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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
사도행전 7:51-53
우리는 지금까지 스데반이 전한 설교의 내용을 가지고 열 시간에 걸쳐서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한 사람이 전한 설교를 가지고 이토록 많은 시간에 걸쳐서 살펴보았던 이유는 그만큼 이 설교가 갖는 의미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의 설교가 기독교 교리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은 사도 바울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을 드렸지만 스데반이 산헤드린 공회에서 설교를 하던 그곳에 바울이 된 청년 사울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스데반의 설교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었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나사렛 예수에 관한 메시지를 전하는 스데반이 처형당하는 것을 마땅히 여기면서도 그의 당당한 순교의 장면과 그가 전했던 메시지의 내용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난 이후 그는 그때 들었던 스데반의 설교 내용과 함께 그 방법론을 가지고 성경을 해석하면서 일평생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도 복음을 전하다가 로마에서 순교했습니다. 그러니까 스데반은 이 한 번의 설교를 하고 죽었지만, 그의 설교는 사도 바울에게로 이어진 것입니다. 스데반의 설교가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가 믿는 기독교 교리의 깊은 진리를 다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스데반은 자신의 설교에서 다른 어떤 내용보다도 모세의 이야기에 더 많은 강조점을 두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모세가 등장하게 된 시기를 역사에서 어느 날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하심 속에서 실현된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모세가 등장하게 된 시기를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시기가 다가왔을 때 두 가지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첫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심히 번성하게 되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왕이 애굽을 통치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박해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번성함’과 ‘박해’라는 이 두 가지의 현상 사이에는 긴장관계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에서 번성하고 잘되는 것이 악한 자들의 마음에는 몹시 거슬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담 이래로 타락한 인간이 한결같이 보여 왔던 현상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던 것도 아벨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아 자기보다 더 잘되고 번성해졌기 때문입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없애려고 했던 것도 똑같은 이유에서였습니다. 그러니까 사탄과 마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에서 잘되고 번성하는 꼴을 못 봐줍니다. 그래서 시련과 박해를 통해 끊임없이 공격합니다. 결국 바로의 핍박은 이스라엘의 어린아이를 강에 던져 죽이게 하는데서 절정에 달합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상황에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모세가 태어났습니다. 모세는 35절 하반절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언약을 이루기 위해 ‘관리와 속량하는 자’로 태어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스데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그 모세를 거부하고 대적했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사실 스데반이 산헤드린 공회에 고발을 당한 것은 모세와 그의 율법을 무시하고 비판했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자신을 고발하고 심문하는 산헤드린의 권력자들과 유대인들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은 내가 모세와 그의 율법을 무시했다고 뻔뻔스럽게 고발하고 있지만, 당신들 자신을 살펴보라!”
그리고 이 부분에서 스데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악함이 광야 40년을 지나면서 점층적으로 극도에 달했음을 증거합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를 배척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을 향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론에게 악한 것을 요구하여 우상을 만들었고, 그 우상에게 희생제물을 바치고 그 앞에서 기뻐하며 즐거워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노예된 애굽에서 이끌어내신 하나님을 외면하고 등을 돌렸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도 완악한 그들을 외면하사 얼굴을 돌리시고, 그들을 우상 섬기는 일에 내버려두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런 타락한 행위는 왕정 500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결국 아모스 선지자가 말한 대로 하나님께 드려야 할 제사를 소홀히 하고, 열정적으로 우상을 섬겼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라가 망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야만 했습니다. 이 사실을 스데반은 43절 하반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으로 옮기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러한 맥락에서 이제 스데반은 자신의 설교를 마무리하면서 아주 짧게 현실의 적용으로 들어갑니다. 사실 설교에서 중요한 것은 들었던 그 말씀을 현실의 삶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소중한 진리라고 할지라도 현실의 삶에서 적용하지 않으면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강단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받았으면 그 말씀을 현실의 삶에 적용하려고 노력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마음에 매우 심각한 부담감을 주는 무거운 짐이 될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삶에 적용하려고 노력할 때 시편 기자가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들에게 최고의 참된 만족과 기쁨을 주게 될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성도들의 행복을 위해 그들이 능히 감당할 수 있는 계명을 주시는 자비로우신 아버지이시지, 결코 지킬 수 없는 계명을 주셔서 성도들을 억압하고 가학적 쾌락을 즐기는 폭군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더 이상 계명이 무거운 것이 아니라 기쁨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사랑은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기쁨으로 행하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을 읽어보아서 그렇고, 우리가 직접 경험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사람들은 언제나 두 가지로 반응합니다.
