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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감옥도 가둘 수 없었던 사람들
사도행전 12:1-19
빌립이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가이사랴에 있는 고넬료의 집에 가서 이방인 로마 사람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그 다음으로 안디옥에까지 복음이 전해집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복음이 이처럼 안디옥에까지 전파될 수 있었던 것은 “스데반의 일로 인하여”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복음이 이처럼 안디옥에까지 전파될 수 있었던 것은 사도들과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의 자발적인 전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에 불어 닥친 핍박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전략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핍박’이라고 하는 전략입니다. 환난과 핍박 ….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은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만약에 예루살렘에 환난과 핍박이 없었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대부분의 학자들은 아마 기독교는 예루살렘에서 유대교의 한 분파로 시작했다가 결국 유대교에 흡수되어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렇지만 스데반이 죽임을 당한 이후 불어 닥친 박해로 예루살렘 교회는 사도들만 남겨두고 모두가 온 유대와 사마리아를 비롯하여 여러 이방 지방으로 흩어졌습니다. 그 결과 복음이 안디옥에까지 전해진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을 뛰어넘어 반만년 동안 우상에 찌들어 살았던 이 땅에도 전해졌습니다.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지만 사도행전 8장 4절에 보면,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라고 말씀합니다. 이 한 마디가 그렇게 중요할 수가 없습니다. 흩어질 때에 그 사람들이 자신들이 가고 싶었던 길로 간 것이 아닙니다. 저들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그저 살기 위해 도망해야만 했던 피난민들입니다. 제대로 먹지도 못했을 것이고, 잠도 제대로 편안하게 자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저들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들이요, 실패자들입니다. 그렇지만 저들은 흩어진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전도합니다. 참으로 역설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들은 핍박으로 어쩔 수 없이 흩어졌지만,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것은 자발적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무명의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안디옥에 교회가 세워집니다. 누구라고 이름이 적혀 있지 않습니다. 누가 주도를 했고, 누가 전도를 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스데반의 일로 인하여 예루살렘에서 피난해 온 무명의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안디옥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을 통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얻기도 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은혜롭게 성장하는 가운데 흉년으로 어려움에 처한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 구제금 보내기로 결정합니다. 참으로 은혜로운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서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우리들의 시선을 밝고 화창한 안디옥이라는 무대에서 먹구름이 잔뜩 낀 어두운 예루살렘의 무대로 향하게 합니다. 그러면서 본문은 “그때에”라는 말씀으로 시작을 합니다. 여기에서 ‘그때에’라는 말은 바로 앞의 11장에 기록된 바와 같이 안디옥 교회가 한창 은혜롭게 성장하고 있었을 그때를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그때에 예루살렘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을 본문 1절이 주고 있는데,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신약성경에는 ‘헤롯’이라는 이름을 가진 다섯 사람이 등장합니다. 첫째는, 마태복음 2장에 등장하는 인물로서 헤롯 대왕인데, 그는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베들레헴에 있는 두 살 아래의 모든 아기들을 죽이도록 명령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본래 이방 혈통인 에돔 사람인데, 로마와 손을 잡고 로마의 허락 아래 유대인의 왕이 된 사람입니다. 둘째는, 헤롯 아켈라오라고, 대 헤롯에 이어서 왕이 되었지만 주후 4년으로부터 6년에 걸쳐서 왕 노릇한 사람입니다. 셋째는 마태복음 14장에 등장하는 인물로, 세례 요한의 머리를 베었던 헤롯 안티파스가 있습니다. 넷째는 오늘 본문의 헤롯 아그립바 1세이고, 다섯째는, 사도행전 26장에 등장하는 인물로써 사도 바울이 로마로 압송되기 전에 자신의 간증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서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라고 했던 헤롯 아그립바 2세입니다. 다섯 사람의 헤롯이 다 기독교를 박해했던 자들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헤롯 아그립바 1세는 로마에서 교육을 받고 그곳에서 성장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팔레스틴에서 성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로마 황제로부터 유대 지역의 분봉왕이 된 후 유대인들의 호의를 얻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친유대주의 정책을 펼치면서 율법과 유대인들의 규례들을 엄격히 지키려고 했습니다. 그의 그러한 정책은 유대인들에게 호의로 받아들여져서 유대인들에게 인기가 있었을 뿐 아니라 그를 형제처럼 생각했습니다.
