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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로마 시민인 줄 알고
사도행전 22:24-30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난 이후 3년 만에 예루살렘에 돌아온 바울은 그곳에 있는 자기 동족들에게 극렬한 핍박자에서 복음의 증거자로, 죄인 중의 괴수에서 의인 중의 의인으로 자신을 변화시킨 복음을 전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도 자기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 얻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자기 민족을 얼마나 사랑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그 경험으로 마음이 뜨거워져 있습니다. 지금 자신의 그 열정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바울의 그 마음을 한사코 말리시면서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울은 주님의 이 말씀이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사울이었던 바울이 교회를 박해했던 일과 스데반을 처형할 때 그가 맡았던 역할에 관해 모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랬던 바울이 3년 만에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예루살렘에 나타났을 때 유대인들은 참으로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바울은 생각했습니다. “교회를 말살시키기 위해 자신의 전존재를 다 바쳤던 바울이 어떻게 저렇게 180도 달라질 수 있을까?” 따라서 바울은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극렬한 교회의 박해자에서 복음 전도자로 변하게 된 자신의 증언에 대단한 관심을 보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자신보다 더 적합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에게 자기가 복음을 증거하면 긍정적인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주님, 이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제가 잘 압니다. 더구나 저들은 제가 교회를 짓밟고 그리스도인들을 옥에 가두었을 뿐만 아니라 스데반이 산헤드린 앞에서 순교할 때 제가 거기에 있었고, 그때 제가 어떤 역할을 맡았었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율법에 관한 일들에 대해 제가 얼마나 열심이었는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제가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제 말을 듣고 주님께로 돌아올 것입니다.”
바울의 이러한 마음은 어쩌면 오늘 저와 여러분이 종종 갖는 마음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하나님보다 자신이 더 잘 안다고 확신 있게 행동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결정에 그대로 따라와 주시기를 강요하기도 합니다. “하나님, 이 문제는 제가 더 잘 압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제가 하는 대로 따라와 주세요.”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의 그러한 행동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카락 하나까지도 다 헤아리시는 전능하시고 전지하신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정확하게 우리를 알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의 이끄심과 선택에는 결코 실수나 잘못됨이 없습니다. 우리 인생들을 향한 하나님의 이끄심과 선택은 언제나 선하셨고, 정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논쟁하는 것은 더 없는 어리석은 행동임을 아셔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우리에게는 오직 “예”라는 순종만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이 주님과 논쟁하려고 하는 동안 주님께서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하십니다. 사실상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바울의 증언을 받아들일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바울에게 논쟁을 멈추게 하신 후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기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네가 나에 대해 하는 말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재차 이유를 묻지 말고, “떠나가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바울의 사명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선언하셨습니다. 결국 바울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예루살렘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주님의 말씀에 따라 이방인들에게로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20여년의 세월이 흐른 후 바울은 두 쇠사슬에 결박당한 채 예루살렘 성전 바깥뜰에서 로마군의 안토니아 요새로 통하는 중간 계단 위에 서서 방금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에게 자기 변명을 시작했습니다. 바울의 자기 변명의 핵심은 그가 율법과 하나님께 열심히 있던 자로서 예수의 도를 박해하던 자였으나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 회심한 이후 그의 증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전 바깥뜰에 모여 있던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바울이 이방인에 대한 그의 사명을 말하기 전까지는 대단한 흥미를 가지고 집중해서 그의 말을 경청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바울은 자신의 생애 가운데서 가장 신났던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동족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원했고, 지금 수많은 유대인들 앞에서 그 복음을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바울의 자기 변명을 듣고 있던 유대인들은 바울이 “이방인들에게로 보내리라”는 주님의 말씀으로 이방인 전도의 정당성에 대해서 언급했을 때,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울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감과 분노가 되살아났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그런 배교자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분노한 그들은 한 목소리로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고 소리쳤습니다. 한 마디로 죽여 버리자는 말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관습에 따라서 미친 듯이 고함을 지르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면서 극도의 분노를 드러냈습니다.
