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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넬료의 가정에 임하신 성령의 역사
사도행전 10:44-48
우리는 지난해부터 계속해서 사도행전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올 한해도 사도행전의 이야기는 계속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과 우리가 섬기는 교회에도 사도행전의 역사가 계속되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앞서 여러 차례 말씀을 드렸듯이 사도행전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분부하신 1장 8절의 말씀이 한 단계씩 확장되어져 가는 역사적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제자들이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유일한 구원자라는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면서 예루살렘 교회는 시작이 됩니다. 120여명으로 시작했던 예루살렘 교회는 삼천명, 오천명, 그리고 숫자를 헤아릴 수 없는 허다한 무리들이 주께로 돌아오면서 짧은 시간에 엄청난 부흥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놀랍게 부흥했던 예루살렘 교회가 사도행전 6장에서 성장을 멈추더니 내적인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7장에 들어서면서 스데반이 순교를 당하는 사건을 시작으로 교회 공동체는 그야말로 쑥대밭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도를 전하는 것을 싫어했던 권력자들과 폭도들에 의한 박해로 교인들은 유대와 사마리아와 모든 땅으로 뿔뿔이 흩어져야만 했습니다. 허다한 무리들로 넘쳐 났던 예루살렘 교회는 황폐화가 된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보았을 때 예루살렘 교회와 복음의 미래는 결코 장담할 수가 없는 암울한 지경이 되었습니다. 권력자들과 폭도들은 교회가 완전히 끝장났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무덤에 묻히셨을 때 예루살렘의 권력자들과 무리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쾌재를 부르며 대단히 만족했을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의 도를 전하는 저들 교회는 이제 완전히 끝났다!”
그러나 교회와 복음의 이야기는 그렇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마치 농부가 씨를 뿌리듯이 흩어지면서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했습니다. 타오르는 불씨를 들고 전하는 성도들로 인해 복음은 더 뜨겁게, 더 넓게 확장되고 있었습니다. 8장부터 10장에 있는 사건들은 이 사실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는 우리를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로 안내하고, 그곳에서 개종한 사마리아인들과 에디오피아의 내시인 구스인을 만나게 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욥바를 거쳐 이방인 로마의 군인과 만나도록 해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교회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교회의 위대함입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세상은 다 끝났다고 선언하는 그 순간에 하나님의 교회는 다시 분연히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은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를 아무것도 없는데서 창조해 내고, 성령의 권능으로 매 세대마다 새롭게 창조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세상에서 가혹한 시련과 핍박을 받아도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럴수록 그리스도인들은 능력 주시는 하나님 안에서 더욱 강하고 담대해집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맡겨져 있으며,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는 우리들만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교회의 역사는 곧 하나님의 역사요,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곧 우리 주님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지금도 교회와 그의 백성들을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누가는 이러한 사실을 우리들에게 계속해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는 복음이 이방 세계로 전파되는 것에 대해 제자들이 불편해 했다는 사실을 여지없이 고발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예루살렘을 벗어나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복음은 오직 예루살렘과 유대인들에게만 주어진 것이라는 민족주의적 틀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지만 유대주의적 사고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가는 베드로가 가이사랴의 이방인 고넬료의 집으로 오는 것을 꺼려했다는 사실을 조금도 감추려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실 베드로와 유대인 일행들이 고넬료가 보낸 이방인들과 함께 가이사랴 고넬료의 집에까지 오는 동안의 여행이 얼마나 지루하고 고통스러웠을런지에 대해서 우리는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결코 함께 할 수 없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밤을 새워서 함께 걸어가고 있는 모습은 너무나도 부자연스러운 행동이었습니다. 캄캄한 밤길을 걸어가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어쩌면 그들의 마음의 상태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베드로가 욥바에서 보았던 환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여전히 알 수 없는 수수께끼였습니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이 음식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사람을 가리키는지 ….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의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베드로가 고넬료를 만나고, 그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모든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깨끗하지 아니한’ 음식뿐만 아니라, ‘깨끗하지 아니한’ 사람, 즉 누가 거룩한 공동체의 식탁에 앉을 사람들인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어떠한 차별이나 편견이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를 행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거룩한 식탁에 참여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엄청난 사실을 깨닫게 된 베드로는 자신이 이방인 고넬료의 가정에 방문하게 된 일들에 대한 복음적인 정당성을 선언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크게 두 가지의 내용을 선언합니다.