특히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두터운 친분을 맺고 있었던 그는 그들로부터 예수님의 제자들에 의해 복음이 지속적으로 전파되는 것에 대한 걱정과 불만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자신의 든든한 지지 기반이었던 유대주의자들의 환심을 사서 자신의 위치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리하여 유대주의자들의 골칫거리였던 교회의 지도자인 사도들을 하나의 본보기로 삼아서 박해하고 핍박하였을 것입니다. 교회 지도자들을 없애버린다면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무너져버릴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그는 사도 야고보를 참수형에 처해 죽여 버렸습니다.
신약성경에는 ‘야고보’라는 이름을 가진 세 사람이 등장합니다. 요한의 형제이자 세베대의 아들인 야고보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그리고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등장하면서 이후 예루살렘 교회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는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입니다. 헤롯 아그립바에 의해 참수를 당한 야고보는 요한의 형제 야고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과 야고보 형제를 가리켜 ‘보아너게’, 즉 ‘우레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지어주기도 하셨습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는 세 명의 제자를 사랑하셨는데,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중요한 자리에 가실 때 항상 이들 세 명의 제자를 따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러 가실 때와 변화산에 가실 때에 이들 세 사람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앞에 두고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하러 가실 때에도 이들 세 사람을 따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당신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하나는 주님의 오른편에, 하나는 주님의 왼편에 앉게 해 달라”고 예수님께 요청하도록 자기들의 어머니를 부추긴 자들이 바로 야고보와 요한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야고보와 요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예수님의 이 물음에 성경은 누가 대답을 했다고 밝히지 않습니다. 아마도 야고보가 먼저 대답한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나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잔’은 포도주 잔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잔이요, 순교의 잔입니다. 야고보는 그 잔을 마시겠다고 했습니다. 야고보가 거기까지 알고 대답했는지, 모르고 대답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무튼 그의 고백처럼 헤롯이 교회를 핍박할 때 야고보는 참수를 당함으로써 그 잔을 마셨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야고보는 예수님의 말씀을 성취했습니다. 야고보는 열두 제자들 중에서 제일 먼저 순교하게 됩니다.
초대교회 교부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클레멘스에 의하면, 야고보를 고발했던 사람이 그의 남다른 용기를 보고 야고보의 발 앞에 엎드려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며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다고 고백했습니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그때 야고보는 그에게 “평강이 있으라”라고 말하며 입을 맞추었고, 그들은 모두 동시에 참수를 당했다고 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네 가지의 사형 방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돌팔매질을 통한 처형과 화형, 그리고 참수형과 교살입니다. 그런데 탈무드에 따르면 참수형은 우상숭배를 따르도록 다른 사람을 유인하고자 했던 사람들을 처형하는 방식이었다고 합니다. 야고보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경배하도록 사람들을 이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야고보를 참수형으로 처형했습니다. 헤롯이 이와 같은 잔악한 행동을 하게 된 동기는 전적으로 정치적인 것으로서 유대인들을 기쁘게 해 주고, 그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든 인생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삶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를 영화롭게 하는 일입니다. 모든 만물이 창조된 목적이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서 사역을 감당하실 때 언제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서 이렇게 말씀했는데,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이 고백처럼 사도 바울은 자신이 지금까지 일한 것은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자신은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보듯이 헤롯은 유대인들을 기쁘게 하려고 정의를 외면한 채 야고보를 참수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헤롯의 그와 같은 잔인한 행동을 보고 더 없이 기뻐했습니다. 같은 동족인 야고보가 처참하게 참수 당하는 것을 보고 같은 유대 사람들이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미 기독교가 커져서 유대교에 대한 도전적 세력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유대 사람들, 특히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에는 기독교가 아주 골치 아픈 존재였던 것입니다. 기독교가 살아 역사 하는 한, 자기들의 종교는 죽은 종교가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능력을 행하고 있는 한, 자기들은 무능한 자들이 됩니다. 저들이 유무상통하고 있으니 자기들은 부정한 자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헤롯에게 자신들의 불만과 불편함을 이야기했고, 헤롯이 대신하여 야고보를 처형하고 교회를 박해하니까 “잘 되었다”고 박수를 치면서 만족해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만족감을 보았던 헤롯은 내친 김에 그들을 더 만족시켜주고 환심을 사기 위한 또 다른 방안을 모색하게 됩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한 사건에서 만족을 얻게 되면, 그 다음에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것보다 더 자극적인 사건이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사람을 기쁘게 하려면 사람의 눈치를 보아야 합니다. 