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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사람, 예배자로 살게 하소서!
시편 50:5, 로마서 12:1
2023년 계묘년 새해 아침에 역사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복이 여러분과 가정과 일터 위에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인류의 어느 누구도 살아보지 못한 2023년을 맞은 새해 벽두에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여기 이곳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러 왔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하나님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듣는 가운데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지난 2019년 2월, 영국의 BBC뉴스의 보도에 따르면, 지금의 세대를 가리켜 “밀레니얼 번아웃” 세대라고 표현했습니다. 밀레니얼 번아웃이라는 말은 번아웃 증후군을 뜻하는 것으로, 극심한 육체적․정신적 피로를 느끼고 열정을 잃어버리는 증상을 통칭하는 용어입니다. 이것은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사회적 분위기와 존재만으로 가치 있다고 믿기에는 수없이 밀려오는 상대적 박탈감 등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증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정신적 탈진이라고 하면 더 이해하기가 쉬울 듯합니다. 이러한 상태는 곧 극심한 스트레스로 이어져서 마음의 병을 얻기도 하고, 우울 증상을 겪기도 합니다. 지금의 시대를 이렇게 통칭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번아웃 증후군을 겪고 있는 세대를 향하여 많은 전문가들은 이런 저런 해결법을 제시합니다. “자세를 바꾸어라”, “심호흡을 하며 간간히 산책을 하라”, “시간을 현명하게 관리하라”, “충분한 수면을 취하라”, “브레이크를 밟지 말고 기어를 전환하라.” 그런데 전문가들이 제시하고 있는 이러한 해결책들이 과연 무기력하고, 갑자기 불이 꺼진 듯 방전되어 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말하는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을까요?
과거 가난해서 배가 고팠던 시절에 우리의 부모님들은 열심히 돈을 벌어서 먹을 것이 풍족한 시대가 오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잘 살아보자”라는 일념으로 허리띠를 졸라매고 잠도 설쳐 가면서 정말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풍성히 누릴만한 시대가 왔음에도 오히려 행복은 멀어지고 사람들은 더 힘들고 고단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토록 얻고자 하던 것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온전한 회복과 행복은 오지 않을까요?
구원받은 믿음의 성도들이라면 누구나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존재 목적은 먹고 마시는데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결코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세상에서 모든 부귀영화를 다 누렸던 솔로몬이 노년에 깨달았던 진리는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는 헛되다”는 것이었습니다. 솔로몬은 이 땅에서는 사람을 만족시킬만한 것은 없으며, 그러므로 인생들을 향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라고 권면합니다.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제1문에서도,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사람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경외할 때에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존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번아웃 증후군의 근본적인 원인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이 땅에서 자신이 누리지 못하는 것을 향해 악착같이 얻으려고 하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깊은 바다의 끝은 있어도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들을 채우고 또 채워도 만족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삶의 결국은 목마름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이 참된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만 경외하는 것입니다.
지난 2020년 코로나가 확산되기 시작했을 때 미국의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BC를 코로나 이전(Before Corona) AC를 코로나 이후(After Corona)로 부르며, 세계는 코로나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라고 했습니다. 3년의 코로나를 겪으면서 돌아보면 사실이 그렇습니다. 우리의 일상은 코로나 이전과 이후를 경계로 많은 것들을 바꾸어놓았습니다.