두 쇠사슬에 결박당한 채 로마 군인들에 의해 안토니아 요새로 옮겨지던 바울에게 유대인들을 향해 자기 변명을 할 수 있도록 허락했던 사람은 로마 군대의 천부장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자기 변명을 위해 사용한 언어는 천부장이 알아들을 수 있는 라틴어나 헬라어가 아니라 유대인들의 히브리어였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씀을 드리면, 당시 유대인들이 모국어로 사용했던 아람어였습니다.
아람어를 몰라서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던 천부장은 바울의 말을 듣고 있는 유대인들의 반응을 민감하게 살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말을 듣고 있던 유대인 군중들이 갑자기 난폭해졌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말을 가로막으면서 또다시 바울을 쳐 죽일 기세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일제히 소리를 지르면서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면서 그의 죽음을 요구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바울이 서서 연설하던 안토니아 요새의 현관을 향해 일제히 밀치고 들어갔을 것입니다.
천부장은 그것이 유대인들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는 표시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천부장은 곧바로 사태 수습에 나섰는데, 본문 24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천부장이 바울을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고 그들이 무슨 일로 그에 대하여 떠드는지 알고자 하여 채찍질하며 심문하라 한대.”
아람어로 말하는 바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던 천부장은 단지 그 결과로 유대인들이 갑자기 흥분하는 것으로 보아서 바울에게 어떤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당황한 천부장은 바울을 안토니아 요새 안으로 데리고 가게 했습니다. 그는 바울에 대항해서 일어난 그 분노에 대해 무언가 알 필요가 있었지만, 군중들의 일관성 없는 고함 소리만으로는 아무런 사실도 알아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천부장은 바울의 자기 변명을 듣고 있던 유대인들이 왜 갑자기 그토록 바울에 대해서 분노하고, 바울을 쳐 죽이려고 하는지 그 이유를 확인하기 위해서 바울을 채찍질하며 심문할 것도 명령했습니다.
당시 로마제국이 고안한 채찍은 인간이 사용했던 채찍들 가운데 가장 잔인했던 채찍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약간의 뼈나 유리, 혹은 납 파편들이 가죽에 박혀 있는 채찍이었는데, 그 채찍에 맞는 사람은 살점이 뜯겨져 나가는 무자비한 채찍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집행하기 위해 보통은 웃옷을 벗겨서 등을 완전히 드러내는 방식으로 사람을 기둥에 묶어 놓았습니다. 서른아홉 번의 채찍질이 일반적인 형량이었지만, 상관의 명령이 없는 한 채찍질은 계속되었습니다.
채찍질을 당하는 동안에 고백을 한다면 그것을 집행하는 사람은 그 다음 채찍질을 조금 약하게 진행할 것입니다. 하지만 만일 침묵한다면 그 고통이 너무 극심해서 죄를 고백할 때까지 더 세게 채찍질을 할 것입니다. 이러한 잔인한 채찍질로 인하여 장애인이 되는 경우도 있었으며, 심지어 과다 출혈과 극심한 고통으로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때문에 로마인에게는 이러한 가혹한 채찍질이 시행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고린도후서 11장 24절에서 자신이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로 이러한 채찍질을 다섯 번이나 맞았다고 했습니다.
당시 라틴어를 사용했던 로마인들은 아마도 바울이 아람어로 말하는 것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바울이 도대체 무슨 말을 했기에 유대인 군중들이 그토록 분노했는지 그들은 궁금해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바울을 채찍질하며 심문을 해서 그 이유를 알아보려고 했습니다. 당시의 평균 수명으로 이미 인생 노년에 접어든 바울이 만약 무자비한 채찍질을 당한다면, 자신이 가야 할 로마제국의 심장인 로마로는 출발도 해보기 전에 로마 군인이 가하는 채찍에 맞아 예루살렘에서 생을 마감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잔인한 그 채찍질 속에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았습니다.
