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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사도행전 12:20-25
우리는 계속해서 사도행전을 통해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저자인 누가는 사도행전을 통해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어 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동력으로 세 가지를 강조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첫째로, 누가는 복음 전파의 중요한 동력으로 기도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기도생활을 자세히 소개한 누가의 관점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가는 앞서 기록한 누가복음에서 다른 복음서들보다 예수님의 기도생활을 더 많이 기록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에서는 성도들의 기도생활에 대해 꼼꼼하게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사도들과 성도들이 가룟 유다의 자리를 채우기 위해 먼저 했던 일은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성령 강림이 있기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모여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예루살렘의 권력자들이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제자들을 감옥에 넣고 위협할 때 그들이 한 행동은 기도였습니다. 헬라파 과부들의 구제 문제로 교회가 갈등에 직면하여 일곱 집사를 세울 때에도 그들은 먼저 기도를 했습니다. 베드로가 고넬료를 만나기 전, 그리고 헤롯에 의해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그들은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다음 주일에 살펴보게 될 13장에서 바나바와 사울을 선교사로 파송하기 전에도 먼저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이후에도 성도들의 기도생활에 관한 이야기는 사도행전 전체에 걸쳐 계속 강조되면서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해 누가가 우리들에게 이야기하고자 하는 핵심은 성도들에게서 기도가 없는 신앙생활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누가는 복음 전파의 중요한 동력으로 성도들의 모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사도행전을 기록하면서 부활하신 예수님과 사도들이 함께 모였다는 사실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사도들은 각자의 길로 뿔뿔이 흩어지지 않고, 120여 성도들과 함께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함께 기도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2장에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핍박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성전에 모이기를 더욱 힘쓰며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모이기를 힘썼다는 이야기는 사도행전 전 부분에 걸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초대교회 성도들이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며 그리스도의 공동체로 모인다는 것은 순교와 핍박을 각오해야만 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초대교회가 숨어 있는 지하교회였던 것이 아니라 주님을 드러내어 전하며 고백하는 일사각오의 교회였음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핍박의 시기에 자신의 신앙을 분명하게 고백하며, 자신의 그리스도인 됨을 세상이 다 알도록 모이기에 열심이었습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환난 중에도 성도들이 모여 기도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20장 25절에서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라고 권면합니다. 여기에서 “모이기를 힘쓰라”라는 말씀은 평화로운 시기에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초대교회사를 연구한 학자들에 의하면 초대교회 당시 핍박의 시기에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질까 두려워서 공적예배에 참가하기를 회피한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성도들 중에는 외부의 박해와 유대교로 회귀하려는 움직임 등으로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핍박을 두려워하고, 또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약해지면서 예배 모임에 참석하기를 포기하는 자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더구나 그들에게 예배 모임에 대한 포기는 하나의 습관처럼 굳어져 있었습니다. 이러한 바람직하지 못한 습관은 성도 상호간에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지도 못하게 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 공동체의 결속마저 해치는 일이 되고 맙니다. 자연히 서로에 대해 무관심하게 만들고 점차 이기적으로 변해가게 만들어버립니다. ‘사랑은 교제를 촉진하고, 교제는 사랑을 자극’하는데, 모이기를 폐하는 일이 일상적인 현상이 되어 버린다면 결국에는 기독교의 존립마저 흔들리고 말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성도는 유기체로써 각 지체의 한 부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모임에 참석하는 일은 성도 개개인에게나 교회 공동체에게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믿음을 성장시키고 확정할 뿐 아니라, 공동체 상호간에 위로와 격려를 줌으로써 힘 있게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이러한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교회를 무력화시키고, 성도들의 신앙을 퇴보로 몰아가고자 모임에 참석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려고 갖은 방법을 다 시도합니다. 그런 점에서 성도들의 모임은 종말론적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임을 폐하는 것은 불신앙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2장 19절에서 보듯이 초대교회에서 예배에 참석하기를 꺼려했던 것은 두 가지의 요인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것은 신앙의 열심이 식었거나 아니면, 사도들의 가르침을 외면하고 교회 공동체를 떠난 경우에 볼 수 있는 현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성도들은 계속해서 서로를 위해 권면함으로써 신앙의 나태와 믿음에서 떠날 수 있는 여지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는 사도행전을 통해 핍박과 환난 가운데서도 모이기를 힘썼던 성도들의 신앙을 본받을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누가는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는데 주도적인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사도들에 의해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었지만, 그 역사는 사도들의 주도적인 계획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개입하셨음을 확실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2장에서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신 사건은 하나님께서 요엘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 그 예언이 성취된 것으로 전적인 하나님의 역사였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제자들이 더 이상 마가의 다락방에 숨어 있지 않고 밖에 나와 담대히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전할 수 있었던 것도 그들에게 임하신 성령 때문이었습니다.
