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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사슬에 결박당한 바울!
사도행전 21:27-36
오순절에 성령강림의 사건으로 시작된 초대교회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온 유대와 사마리아를 비롯하여 이방 여러 지역에 세워졌습니다. 우리는 초대교회가 처음부터 두 개의 교회, 즉 유대인 교회와 이방인 교회가 생겨났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 두 교회 간의 차이는 매우 컸습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며 믿음으로 나아왔지만, 여전히 율법에 매여 있었고, 유대 전통을 절대적으로 고수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바울의 메시지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율법이나 유대 문화를 알지 못했던 이방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교회에 들어와서 하나님의 은혜와 의를 경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행위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배웠습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간의 가장 첨예한 문제는 ‘할례’와 ‘율법’이었습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도 할례를 받고 율법을 준수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율법의 준수와 할례는 구원의 조건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예루살렘 공의회는 율법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우상에게 바친 더러운 음식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는 것 이외에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떠한 율법의 굴레를 씌워서도 안 된다고 결의를 했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의에 따라 이방인들에게 율법이나 할례를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받아야 하고, 이방인들은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 바울은 분명히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바울은 율법이나 할례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를 얻는다고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소문이라는 것이 늘 그렇듯이 그것들은 과장되어 돌아옵니다. 그리하여 바울의 메시지가 어디선가 잘못되어서 “유대인들도 할례 받을 필요가 없다”라고 전해진 것입니다. 심지어 바울이 유대인의 전통과 관습을 송두리째 무시할 뿐 아니라, 모세를 배신한 배반자라는 거짓 소문이 지금 수만 명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제 바울 자신이 직접 나서서 이들 수만 명의 고집스러운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설득하고 가르쳐야 하겠는데, 그럴만한 시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와 예루살렘 교회의 장로들이 그 대책으로 타협안을 내놓습니다. 그것이 지난 주일에 살펴보았던 내용이었습니다.
야고보와 장로들의 요구를 받아들인 바울의 행위를 놓고 어떤 사람들은 그가 나약하게 현실과 타협하여 복음의 진리를 저버렸다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바울에 대한 이러한 비난은 예루살렘에서 결박을 당할 뿐만 아니라 죽을 것도 각오했던 바울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오해입니다. 바울은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말할 만큼 복음의 본질적인 진리에 대해서는 단호했습니다. 그렇지만 비본질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언제나 온유함과 자유함으로 대했습니다.
바울은 주님 안에서 사랑의 융통성을 가지고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으로 행동했습니다. 바울은 대화가 꽉 막힌 사람이 아니라 누구와도 대화가 가능한 열린 마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했던 것은 복음 안에서 한 사람이라도 더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주님 안에서 보다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일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사소한 입장 차이로 인한 자존심 따위는 다 버렸습니다. 우리는 바울의 이러한 유연하고 융통성 있는 성숙한 삶의 자세를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바울이 이처럼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으로 살았다고 해서 어떤 기준도 없이 모든 사람들의 입맛에 맞추어 살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에게는 한 가지 분명한 삶의 원칙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먹고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한다는 원칙이었습니다. 그것은 복음 안에서 한 사람이라도 더 얻기 위해서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으로 살아가는 열린 마음과 자신이 만나는 사람들 가운데에 단 한 사람이라도 실족하지 않게끔 자기 절제의 거룩한 삶을 동시에 추구하면서 살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주님을 본받아 바울처럼 자기의 거룩한 절제의 삶을 통해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을 얻도록 다른 사람의 이로움을 추구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바울이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오해를 해소시켜 주기 위해 야고보와 장로들의 제안을 받아들여서 나실인 서원을 한 네 명과 함께 정결 예식을 행한 이후에 일어난 일들에 대해 증거하고 있습니다. 본문 27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나실인 서원 기간이 만료된 사람은 성전에서 7일 동안 머물면서 정결 예식인 결례를 행하고, 제8일에는 머리를 깎아야 된다고 했습니다. 야고보와 장로들이 바울에게 맡긴 네 명도 예루살렘 성전에서 나실인 서원 만료 예식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의 기한 만료 예식을 끝까지 도와주기 위해서 그때까지 성전을 떠나지 않고 있었습니다.