본문 25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가죽 줄로 바울을 매니 바울이 곁에 서 있는 백부장더러 이르되 너희가 로마 시민 된 자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 하니.”
로마 군인들은 채찍질을 하기에 좋도록 바울의 두 팔을 위로 뻗게 한 상태에서 등이 밖으로 보이도록 기둥에 묶었습니다. 이제 잔혹한 채찍질이 시작될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로마의 형법에 의하면 로마 시민의 소송에 있어서는 고소가 우선 법정에 상정되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법정에서의 엄격한 심의를 통하여 범죄가 확정된 후에 비로소 형벌을 가할 수 있다고 명시하였습니다. 일단 정식으로 고소가 상정되면 로마 행정관과 고문단 앞에서 공청회를 갖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재판에 의해 범죄 사실이 입증되고, 형이 확정되기 전에 로마 시민에 대한 채찍질은 위법이었습니다. 만약 이 법을 어기고 채찍질을 한 경우에는 책임자가 처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로마인이 아니라 할지라도 아무런 유죄 판결도 나지 않은 상태에서 고문으로 심문을 시작하려는 천부장의 결정은 로마법에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로마 군인들이 채찍으로 자신을 치려고 하는 그 순간, 현장 책임자인 백부장에게 반문을 합니다. “너희가 로마 시민 된 자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 앞서 말씀을 드렸듯이 로마 법원의 정식 재판을 통해서 범죄 사실이 입증되고 형이 확정되기 전까지는 로마 시민에 대한 채찍질을 절대 금하고 있었습니다. 누구든지 이 법을 위반하면 그 사람이 처벌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아직 정식으로 기소되지도 않았고, 재판을 받지도 않은 자신에게 채찍질을 가려고 한 로마 군인들의 위법성을 지적한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 시민이라는 말에 백부장은 깜짝 놀랐습니다. 로마 시민인 바울에게 채찍질을 했다가는 현장의 책임자인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채찍질을 명령한 천부장도 무사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 26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백부장이 듣고 가서 천부장에게 전하여 이르되 어찌하려 하느냐 이는 로마 시민이라 하니.”
백부장은 천부장의 잘못된 순간적인 판단이 커다란 화를 자초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즉시 천부장을 찾아가서 바울이 로마 시민이라는 사실을 보고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실 작정이시냐?”고 물었습니다. 백부장의 이 질문은 어떤 경우이든 로마 시민인 바울에게 채찍질을 해서 화를 자초하는 결과가 초래되어서는 안 된다는 백부장의 걱정스럽고 초조한 심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 27절과 28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천부장이 와서 바울에게 말하되 네가 로마 시민이냐 내게 말하라 이르되 그러하다 천부장이 대답하되 나는 돈을 많이 들여 이 시민권을 얻었노라 바울이 이르되 나는 나면서부터라 하니.”
바울이 로마 시민이라는 백부장의 놀라운 보고에 천부장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당황한 그는 즉각 채찍질을 하기 위해서 바울의 두 팔을 양 기둥에 묶어 두고 있는 그 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바울에게 묻습니다. “네가 정말 로마 시민이냐?” 천부장이 얼마나 놀랐는지는 통상 피의자가 천부장에게로 와야 함에도 불구하고, 천부장이 피의자인 바울에게 직접 간 사실에서도 확인이 됩니다.
천부장의 당황스러운 태도와는 대조적으로 바울은 담담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러하다.” 바울이 로마 시민이라는 대답을 들은 천부장은 먼저 “나는 거액을 들여서 로마 시민권을 매입했다”고 밝혔습니다. 이것은 바울에게 “네가 로마 시민일 줄은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는데, 너는 대체 어떻게 해서 로마 시민이 되었느냐?”는 우회적인 질문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은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런 질문을 해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로마 시민임에도 불구하고, 천부장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아보지 못하고 채찍질을 당하기 직전의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는가?”