결국에는 사람에게 거짓과 위선으로 아부하고, 그들의 비위에 맞추기 위해 점점 더 위험하고 자극적인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헤롯은 유대인들의 마음을 확실히 사로잡고 환심을 사기 위해 당시에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지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베드로를 없애고자 감옥에 집어넣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직접적으로 박해를 가한다는 의미의 핍박일 뿐 아니라, 교회 전체를 없애고자 하는 말살정책인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대로 무슨 교리에 따른다거나 신앙적인 문제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순전히 정치적인 이유로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니까 “때는 무교절 기간이라”고 했습니다. 무교절은 유월절을 가리킵니다. 유월절이란 애굽에 노예가 되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방되었던 절기입니다. 그 의미를 살려서 유월절이면 죄수를 얼마간 석방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방면하고 사면하는 일이 있을지언정, 해방의 절기에 사람을 체포 한다던가 죽인다던가 하는 일은 못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무교절을 피해야겠다고 해서 저들은 체포한 베드로를 바로 죽이지는 않고 대기 상태에 있게 하는 것입니다.
본문 4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인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내고자 하더라.”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비록 중죄인이라 하더라도 한 명의 죄인을 한 사람의 보초병에게 쇠사슬로 매게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네 명이 한 조가 되어 3시간씩 각각 네 조로 경계를 서면서 교대로 임무를 수행하게 합니다. 그 가운데 두 명의 군사가 베드로의 양쪽에서 쇠사슬로 각각의 손을 묶어 지키고, 다른 두 명의 군사들은 밖에서 보초를 섰습니다. 뿐만 아니라 10절에 보면 또 다른 예방책으로 감옥 문을 완전히 차단하도록 커다란 쇠문을 사이에 두고, 또 다른 파수꾼 둘을 두었습니다. 하루 24시간 동안 베드로는 그렇게 병사들에게 묶여서 무교절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 베드로 한 사람을 위해서 이 정도로 삼엄하게 경비를 하게 했다면, 감옥 전체에 대한 경비는 얼마나 철통같았겠습니까!
그렇다면 헤롯이 그토록 삼엄한 경비를 서게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먼저, 그는 베드로가 예루살렘 교회의 중심인물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사실은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일찍이 베드로를 포함한 사도들이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의 시기로 옥에 갇힌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주의 사자가 옥문을 열어서 그들 모두가 감옥에서 나왔습니다. 아마도 헤롯은 그 사실에 대해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삼엄하게 경비를 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한 마디로 헤롯은 베드로가 탈출할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도 완전히 차단하기 위한 대비책으로 그토록 삼엄한 경비를 세웠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지금 바깥에는 자신들의 민족이 해방되었던 그날의 기쁨을 누리며 사람들이 축제에 들떠 있습니다. 그렇지만 무교절의 이 밤이 지나면 헤롯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베드로를 백성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처형할 것입니다. 베드로에 대한 판결은 이미 내려져 있습니다. 그는 공정한 재판을 받을 기회도 없이 아침이 되면 헤롯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오늘밤이 이 땅에서의 마지막 밤이 될 것입니다. 상황은 극도로 어두우며, 심지어 절망적입니다. 베드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것은 예루살렘 교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아침이 되면 자신들의 지도자인 베드로는 많은 유대인들 앞에서 공개 처형을 당할 것이고, 이후에 국가 권력을 앞세워서 노골적으로 교회와 자신들에게 박해를 가해 올 것입니다. 앞서 스데반의 순교로 많은 헬라파 유대인들이 뿔뿔이 흩어졌는데, 이제는 그나마 남아 있던 유대파 유대인들마저 죽임을 당하거나 살기 위해 뿔뿔이 흩어져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 개인은 물론이거니와 예루살렘 교회도 최대의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오늘의 본문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헤롯의 박해에 직면해 있던 베드로와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어떠한 태도를 취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헤롯의 박해로 야고보가 죽임을 당하고, 베드로마저 감옥에 투옥되어 죽임을 당할 위기에 처했을 때 베드로와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나아가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종종 우리의 인생에서 의도치 않게 찾아오는 고난과 시련이 있습니다. 그때 절망의 감옥에서 나오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첫째로, 죽음의 위기 앞에서 저들이 한 일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며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불과 며칠 전에 사랑하는 야고보가 유대인들 앞에서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베드로가 감옥에 갇혀서 참수형에 처해질 시간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헤롯은 베드로를 처형한 후에 그 칼로 교회를 향해 휘두를 것입니다. 그야 말로 사면초가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예루살렘 교회가 할 수 있었던 일이 무엇일까요?