무엇보다 코로나가 우리에게 가져다준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공동체를 향한 희생보다 개인의 편리함을 우선시 여기게 만들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코로나 이전에는 귀찮고 힘들어도 각종 모임에 나가야 했었고, 경조사에는 반드시 참여해야만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 비난들을 감수해야만 했습니다. 때문에 그런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참여해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코로나를 겪으면서 이제는 모임과 행사에 참여하는 것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할 수도 없습니다. 사람들도 이전처럼 공동체에 얽매여서 희생하기보다 개인의 자유와 편리함을 더 추구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교회도 결코 예외일 수 없습니다. 코로나 이전에는 어쩌다가 교회에 빠지고 싶어도 담임목사님으로부터 시작해서 구역장, 권찰 등 교회의 여러 사람들부터 폭탄 전화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 전화가 부담이 되어서 가급적이면 교회에 출석을 하고 다른 일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코로나라는 이유만으로 그 모든 것이 다 이유가 되고, 묵인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모임에 왜 안 나왔는지, 예배에는 왜 빠졌는지에 대해 묻는 사람도 없습니다. 오히려 묻는 것이 이상한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코로나의 상황이 만들어준 편리함에 취해 개인의 자유를 누리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편리함이 공동체의 유대성과 사회적 관계성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심지어 가족관의 유대관계도 허물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편리함은 기독교 신앙에서의 생명력과 역동성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잃어버린 명목상의 신앙인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개인의 불이익과 불편함마저도 감수하면서 경건의 훈련을 이어왔던 한국교회의 아름다운 신앙적 전통과 유산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교회는 이제부터라도 예배를 온전하게 회복하면서, 동시에 예배의 전통을 다음세대에 전수하고,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 회복해야 할 가장 우선적이고 중요한 것은 기독교 신앙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예배’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받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신비를 감사드리며 송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예배가 코로나를 겪으면서 인본주의에 떠밀려 심대하게 훼손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단은 이러한 시대적 위기를 깨닫고, 교회 현장의 요청에 책임을 다하고 시대적 도전에 응답하고자 지난 107회기 총회에서 “복음의 사람, 예배자로 살게 하소서”라는 주제를 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도 총회의 뜻에 따라 금년에 “복음의 사람, 예배자로 살게 하소서”라는 주제로 방향을 정하여 한 해를 살아가고자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간 금년의 주제를 다같이 외쳐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복음의 사람!”이라고 외치면, 여러분들은 “예배자로 살게 하소서!”라고 힘차게 외쳐주시기를 바랍니다.
“복음의 사람, 예배자로 살게 하소서”라는 주제는 먼저, “우리가 누구인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에 대한 응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복음의 사람”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십자가의 복음을 믿고, 그 믿음으로 삶의 현장에서 역동적으로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의 사람”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구원받고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도록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을 말합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우리를 설레게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희생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다시는 죄악에 매이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해방과 자유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활의 기쁜 소식이 우리의 심장을 뛰게 하는 것은 이 땅 위에 살아가는 모든 피조물들이 처해 있는 죄와 죽음의 사슬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여금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복음은 어떤 시련과 고난 중에도 우리에게 멈출 수 없는 힘과 능력의 근원이 됩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나라와 정의가 하늘에서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따라서 복음의 사람들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나라’라는 영광된 푯대를 향해 힘차게 달려가게 하시는 이, 곧 우리에게 복음을 주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경배해야 하는 마땅한 이유를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통해 우리를 예배자로 부르셨습니다. 지금도 그 복음을 통해 예배자로 부르고 계십니다. 이것은 주님의 나라가 임하는 그날까지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배자로 부르시는 그 사랑의 초대에 “아멘”으로 응답하는 자가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며, 그 사람이 바로 복음의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위기는 곧 기회다”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이것은 ‘위기’라는 단어 속에 ‘위험’과 ‘기회’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위기란 꼭 나쁜 것만이 아니라 발전과 쇄신의 기회가 된다는 뜻입니다. 위기 속에서 낙심하고 주저앉아 있을 것이 아니라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 그것을 통해 다시 일어나 성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세계적인 재난이었던 코로나 사태는 한국교회에도 가장 치명적인 위기로 다가왔습니다. 교인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려야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데, 현장 예배를 드릴 수 없는 불가피한 상황 속에서 교회는 속수무책으로 그저 이 또한 지나가기만을 바랄 뿐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마냥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바랄 수는 없습니다. 그러한 생각과 행동은 하나님이 원하시지도 않으십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코로나와 같은 바이러스로 인한 극심한 위기를 겪었던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중세 말기였던 14세기와 15세기에는 흑사병으로 유럽 인구 중에서 1/3이 죽었습니다. 당시 유럽인들은 흑사병으로 정신적인 방황과 우울증, 죽음에 대한 심각한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앞의 그림은 1440년에 그려진 스위스 바젤 지방을 배경으로 한 “죽음의 춤”이라는 그림입니다. 그림을 보면, 벌거벗고 썩어 가는 해골이 춤을 추면서 다양한 신분과 계층의 사람들을 둘러싸고 희롱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한 마디로 사람들의 우울하고 위축된 심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시 흑사병은 가족관계가 붕괴되고, 사회적 결집력을 심각하게 훼손시켰습니다. 가족 중에 누군가가 흑사병에 걸리면 그를 버려두고 도망을 갔습니다. 나라도 먼저 살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위기의 상황에서 공동체를 세우고, 가정을 세우려는 노력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에 의한 희생적인 헌신과 섬김이었습니다. 그들은 흑사병이라는 죽음의 위협과 두려움 가운데서도 흑사병에 걸린 사람들을 치료하고 구제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종교개혁자 쯔빙글리는 그의 동생이 흑사병으로 죽었고, 자신도 흑사병에 걸린 사람들을 구제하는 일에 헌신하다가 흑사병에 걸려서 죽음의 문턱까지 갔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섬김과 희생과 사랑을 기억하면서 어려움에 처한 이웃과 형제들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섬김과 희생을 통해 하나님의 교회는 세상 속에서 거룩한 영향력을 미치며 성장해 왔습니다.