앞의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당시 로마 시민에 한해서 보통 양모로 만들어진 대략 3.5m에서 6m 사이 길이의 반원형 옷감을 왼쪽 어깨에서부터 아래로 늘어지는 ‘토가’라는 겉옷을 입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 옷은 로마 시민만이 입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토가는 착용과 행동이 불편해서 고위공직자이거나 공식 행사에 참여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반 로마 시민은 평상시에는 입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그때에는 오늘날처럼 주머니에 휴대하고 다닐 수 있는 작은 주민등록증도 없었습니다. 로마 시민임을 증명하는 문서들은 해당 관청의 호적 공문서 보관소에 두었으며, 개인이 가지고 다니지도 않았습니다. 따라서 토가를 착용하지 아니한 로마 시민에게 자기 자신이 로마 시민임을 드러내는 외적인 표시는 따로 없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누구든지 자기 자신이 로마 시민이라고 밝히면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믿어 주었습니다. 만약 로마 시민이 아닌 사람이 로마 시민을 사칭하면 예외 없이 극형인 사형에 처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로마 시민이라는 바울의 말도 천부장이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2,000년 전에 로마제국이 지중해 세계를 지배했던 당시에 로마 시민권은 매우 중요한 권리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로마제국에서 로마 시민이 아닌 사람이 로마 시민이 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로마제국에 혁혁한 공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부패한 공무원에게 뇌물을 주고 로마 시민권을 매입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로마 시민권은 자손 대대로 승계 되었습니다.
2세기나 3세기에 뇌물로 로마 시민권을 사는 일은 매우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바울 당시인 41년부터 54년까지 로마의 최고 통치자였던 글라우디오 황제 때에도 이런 일들이 만연했는데, 그의 아내였던 메살리나와 장관들까지도 로마 시민권을 팔아서 돈을 모았다고 합니다. 천부장이 상당한 돈을 주고 로마 시민권을 획득한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더구나 본문에 등장하는 천부장의 이름은 ‘글라우디오 루시아’입니다. 따라서 이 천부장의 씨족명이 ‘글라우디오’였던 것을 감안할 때, 그 역시 글라우디오 황제 치하에서 시민권을 산 것이 틀림없습니다. 천부장이 헬라식 이름인 ‘루시아’인 것으로 보아 원래 그는 헬라인이었으며, 그는 돈이 많았기 때문에 로마 시민권을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천부장이 뇌물로 로마의 시민권을 산 것과는 대조적으로 바울은 태어나면서부터 로마 시민이었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조상이 로마 시민권자였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베냐민 지파이며, 정통 유대인이었던 바울의 조상이 언제 어떤 과정으로 로마 시민권을 획득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알려진 것은 없습니다. 다만 가장 유력한 추정은 바울의 조상 중 한 명이 로마 행정관이나 장군에게 중요한 공헌을 세움으로써 그 대가로 로마 시민권을 획득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당시 로마 제국의 통념상 로마 시민권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동일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처럼 태어날 때부터 로마 시민으로 태어난 혈연적 시민권은 돈으로 매입한 시민권보다 더 귀하게 다루어졌습니다. 그리고 돈으로 시민권을 샀다고 하더라도 그 산 시기가 오래 되었을수록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따라서 어느 쪽으로 보더라도 고작 자기 당대에 로마 시민권을 매입한 천부장의 시민권보다 태어날 때부터 로마 시민으로 태어난 바울의 시민권이 훨씬 더 가치가 있었습니다.
본문 29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심문하려던 사람들이 곧 그에게서 물러가고 천부장도 그가 로마 시민인 줄 알고 또 그 결박한 것 때문에 두려워하니라.”