당시 교회가 할 수 있는 가능한 일이 몇 가지 있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헤롯이 뇌물을 좋아하니까 뇌물을 주어서 베드로를 살려보자는 의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둘째는, 예루살렘 교회에는 힘 좀 쓰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비상 구조대를 조직해서 베드로를 구출해 보자는 의견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도 아니면, 헤롯이 베드로를 참수시킨 후에 자신들을 박해를 할 것이니까 각자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대책을 세울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때 예루살렘 교회가 선택한 계획이 무엇입니까? 이 물음에 본문 5절이 답을 주고 있는데,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본문에서 ‘간절히’라는 단어가 영어로는 “우리의 에너지를 다 소모해서 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더라’라는 단어는 베드로가 갇혀 있는 동안에 교회가 쉬지 않고 하나님께 계속적으로 기도를 드렸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간절한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절망의 감옥에 갇혀 있는 베드로를 위해 예루살렘 교회가 한 일은 쉬지 않고 드리는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12절에 보면,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이 베드로가 감옥에 갇힌 그날부터 기도하기 시작하여 그가 풀려난 그때까지도 그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이미 두 번씩이나 베드로를 비롯한 다른 사도들이 감옥에 갇혔던 경험을 했었습니다. 그때마다 그들은 모여 간절히 기도했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 위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또 다시 위기에 부딪친 것입니다. 더구나 베드로의 투옥은 야고보의 순교 직후에 있었던 일이고, 교회를 말살시키려는 헤롯의 음모가 분명하게 드러난 시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금번의 위기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직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 교회가 유일하게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어떠한 방법을 통해서라도 베드로를 구출해 주시기를 자신들의 몸의 에너지가 다 소모될 정도로 간절히 기도했던 것입니다. 일반적인 상황은 일반적인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비상한 상황은 비상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지금은 절체절명의 비상한 상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보통 기도로는 안 됩니다. 그것이 간구입니다.
본문 5절을 원어로 보면 ‘갇혔고’와 ‘교회는’이라는 단어 사이에 ‘그러나’라는 접속사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원문을 그대로 번역하면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다. 그러나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했다”가 됩니다. 말하자면 지금 상황이 인간적으로만 보면 기도나 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열두 사도 가운데 한 사람인 야고보가 순교했습니다. 이에 관한 한 헤롯은 피도 눈물도 없는 폭군입니다.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라면 그는 어떠한 짓도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며칠 남지 않은 명절이 지나면 교회의 수장인 베드로마저 참수형에 처할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다급합니다. 피가 마릅니다. 베드로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인간적인 수단을 강구해야만 하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렇게 하지를 않았습니다. 교회는 베드로를 구하기 위해 어떠한 인간적인 수단도 강구하지 않았습니다. 교회가 베드로를 위해 한 일이란 고작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일뿐이었습니다. 인간적인 시각과 판단으로 본다면 얼마나 무대책적인 일입니까? 그런데도 교회는 끝내 기도만을 고집했습니다. 기도 외에 다른 일은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고난 속에서 성도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무기는 기도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나약한 자가 마지막에 붙잡는 ‘지푸라기’가 아닙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기도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도는 교회의 가장 강한 벽이고, 요새이다. 그것은 기독교의 가장 뛰어난 무기이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기도하면서 왜 염려하십니까?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성경에 보면, 그리고 주변에서 간증을 들어보면 절망의 감옥에 갇혔을 때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일하시는 어떤 방법의 틀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기도를 시키십니다. 그래서 평소에 기도를 하지 않았던 사람들도 그때 비로소 기도를 시작합니다.
