려두셨으니.”
그러니까 이스라엘 자손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그 앞에서 뛰놀며 섬김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하나님으로부터 돌이켜 애굽을 향했듯이 하나님도 그들에게서 얼굴을 돌이키셨다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 자손이 행한 그대로 하나님께서 같은 모습으로 되갚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얼굴을 외면하셨다는 것은 그 대상에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고 완전히 버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 자들을 그 마음의 화인 맞은 상태로 내버려두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번의 잘못에서 그치지 않고 거듭 우상숭배에 몰두하는 그들을 내버려두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간이 경험하고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형벌이 바로 이것이 아닐까요? 하나님께서 등을 돌리시고 떠나가시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실상 우리는 하나님을 얼마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죄를 지었을 때에도 하나님은 그의 얼굴을 사람들에게서 돌이키지 않으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서 등을 돌리시고 외면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찾아오셨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 4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자비하시고 사랑이 한이 없으신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선하고 인자하게 대해 주시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악인과 불의한 자들에게도 은혜를 내려주십니다. 물론 여기에서의 은혜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은혜가 아니라 소위 말하는 ‘일반은총’입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에게서 눈길을 거두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도 돌이키시는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외면하시고 돌이키시는 때가 언제입니까? 그것은 사람들이 교만하여 자신들의 얼굴을 하나님에게서 돌이킬 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돌이키심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한 가지를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얼굴을 돌이키시기 전에 반드시 먼저 사람들을 축복하시며 모든 기회와 가능성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얼마나 큰 복을 주셨는지를 보십시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불과 얼마 전에 애굽에서의 사로잡힘과 속박에서 그들을 이끌어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기적적으로 홍해를 건너게 해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교만해지자 하나님은 그들에게서 얼굴을 돌이켜 버리셨습니다. 그리하여 출애굽 1세대 가운데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모두가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느 날 갑자기 그의 얼굴을 돌이키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돌이키심에는 단계가 있습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은 돌이키시기 전에 반드시 먼저 경고를 주십니다.
우리가 이스라엘 자손의 이야기를 읽을 때 발견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실 때마다 항상 이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반면에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으리라”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아담과 하와를 만드신 태초부터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자기 형상대로 만드신 후에 그들이 원할만한 모든 것을 낙원에 두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경고도 하셨습니다. 한 나무의 실과만큼은 절대 먹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7). 이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얼굴을 돌이키시기 전에 반드시 불순종에 따르는 결과를 경고해 주십니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은 사람들이 그의 선하심을 무시하고 그 경고를 우습게 여길 때 당신의 얼굴을 돌이키셨습니다. “하나님이 돌이키사.”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특별한 교만함과 악함에 내리시는 한 가지 형벌입니다.
두 번째로, 그들이 돌이키지 않을 때 하나님이 외면하사 그들을 버려두십니다.
본문에서 ‘하늘의 군대’는 하늘에 있는 해와 달과 별들의 천체를 말합니다. 이것은 왕국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천체를 섬기는 자리에 나아갔던 것을 가리킵니다. 스바냐 1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붕에서 하늘의 일월성신을 숭배했습니다. 본문 43절에 보면 그들이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을 받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간 후 암몬의 우상인 몰록을 섬기며, 앗수르인들이 섬기는 토성을 가리키는 레판의 별을 숭배했습니다. 그들은 그 대상만 바꾸었을 뿐 광야 시대에 송아지를 섬기는 우상숭배의 죄악을 가나안 정복 이후에도 계속해서 행하는 패역함을 보였던 것입니다.
스데반은 이 사실을 놓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외면하사 그들을 … 버려두셨으니!”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늘의 일월성신을 섬기는 일에 버려두셨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 24절 이하에서 세 번이나 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두시고, 이러한 것에 내버려두시며, 저러한 것에 내버려두신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미 말씀을 드렸듯이 인간의 타락과 함께 인간과 세상에 재난이 닥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곧바로 그들을 팽개치시면서 “그래, 이제 너희와는 끝이다. 계속 그렇게 살아라”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 큰 인자하심으로 죄를 제한하시고 억제하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일반은총’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의 특별한 교만을 벌하시는 두 번째 방법은 이러한 통제를 거두어들이시는 것입니다. “버려두셨으니.” 하나님은 사람들이 제멋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시며, 그 동안 억제하고 있던 힘을 전부 거두어들이십니다. 이것은 참으로 엄청난 일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현 상황을 이해하는 온전한 열쇠입니다.