글라우디오 루시아 천부장은 분명히 로마의 법을 어겼습니다. 그는 재판에 의하지 않고서는 로마 시민을 결박하거나 매질을 가하지 못한다고 하는 규정을 어겼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로마 시민이라는 것, 더군다나 태어나면서부터 로마 시민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마당에 그가 갖는 두려움은 매우 큰 것이었음이 분명합니다. 만약 로마 시민인 바울이 정식 재판도 없이 그렇게 다룬 것만으로도 고발을 한다면 자신이 처형의 대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천부장의 명령에 따라서 바울을 채찍질하려고 했던 로마 군인들도 바울이 로마 시민임을 확인하고서는 슬그머니 그 현장에서 물러가 버렸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바울을 한낱 유대인 범죄자로 취급했던 천부장과 그의 부하들의 태도가 완전히 바뀌어진 것입니다.
천부장은 바울의 쇠사슬을 풀어주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유대인들이 그토록 그에게 분노하는지를 알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음 날 바울이 정식으로 심문을 받도록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했습니다. 그것이 본문 30절인데,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튿날 천부장은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그를 고발하는지 진상을 알고자 하여 그 결박을 풀고 명하여 제사장들과 온 공회를 모으고 바울을 데리고 내려가서 그들 앞에 세우니라.”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후에 바울이 자기 자신이 로마 시민이라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그리고 공개적으로 밝힌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습니다. 본래 바울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서 자신이 그토록 자랑거리로 여겼던 세상의 것들을 다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자신이 자랑거리로 여겼던 세상 것들을 삶의 목적으로 삼아서 살았더라면 작은 유대 사회 속에서는 젊은 시절에 벌써 출세하고 인정받는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을 삶의 목적으로 삼는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고귀한 자기 생명을 무의미하게 고갈시키는 어리석은 짓임을 알았기 때문에 그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여기에서 ‘배설물’은 인분이나 식탁에서 떨어진 음식 찌꺼기 등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최상의 자랑거리로 여겼던 것들을 예수님을 만난 이후로 더러운 악취가 나는 인분이나 음식 찌꺼기 정도로밖에 여기지 않게 된 것입니다. 악취가 나는 배설물을 좋아해서 가지고 다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삶의 목적으로 삼았던 세상의 자랑거리들 가운데에는 로마 시민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 안에서 천국 시민권을 획득한 바울에게 로마 시민권은 더 이상 삶의 목적이 될 수 없었습니다. 주님의 명령에 따라서 제1차 전도여행에 나선 바울은 가는 도시에서마다 수모를 겪었습니다. 루스드라에서는 유대인들에게 선동당한 시민들의 돌팔매질로 사람들이 땅바닥에 쓰러진 바울이 죽었다고 단정하여 성 밖으로 내버릴 정도로 심한 곤욕을 치렀습니다. 만약 바울이 가는 곳마다 자신이 로마 시민임을 밝히면서 지방 관청의 도움을 요청했더라면 전혀 당하지 않아도 될 수모와 곤욕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이 어디에서든 단 한 번도 그렇게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주님 안에서 구원받은 바울은 자신이 로마 시민이라는 사실을 아예 잊어버리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제2차 전도여행을 시작한 바울이 유럽 대륙의 빌립보를 찾았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곳에 귀신 들린 불쌍한 여인이 있었는데, 고약한 몇 사람들이 그 불쌍한 여인을 내세워서 사람들에게 점을 보게 하고 많은 돈을 벌고 있었습니다. 며칠 동안 계속해서 그 불쌍한 여인과 마주친 바울은 마침내 주 예수의 이름으로 그 여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어 주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그 여인을 이용해서 돈을 벌던 고약한 사람들이 바울과 바울의 동역자인 실라를 붙잡아서 빌립보의 집정관들에게로 끌고 갔습니다. 바울이 여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어 버렸기 때문에 그 여인을 이용해서 더 이상 돈을 벌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 유대인들이 로마 사람인 우리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해로운 풍속을 전한다”는 거짓 모함으로 바울과 실라를 빌립보의 집정관들에게 고발해 버렸습니다. 그들에게 선동을 당한 빌립보의 시민들도 역시 소리를 지르며 그들과 합세해서 바울과 실라를 집정관들에게 고발했습니다. 빌립보의 집정관들은 아무런 재판 과정도 없이 바울과 실라에게 태형을 가하게 한 다음에 두 사람을 빌립보 감옥의 지하 감방에 투옥시켜 버렸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아무런 죄도 없이 억울하게 태형과 투옥을 당하면서도 그때까지도 자신이 로마 시민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내지 못했습니다. 그날 밤에 주님의 신비로운 섭리로 감옥의 간수와 그의 가족들이 바울로부터 복음을 영접하는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음을 주님께 감사했을 따름이었습니다.
