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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를 받아 흩어지는 성도들!
사도행전 8:1-4
기독교의 신앙과 가르침은 인간들의 상상이나 깊은 철학적 사고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신앙과 가르침은 철저히 역사적 사건과 사실 및 행위의 결과물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이 책의 이름은 ‘사도행전’입니다. 말 그대로 사도들이 행한 일을 기록한 책입니다. 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을 기록한 책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사도행전에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는데 주도적인 일을 감당했던 것은 사도들이지만, 그들을 통해 행동하신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책을 ‘사도행전’보다는 ‘예수행전’, 혹은 ‘성령행전’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교회가 어떻게 생겨났으며, 초기에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를 알아보았습니다. 특별히 사도행전은 1장 8절의 말씀이 성취되어 가는 과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주신 지상 대명령에 따라 복음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전파되어 가는 모든 과정을 차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사람들의 깊은 묵상이나 철학적 사고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이 세상에서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들의 결과물로 생겨난 곳입니다. 역사를 배제하면 교회를 이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아예 교회 자체가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보십시오. 초대 예루살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리고 그들이 전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초기 사도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전한 중대한 메시지는 나사렛 예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사도들은 나사렛 예수에 관한 메시지를 전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산헤드린의 권력자들로부터 위협을 받기도 했습니다.
당시에는 여러 가지 사회적인 문제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로마에 정복당한 유대인들은 나라가 없었습니다. 자부심이 강한 민족은 정복당하고 싶어 하지 않는 법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라는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은 할례 받은 자들이고, 이방인들은 할례를 받지 못한 자들이라며 이방인들을 멸시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무시하고 멸시했던 이방인인 로마에 정복당했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통치를 받았고, 그 사실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복음을 전하러 다니던 사도들은 이러한 당시의 정치 사회적인 상황을 다루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직 나사렛 예수만을 전했습니다.
사도행전 1장부터 7장까지 살펴보았던 우리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부터 7장까지, 아니 사도행전 전체를 읽어보십시오. 거기에는 로마의 폭정이나 속박에 대한 언급이 단 한 마디도 다루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정치적인 사안도 전혀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전부 나사렛 예수에 관한 메시지뿐이었습니다. 사복음서도 나사렛 예수만 이야기하고 있고, 사도행전도 여전히 나사렛 예수에 대한 이야기만 하고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 갈릴리에 살았던 이 특별한 인물은 수년간 목수로 일하다가 나이 서른에 갑자기 등장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메시지를 선포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기이하기 짝이 없는 일들도 행했습니다. 기적을 일으켰고, 거센 폭풍을 잠재웠으며, 죽은 자를 살려냈고, 시각장애인의 눈을 뜨게 해 주었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는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놀라운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죄만 없으실 뿐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었을 뿐 아니라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분이셨습니다. 사도들과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그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어느 영웅들의 죽음과 같은 그런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마지막은 차마 입으로 올려놓고 말하기가 민망할 정도로 비참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사도들과 그리스도인들은 그가 어떻게 나무에 못 박혀 죽으셨는지, 어떻게 그의 시신이 내려져 무덤에 장사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자신들이 그 모든 일을 목격했는지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이야기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제사장과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이 어떻게 돌을 굴려 무덤을 막고 로마 군인들을 세워 무덤을 지켰는지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처참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던 그가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대제사장과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이 로마 군인들을 앞세워서 만반의 사전 대책을 다 세워놓았는데도 무덤은 텅 비어 버렸습니다. 나사렛 예수! 죽으신지 삼일 만에 부활하신 그는 사도들에게 나타나셨고, 사도들은 그가 육신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나사렛 예수와 그의 몸의 부활! 이것이 바로 사도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전했던 메시지였습니다. 그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몸의 부활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가 온 인류를 구원할 유일한 구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선포했습니다.
물론 사도행전 2장에는 오순절 날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특별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여기 다락방에 모여 있던 평범한 사람들과 어부들로 이루어진 무리들, 그들 가운데는 교양과 학식을 갖춘 자들이나 세상에서 인정받는 자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산헤드린의 권력자들은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배운 것이 없는 천한 사람으로 취급당할 정도로 그들의 출신과 신분은 미천했습니다.