이와 같은 아름다운 섬김과 헌신은 한국교회에서도 끊임없이 있어 왔습니다. 한국교회 초기에 중부지방을 중심으로 말라리아가 창궐하고 많은 사람들이 죽어갈 때 선교사들과 믿음의 선배들은 그 속으로 들어가 희생했습니다. 한국교회 믿음의 선배들은 자신들보다 교회와 이웃을 먼저 생각했고, 영혼을 구하는 일에 자신을 바쳤습니다. 나아가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고, 모이기를 힘쓰면서 위기를 극복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도 다시 일어나 하나님 앞에서 깨어 기도하고, 더욱 열심히 수고하며, 하나님의 힘주심과 도우심을 의지하여 우리 시대의 여러 가지 어려운 위기를 극복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에 함께 모여 공동체로 드리는 예배의 소중함을 깨닫고 다시 예배자로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복음의 사람들을 예배자로 부르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일반적으로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예배는 우리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명령이요, 이에 상응하는 우리의 의무와 사명으로 각인 되어 왔습니다. 예배는 예수님을 믿는 성도로서의 마땅한 도리였고,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은 자에게 요구되는 순종이었습니다. 나아가 청지기에게 기대되는 기본적인 충성이었습니다. 심지어 신명기 28장 47절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께서 여러분에게 풍성하게 주어 잘살게 하실 때에 여러분이 감사하며 기쁜 마음으로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지 않으면 여호와께서 여러분에게 원수들을 보내어 그들을 섬기도록 하실 것”이라고 경고를 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 비추어 오늘의 예배드림에 관하여 깊이 숙고해 보아야 합니다.
본문의 시편 50편은 외적인 형식만 갖추고 진정한 감사와 찬송이 없는 제사를 드리는 예배자들을 책망하면서 참된 예배가 무엇인지를 교훈하는 시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인 시편의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과 세상 앞에서 어떤 존재로 서야 하고, 또 어떤 태도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언약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성도는 영과 진리로 드리는 참된 예배자로 살아가는 복음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배자로 사는 복음의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예배자로 사는 복음의 사람은 단지 입술로만 고백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또한 경건의 모양을 가지고 흉내를 내는 사람도 아닙니다. 나아가 겸손을 가장하면서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위선적인 예배자의 모습은 더더욱 아닙니다. 음악가로서 작곡가이자 목사인 밥 코플린은 그의 책 참된 예배자라는 책에서 참된 예배는 “예수님이 절대적으로 중심이 된 예배”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누리는 기쁨과 감사, 위로, 평안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고 있다면, 그가 바로 참된 예배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말씀하셨듯이 참된 예배자는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예배자로 사는 복음의 사람이 왜 필요할까요?
최근 여론조사기관에서 진행한 교회에 대한 이미지 조사 결과는 우리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얼마 전, 한 여론조사기관에서 “교회를 신뢰하나요?”라는 질문에 “그렇다”라고 응답한 것이 31%에서 18%로 추락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통계 수치를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오늘의 한국교회가 사회에 주는 신뢰도는 입에 담기가 너무 부끄럽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에 대한 이미지에 대한 부정적인 결과는 교회가 교회로서의 그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의 구성원들인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에서 책임 있는 삶을 살아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들을 통해서 세워진 신앙공동체입니다.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인들의 삶이 교회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복음이 경험되지 못하고, 바르게 예배하는 삶이 되지를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교회의 정체성뿐만 아니라 성도로서의 분명한 정체성도 확립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한 신앙과 삶이 일치되지를 못하고, 형식적인 신앙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예배자로 사는 복음의 사람으로 세워지지를 못했습니다. 그 결과 교회에 대한 이미지가 지금과 같이 추락하게 된 것입니다. 복음의 경험이 상실되고, 예배자로 사는 복음의 사람들의 모습이 사라진 이 시대에 예배자로 사는 복음의 사람은 절대적으로 시대의 요청이자,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그렇다면 예배자로 사는 복음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성도로서의 분명한 정체성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본문 시편 50편 5절 상반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르시되 나의 성도들을 내 앞에 모으라.”