사람들은 오늘날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비극적인 일들을 놓고 하나님을 비난합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가?” 그러나 이러한 비난에 대한 답변은 이것입니다. 그 모든 일은 사람들이 제멋대로 하도록 하나님이 잠시 허용하신 결과에 지나지 않습니다. 평상시에는 허용하지 않고 제한하십니다. 그러나 평상적인 수준을 뛰어넘는 특별한 교만과 악이 드러날 때 하나님은 그 억제력을 거두어들이시고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하도록 허용하십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하도록 허용하신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의 얼굴을 돌이키사 버려두셨다는 말입니다.
바로 그 일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물질적인 풍요로움에 취해 하나님께 등을 돌렸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우리 인간의 힘으로 잘 살 수 있다는 자만에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필요 없습니다. 우리도 다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이러한 교만 앞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좋다. 어디 너희 마음대로 한 번 해 봐라! 너희가 무엇을 만들어내는지 보자.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보자.”
하나님은 아주 의도적으로 이렇게 하십니다. 잊지 마십시오.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하나님에게서 얼굴을 돌이킬 때 하나님은 곧 바로 얼굴을 돌이키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도의 선을 넘어섰을 때 하나님도 의도적으로 그들에게서 당신의 얼굴을 돌이키십니다. 지금 여러분은 하나님이 억제하시지 않는 세상의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악을 억누르지 않으시고 실컷 활개를 치며 활동하도록 허용하고 계십니다. “버려두셨으니.” 하나님은 인간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셨고, 그에 따르는 모든 결과에 내버려두셨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내버려두심은 반드시 그 끝이 있습니다. 인간들이 마음껏 죄를 짓도록 끝까지 버려두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 번째는, 그래도 끝내 돌이키지 않으면 그들을 바벨론 밖으로 옮기십니다.
이것은 그들을 외면하시고 얼굴을 보이지 않으실 뿐 아니라, 억제하고 통제하는 힘을 거두어들이시며, 보다 적극적으로 벌하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성경 전체의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은 범죄하여 타락한 유다 백성들을 바벨론으로 보내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원수들에게 정복당하여 그들의 다스림을 받도록 허용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발견하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면 어떤 원수가 쳐들어와도 넉넉히 정복할 수 있었고, 매번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그들의 힘과 무기를 의지할 때에는 어김없이 패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내버려두셨기 때문입니다. 갈대아인들이 대군을 일으켰을 때에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자신의 힘과 도움을 전부 거두어들이시고 그들에게 패배하도록 허용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끌려갔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주신 형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바벨론으로 끌려간 일은 인류 전체에 닥칠 일을 보여주는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그 죄를 벌하십니다. 이 사실 앞에 마음껏 도전해 보십시오. 이 사실을 비웃고 하나님의 율법을 조롱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해 보십시오. 그러나 그렇게 할 때 닥칠 결과를 미리 알려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57장 21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했던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다같이 읽겠습니다.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여러분도 이 말이 사실임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저나 여러분도 악하게 살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기 방식대로 살겠다고 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평강이 있었습니까? 당연히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평강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평강을 주시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 죄를 지으면 이런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실을 성경을 통해 미리 경고하셨기 때문에 아무도 변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이 왜 이런 식으로 행동하신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을 버려두셨습니다. 그들을 내어주셨습니다. 버리셨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두심으로써 벌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제 대답은 이것입니다.
첫째는, 당신이 죄를 미워하는 거룩한 분임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벌하시는 것이 정당한 처사임을 밝히기 위해서 이렇게 하십니다. 그는 십계명과 도덕법과 산상설교를 주신 이유를 깨우치고자 하십니다. 순종하라고 하시는 이유를 깨우치고자 하십니다. 순종하지 않으면 이런 결과가 나오기 때문에 깨우치고자 하십니다. 그는 자신이 죄를 미워하고 혐오하는 거룩하신 분이심을 선포하십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둘째는,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심판을 경고하시려고 이렇게 하십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하나님이 특별하게 심판하신 사례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전부 최종적인 마지막 심판을 예고하는 사건들입니다. 하나님이 특별하게 심판하십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자신들이 어리석은 길로 갔던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이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좋은 시기를 보내다가 또 다시 예전에 타락했던 그 길로 돌아갑니다. 그러면 또 다른 심판이 임합니다. 이 같은 심판이 계속 이어집니다. 대홍수, 바벨탑, 애굽과 바벨론의 포로 됨, 주후 70년의 예루살렘 멸망이 다 그런 심판들입니다. 우리는 그 모든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런 심판이 임했을까요?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유다 백성들이 순종하지 않을 때 그 땅에서 쫓겨날 것이며, 그들의 성도 무너질 것이라고 미리 경고하셨습니다. 수백 년 전에 그 모든 것을 예언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죄에 대한 형벌로 심판이 임하고 예언이 성취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도 최후의 심판 때 일어날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주후 70년에 있을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시면서 최후의 심판 때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다시 세상에 오실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종말의 날, 하나님의 아들이 온 우주를 심판하러 다시 오실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끝까지 복음을 거부하고 반역한 자들에게 최종적으로 등을 돌리시고, 그들을 지옥의 무저갱에 던지실 것입니다. 다시는 그들을 쳐다보지 않으실 것입니다. 다시는 웃는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다시는 자비를 베풀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들은 죽지 않는 지옥에서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살아갈 것입니다. 