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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의 의미
사도행전 11:19-26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사도행전을 통해 한 사람이 회심하고 기독교에로 개종하는 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누가가 사도행전에서 말하고자 하는 ‘개종’이란 ‘시작에 관한 이야기들’입니다. 이것은 개인의 새로운 생활의 시작임은 말할 것도 없고, 교회생활에 있어서의 새로운 시작이고,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사명의 시작에 관한 이야기들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기독교에로 개종하는 것은 신앙의 마침표가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향한 여정의 시작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유념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교회 공동체에 들어와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 신앙을 다 이룬 것처럼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누가가 사도행전에서 말하고자 하는 ‘개종’이 아닙니다. 누가가 말하고자 하는 개종은 그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교회 공동체에 들어오는 그 순간부터 새로운 여정의 시작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이전에 사망과 어둠의 권세에 붙잡혀 있던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영원한 생명을 얻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순간부터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를 담아서 살아낼 것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 가정에서, 일터에서, 내가 서 있는 곳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누가는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하는 것이 단지 그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만 이야기를 끝내지 않습니다. 누가는 사도행전을 통해 누군가가 기독교에로 개종을 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일들에 대한 부르심을 받은 사건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이 된 순간 복음의 진리를 자신만의 소유로 간직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도록 복음을 지속적으로 밀고 나가 땅 끝까지 증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거룩한 역사를 이루시기 위해 우리를 선택하시고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실천 강령의 핵심입니다. 누가는 사도행전을 통해 이 사실을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실을 너무나도 쉽게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난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에 만족해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그 순간부터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향한 여정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여정은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명령하신 지상 대명령을 땅 끝까지 충성되게 감당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먼저는 한 영혼이라도 구원받고 천국 백성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즉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이 땅에 완성하실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복된 삶을 살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이 모든 민족과 온 세상에 전파되는 그 날에 다시 오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날이 되면 이 땅에는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이 완성될 것입니다. 그날이 되면 불신자는 영원한 지옥에 떨어질 것이요, 믿는 자는 영원히 주님과 함께 영생복락을 누리며 살 것입니다. 우리는 그날을 사모하며 오늘을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이 오셔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시는 그날이 하루라도 빨리 이루어지기 위해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사망과 저주에 빠져 있는 인생들을 생명과 축복의 인생으로 바꿀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복음으로 사람들을 흔들어 세상으로부터 하나님께로 향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하루라도 빨리 이 땅에 다시 오시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런데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절대적으로 바라고 소망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죽어서만 가는 그 나라가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나는 순간 우리 주님이 계시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이미 우리에게 임한 나라입니다.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그 순간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 지금 하나님 나라에서의 백성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아직 완전히 이 땅에 임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already, not yet”, “이미, 그러나 아직”이라는 단어로 설명을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장차 임할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써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임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재림하실 그때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기독교적 역사관을 이해하게 됩니다. 즉 모든 그리스도인은 아직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임하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그날을 바라보며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누가가 사도행전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메시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회심하는 그 순간부터 믿음의 여정으로서의 시작이라고 말입니다.
스데반의 죽음으로 일어난 매섭고 무서운 환난의 바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으로까지 옮겨다 놓았습니다. 누가가 이 사실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복음은 마치 들판의 불과 같았습니다. 들불은 한 장소에서 거세게 번지다가 다른 장소로 옮겨 붙습니다. 지금 이 들불은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의 견고한 진을 무너뜨릴 정도로 강렬하게 타고 있습니다.
그런데 박해로 흩어지게 된 성도들 가운데 안디옥에 흘러 들어갔던 일부 성도들이 그곳에서 유대인뿐만 아니라 순수 헬라인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모험을 감행했습니다. 제가 ‘모험’이라고 한 것은 먼저는 그때까지만 해도 흩어진 성도들이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했지만 그 전도의 대상은 어디까지나 유대인들에게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고, 주를 위해 순교할 신앙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구원은 오직 할례를 받은 유대인들만의 전유물이라는 고정관념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엄청난 위험을 각오해야만 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예루살렘에서 쫓겨 피난을 왔는데,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소식이 유대인들에게 알려지면 그 후과를 장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흩어지면서도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순수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것이 모험이었던 또 다른 이유는 당시 헬라인들의 의식 세계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장에서 말씀했듯이 당시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았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지혜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지적인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으면서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헬라인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어리석은 한 유대 청년의 무의미한 죽음일 뿐, 그 외에 어떤 의미도 없었습니다. 헬라인들은 십자가를 미련하고, 수치스러운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십자가의 복음을 받아들일 리는 만무했습니다.