5장에서 제자들이 예루살렘 권력자들의 시기로 감옥에 갇혔을 때 “주의 사자”가 옥문을 열고 사도들을 데리고 나와 놓여나게 했습니다. 8장 26절에서는 주의 사자가 빌립을 에디오피아 내시에게로 이끄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9장 5절에서는 주님께서 성도들을 핍박하는 사울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회심시키는 역사적 전환점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환상을 통해 그가 고넬료의 가정에 가서 복음을 전하도록 계시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통해 헤롯에 의해 삼엄한 감옥에 갇혀 있는 베드로를 구해 주셨습니다. 이후의 사도행전을 보면 복음이 누구에 의해서 누구에게 전파되어야 하는지를 결정하시고 인도하시는 분은 사도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주도적인 개입하심과 역사는 사도행전 전체에 확연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결국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해서 누가가 우리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중심 메시지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고, 하나님 나라를 세워 가는 중대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기도’와 ‘모임’과 ‘하나님의 역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 땅에 복음이 전파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일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주도적인 역사에 근거합니다. 누가는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니까 허다한 사람들이 믿고 주께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이 예루살렘을 떠나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이방 지역으로 뻗어갈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그 길을 이끄셨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하기를 쉬지 말고,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모임 속에 하나님의 주도적인 역사하심과 이끄심이 있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교회는 결코 든든한 기초 위에 서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12장을 보면서 요지경과 같은 세상을 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탄의 자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구가 있는가 하면, 사탄의 도구가 있습니다. 마땅히 선한 사람이 승리를 해야 될 것 같아 보이는데도, 선한 사람이 무참하게 희생을 당합니다. 이런 모순들이 우리가 읽은 성경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처참하게 희생될 때에 슬퍼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오히려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군중들의 심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양심에 가책도 없이 의로운 피를 더 흘리려고 검은 마음을 품고 악을 꾀하는 정치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사도행전 시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도 버젓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정신이 번쩍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국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어도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하나도 안 변했습니다. 지금도 헤롯이 존재합니다. 지금도 피를 보고 즐거워하는 유대인들이 존재합니다. 이와 같은 무서운 세계 한 가운데에 교회가 있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있습니다. 헤롯이 손에 들고 살벌하게 휘두르던 칼날이 오늘날에도 우리 교회 주변에 있습니다. 지금도 피를 더 흘리기 위해, 교회를 아예 말살시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유대인들이 여전히 있습니다.
그러므로 12장의 사건은 이 세상에서 교회 역사에 끊임없이 일어났었고, 앞으로도 계속 일어날 수 있는 비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가 피를 쏟고 죽임을 당한 이후 얼마나 많은 의로운 사람들이 피를 쏟았습니까? 가인이 의로운 아벨을 죽인 이후로 의로운 자들의 핏 소리가 하늘에 사무치도록 요란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더 이상 참고 들으실 수가 없으셔서 하늘 보좌에서 일어나실 것입니다. 그날이 바로 이 세상의 종말입니다. 그날은 멀지 않은 때에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종말이 이르기 전에도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은 때때로 역사의 한 가운데서 심판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특별히 사도행전 12장은 헤롯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헤롯의 가문은 본래 에돔 사람으로써 유대인의 왕이 되어 교회를 대적했던 하나님과 원수된 저주받은 가문입니다. 헤롯 대왕은 예수님을 죽이려다가 실패하니까 베들레헴에 있는 죄 없는 두 살 아래의 모든 어린 아기들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전부다 죽였던 아주 지독하게 더러운 왕이었습니다. 그 아버지의 피를 아들이 그대로 이어받습니다. 그는 동생의 아내를 탐해서 본래 아내를 내쫓고 동생의 아내와 결혼을 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그의 잘못된 행동을 지적했더니 감옥에 가두었다가 부인을 즐겁게 하기 위해 세례 요한의 목을 쟁반에 담아서 주었던 고약한 임금이 헤롯 대왕의 아들 헤롯 안티파스입니다. 그런데 이런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더러운 피가 헤롯 아그립바 1세에게 다 갔습니다.