다시는 거기에서 빠져 나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이 지옥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크고 무서운 심판의 날이 온다는 사실을 경고하시기 위해 우리를 내어주십니다. 그때가 얼마나 가까이 다가왔는지 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날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은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그날 하나님은 당신에게서 얼굴을 돌리고 거역한 사람들을 영원히 죄 가운데 버리실 것이며, 어떤 소망이나 면죄의 여지도 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는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 사랑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하시는 일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들을 깨우기 위해 애쓰십니다. 인간은 복음을 듣기는커녕 비웃으며 조롱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농담거리로 삼고, 갈보리 십자가의 거룩한 피 흘림을 모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세상이 지금 어떤 지옥을 만들고 있는지 눈을 떠서 보게 하시고자 일하십니다. 이것이 사람들을 회개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베드로도 하나님이 왜 이런 세상을 묵인하시는지 그 대답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타락한 세상을 진작에 멸망시키지 않는 이유를 베드로후서 3장 9절에서 말씀하고 있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너무 늦기 전에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이런 일들을 허용하시는 것은 당신의 무한하신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이 넘치는 호소에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버려두시는 방법을 시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버려두심이 우리를 영원한 저주에 이르게 하고자 하심이 아니라, 당신의 무한하신 사랑에서 비롯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이 엄중한 경고 앞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은 먼저 거짓과 위선을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경건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경건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있는 표현 중에 최고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예배할 때 최고로 고귀한 모습을 보인다는 점에서 경건의 회복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부분에서 잘못되는 것이야말로 무엇보다 큰 비극인 것입니다. 거짓 경건이야말로 참된 기독교에 치명적인 해악이 됩니다. 산헤드린의 비극이 바로 여기 있었습니다. 그리고 산헤드린의 비극은 오늘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문제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큰 원수는 거짓 경건입니다.
본문 42절에서 스데반은 아모스 선지자의 말을 빌어서 이렇게 반문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집이여 너희가 광야에서 사십 년간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있을 때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지 않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제사장 조직과 제사 제도가 있었고, 실제 제사도 드렸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그들이 진심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온 제물을 드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자손은 예배의 원형은 지키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정말 하나님을 예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자신들의 욕망을 채워주기 위해 매수할 수 있는 분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속일 수 있고, 우롱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스데반이 여기에서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에게 하고 있는 말이 바로 이것입니다. 위선과 거짓으로 가득한 그들의 예배는 정직하지 못했고, 마음으로는 사실상 믿지 않는 일을 하면서 일종의 이중적인 종교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시편 기자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여 우리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모든 것을 덮어 가며 손익계산서를 맞춥니다. 서로 속이기도 하고 자신을 속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우리와 같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도 다른 사람을 대하듯이 대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한 가지뿐입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하나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그를 높이며 그에게 순종하고 그를 섬기려는 순전한 소원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절반의 마음으로는 하나님과 일할 수 없습니다. 그가 원하시는 것은 전적인 충성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막 12:30).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전부를 원하십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엄중한 경고 앞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대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 방법이 무엇입니까? 베드로는 스데반 보다 앞서 그 방법을 알려주었는데, 사도행전 4장 12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으로 예배드리기를 원하십니다. 즉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만 나오라는 것입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우리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방법을 대체해 버리면 안 됩니다. 이 사실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 3장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그렇습니다. 이 복음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유일한 구원의 방법입니다.
그런데 광야의 이스라엘 자손들,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자기 방법으로 예배를 드리려고 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쫓겨나야 했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다른 복음도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통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의 피를 힘입어야 합니다. 오직 이 방법으로만 하나님의 임재 안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스데반이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을 향해, 그리고 오늘의 저와 여러분을 향해 전하는 메시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처럼 여러분의 거짓된 경건이 영원한 멸망의 원인이 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소원합니다. 너무 늦기 전에 회개하도록 부르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아직은 늦지 않았습니다. 아직은 은혜의 문이 열려 있습니다. 아직은 은혜의 때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깨끗한 마음으로 회개하고 다시 복음 앞에 서십시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으십시오.
“땅의 모든 끝이여 내게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