50편의 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1-6절은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 제사로 당신과 언약한 자들을 판단하기 위하여 온 세상의 거민들을 증인으로 소집하셨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7-15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형식적인 제물의 무가치함을 지적하시면서 진정한 감사의 제사만이 당신을 영화롭게 할 수 있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16-21절은 입술로는 하나님의 율법에 대하여 말하면서도 실생활에서는 각종 죄악을 일삼는 위선적인 행위에 대하여 책망하며 심판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22-23절은 하나님을 잊어버린 자들을 향하여 엄중한 경고를 하며 참된 제사를 드리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5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나의 성도들을 내 앞에 모으라”고 하시면서 성도들을 당신에게로 모을 것을 명령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성도들을 당신 앞에 불러 모으시는 이유는 6절에서 하나님을 심판장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을 때 이는 그들을 판단하시기 위함이 분명합니다. 즉 그들의 잘못에 대하여 합당한 보응을 하기 위하여 그들을 당신의 재판정으로 소환하시는 것입니다.
특별히 본문에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향하여 “엘 엘로힘 야훼”라고 세 가지 호칭을 부르면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즉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입니다. 여기에서 ‘전능하신 자’로 변역된 ‘엘’은 ‘신들 중에 가장 높으신 신’이라는 뜻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하고 있는 호칭입니다. 그리고 ‘엘로힘’은 천지 만물을 친히 창조하신 분으로서 삼라만상에 대한 절대 주권을 가지고 계신 분이심을 나타내기 위한 호칭입니다. 시편 기자가 하나님의 이름을 이렇게 세 가지로 반복해서 부르는 것은 전능하신 창조주로서 하나님이 가지신 공의로우신 재판장의 모습과 당신의 백성을 선택하시고 보호하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회중들의 주의를 집중시키기 위함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당신 앞으로 부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50편 4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을 판결하시려고 위 하늘과 아래 땅에 선포하여.”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시고, ‘성도들’을 당신 앞에 피고인석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피고인으로 세워진 사람들은 하나님과 계약의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경건한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철저하게 계약을 따라 사는 자들이었습니다. 계약의 내용은 율법과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따라서 율법은 경건한 사람들에게 예배하는 삶의 일부였습니다. 그들은 늘 계약의 내용과 계약에 대한 충성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예배에 참여함으로써 시내산에서 세워진 계약관계를 완성해 가는 삶을 살았습니다. 경건한 성도들에게는 율법이 삶이었고, 삶은 곧 예배하는 삶이었습니다. 이것은 곧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분명한 정체성을 드러내는 행위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정체성을 잃어버렸습니다. 7절 이하의 말씀을 살펴보면 성도들의 죄목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께 가증한 제사를 드린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실생활에서 각종 악을 행하면서 외식적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이 사실을 하늘과 땅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시고, 성도들을 피고인석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로 나와 언약한 자’라는 표현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뿌리와 역사, 그 정체성을 밝혀주는 것임과 동시에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밖에서, 그리스도인들만 모여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속에서,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 사람들과 구별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인의 분명한 정체성을 가진 예배의 자리로 부르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세상 속에서 참된 예배자로 살아가는 복음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예배하는 복음의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라는 분명한 자기 정체성을 가진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경험을 통해서 옛 사람이 벗어지고,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는 신비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는 모든 삶을 통해 자신을 산 제물로 드려 온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나아가 예수님을 만난 경험이 있는 사람은 베드로처럼 분명한 자기 신앙고백이 있는 사람입니다. 더 나아가 수가성의 여인처럼 예수님을 만나 인격적인 감화를 받은 사람은 자신의 옛 삶을 던져버리고 예수님을 전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제는 형식적인 예배에서 벗어나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예배하는 복음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우리 주님은 우리 모두를 하나님만을 참되게 예배하는 복음의 사람으로 초청하고 계십니다. 이 초청 앞에 순종함으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둘째, 예배자로 부르셨다는 언약을 확신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50편 5절 하반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은 제사로 나와 언약한 이들이니라 하시도다.”