12장에 등장하는 헤롯 아그립바 1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간교함과 사악함을 다 물려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영달과 출세, 향락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사람은 자신의 욕망을 성취하기 위한 대상이었을 뿐입니다. 더구나 그는 유대와 사마리아 전체를 다스림으로써 할아버지 대헤롯 때보다 더 큰 세력을 확보했던 왕입니다. 그런데 헤롯 아그립바 1세는 이렇듯 큰 세력을 가졌지만 실제로는 애매한 위치에 있었던 왕입니다. 그 위에 왕이 또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로마 황제입니다. 그러고 보면 그가 왕 노릇을 하기가 얼마나 어려웠겠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백성들의 환심도 사야 되고, 로마 황제에게도 잘 보여야 됩니다. 그럼에도 그는 비교적 나라를 잘 다스리는 편이었습니다. 백성들의 환심을 사는데 탁월한 재주가 있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교회 지도자인 사도 야고보를 참수형에 처해 버렸습니다. 그랬더니 유대인들이 야고보의 죽음을 보고 “헤롯 왕 만세!”를 부르며 너무 좋아합니다. 그 모습을 보고 내친 김에 사도들 가운데 우두머리 격이었던 베드로마저 죽여서 유대인들의 환심을 확실하게 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때가 무교절이라서 베드로를 곧장 처형하지 못하고 감옥에 가두어 두었습니다. 그렇지만 베드로가 처형되기 전날 밤에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철통같이 삼엄한 경비의 감옥으로부터 베드로를 구출해 내셨습니다.
이튿날 베드로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헤롯은 무고한 파수꾼들을 심문한 뒤에 그들을 죽여 버렸습니다. 당시 로마법에 따르면 만일 죄수가 도망을 가면 그를 지키던 사람이 그의 형벌을 대신 감당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헤롯이 파수꾼들을 죽였다는 사실에 근거해 볼 때, 베드로를 죽이는 것이 그의 분명한 의도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무교절이 끝나는 날 베드로는 죽을 운명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날 밤에 베드로를 절망의 감옥에서 구출해 내십니다. 결국 헤롯은 베드로를 처형함으로써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려고 했던 자신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유대인들에게 체면치레라도 하기 위해 파수꾼들을 처형시키고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가이사랴로 내려가 버렸습니다.
가이사랴는 지도에서 보듯이 예루살렘의 북서쪽 약 104km 떨어진 지중해 연안에 있는 도시로서 그의 할아버지 헤롯 대왕이 로마의 환심을 사기 위해 세운 아주 큰 항구도시입니다. 그는 막대한 비용을 들여 자연의 불리한 조건을 극복하고 거대한 인공 항구도시를 건설했습니다. 그는 깊이가 36.6m나 되는 바다를 거대한 돌들을 넣어서 메웠습니다. 바다를 메우는데 사용된 돌들 중에 큰 것으로는 가로 15m, 세로 3m, 높이가 2.7m 가량 됩니다. 이 돌들로 메워서 건설된 항구의 길이가 무려 61m에 달했습니다. 12년에 걸친 대장정 끝에 완공된 항구 도시에는 식수로 사용할 물을 얻기가 어려워서 북쪽에 있는 갈멜산으로부터 물을 끌어들이기 위해 9km에 달하는 거대한 수로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당시 4천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로마식 야외극장과 원형경기장 등 최고의 건축물을 세웠습니다.
헤롯 대왕이 이처럼 거대한 도시를 건설했던 것은 자신이 이스라엘의 위대한 통치자임을 과시하기 위함이 있었지만, 동시에 로마 황제의 환심을 사기 위함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신설한 항구 도시에 로마 황제의 칭호인 ‘카이사르’를 붙여서 ‘가이사랴’라고 명명했습니다. 당시 로마 제국 내에는 로마 황제의 칭호나 이름이 붙어 있는 도시가 적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아무 도시에나 로마 황제의 칭호나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도시의 규모가 반드시 일정 규모 이상이어야만 했고, 또 도시 한 가운데나 주요 지점에 반드시 로마 황제의 신전이 자리를 잡고 있어야만 했습니다.