하나는 베드로가 오순절에 설교를 했을 때 반응했던 무리들입니다. 사도행전 2장 27절에 보면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던 무리들은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겸손하게 낮아져서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물었던 것입니다. 이 자세가 바로 구원의 첫걸음입니다. 우리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자세입니다.
또 다른 반응은 오늘의 본문에서 볼 수 있듯이 스데반의 설교를 들었던 무리들입니다. 그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달려들어” 스데반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그들은 스데반이 전하는 복음의 메시지를 자신도 듣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듣지 못하게 하려고 큰 소리를 지르며 자신들의 귀를 틀어막았습니다. 이처럼 사탄과 악에 사로잡혀 있는 자들은 성령에 충만한 사람이 호소하는 말을 듣기 싫어할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거부합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자세는 저주와 멸망으로 향하는 첫걸음입니다.
우리는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이 사도들과 교회를 향해 드러냈던 폭력적인 반응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사도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나사렛 예수를 구주라고 전하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을 붙잡아 감옥에 가두기도 하고, 위협과 협박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스데반을 잡아다가 심문을 한 후에 돌로 쳐서 죽여 버립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것은 기독교의 첫 번째 순교자인 스데반이 산헤드린 앞에서 복음의 메시지를 선포했던 유명한 장면의 결론 부분입니다. 여기에는 아주 극명한 대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쪽에는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스데반이 홀로 서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스데반을 산헤드린 공회에 고발했던 많은 유대인들이 참관인으로 주시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신앙과 불신앙의 차이,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이 어떻게 본질적으로 대조되는지를 완벽하면서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양쪽 다 똑같은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에 대한 태도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스데반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 진리야말로 세상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산헤드린의 권력자들과 유대인들은 그 진리 때문에 분노에 휩싸여 이를 갈고 있으며 마음에 찔림을 받고 있습니다.
스데반의 설교를 통해서 거듭 말씀을 드렸지만, 지나간 옛 역사는 그 자체로 흥미로운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단순히 역사에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그 역사가 전하는 교훈과 메시지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하는 이유는 세상은 지금도 이 사건들이 벌어진 그때와 똑같은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 한 가지 중대한 질문이 있습니다.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은 왜 나사렛 예수를 거부했을까요? 이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질문이며, 문제입니다. 세상이 이처럼 파괴적이고 이기적이며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왜 구주와 복음을 계속해서 거절하는 것일까요? 온 세상이 복음과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살기만 하면 지금의 세상 문제나 여러분 개인의 문제는 전부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그런데도 세상과 사람들은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다른 가르침은 거의 다 신뢰하면서도 유독 이 복음만 조롱하며 거절합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오늘의 본문은 그 이유를 정확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산헤드린 권력자들의 전체적인 정신 상태와 행동을 분석해 보면 불신앙의 본질에 대한 완벽한 진술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보십시오.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은 학식이 아주 높은 거물들이었고, 나라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결코 무지몽매한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모세의 율법을 전문적으로 교육받은 자들이 많았고, 제사장 교육을 받은 자들도 있었습니다. 나아가 그들은 사회적으로 책임 있는 자리를 맡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무지하고 완악한 행동을 했습니다.
물론 기독교의 복음을 거부하는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산헤드린의 권력자들과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각기 다른 성향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을 폭력적으로 처리하는 사람도 있고, 조용히 처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실제로 평소에는 무척 조용해 보이는 사람이 예수님과 복음에 대해서는 아주 폭력적이고 악의적으로 반응하는 경우도 가끔 보게 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불신앙의 본질에 관한 원리입니다. 복음을 믿는 일과 믿지 않는 일에 대해 이상한 생각들을 가지고 있는 오늘의 시대에는 이 원리들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단지 행위의 문제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불신자는 단지 믿지 않는 쪽을 선택한 사람이고, 반대로 신자는 믿는 쪽을 선택한 사람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앙과 불신앙을 단순히 피상적으로만 이해하는 것으로써 불신앙의 본질에 대해 턱없이 부족한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불신앙의 핵심적인 본질은 무엇일까요?
