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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일을 막을 수 있겠는가?
사도행전 11:1-18
사망과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지상 대명령을 주시고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제자들과 초대 예루살렘 교회 교인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주님의 유언과도 같은 귀중한 말씀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그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땅 끝’이 ‘이방인’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를 못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예루살렘 교회가 아무리 열심이었어도 이방 전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베드로와 그의 일행들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풂으로써 예루살렘 교회는 비로소 이방인을 향한 전도의 계기를 맞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인종과 국적, 연령과 계급, 직업의 편견을 초월해서 남녀노소 빈부귀천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어야 할 교회가 비로소 교회다움을 확립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도행전 10장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를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9장과 10장에서 베드로가 무두장이 시몬의 집과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서 며칠 동안 머문 것을 기록하는 것으로 끝맺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누가의 중요한 의도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즉 ‘무두장이’는 죽은 짐승의 가죽을 취급하고 가공하는 직업으로 유대인들이 부정하게 여기는 직업입니다. 그런가 하면, ‘고넬료’는 유대인들이 상종하기조차 꺼려했던 이방인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이들은 유대인들이 함께 하기를 가장 꺼려하는 부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베드로는 이들 집에 아무 거리낌 없이 며칠씩이나 머물렀고, 누가는 이 사실을 9장과 10장의 마지막에 똑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에 가로막혀 있던 차별과 장벽들이 복음 앞에서 완전히 허물어졌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방인 고넬료 집에서의 사건은 한 성령과 한 세례에 이어서 이제 한 교제로 나아갑니다. 편견과 장벽이 다 무너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위대한 능력입니다. 복음은 결코 함께 할 수 없었던 사람들을 함께 할 수 있게 합니다. 절대로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게 합니다. 참으로 위대하고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이제 복음이 유대인에게만 머물지 않고 유대인들이 부정하게 여겼던 이방인들에게까지 확산될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유대인들에게 배척을 받았던 복음이 이방인과 소외된 자들에게는 영접 받게 될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교회가 교회됨이라고 누가는 암묵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앞선 10장은 “그들이 베드로에게 며칠 더 머물기를 청하니라”는 말씀으로 끝을 맺습니다. 며칠만 더 함께 머물러 달라는 고넬료의 간청에 베드로가 어떻게 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였다고 해서 그가 정확하게 며칠을 더 묵었는지도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의 본문을 통해서 이때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서 하루 이틀이 아니라 여러 날을 묵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짐작하게 됩니다. 베드로가 이스라엘 북쪽에 위치한 가이사랴 고넬료의 집에 머물고 있는 동안에 이방인 고넬료의 가정에서 일어났던 사건이 남쪽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에게 전해지기 위해서는 최소한 여러 날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며칠을 더 머물렀는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보다 중요한 사실은 복음이 예루살렘이라는 제한된 지역적 장벽을 깨고 사마리아를 비롯한 이방 지역으로 확장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방인을 향한 복음의 문이 열리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였음을 누가는 명확하게 증언합니다.
사실, 베드로는 사랑하는 주님으로부터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오순절에 120여 성도들과 함께 성령의 권능을 받았습니다. 성령의 권능을 받은 베드로는 예루살렘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담대히 전했습니다. 그 일로 그는 예루살렘 권력자들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고 감옥에 갇히기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도를 전했습니다. 그렇지만 거기까지였습니다. 그는 자기 입으로 말했듯이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이라는 유대주의적 전통과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사람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전통과 고정관념을 깨뜨린다는 것이 이토록 어렵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의 편견과 고정관념을 내려놓았다고 해서 다른 모든 편견과 고정관념을 다 내려놓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또 다른 편견과 고정관념이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것을 볼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관념의 노예가 될 수 있습니다. 편견의 노예가 될 수 있습니다. 아집의 노예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생각의 폭이 넓어야 합니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고 생각을 유연하게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편견과 고정관념을 버리는 곳에서 하나님의 뜻이 발견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대체로 작은 나라에서의 소문은 훨씬 빨리 퍼져나갑니다. 