그런데 오순절 날 그들에게 놀라운 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성령이 그들 가운데 임하신 것입니다. 다락방에 모였던 그들 모두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 사건으로 그들은 완전히 변화되었고 달라졌습니다. 그들은 생각하는 것과 바라보는 가치관이 이전과는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들의 심령 깊은 곳에서는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활기와 즐거움이 넘쳐 났습니다. 얼굴에서는 광채가 났고, 입에서는 전에 몰랐던 언어가 흘러나왔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각각 자신들의 말과 방언으로 그들의 말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이 주시하는 참으로 진기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무리가 모여서 사도들이 전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들 중에 한 사람이었던 어부 출신의 베드로가 일어나 놀라운 권위와 능력을 가지고 설교를 했을 때, 그 메시지를 들었던 무리들은 자신들의 어리석음과 무지함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는 사실을 후회하며 고통스러운 탄식을 쏟아냈습니다. 그들은 자신과 자신의 영혼에 대한 번민에 휩싸여 소리쳤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그러자 베드로가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사람들은 베드로의 말에 순종하여 세례를 받았고, 그날에만 3천명이 교회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몸만 교회 안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서로 교제하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썼습니다. 그 결과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초대 예루살렘 교회가 세워진 이야기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스데반의 순교로 예루살렘 교회에 불어 닥친 박해로 인해 일어난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스데반의 순교와 예루살렘 교회에 미친 박해로 기독교와 교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첫째로, 교회와 복음이 세계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사도행전 8장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모든 사건이 예루살렘 성 안에서만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제자들에게 대명령을 위임하시면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순절의 성령 충만함을 경험한 예루살렘 교회는 수만명의 성도들이 모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여전히 예루살렘에만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마리아는커녕 유대 지역으로 나아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이 순교를 당하고, 8장이 시작되면서 새로운 국면이 펼쳐집니다. 우리는 8장부터 교회가 유대와 사마리아 전역으로 퍼져나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후반부에 나오듯이 계속해서 더 멀리, 그 당시 문명세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그리스와 로마를 비롯하여 스페인까지 전해집니다. 지중해 주변의 모든 나라들이 이 메시지를 듣게 되었을 뿐 아니라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모든 나라에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고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교회가 전 세계 모든 나라에 퍼져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 모든 일의 시작이 바로 여기에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이처럼 은혜가 넘치는 일들만 있었던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산헤드린의 권력자들과 유대교를 중심으로 꾸준히 세력을 모으고 있었던 그 폭풍은 이제 매우 세차게 불기 시작합니다.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던 스데반의 영광스러운 환상은 결국 사탄과 마귀들의 세력에 사로잡힌 무리들의 감정을 폭발시킵니다. 격분한 그들은 자신들의 겉옷을 사울의 발 앞에 두고 스데반을 성 밖으로 끌고 나가 돌로 쳐 죽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의 사건을 중심으로 예루살렘 교회가 급속히 성장하면서 처음에는 수세적 입장을 취하던 산헤드린의 권력자들과 유대교는 스데반을 죽이는 것을 신호로 이제 적극적으로 예루살렘 교회에 대하여 대대적인 박해를 가하기 시작합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 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잡혀가고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 결과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유대교의 이와 같은 극심한 박해를 피해 유대와 사마리아로, 그리고 근방 지역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사도행전 8장은 이러한 맥락에서 기독교의 복음이 예루살렘을 벗어나서 어떻게 사마리아와 여러 지역으로 전파되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실 유대교의 적극적인 박해는 교회와 성도들의 입장에서 보면 분명히 큰 시련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임한 유대교의 대대적인 박해의 광풍은 교회의 존립마저 위태롭게 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역사적 사실에서 깨닫게 되는 것은 유대교의 박해는 결과적으로 복음의 불꽃을 사방으로 확산시키는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흩어진 성도들 중에는 당시 세계 공용어로 통용되던 헬라어를 쓰는 헬라파 성도들이 많았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사마리아뿐만 아니라 이방 세계인 안디옥에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했으며, 그곳에 이방인의 첫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러니까 표면적으로는 산헤드린의 권력자들과 유대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박해가 시작되었지만, 그 배후에는 복음을 땅 끝까지 확산시키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예루살렘이라는 좁은 지역적 틀에서 벗어나 마침내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전기를 맞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스데반의 순교를 통해 기독교가 어떻게 이방 세계에까지 전해지게 되었는지 그 역사를 보게 되는데, 본문 1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본문은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예루살렘에서 쫓겨나 유대와 사마리아 여러 지역으로 흩어진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교회가 사라졌습니까? 아닙니다. 흩어진 성도들은 마치 흩어진 불꽃처럼 가는 곳마다 복음의 불꽃을 일으켰습니다. 여러 지역으로 흩어진 성도들이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움으로써 예루살렘에만 머물던 복음이 온 세계로 확산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꺼지지 않는 불꽃과 같습니다.