무엇보다 당시 헬라인들의 영적 상태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 21절 이하에서 이방인들을 가리켜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으며 …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다”고 했습니다. 이방인들은 헛된 것을 생각했으며, 그들의 어리석은 마음은 어둠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리하여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의 마음의 두려움을 없이하고자 우상을 만들어 섬겼습니다.
이와 같은 현실에서 당시 이방인들은 복음을 그렇게 쉽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때문에 이러한 이유만으로도 순수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대단한 모험이 아닐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20절에 보면 흩어진 성도들 가운데 몇 사람이 순수 헬라인에게도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누가는 여기에서 이들 몇 사람이 누구인지, 그들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들이 스데반이 죽임을 당한 뒤 잇따라 일어난 박해 때문에 예루살렘을 떠나 흩어지면서 복음을 전했다는 사실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사람들은 사도들과 같이 교회에서 유력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적으로는 힘없고 보잘 것 없는 무명의 전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박해를 피해 흩어지면서 안디옥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안디옥이라는 곳이 어떤 곳인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안디옥은 신약시대 당시에 인구가 50만 명을 가진 대 도시로서, 아름다운 국제 도시였습니다. 안디옥은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다음으로 로마제국에서 세 번째로 큰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당시에 화려한 도시들이 그러했듯이 안디옥에도 로마황제 숭배를 비롯한 각종 우상숭배가 성행했습니다. 더구나 경제적으로 부유했던 이곳 시민들의 생활은 사치와 방탕과 문란한 생활 때문에 도덕이 무너진 사회였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도저히 복음을 받아들일 것 같지 않았던 이곳의 수많은 이방인들이 복음을 믿고 주께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누가는 이 엄청난 복음 전도의 성공이 인간의 작품이 아니라는 사실을 본문 21절에서 말씀하는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보십시오.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으며 인간의 이성을 최고로 생각했던 헬라인들입니다. 인간적인 이성과 판단으로는 그들이 도저히 십자가의 복음을 받아들일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하나님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로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결코 인간의 계획과 작품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이 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불가능하고 어려운 일이라도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서 이루지 못하실 일이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사명을 감당하면 하나님의 능하신 손이 힘있게 우리를 도우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는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능하신 손길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역사는 일어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박해를 피해 뿔뿔이 흩어지게 된 그리스도인들이 도망자로 그냥 흩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은 흩어져 가면서도 절망의 말을 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소망 없는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소망의 말을 전했습니다. 생명의 말을 전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에까지 이르게 되고, 안디옥에서 교회를 세우게 됩니다. 실제로 사도행전을 보면 초대 교회에 두 기둥과 같은 교회가 나오는데 하나는 예루살렘 교회이고, 다른 하나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안디옥 교회입니다. 초창기에는 예루살렘 교회가 중심이었지만, 시간이 흘러갈수록 안디옥 교회가 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런데 안디옥 교회가 세워진 것은 사도들과 같이 유력한 자들에 의해서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도들은 단지 안디옥 교회에 대한 소식을 듣고 그 후에 지도자를 파송했다고 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이미 말씀을 드렸지만 스데반의 순교 이후 예루살렘에 큰 박해가 일어났을 때에 환난을 피하여 흩어진 무명의 평신도들이 모여서 세운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안디옥 교회는 어느 한 지도자를 중심으로 시작한 교회가 아닙니다. 무명의 평신도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헌신과 희생으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저는 안디옥 교회가 부흥했던 모습을 보면서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훌륭한 지도자를 통해 부흥한 교회가 아닙니다. 안디옥 교회는 무명의 평신도들이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헌신하면서 세운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안디옥 교회처럼 성도 여러분들의 섬김과 헌신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은혜로운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평신도들에 의해서 세워진 안디옥 교회는 바나바와 바울이라는 위대한 두 지도자의 가르침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안디옥 교회의 교인들은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얻게 됩니다. 본문 26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앞서 살펴보았던 예루살렘 교회는 ‘히브리파 유대인’과 ‘헬라파 유대인’이라는 출신 지역이 뚜렷했습니다. 이것이 교회 안에 갈등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안디옥 교회의 교인들은 더 이상 인종이나 출신 지역으로 특징지어지지 않고 모두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 ‘그리스도의 종들’, 즉 그리스도의 완전한 추종자들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아마도 안디옥의 불신자들이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믿고 늘 그에 대해서만 말을 하는 성도들을 유대인들과 구별하기 위해 ‘그리스도인’이라는 별명을 붙였을 것입니다.