베드로가 이방인의 집에 들어간 것과 그 이방인들이 성령의 은사를 받고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형제들이 듣는 데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예루살렘 교회에는 가이사랴에서 일어났던 일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하고 있었던 사도들과 예루살렘 교회 교인들에게는 이방인 고넬료의 가정에서 일어났던 사건은 엄청난 충격을 안겨다주는 참으로 놀라운 소식이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예루살렘 교회 안에서는 이 사건의 문제를 놓고 시끄러운 논쟁들이 벌어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베드로는 가이사랴 고넬료의 집에서 체험했던 그 감격과 흥분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2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보십시오. 가이사랴에서 베드로의 사역으로 이방인 고넬료를 비롯한 다수의 사람들이 회심하고 주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렇다면 이방인들을 향한 선교의 문을 성공적으로 열고 돌아온 베드로는 예루살렘 교회의 교인들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아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만 상황은 정반대였습니다. 고넬료의 집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소문을 들었던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형제들은 그 위대한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베드로를 세워놓고 정면에서 비난해 댑니다. 여기에서 “비난했다”는 말은 단순한 질책이나 이의를 제기했다는 것이 아니라, 적대감을 가지고 정죄하고자 하는 의도로 비난하고 논쟁하는 것을 말합니다. 베드로는 이방인 고넬료의 가정에서 자신이 했던 일로 인하여 엄청난 반발에 부딪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가 제기하는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결국 땅 끝을 향하여 진군해 나가야 할 복음의 가장 큰 장애물은 다름 아닌 바로 이 복음을 땅 끝까지 가지고 가겠다고 나선 ‘증인들’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오늘 우리의 주위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들입니다. 여러분은 많은 성도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는 주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교회의 성도들 때문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성도들에게 거룩한 영향을 받아야 하는데, 성도들에게서 회복할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받고 교회를 떠나갑니다. 죽도록 충성하는 교회의 일꾼이 되겠다고 나선 그 사람들 때문에 오히려 교회 안의 문제가 심대하게 어그러져 가고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교인들이 교회 성장의 거친 장애물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를 비난했던 사건은 그 시절에 그곳에서만 일어났던 그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할례자들이 베드로를 그토록 격렬하게 비난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할례자들이 베드로를 곤경에 몰아넣고 비난했던 이유는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에게 말씀을 전했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8장에 보면, 이미 이전에 빌립이 이방인인 사마리아인들과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말씀을 전했을 뿐 아니라 세례도 주었습니다. 사실 교회사에서 이방인에게 최초로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푼 사람은 빌립입니다. 그때 예루살렘 교회와 사도들은 빌립이 이방인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세례를 베풀었다는 것을 전혀 문제 삼지를 않았습니다. 오히려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서 그들을 격려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할례자들이 베드로를 비난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할례자인 베드로가 무할례자인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 3절이 이 사실을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여기에 보면, 할례자들은 베드로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풀었다는 문제를 전혀 거론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했느냐는 것도 아니고, 왜 이방인을 구원의 길로 인도했느냐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베드로가 무할례자인 이방인들과 함께 먹었다는 사실을 문제 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들의 전통과 관습을 깨고 무할례자들의 집에서 함께 먹었느냐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놓고 혹여 이렇게 질문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아니, 이방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 뭐가 문제가 됩니까?” 그런데 당시 유대 문화에서 이것은 아주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즉 유대 문화에서는 누군가와 식사를 함께 하는 것은 의미심장한 행위였습니다. 그들은 누군가와 함께 먹는 것을 그 사람과 하나가 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유대인이 이방인과 결코 함께 먹지 않는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식탁 문화를 보면, 대부분의 음식들은 맨손으로 먹었습니다. 그들은 같은 빵 덩어리를 떼어서 그것을 식탁 위에 있는 하나의 그릇에 담은 수프와 소스에 찍어서 먹었습니다. 그리고 빵을 두 번 그릇에 담그지 말라는 식탁 예절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의 빵을 뚝 떼어서 수프와 소스에 담긴 그릇에 여러 번 넣어 찍어서 먹었습니다.
우리네 식탁 문화를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서양인들이 우리 식탁 문화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것 가운데 하나가 된장찌개와 같은 찌개를 하나의 큰 그릇에 담고, 그 그릇에 각각의 사람들이 숟가락을 넣어서 먹습니다. 각자 입에 넣었던 숟가락을 다시 그릇에 넣고, 그것을 입에 넣은 후 또 다시 넣고 …. 입에 넣었던 숟가락을 씻은 후에 넣는 것이 아닙니다. 침이 묻은 그 숟가락을 찌개 그릇에 넣습니다. 처음 이 상황에 직면한 서양인들은 아주 비위생적이라며 기겁을 하고 놀랍니다. 그렇지만 우리네는 아무렇지 않게 맛있게 먹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함께 식사를 하면서 좀 더 가까워지고 친숙해집니다.