시간적으로 그때는 절망의 시간이었습니다. 포기하지 않을 수 없는 시간이었습니다. 지칠 수밖에 없고 잠들 수밖에 없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베드로가 자신들 앞에 설 때까지 기도하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결국 베드로의 양손을 묶고 있던 쇠사슬은 벗어지고 감옥에서 풀려났습니다. 성도들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해 보십시오.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십시오. 기도는 성도들이 지닐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기도는 절망의 감옥에 갇혔을 때 성도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태도입니다. 우리도 이와 같은 기도를 드림으로써 모두가 기도의 응답을 체험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둘째로, 절망의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베드로는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를 전적으로 믿었습니다.
만약 누군가의 인생에서 어제가 오늘과 완전히 단절되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어제 죽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 결코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서로 맞물려서 하나의 선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간은 점이 아니라 선입니다. 시간은 수많은 점들이 서로 이어져 선으로 연결되어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시간이 어느 점에 머물러 버렸다면 그 사람은 바로 그 시점에서 죽었음을 뜻합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의 삶도 역시 점이 아니라 선이 됩니다. 삶은 점이 아니라 계속 이어지는 선이기에 그 연장선 위에서 삶은 성장하기도 하고, 성숙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단, 살아 있는 사람일 경우입니다.
우리의 믿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앎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앎이 삶으로 이어지는 전 과정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머릿속에만 머물러 있는 생각이 아니라 반드시 겉으로 드러나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삶은 분리되지 않고, 삶이 점이 아니라 선이기에 믿음도 역시 점이 아닌 선일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누군가의 믿음이 각각 분리된 점들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면 그 믿음은 성장할 수도 없고, 성숙할 수도 없기에 그 믿음은 죽은 믿음이 됩니다. 그래서 성숙하고 살아 있는 믿음은 계속 이어져 가는 연장선 위에 있습니다.
보십시오. 야고보가 참수를 당했고, 베드로는 체포되었습니다. 이날 저녁이 지나고 아침이 밝아오게 되면 베드로는 많은 유대인들이 보는 앞에서 참수형에 처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베드로가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이 최소 며칠은 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무교절의 기간이 7일이라고 한다면 그는 여러 날을 감옥에 투옥되어 있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상황이 우리들의 상황이라면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어쩌면 투옥을 당하면서도 당장은 심적인 여유를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감옥에 갇히던 첫 날 밤에 감옥 밖에서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뜨거운 열정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 감옥으로부터 구출해 주실 것을 확신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하루 이틀이 지났습니다. 시간이 점점 흘러감과 동시에 마음속의 여유는 사라지고 불안과 두려움이 밀려오기 시작할 것입니다. 믿음은커녕 불신이 더 크게 증폭되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제 해가 졌습니다. 날이 밝으면 우리의 목이 떨어져 죽어야 할 판입니다. 시간은 계속 흘러만 가는데 주님으로부터는 여전히 아무런 응답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절망 속에서 그만 넋을 놓은 채 극심한 불안과 불신과 후회와 두려움에 치를 떨면서 밤을 꼬박 새울 것입니다. 그 절망 속에서 우리의 믿음은 전혀 선으로 이어지지 못한 채 기존에 지니고 있는 믿음의 선마저도 불신 속에서 토막토막 끊어지면서 불신의 점들로 분해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렇지만 베드로는 달랐습니다. 베드로가 마지막 날 마지막 밤이 되었을 때 그는 감옥 속에서 두 군사의 틈에 두 손이 쇠사슬에 묶인 채로 갇혀 있었습니다. 이제 해가 뜨면 자신의 목이 날아갈 판입니다. 군인들의 삼엄한 경계 속에 감옥에 갇혀 있던 베드로가 구조될 가능성이라고는 전혀 없습니다. 베드로는 앞서 순교했던 야고보와 똑같은 운명을 맞을 위기 앞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베드로는 그런 절망적인 상황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편히 누워서 자고 있었습니다. 본문 6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헤롯이 잡아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인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수꾼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