그것은 먼저,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심을 깨달았도다”라는 선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이 현재 가지고 있는 재물이나 명예나 외모를 보시고 편애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판단하시는 유일한 기준은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신명기 26장 5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백했듯이 “떠돌아다니며 사는 아람 사람”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시리아 출신의 난민이었습니다. 지금의 난민은 국제법에 의해 보호라도 받지만 당시에는 어떤 보호도 받을 수 없었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이었습니다. 더구나 그는 하나님께 선택되어 믿음의 조상이 될 만한 특별한 자질을 갖춘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한 가지 칭찬할 만한 조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경외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어떠한 명령을 내리시든지 간에 기꺼이 그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그에게 고향과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 당신이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셨을 때 그의 나이가 고령이고 갈 바를 알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명령에 전적으로 순종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100세가 되어 낳은 독자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명하셨을 때에도 그는 한 마디의 원망이나 불평도 없이 묵묵히 그 일에 순종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부족한 것들이 많았지만 믿음 하나만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믿음으로 조상으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시고 부르실 때, 하나님의 판단 기준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느냐, 우리가 얼마나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랑하느냐?” 하는 것을 보시고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시고 부르십니다. 잊지 마십시오. 비록 오래 교회에 다녔다고 할지라도, 교회에 아무리 헌금을 했다고 할지라도 그에게 진실한 믿음이 없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당신의 백성으로 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경외심과 사랑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그의 뜻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믿음이 환경과 기분에 따라서 흔들리거나 변질되어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베드로는 고넬료를 만나서 그의 이야기를 듣는 가운데 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먼저 선언합니다.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는 줄을 깨달았다.” 참으로 복된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 혈통과 피부색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베드로의 이 선언은 자신의 신앙이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에 근거한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결코 달갑지가 않습니다. 세상 속에서 갖은 고난과 시련에도 믿음을 붙잡고 견디어 온 사람들에게는 분명히 이 말은 듣기에 쉽지가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내가 이만큼 헌신을 했는데, 그래도 내가 남들보다 더 오래 예수를 믿었는데 ….” 한 마디로 자신의 행위와 업적을 가지고 신앙적 판단 기준으로 삼으려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향해 베드로는 두 번째 선언을 합니다. 그것은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라는 선언입니다. 여기에서 ‘각 나라 중’이라는 말은 사실 ‘모든 민족에서’라고 번역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나라에서 지구상의 어떤 민족도 제외시키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베드로의 입을 통하여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족속이 다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받아주십니까? 하나님이 받으시는 사람, 즉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유일하고도 참 신으로 인정하고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경외하다’, ‘의를 행하다’는 단어는 현재 분사형입니다. 그러니까 고넬료의 하나님을 향한 경외와 의가 일시적이 아니라 지속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어쩌다가 드린 한 번의 경건한 제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니고, 한 번의 의로운 행위가 그를 의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지속적으로 그의 삶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를 행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 고넬료를 당신의 백성으로 받아들이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고넬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족속에게 해당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진심으로 하나님만을 경외하고 의를 행함으로써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권속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라는 베드로의 두 번째 선언은 성경의 어떤 본문을 근거로 해서 선언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경험한 신앙고백입니다. 베드로는 고넬료의 가정에서 일어난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보고 이렇게 고백했던 것입니다. “어떤 나라에나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다 받으신다.” 우리도 이렇게 고백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자극에 민감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도 마음을 활짝 열고 성령의 역사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베드로는 자기를 초청한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의 말을 듣고서 그가 본 환상의 의미가 보다 확실해졌습니다. 