헤롯 대왕이 심혈을 기울여서 건설한 항구 도시의 이름을 ‘가이사랴’라고 명명했다는 것은 그 도시 한 가운데에 로마 황제의 신전이 자리 잡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항구를 향해 멀리 바다에서도 신전을 바라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가이사랴는 신으로 군림하는 로마 황제가 인간의 경배를 받으면서 황제의 논리가 인간을 압도하는 황제의 도시였습니다. 그리고 그 도시는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자기 욕망을 삶의 유일한 목적으로 삼고 살아가는 인간들의 욕망으로 가득 찬 도시였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바로 그 욕망의 도시인 가이사랴로 내려간 헤롯 아그립바 1세에게 일어났었던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왕궁에 있던 그가 왜 갑자기 가이사랴로 내려갔는지에 대해서 본문에서는 정확하게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 당시에 살았던 유대 역사가인 요세푸스가 쓴 고대사에 의하면 그때 헤롯 아그립바 1세는 영국 원정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로마 황제 글라우디오를 축하하기 위한 축제에 참석하러 가이사랴에 내려갔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로마 황제에 의해 임명된 분봉왕이었기 때문에 로마 황제를 축하하는 축제를 개최하고 참석하는 것은 그의 주요 업무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본문 20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헤롯이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대단히 노여워하니 그들의 지방이 왕국에서 나는 양식을 먹는 까닭에 한마음으로 그에게 나아와 왕의 침소 맡은 신하 블라스도를 설득하여 화목하기를 청한지라.”
본문에 나오는 두로와 시돈은 지도에서 보듯이 이스라엘 국경 북쪽 레바논의 남쪽 해안 지역에 위치한 항구도시로서 당시 상업과 무역이 크게 발달된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그렇지만 이곳의 땅은 대부분 예전부터 농업에 알맞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솔로몬 왕 때부터 자신들의 땅인 레바논에서 나는 백향목과 잣나무 목재를 자신들의 식량과 교환해 갔었습니다. 그리고 초대교회 당시 그들의 식량을 공급해 왔던 지역이 바로 헤롯이 다스리는 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헤롯이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대단히 노여워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대단히 노여워하다’라는 원어는 ‘큰 적개심을 품고 전쟁하다’라는 뜻인데, 신약성경에서 이곳에서 단 한번만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헤롯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그가 두로와 시돈 사람들에 대하여 계속적으로 크게 분노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학자들은 아마도 그것이 무역 마찰이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결국 그들에게 적개심을 품게 된 헤롯이 갑자기 그들에 대한 양식 공급을 중단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식량의 대부분을 유대에 의존하고 있었던 두로와 시돈 사람들은 큰일 났습니다. 식량의 문제는 생존의 문제입니다. 때문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헤롯과의 다툼을 극복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더구나 이 일이 아마도 가뭄 기간에 있었기 때문에 헤롯의 마음을 돌리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했습니다. 헤롯이 싫어도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왕의 침소를 맡은 시종장이며, 동시에 재정 담당관인 블라스도와 친분을 맺기 위해 안간힘을 다 섰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헤롯이 글라우디오 황제를 위한 축제에 참석하기 위해 가이사랴로 내려왔다는 정보를 블라스도를 통해 듣게 됩니다. 그리고 그 후에 일어난 일들이 본문 21절 이하에 기록되어져 있는데, 먼저 21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단상에 앉아 백성에게 연설하니.”
본문에 보면, “헤롯이 날을 택하여”라고 했는데, 헤롯이 정한 날에 대해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고대사에서 당시의 역사적 사실을 좀 더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영국 원정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로마 황제 글라우디오의 개선을 기념하기 위해 성대한 축제를 로마 황제의 생일인 8월 1일에 있었습니다. 축제는 여러 날 계속되었는데, 그 둘째 날입니다. 헤롯은 그 자리에 있지도 않은 글라우디오를 즐겁게 하겠다고 가이사랴에서 축제를 준비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둘째 날에 두로와 시돈의 지도자들이 헤롯과 화해하기 위해 가이사랴를 방문했던 것입니다.