유대인들의 식탁 문화도 그와 같은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음식을 함께 먹는 것은 서로 친밀한 행위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먹고 있는 빵을 내가 먹고, 우리의 몸들이 같은 빵을 소화시켜서 우리 몸의 일부가 될 때 신비롭게 우리는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은 결코 이방인과 함께 음식을 먹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식탁 교제를 하는 것을 수치와 치욕으로 생각했을 뿐 아니라 부정한 행동으로 여겼습니다.
무엇보다 유대인들이 생각하기에 이방인들의 식탁에는 우상에게 제물로 바쳤던 부정한 음식도 섞여 있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정결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할례자의 식탁에 참여하지 않아야 했던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할례자들의 이러한 태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화평으로 하나가 되게 하신 것을 부인하는 행위가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는 자신들의 전통과 관습과 고정관념으로 복음의 본질을 심대하게 왜곡시키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를 곤경에 몰아넣고 격렬하게 비난하고 있는 사람들이 본문에서는 ‘할례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유대인들은 태어나면 누구나 팔 일째 되는 날에 할례를 받습니다. 유대인 성인 남자라면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초대 예루살렘 교회를 이루고 있었던 교인들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도 역시 다 할례를 받았습니다. 사도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본문에서는 베드로를 비난한 사람들이 ‘할례자들’이었다고 유독 강조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복음의 핵심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변하지 않는 영원한 진리입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써만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로부터 교회 안에는 믿음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구원의 조건을 더하려는 두 부류의 이단들이 있어 왔습니다. 하나는 ‘지식’이고, 다른 하나는 ‘행함’입니다.
‘지식’을 강조하는 부류는 소위 ‘영지주의자들’인데, 이들은 믿음만으로는 부족하고 보다 차원이 높은 영적 지식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오늘날 대표적으로 ‘박옥수의 구원파’인데, 이들은 믿음만으로는 안 되고, 깨달아야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칩니다. 이들의 주장대로라면, 어리석은 자들이나 지적 장애인들과 같이 스스로 깨우치기 어려운 사람은 구원받지 못하고 영원히 지옥에 떨어지는 저주받은 자들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믿음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고 행함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단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실천적인 문제들로서 사람은 구원에 합당한 공로를 쌓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율법을 알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소위 율법주의자들로서 본문에 등장하는 할례자들입니다. 여기 ‘할례자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할례를 구원의 절대적인 조건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주장대로라면 사람이 어느 정도 공로를 쌓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자신의 공로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은 늘 불안할 수밖에 없고, 반면의 사람은 우월감에 사로잡혀 교만하게 될 것입니다. 본문의 할례자들은 자신이 받은 할례에 대해 그릇된 우월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할례를 받은 유대인들이 이방인들 앞에서 자신들의 우월성을 강조할 때, 그들은 이방인을 가리켜 ‘무할례자’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할례도 받지 못한 짐승 같은 인간이라는 경멸의 표현입니다.
어쨌든 예루살렘에 도착하자마자 할례를 받은 사람들이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한 베드로를 세워놓고 비난했습니다. 아마도 베드로는 몹시 답답했을 것입니다. 며칠 전 자신이 어리석게도 하나님께 거부했던 그 일을 지금 같은 믿음의 형제들이 자신에게 퍼붓고 있으니 말입니다. 10장에서 살펴보았듯이 베드로 자신도 이방인과 함께 먹는 것이 그다지 편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이방인들과 함께 식탁 교제를 나누었다는 소식을 예루살렘 교회의 형제들이 알 것이고, 그로 인해서 자신에게 돌아올 비난과 위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하나님의 지시하심에 순종해야만 했고, 또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는 자신을 비난하는 교회와 형제들을 향하여 무언가를 설명해야만 했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의 계시와 인도하심으로 가이사랴의 사역을 감당했던 베드로로서는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한심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4절에서는 베드로가 이 같은 비난에 대해 차례로 설명을 했다고 하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베드로가 그들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
베드로는 욥바 무두장이의 집에서 기도하다가 보았던 환상으로부터 시작하여 차례로 일어난 고넬료 사건을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당시에 편지는 소나 양의 가죽으로 만든 양피지에 기록되었습니다. 양피지는 희귀했을 뿐 아니라 부피도 컸습니다. 학자들은 사도행전은 대략 1m 길이의 양피지를 필요로 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누가는 당연히 글의 내용을 줄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똑같은 사건을 두 번이나 언급을 합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10장에서 베드로에게 그 일이 일어났을 때 그것을 읽었습니다. 저도 책을 쓰지만 독자들이 지루하지 않도록 똑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쓰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앞장에서 읽었던 그 내용을 다시 한 번 더 읽습니다. 이것은 정상적인 저술 방법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는 왜 이렇게 똑같은 내용을 두 번이나 기록했을까요?