첫째로, 불신앙은 단순히 사람의 행동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맺는 관계 전반에 관련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을 구분하는 기준 중에 이것보다 더 크고 깊은 것은 없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이 친히 사용하시고 사도들이 사용한 용어는 ‘새로운 출생’, ‘중생’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새로운 존재가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근본적인 일이며, 아주 깊은 차원의 일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바는 이것입니다. 처음에 인간이 하나님께 반역함으로써 불신앙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반역으로 인간은 깊은 구렁에 떨어져 버렸습니다. 타락은 인간의 존재 전반에 영향을 끼쳤고,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셨던 그 본래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었습니다. 첫 반역의 결과로 일어난 타락의 일들이 무엇인지는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이 취한 반응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세상 사람들의 진정한 문제가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사람들이 복음을 믿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기독교의 복음이 개인과 가정과 인류를 구원하는 유일한 해결책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처럼 문제의 해결책을 계속해서 무시하고 거부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대답은 그들이 죄인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죄를 지어 사탄과 마귀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들의 정신과 의지와 마음을 비롯한 존재 전반에 심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스데반이 본문 51절에서 전하는 메시지를 한 번 들어보십시오.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스데반은 지금 이 말씀을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이방인들을 향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유대인들, 모세와 율법과 성전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소위 ‘경건한 유대인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그런 자들을 향해 스데반은 먼저 이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목이 곧은 사람들아!”
여기에서 ‘목이 곧은’이라는 단어는 ‘완고하고 고집이 센’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교만하다는 의미보다는 자기 욕심과 고집으로 가득 차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순종하려 들지 않는다는 의미가 더 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당신께 등을 돌렸을 때 그들을 가리켜 “목이 곧은 백성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범죄할 때마다 그들을 향해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죄악의 길로 마음을 향하는 사람들이 바로 ‘목이 곧은 사람들’입니다. 스데반은 지금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산헤드린의 권력자들과 유대인들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목이 곧은 사람들아!”
스데반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이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에 대하여 가장 영예롭게 생각하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할례’였습니다. 할례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써 하나님께로부터 선택된 백성임을 상징하는 표지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방인들을 일컬을 때 ‘할례 없는 자’라고 하면서 업신여겼습니다. 유대인은 할례를 받고 이방인은 할례를 받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는 선택된 백성이고, 너희들은 저주받은 백성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산헤드린의 권력자들과 유대인들을 향해 스데반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들은 스스로 할례를 받은 유대인이라고 자부하지만 마음과 귀는 할례를 받지 못했다. 너희는 육에 속한 자들, 불신자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이방인들처럼 생각하며 행동하고 있다. 너희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랑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사랑하는 여러분, 스데반의 이 말을 듣고 있던 산헤드린의 권력자들과 유대인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자신들은 할례 받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라는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그들에게는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격분해서 스데반에게 달려들었고 돌로 쳐서 죽였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스데반의 지적은 사실이었습니다. 당시 산헤드린의 권력자들과 유대인들은 외적으로는 할례를 받았을지라도 내적으로는 할례 없는 이방인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의 할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마음은 항상 죄의 정욕으로 가득 차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둔감했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귀에 할례’도 받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전하는 말도, 그리고 수많은 선지자들을 통해 전하는 말씀도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끝내는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 예수님께서 자기 땅에 오셔서 말씀을 전하셨음에도 귀를 막고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전하는 말씀이 듣기 싫다고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렸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똑같은 이유로 스데반을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경향은 이스라엘 조상들이나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 그리고 스데반을 죽였던 산헤드린의 권력자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늘의 사람들도 똑같이 그렇게 행동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마음에 정욕으로 가득 차서 영혼을 살리고, 부패하고 타락한 세상을 구원할 유일한 길인 복음의 메시지를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듣지 않을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핍박하고 대적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원리는 인간이 타락하고 죄를 지은 결과,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절하는 이유도 그 상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귀도 할례를 받지 못했고, 마음도 할례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 상태에서 그들은 복음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로마서 2장 2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앞 절에서 사도 바울은 겉모양으로 유대인이라고 해서 유대인이 아니요, 겉모양으로 살갗에 할례를 받았다고 해서 할례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육신의 할례는 아무 의미가 없으며 마음의 할례만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분명히 율법을 지닌 유대인이었지만 실제로는 율법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외면적으로는 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므로 모세의 제자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지옥판결을 피할 수 없는 진노의 자식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이 ‘마음의 할례’에 대해 예레미야 선지자는 ‘마음 가죽을 베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마음을 찢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가슴에 피가 철철 흐를 정도로 우리의 마음이 통회하고 자복하는 마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귀에 할례를 받아야 하며, 마음에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근본적인 수술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복음의 진리를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스데반이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에 대해 하는 말, 그리고 바울이 모든 육에 속한 사람들에 대해 하는 말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 이유는 영적인 이해력 자체가 그들에게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영적인 능력이 있어야 영적인 일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소통의 영이 없는 사람은 결코 영적인 일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의 도가 그저 미련하고 어리석게만 여겨질 뿐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 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여기 ‘육에 속한 사람’은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이들은 타락이 얼마나 파괴적인 것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타락은 사람들의 정신에 중대한 영향을 끼쳐서 하나님께 속한 것과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타락은 종국적으로 자신만 아니라 가정과 사회를 파괴합니다.