당시 로마 시저의 군인들을 ‘시저인’이라고 불렀고, 폼페이의 군인들을 ‘폼페이인’이라고 부르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안디옥에 있던 성도들도 그런 식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 그리스도의 군인, 그리스도의 종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워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처음에는 조롱과 야유의 의미로 불리워진 경멸적인 의미를 지닌 호칭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이름으로 불리게 된 성도들은 그 이름을 듣고 기분 나빠하거나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성도들이 이러한 표현을 거절하지 않았던 것은 그들이 정말로 그리스도의 군사로 전신갑주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성도들은 자신들이 이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오히려 그리스도를 위해 영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으로 로마제국을 정복했고, 결국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존경을 얻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안디옥에 복음이 전해지고, 그곳의 사람들로부터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 불과 1년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고 우리에게 증거합니다. 그러니까 안디옥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던 사람들은 대다수가 예수를 믿은 지 얼마 되지 않는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분명하고도 뚜렷한 열의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믿지 않는 사람들을 통해 확인되었습니다. 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사실 오늘의 우리는 사람들에게 쉽게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밝히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끝까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숨기려는 사람들도 있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밝힐 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우리들에게 던지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첫째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그리스도를 위해 어떠한 고난과 어려움도 감당하겠다는 자기 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본문 19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스데반의 순교 이후에 예루살렘 교회의 수많은 성도들이 박해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정든 고향과 집을 떠나 정처 없이 피난의 길을 떠납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이전에 가본 적이 없던 여러 곳으로 뿔뿔이 흩어져 피난을 가면서도 절망하는 자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박해를 피해 도망을 가야 하는 그 절박한 순간에도 주님을 더욱 힘써 전하는 복음의 전도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솔직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려움을 당하면 그 어려움의 원인에서 도피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정반대의 현상이 얼어날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무엇을 위하여, 또는 누구를 위하여 어려움을 겪을 때 거기에서 도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어려움의 원인에 대해서 더 강한 애착을 가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30장에서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사울을 피하여 블레셋 땅인 시글락에 망명하여 살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블레셋 왕이 이스라엘을 침공하기 위해 다윗을 불렀다가 블레셋 방백들의 반대로 시글락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런데 다윗이 시글락에 없는 동안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아말렉이 쳐들어와서 부녀자들을 모두 사로잡아가고 성은 불에 타버린 엄청난 재난을 당하게 됩니다.
그때 성경에 보면, 다윗과 함께 있던 무리들이 소리쳐 울부짖다가 지쳐서 더 이상 울 기운조차 없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당시 그들의 상황이 그만큼 절망적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리하여 사랑하는 처자식을 잃고 흥분한 부하들이 다윗을 돌로 쳐 죽이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이 절망의 순간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데, 사무엘상 30장 6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보십시오. 이 절망적인 사건 앞에서 모든 사람들은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분노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절망의 순간에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다시 용기를 얻었습니다. 저는 다윗의 위대함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사울을 비롯한 모든 이스라엘 군대가 골리앗을 바라보면서 벌벌 떨고 있을 때에 그는 골리앗을 보지 않고 전능하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담대하게 나가서 골리앗을 넘어뜨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절망의 순간에 하나님을 바라보았던 사람, 그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던 다윗입니다.
로마시대 당시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받았던 박해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로마 원형 경기장에서 사자에게 찢겨 죽임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불에 태워져 죽임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것이 자신들이 지은 죄 때문이라면 그래도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고난을 당해야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쫓는다는 이유 때문에 생명을 잃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이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를 쫓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된 것을 영광으로 여기며 죽음의 현장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서는 자신의 생명도 아깝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서는 전 재산을 다 빼앗겨도 그것이 전혀 힘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를 위해 그렇게 당할 수 있음에 감사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것이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향해 이렇게 불렀습니다. “저가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은 안디옥의 성도들이 얼마나 그리스도를 뜨겁게 사랑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절망적인 환경에 처한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따르겠다는 자기 신앙고백이 분명한 사람입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그리스도를 닮겠다는 자기 삶의 결단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을 드렸듯이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 그리스도를 쫓아가는 자”를 의미합니다. 일반적으로 ‘따라 간다’는 것은 멀리서 어물쩍거리면서 희미하게 따라가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곁에 바짝 붙어서 보다 더 가까이 따라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당시 안디옥의 불신자들이 보기에는 신자들이란 단순히 착하고 부지런한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밖에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독특한 삶을 살았습니다. 안디옥의 사람들이 세상 향락에 취해 살아갈 때 그들은 거룩하고 절제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온몸으로 예수님을 본받아 살려고 했습니다. 그들에게서 예수님의 냄새가 납니다. 불신자들과는 어딘가 달라 보입니다. 그들 모두를 공통적으로 묶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였습니다. 저 사람이 뭔가 좀 다르다고 해서 알아보면 그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이 신자들에게 붙여준 별명이 바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헬라어와 라틴어의 결합어입니다. 