마침 유대인들의 최대 명절인 오순절을 예루살렘에서 지내기 위해 전 세계로부터 200만 명의 유대인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에는 항상 ‘애국심’이라는 커다란 감정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도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아시아는 튀르키예 대륙의 서부 지역을 일컫는 아시아 중심의 도시 에베소를 가리킵니다. 당시 바울은 예루살렘의 유대인들보다는 에베소의 유대인들에게 더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3년 동안 밤낮 쉬지 않고 에베소에서 가르쳤고, 그곳에서 놀라운 부흥을 일으켰기 때문에 에베소에서는 그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에베소에서 온 유대인들은 유대교에서 개종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유대교의 열렬 신봉자들로서 의도적으로 바울의 사역을 방해했을 뿐만 아니라 생명을 위협하기도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갔다가 성전 바깥뜰에서 결례를 행하고 있던 바울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보는 즉시 성전에 가득 차 있는 사람들을 충동질했습니다. 본문에서 우리말로 ‘충동질하다’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은장색 데메드리오가 에베소에서 일으켰던 소동을 묘사할 때 사용된 그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이 소동이 에베소에서 일어났었던 그 소동과 비슷한 불법적인 소동이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완료형으로 기록된 것은 무리들을 충동하는 행동이 한 번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글개역 성경에는 유대인들이 ‘바울을 붙드는 것’으로 기록되어져 있지만, 헬라어 원문에는 유대인들이 단순히 바울을 붙잡은 것이 아니라 바울이 꼼짝할 수 없도록 중죄인처럼 두 손을 결박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에베소에서 온 유대인들이 바울을 강제적으로 결박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본문 28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
에베소에서 온 유대인들이 충동질해서 바울을 결박한 죄목은 두 가지였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을 결박한 그 죄목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밝힌 바울의 첫 번째 죄목은 바울이 각처에서 잘못된 가르침을 퍼뜨리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우리 백성’ 즉 ‘유대인’과 ‘율법’과 ‘이곳’, 즉 ‘성전’을 훼방하고 반대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선택된 백성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유대인이라는 특권의 상징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과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으로 인식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유대인들이 그토록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이 세 가지, 즉 유대인과 율법과 성전을 비방하면서 반대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모든 장소에서 ‘율법’과 ‘유대인’과 ‘성전’을 반대하여 모든 사람을 그릇 가르쳐 왔다면 바울은 얼마나 고약한 중죄인이겠습니까? 특히 에베소에서 온 유대인들은 바울을 가리켜서 ‘그 자’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성전에 모여 있던 사람들도 모든 장소에서 모든 사람을 그릇 가르쳐 왔다는 바로 그 사람에 대해 들어서 알고 있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동안 바울이 거치는 곳마다 바울을 배교자로 낙인을 찍어서 죽이려고 거짓 소문을 퍼뜨렸던 유대인들의 거짓 모함이 예루살렘 성전을 가득 메우고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 정도로 이미 광범위하게 유포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을 비방하며 고소한 두 번째 이유는 성전, 곧 거룩한 곳을 더럽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지성소와 성소가 있고, 사람에 따라 출입할 수 있는 곳이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앞의 예루살렘 성전 조감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맨 안쪽에는 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는 ‘제사장의 뜰’이 있고, 거기서 조금 벗어나면 유대인 남자들만 들어갈 수 있는 ‘유대인의 뜰’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조금 더 벗어나면 유대인 여자들이 출입할 수 있는 ‘여인의 뜰’이 있었고, 성전의 바깥에 ‘이방인의 뜰’이 있었습니다. ‘여인의 뜰’과 ‘이방인의 뜰’ 사이에는 큰 담이 있어서 이방인은 그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방인은 거기까지였습니다. 만약 이방인이 이방인의 뜰을 넘어서서 성전 안으로, 즉 이스라엘의 뜰 안으로 들어가면 그가 누구든지 죽음을 면할 수 없었습니다.
로마 당국도 유대인의 이러한 종교적 금기 사항에 대해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령 로마 시민권을 가진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이스라엘의 뜰 안으로 들어가면 반드시 죽음의 형벌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이 부지중에라도 성전 안뜰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안쪽 경내에 이르는 계단의 발치 부근에 1.4m 높이의 ‘돌로 된 칸막이용 벽’을 만들어 쌓았는데, 그곳에는 다음과 같은 헬라어와 라틴어로 쓴 경고문이 붙어 있었습니다. “외국인은 성전과 그 경내를 둘러싼 울타리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울타리 안으로 침입하다가 적발되어 사형을 당하는 자는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스스로를 원망할 수밖에 없다.”