앞서 하나님께서 “나의 성도들을 내 앞에 모으라”고 선언하셨을 때 ‘나의 성도’는 경건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성도’는 “제사로 언약을 맺은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제사로 언약을 맺은 성도들을 하나님 앞으로 모이도록 명령하십니다. 이렇게 모이도록 명령하신 이유는 하나님과 제사로 언약을 맺은 백성들이 형식적으로 드리는 제사에 대해 교훈하시고 권면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제사로 언약을 맺은 이들이 하나님으로부터 판단을 당하는 대상으로 부름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언약’이라는 단어는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맺은 언약에서 그 의미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과 아브라함은 제물을 둘로 쪼개고 그 사이로 타는 횃불이 지나가게 하심으로써 언약을 맺었습니다. ‘언약’이라는 단어는 원래 ‘자르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언약의 방법은 고대 근동에서 사람들이 언약을 체결할 때 짐승을 둘로 쪼개어 태우는 의식을 가졌던 것에서 유래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의식은 약속을 지키지 않은 사람은 쪼개진 짐승처럼 처절한 죽음으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는 사실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 언약을 맺으시면서 요구하신 것은 제사와 예배였습니다. 그리고 그 후손들에게는 기업을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맺은 제사 언약은 모세에 이르러 더욱 구체화되었습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여러 가지 종류의 제사에 대한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체적으로 명령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존귀한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이제 그에 합당한 모습, 즉 마음과 성품과 뜻을 다해서 제사하는 삶이 되어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자세와 태도를 취해야 할지에 대해서 함축적으로 전달해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은 우리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제사로 언약을 맺은 사람들입니다. 구약의 언약이 동물을 통해서 맺은 언약이었다면, 신약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언약을 맺은 성도들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체결된 언약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로 언약을 맺은 백성이 취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자세와 태도는 주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배는 하나님께서 친히 찾아오셔서 베풀어주신 은혜와 권능에 대해 응답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성도라면 당연히 성도의 가장 기본적인 의무라고 할 수 있는 예배하는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르셨듯이,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예배하는 삶으로 부르시고, 언약을 맺으시는 하나님 앞으로 초청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자, 주님을 예배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한 시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로, 모든 삶을 산 제물로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로마서 12장 1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로마서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 성도들에 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성도들은 죄와 죽음의 지배에서 해방된 사람들입니다. 과거 나를 지배하고 죄의 종노릇을 했던 삶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삶으로 회복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들은 ‘성도’라는 거룩한 이름을 부여받았습니다. 성도들은 의에 대해서 순종하고, 성화의 길, 영생의 길을 따라 가는 영적 순례자들입니다. 따라서 이제 거룩한 이름으로 부름을 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인이란 자신의 모든 삶을 그리스도의 삶의 방식에 함께 참여하는 존재들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물로 드려진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신약은 더 이상 구약의 희생 제물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성도는 죽은 짐승의 살코기와 피가 아니라 살아있는 우리 자신을 산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이 바로 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라고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1절의 말씀을 근거로 할 때 사도 바울은 인간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존재이며, 하나님을 경배하는 존재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사의 개념을 죽은 동물에게서 찾는 것이 아니라, 현재 살아가고 있는 신앙인 그 자체에서 찾고 있습니다. 즉 제사로 드리는 삶은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 거룩한 삶을 살아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들이 드려야 할 거룩한 산 제사, 즉 영적 예배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인의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삶의 모든 영역 속에서 그리스도 십자가의 정신으로 희생하고 섬기며 살아가는 삶 자체가 바로 우리가 드려야 할 영적 예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대가 어지럽고 혼란스러울수록 하나님은 거룩한 남은 자를 두셨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복음을 경험하고, 그 복음의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의 자리에 섰습니다. 그들은 신앙의 자기 정체성이 분명했고, 예배자로 부르시고 언약하셨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 자신의 모든 삶을 산 제사로 드렸습니다. 코로나는 분명히 한국교회와 우리 교회에 위기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위기는 우리의 신앙적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계기를 제공했습니다. 코로나가 우리의 신앙됨을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확연하게 드러나게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언약에 대한 자신의 믿음에 확신을 세우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은 에스라 시대처럼 무엇보다 약화된 성벽과 무너진 제단을 수축해야 할 때입니다. 지금은 암울한 시대를 진리의 등불로 밝혀나갈 이 시대의 에스라와 느헤미야, 이사야와 같은 복음의 사람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의 보혈, 복음의 능력이 교회와 사회, 세계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입니다. 그리고 이 동력은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이 땅을 지키는 복음의 사람들이 참된 예배자로 살아갈 때, 성경의 비전은 역사의 현실로 우리 앞에 다가올 것입니다. 이 비전의 실천을 향해 우리 모두 예배하는 복음의 사람으로 살아, 하나님 앞에 충성된 종으로 열심히 달려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