본문에서 ‘누워 자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잠자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똑같은 잠을 자지만 잠에도 두 가지의 차원이 다른 잠이 있습니다. 하나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버리는 잠이 있고, 다른 하나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편안하게 자는 잠도 있습니다. 베드로의 잠은 두 번째의 잠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알아서 해 주실 것을 전적으로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 자신이 그가 처한 암담한 상황 속에서도 전혀 불안과 공포를 느끼지 않은 채 오히려 편안히 잠을 잤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동시에 베드로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했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베드로는 사도행전 5장에서의 사건처럼 그날 밤에 주님께서 자신을 반드시 구해 주실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본문 11절 이하를 보면 베드로는 첫째 파수와 둘째 파수를 지나 감옥 밖에 나올 때까지 환상으로 착각했었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그날 밤 마지막 순간까지도 해가 뜨기만 하면 야고보처럼 자신도 참수형을 당할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절망적인 마지막 순간에도 베드로가 평안하게 잠을 잘 수가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를 온전히 믿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아픔이고, 지금은 고통이고, 지금은 힘들지만 그 속에서도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을 전적으로 믿었습니다. 자신이 살고 죽는 것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음을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베드로의 믿음은 멈추거나 점들로 분해되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죽음 이후 미래까지 연결되는 선으로 지속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런 믿음의 연속선 위에서 베드로를 구출해 주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습니다.
사실, 이전의 베드로는 주님을 위해서 수없이 많은 신앙행위들을 했지만 그 행위들은 불연속적인 점들로 분리되었고, 선으로 연결되지를 못했습니다. 때문에 그의 신앙은 성장할 수도, 성숙할 수도 없었습니다. 때문에 베드로는 3년 동안 밤낮 주님을 모시고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앙은 3년 동안 제자리만 맴돌고 있었던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선으로 이어지지 않는 믿음, 점으로 분리되어 버리는 믿음은 결코 살아 있는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죽은 믿음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본문의 베드로는 예전의 베드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피를 말리는 고통이 계속되는 시간 속에서도 그의 믿음은 결코 흔들리거나 무의미한 점들로 분해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믿음은 계속 연속선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연속선의 믿음을 가진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진 베드로를 하나님께서는 감옥에서 구출해 내시고, 인류의 역사를 새롭게 하는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절망적인 순간에도 연속선으로 계속 이어져야 합니다. 어느 순간에는 믿음이 드러나고, 어느 순간에는 믿음이 사라져버리는 그런 점과 같은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점들이 서로 이어지기 시작하면 그 점들은 더 이상 무의미한 점들이 아니라 그때부터 선으로 살아서 역사하며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백지에 수없이 많은 점을 찍는다고 할지라도 그 점 자체들만으로는 무의미한 점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일평생 주님을 위해서 수없이 많은 신앙행위를 한다고 할지라도 그 행위들이 불연속적인 점들로 분리되어 있다면 그 믿음은 절대로 성장할 수도 없고, 성숙해질 수도 없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살아 있는 믿음은 점이 아니라 선이고,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당신을 믿는 사람의 믿음의 연속선 위에서 당신의 선하신 섭리를 이루어가십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가 간절히 기도하고,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를 믿었더니,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베드로가 깊이 잠들어 있는 그 시간에 하나님의 개입하심이 시작된 것입니다. 천사를 보내어 놀라운 드라마를 시작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를 위해 그토록 치밀하게 역사하신 하나님께서 지금 이 시간에도 저와 여러분을 위해 치밀하게 역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하여 내 삶이 아무리 절망이어도 엎드려 기도를 시작하면, 그리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고 일어설 수 있다면, 절망의 감옥에서 나오게 하셨던 희망의 드라마는 오늘 여러분의 삶에도 일어날 것입니다. 그런 한 해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믿음과 신앙이 단절된 점이 아니라, 성숙과 성장을 통해 계속해서 이어지는 살아 있는 선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