헤롯은 그날 그곳에 주둔하고 있던 많은 로마 군인들을 초청하여 많은 사람들과 함께 큰 잔치를 벌였는데, 로마 황제는 그 자리에 없으니까 결국은 자기가 황제처럼 나타납니다. 로마 황제를 위한 잔치이지만 결국은 자기가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은 것입니다. 그날 이른 아침에 그는 온통 은을 두드려서 만든 화련한 긴 옷을 입고 극장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데, 그 옷은 태양 빛에 반사가 되면 휘황찬란한 빛이 발산되도록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화려한 복장은 그곳에 모인 많은 사람들에게 왕으로서의 위엄을 과시하는 큰 효과를 만들어내었을 것입니다. 헤롯은 그렇게 당당하고 위엄에 찬 모습으로 백성들 앞에 앉아 연설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때 그곳에 모였던 사람들이 열렬한 박수를 보내면서 소리를 지르는데, 본문 22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하거늘.”
요세푸스의 기록에 보면 저들이 헤롯을 향하여 “당신을 이제부터 신으로 섬기겠나이다”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당신은 사람이 아닙니다. 신입니다. 신으로 섬기겠습니다.” 헤롯은 기분이 좋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헤롯에게 찬사를 보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헤롯으로부터 환심을 사기 위해 두로와 시돈에서 동원된 박수부대였습니다. 그들은 헤롯이 양식 공급을 끊어버림으로써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외침에는 진실이 담겨 있을 리가 없습니다.
더구나 정통 유대인들은 유일하신 하나님만을 섬겼기 때문에 사람을 신으로 숭배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에돔 사람이면서도 유대인의 왕으로써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유대의 율법과 규례를 엄격하게 지켰던 헤롯은 마땅히 그와 같은 아부꾼들을 책망했어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헤롯은 자신을 신이라고 칭송하는 그들을 책망하지도 바로 잡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의 불경한 아첨을 거절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을 향해 “신이다!”라고 외치는 환호와 찬사를 당연하다는 듯이 즐겼습니다. 그의 안중에는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아니, 자신이 이미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하나님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때 비참하고 끔찍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그날 일어났던 일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헤롯이 군중들의 칭송에 잔뜩 취해서 즐기고 있을 때 유대인들이 불길의 징조로 여기는 올빼미 새 한 마리가 날아오더니 원형극장 기둥 위에 앉았습니다. 헤롯이 올빼미를 보는 즉시 갑자기 장 속에서 일어나는 극심한 복통으로 그 자리에 쓰러져 버렸습니다. 신하들에 의해 재빨리 궁궐 안으로 옮겨진 헤롯은 5일 동안 극심한 복통으로 사경을 헤매다가 54세의 나이로 죽고 말았습니다. 죽으면서 그는 마지막 말을 이렇게 했다고 합니다. “너희가 나를 신이라고 부른 것으로 인하여 나는 죽게 되었다.” 죽으면서 정신을 딱 한 번 차린 것 같습니다.
헤롯 아그립바 1세, 그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는 전혀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인생 목적과 최대의 관심사는 자기 욕망이었습니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라면 죄 없는 사람을 투옥시키고, 목을 자르고, 단지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만으로 시돈과 두로 사람들을 굶어 죽게 만드는 위험 속에 빠뜨리는 등 무슨 짓이든 서슴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무엇이 정의이고 불의인지 구별할 수 있는 능력조차 갖추지 못한 어리석은 인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는 권력에 심취해서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하나님의 자리에 앉기도 했었습니다. 그의 권력은 가히 무소불위의 권력이었습니다. 그 권력으로는 하지 못할 일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 권력이라면 자신의 생명을 천년만년 지킬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욕망의 도시 가이사랴에서 5일 동안 극심한 고통을 당하다가 죽었습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헤롯이 급성 복통으로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을 뿐 그가 어떻게 해서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본문에서 의사였던 누가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는데, 본문 23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
본문은 헤롯이 “벌레에게 먹혀 죽었다”고 말씀합니다. 학자들은 장내에 살고 있는 회충이 단단한 공 모양을 형성하여 장 폐색증을 일으킴으로써 죽게 되었다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렇게 비참하게 벌레에 먹혀 죽고 말았습니다. 그는 권력으로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고 생명을 위협했지만, 정작 자신의 생명을 갈아먹는 벌레 한 마리도 물리칠 수 없었습니다. 본문은 그 이유를 말씀하기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쳤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누가는 자신이 의사였음에도 불구하고 헤롯의 죽음에 대한 의학적인 전문 용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헤롯이 죽게 된 근본 원인이 무엇인가를 더 강조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즉 헤롯이 사도를 죽이며 교회를 박해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챈 그의 패역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헤롯의 이야기는 23절에서 비참하게 끝이 납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24절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는데,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오늘의 본문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살았던 헤롯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벌레에 먹혀 죽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면서, 바로 뒤이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 하였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즉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를 투옥하는 등 교회를 박해했던 헤롯은 급사한 반면, 하나님의 말씀은 점점 더 흥왕하여 갔습니다.