그것은 이 사건이 예루살렘 교회에 참으로 중요한 시점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이야기를 기록하도록 영감을 주셨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본문의 상황을 제대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지금 이 문제는 예루살렘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제입니다. 즉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관계가 아니고, 믿는 사람과 믿는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문제입니다.
본문에서 ‘비난하다’라는 헬라어는 ‘~로부터 자신을 분리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본문의 할례자들은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들로부터 자신들을 분리했을 뿐 아니라, 이방인과 식사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베드로로부터도 자신들을 분리시켰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무할례자인 이방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초대교회의 최고 지도자인 베드로보다도 자신들이 더 우월하다는 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행동은 기독교인이 된 고넬료와 이방인들을 받아들일 수 없을 뿐 아니라 베드로까지 배척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근거는 오직 하나, 자신들은 할례 받은 유대인으로서 베드로와는 달리 무할례자와는 식탁을 함께 하지 않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상종조차 하지 않았다는데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의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에 나타난 내용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는 그 시절 그 때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늘의 교회 안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고, 또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 우리 모두는 예수 안에서 하나입니다. 그리고 이전의 모든 것이 새롭게 변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전의 전통과 관습과 고정관념에 얽매여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보통 때는 곧잘 형제자매라고들 쉽게 말하지만, 자신의 생각과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순간 상황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때부터는 한 교회 안에, 한 하나님을 믿고 있으면서도 철저하게 분리시킵니다. 그럼으로써 보다 근본적인 문제들을 망치고, 교회가 분쟁에 휩싸이게 됩니다.
저는 가끔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도대체 천국은 몇 개가 있어야 할까?”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서로 함께 할 수 없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천국에 간다고 확신을 하니, 결국 하나님께서 저들을 위해 천국을 여러 곳에 많이 만드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만 하나님이 한 분이시듯이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천국도 하나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모두가 하나입니다. 에베소서에 있는 말씀대로 주도 하나요, 말씀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입니다. 우리는 한 가지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머리요, 우리는 그분의 지체입니다.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하나가 됩니다.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 하는 것은 한 몸 안에 오른손과 왼손이 있는 것처럼 각각 한낱 지체일 뿐입니다. 손과 발이 있는 것처럼 유대인도 예수 믿는 사람, 이방인도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인 것입니다. 언어도 다르고 풍속도 다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창조 때로부터 하나님의 마음은 항상 온 세상을 향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신 이유는 그들에게 그럴만한 가치가 있거나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신명기 7장 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은 그들이 모든 민족들보다 수가 더 많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가장 수가 적은 민족이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적다’는 히브리어는 그 수가 너무 적어서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을 묘사하는 단어입니다. 사람의 숫자가 부와 힘을 상징하던 옛날에 얼마나 수가 미미하였으면 눈에 띄지도 않을 정도로 지극히 보잘 것 없던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제사장 나라로 삼으시고 복을 주시는 목적은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살아 계신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는 것의 가치에 관한 본보기를 이 세상에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본보기가 되지를 못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지를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매우 폐쇄된 회로처럼 되었으며, 하나님의 진리를 이방인들에게 기꺼이 전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받은 할례를 마치 자신들만이 구원받을 수 있는 권리나 자기 의로 삼는 자기도취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더 우월하다고 착각하면서 하나님께서 구원하기를 기뻐하시는 이방인들을 마치 구원받지 못할 무할례자인 것처럼 경멸했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예루살렘 교회의 최고 지도자인 베드로까지 비난하고, 자신들과 분리시키는 교만과 분열의 죄를 범하고만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들이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들은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다고 고백하는 예루살렘 교회의 교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그들이 이처럼 어리석은 짓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그들이 할례를 자기 의로 내세우며 전통과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예수님을 온전히 자신의 주인으로 모시지를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은 오늘의 우리들에게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자기 의에 도취되어서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사람과의 사이를 분리시키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결코 그런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물론 사람들 간에는 분명히 차이는 있습니다. 