바울이 이방인을 성전 안으로 데리고 들어간 것이 사실이라면 이방인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이방인을 성전 안으로 끌어들여서 성전을 더럽힌 바울도 역시 성전 모독죄로 죽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에 대한 에베소에서 온 유대인들이 밝힌 두 가지의 죄목은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었습니다. 바울이 모든 장소에서 모든 사람에게 그릇 가르쳐 왔다는 것이 사실이 아님은 우리가 지난 시간에 이미 확인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이방인을 성전으로 끌어들여서 성전을 더럽혔다고 하는 것도 전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본문 29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는 그들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이러라.”
지금 성전에 있는 사람들을 충동질하여 바울을 붙잡아서 결박한 사람들은 에베소에서 온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민족의 명절인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왔다가 역시 에베소에 살고 있는 헬라인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예루살렘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마 바울이 3년 동안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할 때 주님을 영접했던 드로비모가 뜻깊은 오순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왔다가 바울을 만나 함께 있게 된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때 드로비모와 바울은 예루살렘 성전 안에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에베소에서 온 유대인들은 바울과 드로비모가 예루살렘 ‘시내’에 함께 있는 것을 보았을 뿐이었습니다.
바울은 성전의 울타리 안으로 드로비모를 데리고 들어간 적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베소에서 온 유대인들은 단지 바울과 드로비모가 예루살렘 시내에 함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바울이 그를 성전 안에까지 데리고 들어갔었다고 단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충동질하여 그를 결박시켰을 뿐만 아니라 바울이 성전을 더럽혔다고 공개적으로 고발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에베소에서 온 유대인들의 의도적인 거짓말이라기보다는 바울을 적대시하는 편협된 마음에서 비롯된 잘못된 추측성 판단이었습니다. 본문에서도 “들어간 줄로 생각함이러라”라고 해서 그들이 직접 두 눈으로 본 것이 아니라, 들어갔을 것이라고 단지 추측하고 가정하였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지금 유대인들을 충동질해서 바울을 붙잡아 결박한 에베소에서 온 유대인들은 바울이 소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할 때부터 바울이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면서 계속적으로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핍박했던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 사람들이 여기까지 따라온 것입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따라왔다면 모르지만, 죽이기 위해서 악착같이 여기까지 따라온 것이니 이게 보통 극성입니까? 사람이 이렇게까지 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바울을 그토록 박해하고 죽이려고 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시기와 질투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이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하였을 때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왔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그때마다 유대인들은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였다”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바울을 시기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바울을 따라다니면서 조직적으로 소동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바울을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시기와 질투가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시기와 질투가 강하게 일어나기 시작하면 신앙이고 뭐고 눈에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은 “저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생각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에베소에서 온 유대인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진실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사람들을 충동질해서 배교자 바울을 공개적으로 처단하는 것이었습니다.
본문 30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
에베소에서 온 유대인들이 바울에 대해 내세웠던 두 가지의 죄목 때문에 예루살렘의 온 성에서 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예루살렘의 유대인들도 사실 여부를 따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에베소에서 온 유대인들에게 충동질을 당해 이미 군중심리에 빠져버린 그들은 불문곡직하고 이미 두 손이 묶여 있는 바울에게 달려들어 바울을 성전 밖으로 끌어내었습니다. 본문에서 우리말로 ‘끌고 나가니’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3인칭 복수 미완료형입니다. 이것은 흥분한 유대인들이 바울을 마치 포박 당한 짐승을 끌고 나가듯이 성전에서부터 질질 끌고 밖으로 나갔다는 의미입니다.
유대인들이 이처럼 바울을 성전 밖으로 질질 끌고 나간 이유는 하나입니다. 그것은 거룩한 성전 안에서 피를 흘려 성전을 더럽힐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 옛날 스데반에게 했던 것처럼 바울을 성전 모독죄로 돌로 쳐 죽이기 위해서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갔습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예루살렘 성전을 관리하던 레위인들이 성전으로 통하는 모든 문들을 닫아 버렸습니다. 바울이 성전에서 내침을 당한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전은 사람을 살리는 곳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이 죄 없이 유대인들에게 짐승처럼 질질 끌려 나가는 것을 보고서도 레위인들은 성전으로 통하는 문들을 다 닫아 버렸습니다. 그들에게는 바울의 생명이 아니라 성전 건물 자체가 중요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주님을 본받아서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받을 수 있게끔 많은 사람의 이로움을 추구했던 참된 그리스도인의 표본이라면, 본문의 유대인들은 다른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의 이로움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인간들의 전형입니다.