그것은 비록 이방인이라도 하나님의 택한 백성에게는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전한 설교의 내용은 다른 설교들과 마찬가지로 복음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즉 화평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은 성령과 능력으로 기름 부으심을 받으신 하나님의 아들로써 치유와 생명의 주님이 되신다는 것과,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셨지만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선교의 지상 대명령을 주신 분이라는 것, 그리고 구원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전했습니다. 이것은 초대교회로부터 지금까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향해 외쳤던 유일한 메시지였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우리가 세상을 향해 외쳐야 할 하나밖에 없는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이 복음 외에 다른 것을 세상에 전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에 사도들과 교회가 전한 것이 아닌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방문하게 된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음을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의 선언이 지극히 타당하다는 것임을 보여주시고자 저들 이방인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이방인에게도 성령이 임하셨다는 사실은 복음이 누구에게나 공평하다는 베드로의 선언이 타당한 것인가에 대한 어떤 의심도 사라지게 합니다. 성령께서는 이 사건의 주체가 하나님이시라는 베드로의 선언을 확정하시고자 고넬료와 그의 친척들 위에 강림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44절은 이렇게 시작하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가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복음을 듣고 있던 고넬료를 비롯한 그곳의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이 사건은 ‘가이사랴의 오순절’이라고 불릴 정도로 교회사에서 중대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그리고 성령 강림의 대상이 이방인이라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가 실로 크다고 할 것입니다. 이 사건은 이후에 유대주의자들이 이방인들을 향한 선교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반발할 때 사도들이 제시를 했던 사건입니다. 즉 이방인에게 성령이 강림한 이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더 이상 유대인과 이방인 간의 구별과 차별이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앞서 일어났던 오순절의 사건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방인을 위해서도 그와 같은 사건이 이루어지는데, 바로 고넬료의 가정에서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고넬료의 가정에서 일어나는 이 사건과 예루살렘 교회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비교해 봅니다. 하나는 유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의 중심부인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졌고, 하나는 이방인 로마 사람들이 점령하고 있는 가이사랴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이루어졌고, 하나는 로마군인의 집에서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얼마나 큰 차이가 있습니까?
마가의 다락방과 고넬료의 집을 비교해 봅니다. 예루살렘에 있었던 오순절 사건은 사도행전 2장 1절 이하에 있고, 가이사랴에 있었던 이 사건은 지금 살펴보고 있는 사도행전 10장에 나타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공통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오늘의 우리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즉, 오늘 우리들에게도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가이사랴의 성령 강림’과 예루살렘의 ‘오순절에 임한 성령 강림’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습니까?
첫째로, 이들은 “모여 있었다”는 것입니다.
앞선 24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그러니까 고넬료가 자기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다 모아 놓고 베드로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다루고 있는 사도행전 2장 1절에 보면,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라고 했습니다. 가이사랴 고넬료의 집과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 강림의 사건이 일어났던 공통점은 모두가 모여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여 있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개인에게 일어난, 개인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누구 한 사람이 골방에서 체험했다는 식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론적 의미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독교는 여기서부터 독특한 의미를 가집니다. 여느 종교처럼 혼자서 산에 올라가 이른바 입산수도를 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공동체적 의미가 있고, 교회론적 의미가 있습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함께 모이고, 함께 기도합니다. 그리고 함께 역사를 체험합니다. 바로 교회론적입니다. 때문에 교회론에 있어서 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성숙하고 바른 그리스도인입니다. 그가 아무리 혼자서 산을 옮길만한 능력을 행한다고 할지라도 교회를 떠나 있다면 그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를 떠나서는 결단코 건강한 신앙을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도 가만히 보면 개인적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많이 있습니다. 혼자 기도하고, 혼자 산에 올라가 계시를 받고, 혼자 환상을 보고 …. 이런 이야기들을 하고 돌아가는데, 사실 이런 이야기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나타난 오순절 사건은 120명이 함께 체험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특별할 것도 없고, 요한이 특별할 것도 없습니다. 120명의 제자들이 함께입니다. 그들 모두가 함께 체험을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고넬료의 가정에 모였던 사람들 모두가 함께 체험을 합니다. 그들 가운데는 로마 군인도 있고, 그들의 아내들도 있습니다. 자녀들도 있습니다. 친척들도 있습니다. 친구들도 있습니다. 아시는 대로 고넬료는 경건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집안 식구와 친구들이 다 고넬료와 같이 경건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다같이 도덕적으로 선행을 하고, 때마다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 고넬료의 청함을 받고 와서 모여 있었던 그 사람들이 다 성령을 받았습니다.