이튿날, 날이 새자 그 전날 바울과 실라에게 태형과 투옥을 명령했던 빌립보의 집정관들이 빌립보 감옥의 간수에게 부하들을 보내어서 바울과 실라를 석방시켜 주라고 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에 자신과 실라가 로마 시민이라는 생각이 바울의 뇌리를 스쳤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자신들의 석방을 통보한 감옥의 간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도행전 16장 37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이 이르되 로마 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내보내고자 하느냐 아니라 그들이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 한대.”
바울의 이 말을 전해들은 빌립보의 집정관들은 화들짝 놀랐습니다. 그들은 빌립보 감옥의 지하 감방까지 바울과 실라를 황급하게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의를 갖추어서 바울과 실라에게 지하 감방에서 나가주기를 요청했고, 빌립보 감옥 밖까지 배웅하면서 자신들의 잘못을 가만히 덮어주고 다음 행선지로 조용히 떠나주기를 간청했습니다. 바울과 실라에게 두 손이 닳도록 자신들의 잘못을 빈 것이었습니다. 로마 시민인 바울과 실라에게 재판도 없이 태형과 투옥을 시킨 것을 바울이 문제로 삼을 경우에 자신들의 목이 달아날 판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6장을 살펴볼 때 말씀을 드렸지만, 이때 바울의 경험은 바울에게 대단히 소중한 깨달음을 안겨주었습니다. 자신이 배설물처럼 버린 로마 시민권이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목적으로 삼은 주님의 증인으로 살아감에 있어서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도구로 쓰임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주님의 부르심을 입고 세상의 자랑거리들을 배설물로 여겼다고 하는 것은 더 이상 그런 것들을 삶의 목적으로 삼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지중해 세계를 지배했던 로마제국 내에서 2,000년 전에 로마 시민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더없이 큰 특권이었습니다. 직접 선거로 뽑는 모든 선거에 투표권을 가졌습니다. 아울러 피선거권도 함께 있었습니다. 해외여행을 안전하게 마음껏 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 뒤에는 세계 곳곳에 파견되어 있는 로마 군대가 있었습니다. 로마제국의 황제가 있었습니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로마 시민권이었습니다. 따라서 로마제국 내에서 로마 시민과 로마 시민이 아닌 사람들 사이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 로마제국 내에서 로마 시민으로 태어난 바울이 만약에 평생 로마 시민으로 살아가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았더라면 바울의 학력과 경력, 그리고 바울의 능력과 자질에 비추어 보았을 때 바울은 세상적으로 상당한 출세와 부를 이룰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경우의 바울은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인물이 되었을 것이고, 그의 인생은 이미 2,000년 전에 한 줌의 흙으로 허망하게 끝나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지중해 세계를 석권한 로마제국 내에서 로마 시민으로 태어나 모든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는 로마 시민권의 소유자이면서도 주님을 위해 그 로마 시민권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오직 주님만을 삶의 목적으로 삼은 주님의 증인으로 살았습니다.