이런 인간들은 본문의 유대인들처럼 무엇이 옳고 그르냐, 어느 쪽이 진실이고 거짓이냐는 따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자기에게 더 이로운지만을 따집니다. 그래서 그들은 본문의 유대인들처럼 자신들의 이로움을 위해 온갖 방법으로 사람들을 충동질하고, 멀쩡한 사람을 거짓으로 모함하기도 하고, 자신들의 이로움에 장애가 되는 사람은 짓밟아 버리거나 아예 제거해 버리고 맙니다.
본문 31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이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오순절 기간에 전 세계로부터 모여들었던 많은 유대인들 가운데, 가끔 격분한 유대인들이 로마 군대에 대항하여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때문에 당시 로마 군대는 예루살렘 성전이 내려다보이는 성전의 북서쪽의 안토니아 요새에 주둔하면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감시하면서 통제하려고 했습니다. 만약에 반역이나 폭동을 미리 방지하지 못한 로마 장교는 매우 엄한 처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충동질을 당하여 분노한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성전으로 몰려가서 바울을 쳐 죽이기 위해 질질 끌어낼 때 그들이 조용하게 입을 다물고 조심조심하며 바울을 끌어내었겠습니까? 사람을 쳐 죽이려는 군중이라면 분명 제 정신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흥분한 군중들은 바울을 향해 밀치고 들어왔고, 상황은 극심한 혼돈으로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 소문이 로마 군대의 천부장에게 보고가 되었습니다. 우리말로 ‘요란하다’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홍수가 범람할 때의 모습을 묘사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바울을 쳐 죽이려는 유대인들의 소동은 그 정도로 컸고, 예루살렘의 치안을 책임지는 로마군대 천부장에게 즉각 이 사실이 보고되었던 것입니다. 1,000명의 군사를 거느리는 지휘관인 천부장의 이름은 사도행전 23장 26절에 의하면, ‘글라우디오 루시아’였습니다.
본문 32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가 급히 군인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그들이 천부장과 군인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치는지라.”
천부장은 갑작스럽게 일어난 소동을 보고 받자마자 곧바로 백부장들과 함께 군사들을 데리고 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본문에서 누가는 우리말로 ‘급히’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이것은 천부장이 폭동의 보고를 받자 지체 없이 곧바로 그 사고현장으로 달려간 것을 의미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로마의 식민지에서 일어나는 폭동과 소요에 대해서는 그곳의 천부장에게 일차적이고 직접적인 책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천부장의 거처인 안토니아 요새의 중간에 나 있는 계단이 예루살렘 성전의 바깥뜰과 연결되어 있어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무슨 사건이 터지기만 하면 요새의 군인들이 즉각 현장으로 출동할 수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소동이 일어났다는 보고를 받은 천부장은 휘하의 군인들을 거느리고 바로 그 계단을 이용해서 현장으로 급히 달려 내려갔습니다. 천부장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유대인들은 바울을 처형하기 위해 바울을 치고 있었습니다. 우리말로 ‘치다’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주먹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흉기를 사용해서 상대에게 가하는 일체의 폭력행위를 의미합니다. 천부장의 출동이 조금만 늦었다면 바울은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입니다.
천부장이 이때 데리고 간 군사들은 200명 이상이었을 것입니다. 200명 이상의 군인들이 군호를 맞추어 뛰어 내려가는 모습은 소요를 일으킨 유대인들에게 충분히 위압적이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천부장과 군사들의 갑작스러운 출현에 바울을 치던 유대인들이 행동을 중단한 이유는 아마도 10여년 전에 일어났던 소요에 대한 기억도 한몫을 했을 것입니다. 10여년 전 유월절에 소요가 일어났을 때 로마 군인들이 출동하여 진압했는데, 그때 수백 명이 목숨을 잃는 사건이 발생했었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그때의 그 사건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천부장과 로마 군사들의 갑작스러운 출현에 유대인들은 바울을 치기를 잠시 멈추었습니다.
본문 33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에 천부장이 가까이 가서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고 그가 누구이며 그가 무슨 일을 하였느냐 물으니.”