고넬료만도 아니고, 고넬료의 가족만도 아닙니다. 그의 일가친척과 친구들까지 다 모여서 이 놀라운 체험을 함께 합니다. 공동체적입니다. 그 방에 모인 사람들이 다 성령을 받았다는 것, 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 가운데는 경건에 앞선 사람도 있고 뒤진 사람도 있습니다. 도덕적으로 정결한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가 고넬료가 초청했을 때에 마다 않고 이 집에 왔습니다. 무슨 일이냐고 묻지도 않고 우선 왔습니다. 생전 처음 보는 일이지만 아무튼 고넬료가 오라니까 왔습니다. 왔다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나니 모두에게 성령이 내려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와서 여기 모여 앉았습니다. 여러 모습의 사람이 함께 말입니다. 도덕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지식으로나 저마다 다릅니다. 얼굴이 다른 것만큼 다 다릅니다. 그러나 지금,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할 때에 다같이 성령의 역사를 체험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 특별한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교회론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아무튼 모였다는 것, 예루살렘에서도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고, 여기 고넬료의 집에서도 모였습니다. 모여 있는 중에 사건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교회에 모인다는 것, 그래서 한 마음 한 뜻으로 기도하고 함께 음성을 듣고 함께 체험한다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잊지 마십시오. 기독교 신앙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 모이는 데서부터 시작이 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10장 22절에서 “이제부터는 진실한 마음과 확고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라고 권면한 후에 이렇게 말씀하는데, 25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초대교회 때나 지금이나 사탄과 마귀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흩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환경을 모이기에 부담스럽거나 꺼려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갑니다. 초대교회 때는 유대교나 로마의 박해 등으로 인해 모이기를 꺼려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예 유대교로 되돌아가거나 믿음을 포기하고 모이기를 폐하려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시대는 인본주의를 앞세운 포스터 모더니즘적 사고에 코로나와 같은 불안한 환경을 조성해서 모이기를 꺼려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그럴수록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더욱 모이기에 힘쓰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이 역경과 고난 중에도 모이기에 힘써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성도는 사탄과 영적 싸움을 하며 천국을 향해 가는 하나님의 군사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에 대한 교훈을 출애굽 사건을 통해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흩어서 개별적으로 가나안으로 가게 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회막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게 하사 함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것을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적 처소인 성전을 중심으로 모였다는 것은 곧 축복과 기쁨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함께 하는 자들에게 복을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볼 때 성도가 모이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과 기쁨이 없음을 상징합니다. 성경에서 나뉘고 흩어지는 것은 곧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성도들을 모이지 못하게 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축복을 빼앗으려는 사탄의 계략입니다. 일단 나뉘고 흩어지도록 만들어야 사탄이 그 안에서 실력행사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자가 노리는 것은 무리들에서 떨어져 나온 짐승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탄은 분열을 위해 참으로 다양한 방법을 동원합니다. 때로는 핍박과 박해로, 혹은 게으름과 나태로, 때로는 내부의 분열과 다툼 등으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이리저리 찢고 나누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지금 사탄은 코로나로 위협한 후 사이버 교회, 즉 인터넷교회와 같은 것으로 정상적인 교회를 흩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찌하든지 교회를 나누고 흩으려는 사탄의 계략에 빠지지 않도록 더욱 주의를 기울이고 모이기에 힘써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는 함께 모여 기도하고 찬양하고 마음을 같이 하는 그곳에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허락하십니다. 그러므로 모이기를 힘쓰는 가운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더욱더 하나가 되는 강한 모습으로 천국 도성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둘째로, 말씀을 듣는 사람들에게 임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본문 44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여기에 보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라고 합니다. 같은 공간과 시간에 있다는 것으로가 아니라 있으면서 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듣는 사람에게 성령이 임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음의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비유로 말씀하셨듯이 옥토와 같은 마음 밭이라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듣고자 하는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 앞의 33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는데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마음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비록 초라한 사람이지만 베드로라고 하는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바른 자세로 앉아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성령을 받습니다. 그런데 팔짱을 턱 끼고 앉아서 “저 목사가 무슨 말을 하나 보자” 하는 마음으로 앉아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자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철학을 듣자는 것도 아닙니다. 강단에 서신 저 목사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마음, 이것은 동시에 믿음입니다. 지금의 이 관계를 하나님과의 관계로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과 나와의 관계를 하나님의 관계로 여기는 것입니다. 성전이라고 하는 이 집을 하나님의 집으로 아는 것입니다. 예배하는 이 시간을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시간으로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육신적인 귀와 마음의 귀, 영적 귀가 열려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 이런 믿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성령께서 임하십니다.