이 말은 헬라인들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북부나 로마지역의 라틴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까지도 안디옥 성도들이 살아가는 모습에 대해서 뭔가 특별한 것을 느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 모두의 입으로 안디옥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가리켜 한결같이 했던 말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들은 말이나 생활이 다 ‘그리스도’였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그들은 살아도 그리스도요, 죽어도 그리스도였습니다. 오죽 했으면 별명까지 ‘그리스도 밖에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붙여졌겠습니까? 그리스도 밖에 모르는 사람들, 모든 것을 그리스도에게 맞추는 사람들, 모든 결론을 그리스도로 내는 사람들, 그리스도를 말하고, 그리스도를 노래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았던 사람들, 그들이 바로 안디옥 교회 성도들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안디옥 교회 성도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려졌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안디옥 시민들이 보기에 그들은 착한 사람들이었지만,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착한 사람만은 아니었습니다. 안디옥 시민들이 보기에 그리스도인은 정직한 사람이었지만, 그저 정직한 사람만도 아니었습니다. 안디옥 시민들이 볼 때에 그들은 성실하고 근면한 사람들이었지만, 단순히 성실하고 근면한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순수하고 거룩하고 맑게 살아가는 데에는 단 한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하는 일 모두가 그리스도와 연관된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정직한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 때문에 정직했습니다. 그들은 원래가 선천적으로 진실한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 때문에 진실했습니다. 그들이 원래 순수하고 맑은 사람들이 아니라, 그리스도 때문에 순수하고 맑게 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도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의 삶의 모습이 달라져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진실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성결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솔직히 그리스도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진실한 삶을 살아갈 수가 없는 존재들이 아닙니까? 그리스도가 아니었다면 어쩌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방탕한 삶을 살고 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세상의 정욕과 육신의 쾌락을 잊어버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 때문에 오늘 나는 거룩한 성도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오늘 내가 이렇게 거룩하게 되었노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 그가 바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닮겠다는 자기 삶의 결단이 분명한 사람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갖는 의미는 그리스도의 손에 붙잡혀 살겠다는 열망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주의 손에 붙잡힘 바 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본문 21절의 말씀인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최초로 들었던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주님의 손에 붙잡힌 바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고난을 당하고, 생명의 위협을 당하면서도 평안을 잃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주의 손이 그들을 붙잡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훗날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던 비결은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손이 다메섹 도상에서 자신을 불러주셨던 손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로마서 8장에서 이렇게 자신 있게 고백을 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 내가 확신하노니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 여기에서 “주의 손”이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구약적인 표현입니다. 그래서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주님의 능력이 그들과 함께 했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성령의 역사가 믿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났다는 말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안디옥 교회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는 교회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하나님의 능력이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성도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임재하심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알 수가 있었다고 한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안디옥 교회에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로 돌아오는 역사는 지극히 당연한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박해의 시대에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안디옥은 세상의 달콤한 유혹이 많은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거룩한 백성,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살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이 자신들의 의지만으로는 되지 않기에 주님의 손에 붙잡혀 살기를 소망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보고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의 시대에는 이와 같은 거룩한 자존심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대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갖는 영광스러움을 회복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실천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성장이 빠른 사람일수록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생각이 복잡하지 않고 단순한 사람들입니다. 그날그날 말씀하신 대로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안디옥 교회의 그리스도인! 믿지 않는 이들이 보았을 때 그들은 세상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의 성공과 권세, 세상의 쾌락을 쫓는 이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예수만을 쫓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는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을 쫓았습니다. 예수님의 성품을 닮기 위해 줄기차게 노력했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뚜렷한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엄밀하게 말하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나의 생활과 가치관, 내가 추구하는 것들을 보고 불러주는 칭호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일종의 칭찬이요, 인정이요, 표지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장차 하나님 앞에서의 상급이 될 이름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조심스럽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진정 그리스도인입니까? 혹여 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인하는데,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해 주지 않고 있지는 않습니까? 일찍이 인도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간디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는 인정하고 존경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인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조금도 닮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조금도 그리스도를 닮으려고 하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다.”
솔직히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모습은 아닙니까? 그러므로 불신앙의 사람들의 눈에 내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비치고 있는지 늘 자신을 성찰하면서, 그리스도인다운 신실한 믿음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 땅에 하나님의 교회를 든든히 세워가며,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일에 귀하게 쓰임 받는 신실한 믿음의 권속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