사실 헤롯의 박해 앞에서 교회는 참으로 무기력해 보였습니다. 사도 야고보가 헤롯에 의해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베드로마저 감옥에 갇혔습니다. 심지어 자신들의 생명마저 위협을 받았습니다. ‘설상가상’이라는 말은 바로 이러한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일 것입니다. 당시 헤롯의 박해는 교회로서는 더 이상 견디기 어려운, 마치 숨통을 끊는 것과 같은 대단히 위력적인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뿐 아니라 성도들 모두가 지리멸렬 당할 위기에 놓였습니다.
그런데 야고보의 순교로 교회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핍박을 당할 수는 있지만, 그 핍박으로 인하여 상태가 더 나빠지지는 않습니다. 사실상 핍박은 종종 금을 연단하는 불처럼 보이는데, 이 불을 통과하면서 교회 안의 불순물은 제거됩니다. 그리고 정화된 교회는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그리하여 누가는 본문에서 바로 이러한 고난에 뒤이어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점점 더 널리 퍼져서 믿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의 박해가 강하면 강할수록 더욱더 크게 번성하는 강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의 기록과 더불어 2천 년의 교회사가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어떠한 훼방이나 박해도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고, 교회가 성장하는 것을 저지할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은 세상에 하나님을 대적하여 이길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고 살았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마저 헤롯을 외면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헤롯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예외 없이 흥왕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에게는 생명의 말씀으로 흥왕했다면, 그 말씀을 외면했던 헤롯에게는 저주와 심판의 말씀으로 흥왕했습니다.
헤롯이 머물렀던 가이사랴는 신으로 경배를 받는 로마 황제의 논리가 세상을 압도하는 황제의 도시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스스로 하나님이 된 인간들이 욕망에 눈이 멀어 오직 욕망의 논리를 좇아 사는 욕망의 도시였습니다. 그 욕망의 도시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전혀 통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 아무런 영향력도 미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착각일 뿐이었습니다. 욕망의 도시인 가이사랴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어김없이 흥왕했습니다.
온 우주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지 않을 곳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단지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의미로 흥왕하였느냐의 차이 밖에 없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과 축복의 말씀으로 흥왕하였느냐, 아니면 심판과 저주의 말씀으로 흥왕하였느냐의 차이입니다. 본문 23절을 기점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헤롯과 가이사랴는 심판과 저주로 흥왕하였던 반면에, 바나바와 사울이 있는 안디옥 교회는 생명과 축복의 말씀으로 흥왕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도 야고보와 헤롯을 한 번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 야고보는 패자 같고, 헤롯은 승자 같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며칠 사이입니다. 야고보가 세상을 떠난 것처럼 헤롯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죽음 이후 그들의 영원한 운명을 한 번 비교해 보십시오. 야고보는 주님의 오른편에 앉아 있고, 헤롯은 사탄의 오른편에 던져져 있는 그 운명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무엇보다 ‘헤롯’이라는 이름을 자기 아들에게 붙여주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야고보’라는 이름은 넘쳐납니다. 미국에서 제일 많은 이름이 ‘요한’이고, 그 다음에 두 번째가 ‘야고보’라고 합니다. 야고보는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사랑 받는 이름이요, 하나님 나라에서 별과 같이 빛나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반드시 죽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먼저 죽느냐, 늦게 죽느냐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비록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초라하게 죽는 것 같아 보여도 영원토록 남는 영광스러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생명과 축복의 말씀으로 흥왕하여 더해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일시적으로 교회는 망하고 핍박을 당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권력자들의 칼은 부러져도 하나님의 나라는 반드시 흥왕합니다. 반드시 승리합니다. 우리가 이 비전을 갖고 어떤 상황에서도 야고보와 같이 낙망하지 말고, 베드로와 같이 평안한 마음을 가지고, 주님의 일을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들의 삶 가운데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날마다 흥왕하여 더해 가는 하나님의 복을 누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