둘째로, 불신앙은 사람을 맹목적인 존재로 만듭니다.
본문 52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스데반은 중생하지 못한 자들의 맹목성과 불신자들의 무능함, 그리고 바로 앞에 주어진 진리도 보지 못하는 실상을 이렇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진리가 눈앞에 있어도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불신자들에게는 믿는 일이 허락되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맹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이 믿지 않는 데는 딱히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무조건 싫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분명히 개인과 가정과 사회를 구원합니다. 복음 외에 다른 길과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을 받고자 한다면 모든 사람은 복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럼에도 세상 사람들은 이 놀라운 구원의 복음을 거부합니다. 그들이 복음을 거부하는 이유가 딱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무조건 거부합니다. 그들은 목이 뻣뻣합니다. 완고합니다. 불신자들의 문제점은 그들에게 들을 능력이 없을 뿐 아니라 들을 마음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듣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적극적인 태도로, 아예 저항할 작정을 하고 접근합니다. 한 마디로 불신앙은 맹목적이며, 무모합니다. 완전히 감정적입니다. 그들은 처음에 진리를 대하면 짜증 같은 것이 나면서 전체적으로 불쾌감이 생깁니다. 그래서 비웃고 조롱하면서 대적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불신앙은 단순히 믿지 않는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불신앙은 다음의 세 가지의 적극적인 행동으로 대적합니다.
첫째로, 불신앙은 성령을 거스려 행합니다.
구약의 많은 참된 선지자들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의로우신 메시아가 오실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예언을 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유대인들은 메시아의 도래를 예언하면서 의롭게 살라고 촉구했던 선지자들을 잡아 죽이는 악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이사야 선지자는 톱으로 잘려 죽었고, 예레미야 선지자는 애굽으로 끌려가 돌에 맞아 죽었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성령을 거스려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있던 산헤드린의 권력자들과 유대인들도 그들의 조상들과 똑같이 성령을 거스르고 있습니다.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슬러.” 지금 산헤드린의 권력자들과 유대인들이 들은 스데반의 메시지는 성령의 능력과 나타남이 있는 설교였습니다. 앞서 사도행전 6장 8절에 보면,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의 말에 대답할 수가 없었고, 한마디도 반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말하는 내용에 아무런 대꾸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성령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이런 반응에 대해서는 우리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무언가가 자신의 마음과 영을 뒤흔드는 것, 진리가 불가항력적으로 다가오는 것, 자신이 그 영향 아래에 있는 것을 느낀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영향을 받고 싶지 않아서 눈을 감고 다른 생각을 한다든가, 아니면 성경책을 집어 들고 이리저리 들추어봅니다. 성령의 감동하심을 고의적으로 외면해 버리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할까요? 마귀의 노예로 사로잡혀 있는 그의 의지가 하나님께 반발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그들은 완악하여 성령의 역사를 끝까지 거스르고 대적합니다.
둘째로, 불신앙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거스려 행합니다.