현장에 도착한 천부장은 두 손이 묶인 채 죽음의 몰매를 맞고 있는 바울을 아예 꼼짝달싹 못하도록 부하에게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고 명령했습니다. 38절에 의하면, 천부장은 유대인들이 죽이려고 했던 바울을 이전에 4천명의 자객들을 동원해서 반란을 일으켰던 이집트인으로 착각했습니다. 그래서 난폭하고 거친 사람을 다룰 때 사용하는 쇠사슬로 바울을 결박한 것입니다. 천부장은 바울이 아무리 불법적인 소요를 일으킨 범죄자라 할지라도 법에 의해 다스려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천부장은 바울을 죽이려던 유대인들에게 바울이 누구이고, 그가 무슨 일을 하였는지를 물었습니다.
본문 34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무리 가운데서 어떤 이는 이런 말로, 어떤 이는 저런 말로 소리치거늘 천부장이 소동으로 말미암아 진상을 알 수 없어 그를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니라.”
천부장의 물음에 바울을 쳐 죽이려던 유대인들은 저마다 횡설수설하면서 서로 다른 주장들을 했습니다. 본문에서 “어떤 이는 이런 말로, 어떤 이는 저런 말로”라는 표현도 당시 군중들이 매우 혼란스럽게 떠들어댔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현상은 에베소에서도 있었습니다. 에베소 사람들은 은장색 데메드리오의 선동에 동요되어 에베소의 연극장으로 몰려가 소리쳤지만, 정작 자신들이 무슨 이유로 그곳에 몰려왔는지조차 알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몇몇 주동자들에 의해 충동된 무리들의 대표적인 특성입니다. 군중들은 분명한 목적과 이유도 없이 자신을 충동한 사람들의 의도대로 맹목적인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군중심리는 자기의 이기적 목적을 채우려는 자들에 의해 너무나 자주 악용되고 있습니다. 옛말에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처럼, 옳고 그름에 대한 자기 주관도 없이 군중심리에 빠져 행동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믿음의 사람은 그렇게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다수가 반드시 진리는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가는 곳이라고 무조건 좇아가서는 안 됩니다. 세상 시류에 동요되어 우왕좌왕해서도 안 됩니다. 성도들에게는 세상과 구별되어야 할 뚜렷한 주관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주관’은 자기 생각이 아니라 참 진리인 복음에 근거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세상과 구별되고, 하나님 앞에서도 의롭다고 인정받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천부장은 무리들의 서로 엇갈린 진술과 혼잡한 소동으로 인해 바울이 매를 맞은 실상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하들에게 쇠사슬로 결박당한 바울을 안토니아 요새로 연행해 가라고 명령했습니다. 요새에서 바울을 심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을 쳐 죽이려던 유대인들은 그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쇠사슬에 결박당한 채 연행되어 가는 바울을 안토니아 요새로 이르는 층계 아래에서 폭행해 버렸습니다. 유대인들의 폭행이 얼마나 심했던지 쇠사슬에 결박당한 채 쓰러진 바울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일어서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로마 군사들은 유대인들을 제지하면서 쓰러진 바울을 들고 층계 위로 올라갔습니다.
바울은 살인 강도짓을 하거나 반인륜적인 흉악범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정치적인 음모를 꾸민 국사범이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지난 십여 년 동안 바울이 한 일이라고는 지중해 세계를 세 차례나 누비고 다니면서 오직 주님의 복음을 전한 것 밖에 없었습니다. 그것도 호의호식하면서가 아니었습니다. 배를 타는 구간을 제외하면 아무리 먼 길도 반드시 걸어가야만 했던 바울에게 노숙은 다반사였고, 마른 빵으로 끼니를 때우면서 대지와 하늘을 요와 이불을 삼아 노숙하던 바울은 늘 배고픔과 추위와 싸워야만 했습니다.