남녀의 차이가 있고, 빈부의 차이도 있습니다. 문화 차이가 있고, 언어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차이는 극소화하면서 차별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한 가족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온전한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도들과 교제를 할 때 있고 없음을 가지고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을 구별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은 결코 사람의 외모를 보고 판단하지 아니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가지고 차별하고 분리시키는 사람의 죄를 결코 가볍다고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본문 5절부터 이어지는 베드로의 설명을 들어보면 그는 아주 침착했습니다. 할례자들이 흥분하여 비난하고 있음에 반하여 그는 온유한 가운데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베드로는 원래 성격이 대단히 급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이렇게도 온유하게 차근차근히 설명을 할 수 있었는지 놀라운 뿐입니다. 그는 사실대로 쭉 이야기합니다. 논리적으로나 철학적으로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 하셨는지를 이야기합니다. 자신의 의견이나 생각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역사 하셨고, 나는 그대로 순종한 것뿐이라고 사실대로 차근차근 설명합니다.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알고 그들과 공감대를 이루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마음속에는 적어도 이 마음이 있습니다. “나도 처음에는 당신들과 똑같은 마음이었소. 그렇지만 내가 경험한 것을 당신들이 겪었다면 당신들도 나와 같았을 것이오.” 베드로의 말에는 상대방을 공격하려는 마음이 추호도 없습니다. 상대방이 잘못됐다고 하는 나무람도 없습니다. 여기에 설득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위치를 바꾸어 놓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자신을 비난하는 할례자들을 향해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하는데, 17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베드로는 “내가 누구이기에”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을 극도로 낮추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말을 하고 있는 베드로는 예전에 갈릴리에서 고기나 잡던 무식하고 아무 능력도 없는 어부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예수님께로부터 그 권위와 사명을 위임받은 모든 성도의 목자장이요 어른입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걷지를 못했던 사람을 말씀 한 마디로 걷게 했습니다. 병든 애니아는 물론 죽은 다비다도 살렸습니다. 한 번의 설교로 삼천 명이나 회개시켰습니다. 그런 그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비록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자신이 위대한 사도요, 교회의 최고 어른과 권위자일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면 비록 자기가 알 수 없고, 또 원하지 않는 일이라도 순종하는 것 밖에 다른 행동은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의 동료들로부터 심한 질책과 책임 추궁을 당하는 일이라도 순종합니다. 이것이 바로 참으로 성도다운 모습인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욥은 욥기 9장 12절에서 이렇게 고백하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빼앗으시면 누가 막을 수 있으며 무엇을 하시나이까 하고 누가 물을 수 있으랴.”
다시 말해서 사람이 도대체 왜 하나님과 싸우려고 하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당신은 무엇을 얻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겨루려고 했던 사람들은 항상 그것 때문에 고통을 당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부터 도망하려고 다시스로 가는 배에 올라탔을 때 어려움에 직면해야만 했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과 겨룰 때마다 우리는 고통과 어려움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토기장이의 대가이시고, 우리는 한낱 진흙에 불과합니다. 예레미야가 토기장이가 돌림판에서 진흙 덩어리로 그릇을 빚는 것을 보았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그것을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빚고 있던 그릇이 망가지자 토기장이는 미완성된 그릇을 다시 진흙 덩어리에 집어넣습니다. 그는 진흙 덩어리의 단단함을 서서히 풀어가며 다시 반죽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단 반죽을 시작하고 나서는 그것을 다시 돌림판 위에 올려놓고 그의 마음에 드는 또 다른 그릇으로 빚어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의 형태를 만들기 시작하실 때 우리는 번번이 뻣뻣해지며 저항합니다. 미완성된 그릇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손 안에서 망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하나님은 인내심을 가지고 우리를 다시 진흙 덩어리로 만들어서 우리의 불완전함을 반죽하십니다. 그것은 참으로 어렵고 험난한 과정일 수도 있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릇으로 우리를 빚으실 때 그 안에서 아름다움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험난한 시간이 찾아올 때 여러분을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만들기 위해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모든 것을 양도했을 때 우리의 삶은 참으로 복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18절은 베드로의 말을 들었던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이 베드로에 대한 비난의 말을 그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베드로의 말을 듣고 자기들이 가지고 있었던 기존의 전통과 관습에 사로잡힌 생각들을 버렸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깨달음이 그들 모두에게 은혜가 되고 기쁨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저들의 모임은 다소 시끄럽게 시작했습니다. 언쟁이 있었고, 오해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끝이 좋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언제나 끝이 좋아야 합니다. 끝이 좋아야 모든 것이 좋은 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자신보다 항상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도록 자신을 내려놓고, 끝이 좋도록 노력하는 멋진 믿음의 공동체를 만들어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드리는 삶이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