성령을 거스리는 사람들은 나아가 하나님의 율법 자체를 고의적으로 왜곡하게 만듭니다. 본문 53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이것은 구약성경의 이야기입니다. 타락한 이스라엘 자손들은 대체로 거짓 선지자들을 더 좋아했고, 참된 선지자들은 멀리하고 핍박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거짓 선지자들은 항상 듣기에 좋은 예언을 해 주었습니다. 가볍고 쉬운 말만 해 주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거짓 선지자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는데, 예레미야 6장 14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본문에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무자격 의료 행위를 하는 사이비 의사의 비유를 통해 거짓 선지자들이 얼마나 거짓과 탐욕에 빠져 있는가를 폭로하고 있습니다. 타락한 거짓 선지자들은 마치 자격이 없는 의사가 중환자의 상처를 건성으로 치료하는 것처럼, 백성들의 영적인 아픔과 신음소리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갖은 감언이설로 그들을 미혹했습니다. 사실 거짓 선지자들도 여호와의 율법을 잘 알고 있었으며, 거짓과 탐욕으로 썩어버린 그 백성들 위에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와 심판이 쏟아질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자신들도 거짓과 탐욕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그 백성들의 죄악을 지적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거짓 선지자들은 듣기 좋은 말로 그들을 위로하고 안심시키기에 분주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백성들이 그런 거짓된 소리를 더 듣고 싶어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악된 행위를 분석하고 정죄하면서 실상을 폭로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참된 선지자들에게 “그런 소리를 하지 말라”고 위협하고 핍박했을 뿐 아니라 죽이기도 했습니다. 온 나라가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전하는 메시지를 보지 못했고, 매번 그 메시지에 저항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괜히 그렇게 행동한 것이 아닙니다. 눈이 멀었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한 것입니다. 그래서 거짓 선지자들은 언제나 백성들을 향해 ‘샬롬, 샬롬’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렇지만 예레미야 선지자가 보았을 때 그 어느 곳에도 참된 ‘샬롬’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다가오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의 날을 피할 수 없게 하는 심각한 죄악만 가득할 뿐이었습니다.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바리새인들이 이런 짓을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회피했고, 자신들에게 맞게 비틀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자랑하고 칭송하면서도 그 율법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아주 고의적으로 그렇게 했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위선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행동은 오늘날에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오늘의 현대인들도 자신들이 듣고 싶어 하는 소리만을 들으려고 합니다. 설교자가 강단에서 죄와 불의와 불륜을 지적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합니다. 예레미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참된 평강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평강하다”고 외쳐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이러한 자세는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의 심판을 향해 달려가는 길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셋째로, 불신앙은 의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스려 행합니다.
스데반은 계속해서 산헤드린 권력자들이 범했던 엄청나게 심각한 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스데반은 의인이 오시리라고 예언한 참된 선지자들을 죽인 조상들을 언급한데 이어, 현재의 산헤드린의 권력자들과 유대인들이 ‘그 의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다고 직설적으로 고발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상하지 않습니까?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은 과거 선지자들의 기록을 가지고 있는 학식 있고 경건한 자들입니다. 그 기록을 연구하고 그 기록에 관심을 기울이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은 나사렛 예수가 구약의 선지자들이 전했던 모든 예언의 성취라는 사실을 완전히 놓쳐 버렸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은 실제로 그를 보고 그의 말을 듣고, 그가 행하신 기적을 보았으면서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사도 요한이 증언한데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 사람, 이 목수” 밖에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든 인간은 아담의 원죄를 다 물려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고난 상태 그대로는 결코 하나님의 성령이 하시는 일들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본성은 뒤틀려 있고, 왜곡되어 있으며, 타락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는 ‘허물과 죄’로 죽었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저와 여러분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믿음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이 드러내고 있는 불신앙을 보십시오. 그런 불신앙이 저와 여러분 속에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이나 유대인들과 같은 길을 걷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여러분을 그 불신앙에서 끌어내시고 건져내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앙망하십시오. 통회하는 마음으로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부르짖으십시오. 그리하면 주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성령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진리가 눈에 들어올 것입니다. 여러분의 귀가 즐겁게 그 소리를 들을 것이고, 여러분의 마음이 기쁘게 그것을 믿으며, 그때부터 간절한 순종의 의지가 생길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리게 될 것이며, 그의 영광과 찬송을 위해 남은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를 믿는다고 외적으로 드러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를 마음의 중심에 모시고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속사람이 새롭게 변화된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스데반의 설교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믿음의 반응입니다.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귀와 마음에 할례를 받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믿음으로 반응하여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