길에서 강도를 만나 낭패를 당하기도 했고,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죽음의 고비를 넘기기도 했습니다. 가는 곳마다 배교자로 낙인을 찍은 유대인들의 살해 위협에 시달려야만 했고, 억울하게 매를 맞아 감옥에 투옥 당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어느 곳에서도 법을 어긴 적이 없었고, 어떤 경우에도 신앙의 양심을 저버린 적도 없었습니다. 바울은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주님의 증인으로 걸어야 할 정도만 걸었습니다. 그리고 십여 년에 걸친 세 차례의 전도 여행을 총결산하면서 바울은 이제 생애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찾아갔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위해 그토록 수고하고 헌신한 바울을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최선을 다해서 환대해 주셔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바울 앞에 전개된 그의 현실은 그와는 정반대였습니다. 에베소에서 온 유대인들의 모함으로 흥분한 예루살렘의 유대인들로부터 두 손이 묶인 채 짐승처럼 질질 끌려 나가서 죽음의 몰매를 맞아야 했습니다. 현장에 천부장이 군사들을 데리고 출동하기는 했지만, 천부장은 바울을 구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바울이 꼼짝달싹도 못하도록 두 쇠사슬로 바울을 결박시켜 버렸습니다. 로마 군인들에게 들려 층계 위로 올라가면서 자신을 죽이라는 유대인들의 거친 함성을 들어야만 했습니다.
일평생 주님을 위해 자신의 전 생애를 던졌던 바울이 인생 말년에 그토록 비참하고 더 억울하게 생이 마감하게 되어야 한다면, 하나님이 과연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정의의 하나님이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본문의 사건을 한 눈으로만 보았을 때의 광경입니다. 이전에 앞서 말씀을 드렸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의 눈이 아니라 두 개의 눈들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두 눈들을 지니고서도 눈앞에 보이는 현실에만 집착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두 눈들을 지닌 외눈박이와 같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두 눈들을 지니고, 한 눈으로는 보이는 눈앞의 현실을 직시하면서, 또 다른 한 눈으로는 그 너머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는 사람들입니다.
지금까지는 우리가 한 눈으로 본문 속에서 바울이 직면한 현실만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눈으로 바울의 현실 그 너머를 바라보면 오늘의 본문은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 에베소에서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만나서 성전에 있는 사람들을 거짓 모함으로 선동했을 때, 그곳의 유대인들이 바울을 처형하기 위해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갔더라면 바울은 자신이 최종 목적지로 삼았던 로마로는 출발도 해 보지 못하고 그들에 의해 허무하게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에베소에서 온 유대인들의 거짓 모함에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몰려와서 괴성을 지르면서 바울을 죽이기 위해 소동을 벌였기에 천부장이 현장에 출동해서 바울은 죽음을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쇠사슬에 결박당한 바울이 로마 군사들에 의해 로마 군대 영내로 옮겨졌다는 것은 그때부터 바울이 로마제국의 죄수가 되었음을 뜻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바울은 당시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군사력을 지닌 로마제국의 군대 보호 속에 있게 되었습니다. 만약 이때 오늘 본문이 전하는 것과 같은 사건이 바울에게 일어나지 않아서 바울 자신이 계획한 대로 로마를 향해 출발했더라면 결코 로마로 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당시 바울을 죽이려는 유대인들의 계획은 극에 달해 있었습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맹세한 40명의 유대인 결사대에 의해 바울은 예루살렘을 벗어나기도 전에 그들의 칼에 맞아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분노한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성전으로 몰려와서 바울을 붙잡고 괴성을 지르면서 끌어내는 소동을 일으킨 탓에 바울은 로마제국의 죄수가 되어 그들 결사대의 암살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로마제국 군사의 보호 아래에서 자신의 최종 목적지로 삼았던 로마에 무사히 입성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이 천부장에 의해 쇠사슬에 결박당해 로마제국의 죄수가 되지 않았더라면 결코 누릴 수 없었던 신비로운 섭리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결박한 쇠사슬은 그냥 쇠사슬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바울을 위해 예비하신 은혜의 쇠사슬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동안 주님의 말씀을 쫓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오히려 모함과 비방의 쇠사슬, 불이익의 쇠사슬, 고난과 고통의 쇠사슬에 결박당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쇠사슬만 보고 절망하는 외눈박이가 되지 말고, 또 하나의 눈으로 그 너머에서 그 모든 상황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보십시오. 그 쇠사슬이야말로 자신을 위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은혜의 쇠사슬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쇠사슬에 결박당하면서 사는 한 현재의 토대 위에 자신의 상상할 수도 없었던 미래가 하나님에 의해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쫓아살다가 이 세상에서 모함과 비방의 쇠사슬, 불이익의 쇠사슬, 고난과 고통의 쇠사슬에 결박당하는 것을 결코 두려워하지 마십시다. 그 쇠사슬이야말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은혜의 쇠사슬임을 헤아려 볼 줄 아는 믿음의 눈들을 가진 사람들로 살아서 이 시대에 이루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과 계획이 저와 여러분을 통해 이루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