여러분은 불의 위력과 성질을 잘 아실 것입니다. 불은 처음에는 아주 작게 일어나지만 큰 바람을 만나면 온 산들을 잿더미로 만드는 위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타는 불꽃을 툭 치면 그 불똥이 여기저기로 튀어 여러 곳에서 또 다른 불길을 일으킵니다. 산헤드린의 권력자들과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교회를 쳤으나 예루살렘 교회에 불타고 있던 복음의 불씨들이 사마리아와 온 땅으로 흩어지게 된 것입니다.
불꽃은 칠수록 더 번집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핍박을 받으면 일시적으로는 위축되어도 나중에는 더 크게 확산됩니다. 세상이 교회를 핍박하면 교회는 수많은 불씨가 되어 다른 곳으로 퍼져나가서 그곳에서 또 다른 복음의 불길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역사가 말해 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깨달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저와 여러분이 바로 불길들 가운데 한 불꽃들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가는 곳, 내가 사는 곳에 복음의 불꽃이 타오르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박해를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지 않음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둘째로, 성도들은 박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본문의 1절은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산헤드린의 권력자들과 유대교는 스데반을 처형시킨 것을 기점으로 예루살렘 교회를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박해를 피해 예루살렘을 떠나 다른 낯선 곳으로 피신을 해야만 했습니다.
당시 박해가 어느 정도였는가에 대해 본문 3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여기에서 ‘잔멸하다’는 말을 헬라 원문대로 살펴보면 그 뜻이 재미있습니다. ‘잔멸하다’는 말은 “멧돼지가 포도원을 짓밟는다” 라는 뜻입니다. 멧돼지가 포도원에 들어가서 마구 닥치는 대로 짓밟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포도원을 망치고 마는 것입니다. 바로 사울이 미친 멧돼지처럼 교회를 핍박했다는 것입니다. 닥치는 대로 교인을 잡아들이고, 닥치는 대로 죽이려 했습니다. 아주 악랄했습니다. 이것은 사울이 하나님의 교회에 대해 얼마나 살기등등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울은 대제사장으로부터 교회를 잔멸할 임무와 권세를 부여받아 성도가 보이는 족족 체포하여 투옥시켰습니다. 훗날 사도 바울은 자신이 성도들을 체포했을 뿐만 아니라 죽이기도 했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단자들은 재산을 몰수하고, 유대교 공동체에서 추방했으며, 사형에 처하기도 하였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 전의 사울은 교회를 잔멸하는데 선봉자 역할을 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의도는 분명했습니다. 그것은 교회를 완전히 말살하는 것이었는데, 그 양상은 멧돼지가 포도원을 짓밟듯이 교회를 짓밟고 온통 못쓰게 만드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큰 위기를 맞았습니다. 성도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다 빼앗기고,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유대교인들의 눈에 띄면 체포 구금을 당하고, 사형까지 당하는 위기를 맞은 것입니다. 그야말로 교회는 잔멸의 위기에 놓였습니다.
사실 오순절 성령 강림의 사건을 통해 교회가 세워졌지만, 대부분의 성도들은 고난을 경험해 보지를 못했습니다. 그들은 매일 모이기를 힘쓰며 떡을 떼고, 마치 천국과 같은 행복한 시간들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이 순교를 당한 이후 예루살렘 교회에는 극심한 고난과 박해가 휘몰아쳤습니다. 그들은 그동안 말로만 전해 들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온 몸으로 직접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을 깊이 알게 되었고, 또 그 고난에 동참하는 성도들이 된 것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고난을 모르고, 그 고난에 동참하지 않은 교회는 아주 미숙한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난 받는 것을 회피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재산을 다 빼앗기고, 도피자의 처지에 놓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때문에 능욕 받고 고난당하는 것을 영광이라고 생각하며 기뻐했습니다.