바울이 배설물처럼 버렸던 로마 시민권이 오늘의 본문 속에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그의 생명을 지켜주는 보호막이 되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바울은 로마 시민의 권리를 내세워서 로마 황제에게 상소함으로써 로마제국의 보호 속에서 제국의 심장인 로마에 입성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 모든 일들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신비로운 섭리 속에서 이루어졌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이처럼 삶의 목적으로 삼았더라면 그의 생을 고갈시켰을 로마 시민권이 주님을 위해 배설물처럼 여겼을 때, 그 로마 시민권이 바울과 그 바울을 통해 복음을 영접하게 될 수많은 사람들을 살리는 생명의 도구로 승화되었다고 하는 것이 바로 오늘의 본문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시지입니다.
하루만 술을 마시지 않아도 목구멍에 가시가 돋는다고 생각하는 술꾼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가 존경하는 은사로부터 책 한 권을 선물 받았습니다. 그는 밤을 새워 그 책을 읽었습니다. 그 책에는 술이 인체에 얼마나 해로운 극약인지가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었습니다. 술꾼은 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깊은 결심을 했습니다. 앞으로는 절대로 책을 읽지 않겠노라고 말입니다.
이 술꾼에게는 술이 오늘의 본문이 언급하고 있는 로마 시민권입니다. 은사가 보내준 책을 밤새워 읽고 충격을 받은 이 술꾼이 그 이후부터 술을 백해무익한 배설물로 여기기 시작했더라면, 그동안 술독에 빠져 살았던 그의 과거가 자신만 살릴 뿐 아니라 다른 술꾼들도 술독에서 건져내는 생명의 동력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술꾼은 자신의 로마 시민권인 술을 계속해서 자신의 삶의 목적으로 고수하기 위해서 오히려 절독을 선언했습니다. 결국 이 미련한 술꾼은 백해무익한 그 술과 단 한번밖에 없는 소중한 자기 생명을 맞바꾸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이처럼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이 실은 하나님 앞에서 고작 배설물에 지나지 않는 세상의 것들을 삶의 목적으로 움켜쥐고 있는 우리 자신들의 모습은 아닙니까? 우리가 지금 우리 삶의 목적으로 움켜쥐고 있는 우리 각자의 로마 시민권은 무엇입니까?
어쩌면 그것이 돈일 수도 있고, 권력일 수도 있고, 명예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죽음 이후를 결코 책임져 줄 수 없는 그런 것들을 삶의 목적으로 삼는 한, 그런 것들을 더 많이 소유하고 장악할수록 오히려 그것들이 우리 생명의 소진과 고갈을 더 빨리 재촉할 것이고, 다른 사람의 생명에까지 해를 미치게 될 것입니다. 생명 없는 이 세상의 비인격적인 것들을 삶의 목적으로 삼는 것은 자기 자신을 생명 없는 비인격적인 존재로 전락시키는 가장 미련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영원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 앞에서는 돈도, 권력도, 명예도 한낮 배설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원하신 주님만을 삶의 목적으로 모신 증인으로 살아가면 그 배설물들이 주님에 의해 자신과 다른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보호막이 될 수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을 삶의 목적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그 사람을 통해서는 생명 없는 이 세상의 비인격적인 것들도 주님 안에서 얼마든지 생명의 도구로 승화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을 믿는 우리에게 삶의 목적은 하나님 한 분뿐이시며,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참된 믿음은 언제 어디에서나 목적과 수단을 바르게 분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단이 목적으로 둔갑해 버리면 그것이 무엇이든 목적이 된 수단은 사람을 해치는 흉기로 돌변하고 말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영성은 자신의 삶의 목적으로 삼아왔던 세상의 것들을 배설물처럼 버리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처럼 그동안 자랑거리로 여겨왔던 세상의 로마 시민권이 주님 앞에서는 한낮 배설물에 지나지 않음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만을 삶의 목적으로 모시고 주님의 증인으로 살아서 배설물과 같은 나의 것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도구로 쓰임 받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