고넬료는 겸손합니다. 그는 단순합니다. 특별히 인간적 욕망에 대한 소원이 없습니다. 흔히 말하는 대로 돈을 벌겠다던가, 출세를 하겠다던가, 병을 고치겠다던가 하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여기 고넬료네 집에 온 사람들은 지금 베드로에게 별다른 요청이 없습니다. 오직 신령한 말씀, 그것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깨끗이 비워 가지고 베드로를 쳐다보는 것입니다. 이런 자세로 듣는 사람에게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리고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을 들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전적으로 말씀에 의탁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든지 순종하고, 그대로 받아들이겠다고 하는 마음입니다. 이미 그렇게 결심이 돼 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듣는 사람에게 성령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본문 44절에 보면 “이 말을 할 때에” 듣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임하셨다고 합니다. 베드로가 말씀을 전하는 바로 그 시간에 내려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의 사건으로 말한다면 여러분이 어디 골방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이 시간에 성령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임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 가운데 그 말씀이 내 골수를 쪼개면서 영이 치유되고 몸이 치유되고 문제가 해결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전에 생각할 수 없었던 큰 은혜를 생각하게 되고, 그토록 불평불만으로 가득 차 있던 심령이 감사 찬송으로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그토록 나약하던 사람이 새로운 용기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을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 말”은 사람이 어떻게 잘살고, 어떻게 복 받고, 세상이 어떻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어떻게 십자가에 돌아가셨고 어떻게 부활하셨는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전적으로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세상 철학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모이는 것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듣자고 여기에 온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 성경말씀을 듣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들을 때 성령이 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선 전도자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전도를 해야 됩니다. 객관적 계시가 있기 위해서는 객관적으로 전해 주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누가 전하든지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꼭 들어야 됩니다. 로마서 10장 14절에도 말씀하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그렇습니다. 전하는 자가 있어야 합니다. 전하는 자가 없다면 듣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전도자인 베드로로 하여금 충만한 가운데서 말씀을 전하게 하고, 듣는 자로 하여금 성령의 감화를 주어서 듣게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46절에서 방언을 말했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지금 로마 말을 하는 사람들 앞에서 히브리말을 하고 있습니다. 통역 설교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듣는 사람은 로마말로 다 알아듣습니다. 알아들을 뿐만 아니라 “감사합니다, 할렐루야”하는 것을 보니 이것은 또 자기네말로 합니다. 베드로가 그것을 알아듣습니다.
“방언으로 말하더라”라고 한 것은 이런 현상을 가리킵니다. 복음을 전하는 데 소통케 하는 신비로운 역사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베드로는 자기 말을 했습니다. 듣는 사람은 자기 나랏말로 들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감동해서 간증하는 이야기를 베드로는 또 베드로대로 히브리말로 듣는 것입니다. 분명히 로마사람과 히브리사람이 모였는데 언어가 복음 안에서 거침없이 통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순간을 가리켜 “방언을 말하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고넬료의 가정에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 본문 48절은 이렇게 끝을 맺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 하니라 그들이 베드로에게 며칠 더 머물기를 청하니라.”
빌립이 복음을 받아들인 사마리아인들과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세례를 주었지만, 베드로가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예루살렘 교회는 이때까지도 이방인들에게 세례를 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있는 벽들을 허물고 계셨음에도 제자들은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더는 주저할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이방인 고넬료의 가정에 임하신 성령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은 결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 모인 이방인들에게 기꺼이 세례를 베풀고, 하나님의 한 가족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복음은 거침없이 이방 세계를 향해 나아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방인 고넬료와 그의 가족과 친구들이 모여서 말씀을 사모하는 가운데 그 말씀을 듣는 중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는 유대인과 이방인 간의 차별과 편견이 사라졌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한 공동체의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도 모이기를 힘쓰는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 가운데 하나님께서 성령을 물 붓듯이 부어주시고, 우리 가운데 있는 편견과 차별의 벽들이 무너지며,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든든하게 세워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