셋째로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극심한 박해로 인해 고향과 집에서 쫓겨났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보다 안전한 곳으로 가서 숨어 지냅니다. 그런데 여기 박해를 피해 흩어진 사람들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본문 4절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여기에서 ‘그 흩어진 사람들’은 스데반이 순교를 당한 이후 시작된 박해로 인해 고향과 집에서 쫓겨나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박해를 피해 보다 더 안전한 어떤 곳에 숨어버린 것이 아니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여러 지역으로 두루 다녔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정치적 망명자들이 아닙니다. 이들은 흉악한 죄를 지은 자들도 아닙니다. 이들이 오랫동안 터전을 잡고 살아왔던 예루살렘과 집에서 쫓겨난 것은 단지 나사렛 예수를 믿었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다른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박해를 받고 흩어져 두루 다니며 한 일은 자신들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신세를 한탄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당당하게 가는 곳마다 복음의 말씀을 전파했습니다. 특히 누가는 본문에서 ‘흩어진 사람들’이라는 단어를 ‘씨를 뿌리다’는 의미의 단어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원어적 의미로 볼 때 ‘이 흩어진 사람들’은 마치 농부가 씨앗을 뿌리듯이 그렇게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극심한 박해로 인하여 예루살렘을 떠나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지역으로 흩어졌던 이들은 씨앗과 같이 복음의 씨를 뿌렸습니다.
본문 4절을 자세히 보십시오. 사도들과 교회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습니다. 따라서 흩어진 사람들은 사도가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선택된 집사도 아니었고, 선지자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이름 없는 평범한 교인에 불과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흩어져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에 의해 복음이 멀리 퍼져나가는 촉진제가 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주님이 명령하신 그 뜻을 실현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바, 최소한 이들은 성경에 대해 박식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오순절 성령 강림의 사건 이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극심한 박해를 받고 터전을 잡고 살아왔던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렇지만 이 사람들은 절망하거나 전혀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여러 지역으로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은 특별한 훈련과 교양과 교육을 거친 사람들만이 알아듣고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말씀은 보통 사람들도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고, 또 누구에게나 전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들은 고난으로 낙심하거나 절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기회로 만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흩어진 사람들이 자기 체험만 이야기하며 다니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기독교 신앙에는 자기 체험도 중요합니다. 기독교는 분명히 체험을 바탕으로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이야기를 한 마디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저 복음의 말씀을 전했다고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들이 당한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이렇게 만든 그분, 나사렛 예수만을 전한 것입니다. 그들은 도피자처럼 흩어지면서도 만나는 사람들에게 “보십시오. 우리는 아주 행복합니다. 당신도 행복해지고 싶습니까? 그 방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라고 하면서 자기 체험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과거에는 저러했는데 지금은 이러하다고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성경은 결코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점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가 이런 방식으로 전파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어떤 의미에서 이런 것이 곧 기독교의 메시지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여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 즉 기독교 메시지와 오늘날 세상에서 인기를 누리고 있는 이단들의 본질적인 차이를 참으로 알고 싶다면 이 점부터 알아야 합니다. 이단에 빠진 사람들은 항상 자기 이야기와 자기 체험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본문에 나오는 박해를 받아 흩어지는 성도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말씀만을 전했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인 됨의 신분은 자기 체험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분은 말씀에 달려 있으며, 진리에 달려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에 대한 이야기 대신 주님에 대한 사실들을 이야기했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그들은 오직 “예수와 몸의 부활”을 전했습니다.
물론 기독교 신앙에서 체험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입니다. 나와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의 체험, 성령의 충만한 체험 …. 우리에게는 이러한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자신의 체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하는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전해야 할 복음은 우리의 체험이 아니라 그 체험이 있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가정과 온 인류를 구원할 유일한 구원자가 되신다는 복음의 말씀입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들에게도 분명히 체험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체험 때문에 기꺼이 고난을 받을 준비도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체험을 부인하느니 차라리 박해를 받고 집에서 쫓겨나는 쪽을 택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졌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의 체험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이야기한 것은 자신들을 이렇게 만든 그것, 바로 복음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동일하게 오늘의 저와 여러분이 전해야 하는 것도 바로 ‘복음의 말씀’인 줄로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런데 누가는 흩어진 성도들이 전했던 복음을 다른 어떤 복음이 아니라 ‘그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영어성경에서는 “the word”라고 번역했습니다. 여기에서 ‘the’는 테두리를 정해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이나 판단에 따라 아무렇게나 전한 것이 아니라, 복음의 ‘그 말씀’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주셨던 특정한 말씀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두루 다니며 전한 말은 너무나도 분명하고, 확실했습니다. “복음의 그 말씀!” 바로 ‘그 말씀’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과 심지어 교회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조차 심각한 문제는 기독교 복음의 메시지를 수많은 가르침들 가운데 하나쯤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기독교는 결코 진리를 찾아, 그 진리를 추구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그것은 기독교의 본질을 전혀 모를 뿐 아니라, 기독교를 우습게 만드는 주장입니다. 기독교는 사람들로 하여금 결코 알지 못하는 진리를 찾아 순례하게 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친히 계시로 주신 ‘그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진리를 찾아 방황할 필요가 없습니다. 구원에 이르는 길을 몰라서 절망할 이유도 없습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바로 여기 있습니다. “두루 다니며 복음의 ‘그 말씀’을 전할새.”
보십시오. 그들은 아무것도 찾지 않았습니다. 단지 자신들이 들었고 받은 것을 알려주었을 뿐입니다. 그들은 진리를 추구하는 탐험가가 아니었습니다. 이미 목적지에 다다른 사람들이었고, 자신들이 무엇을 찾았는지를 정확히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은 곳곳에서 이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교회는 진리를 추구하는 곳이 아닙니다. 진리는 이미 주어졌습니다. 누구든지 그 진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따라서 교회는 진리를 전파하는 곳이며, 진리를 선포하는 곳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 곳은 그곳이 어떤 곳이든, 얼마나 오래된 곳이든 교회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약성경은 전혀 모호하지 않습니다. 절대적으로 확실합니다. 확신 그 자체입니다. 사도 바울은 위험한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지 말 것을 계속해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런 가르침들은 이단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주 강한 언어로 아무런 주저 없이 그렇게 말합니다. 그가 다른 복음을 좇는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뭐라고 썼는지 한 번 들어보십시오. 갈라디아서 1장 8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지어 하늘에서 온 천사라 할지라도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복음을 왜곡시키는 것이 그만큼 무서운 범죄 행위가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복음을 왜곡시키는 것은 사실상 인간이 할 수 있는 그 어떤 범죄 행위보다도 하나님을 더욱 진노케 하는 가장 무서운 범죄 행위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왜곡시키는 것은 피해자들에게 살인과는 비교도 될 수 없는 커다란 해를 입히기 때문입니다. 즉 왜곡된 복음을 믿는 자들은 육체적 생명보다도 훨씬 소중한 영적인 생명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영생을 잃어버리고 지옥에 떨어져서 영원토록 고통을 받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잊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의 복음’은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일 뿐입니다. 복음에는 어떤 타협이나 양보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 곧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더하거나 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전한 복음대로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딤후 2:8). 바울이 전한 복음은 바로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체험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과 관련된 사실을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성경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항상 견지하는 태도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이 점에서는 분명해야 합니다. 복음 앞에서는 결코 양보가 있을 수 없습니다.
만약 이처럼 양보 없는 복음이 없었다면 저는 이 강단에 서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직 이것만이 여러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이 없었다면 저는 이 강단에 서지 못했을 것입니다. 저는 저의 소망이나 두려움이나 어떤 기대를 이야기하려고 이 자리에 선 것이 아닙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 저의 체험이 아닌 이 복음의 말씀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에 이 자리에 서서 여러분에게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4절을 이렇게 번역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소문낼새(gossiping).” 그러니까 여기에서 전했다는 것은 저처럼 강단에 서서 전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흩어진 성도들은 낯선 지역을 찾아갔고, 그곳 사람들을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자신들이 믿는 이 놀라운 메시지, 자신들이 박해를 받으면서도 포기할 수 없었던 이 메시지에 대한 말을 꺼냈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본질적으로 기독교와 교회가 전하는 복음의 메시지는 누구나 전할 수 있는 너무나 쉬운 메시지라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복음의 영광이 있습니다. 복음은 어린아이나 무식한 사람들도 전할 수 있고, 또 그들을 쉽게 구원할 수 있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기독교의 메시지는 ‘우리를 구원하는 자 예수 그리스도’를 소문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능히 우리를 죄와 악과 사탄의 속박과 종살이로부터 건져내실 수 있다는 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변화시켜 새 마음과 새 생명과 새 소망을 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능력을 주셔서 넉넉히 이기게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를 구별하여 부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장차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믿는 자들을 전부 모으실 때 주실 영광을 예비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도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날에는 그 나라가 눈에 보이게 외적으로 나타날 것이며, 온 우주를 뒤덮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루살렘 교회에 박해로 흩어졌던 성도들이 유대와 사마리아와 여러 지역으로 다니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소문을 냈던 것이 바로 이 복음의 그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은 마음을 열고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의 저와 여러분이 먼저 해야 하는 것은 오직 복음의 그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흩어진 성도들과 같이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의 그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소문을 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그 말씀을 붙잡고, 그 말씀을 전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 가는 일에 귀하게 쓰임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