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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형들아, 들으라!
사도행전 21:37-22:1
바울은 원래 제3차 전도여행을 마무리하면서 예루살렘에 잠시 들러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의 여러 이방 교회들이 극심한 기근으로 어려움에 처한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 모금한 구제 헌금을 전달 한 후에 자신을 파송한 수리아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다음의 선교 여행을 준비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드로아에서 65km 거리에 떨어져 있는 앗소까지 혼자 걸으면서 자신의 여행 최종 목적지를 수리아 안디옥에서 예루살렘으로 결정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고린도에서 마게도냐를 우회하면서 자신이 복음을 전했던 베뢰아를 비롯하여 데살로니가, 빌립보 등 각 성을 거칠 때마다 성령께서는 바울이 가는 그 예루살렘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영광의 면류관이 아니라, 결박과 환난이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예고해 주셨습니다. 드디어 바울은 그 예루살렘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예고하셨고, 많은 사람들이 예언하면서 염려하던 그 일이 결국 벌어졌습니다. 그는 에베소에서 온 유대인들의 거짓된 충동질에 흥분한 유대인들로부터 거의 죽음에 이르는 몰매를 맞고 예루살렘 성전 밖으로 짐승처럼 질질 끌려 나갔습니다.
아마 그대로 둔다면 바울은 흥분한 유대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때 안토니아 요새에서 큰 소동을 지켜본 천부장이 군대를 이끌고 급히 달려옴으로써 그들은 바울에게 가하던 폭행을 잠시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천부장의 명령으로 두 쇠사슬에 결박당한 채 안토니아 요새로 끌려가던 바울은 요새로 통하는 층계 아래에서 더욱 격렬해진 유대인들의 폭행으로 쓰러졌습니다. 쓰러진 바울이 일어나지를 못하자 로마 군인들은 흥분한 유대인들을 제지하면서 바울을 들어 층계 위로 올렸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이 극심한 소동을 마음속에 그릴 수가 있겠습니까? 지금 바울이 직면한 상황은 매우 급박스럽고도 어수선했습니다. 에베소에서 온 유대인들의 충동으로 흥분한 수많은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무엇 때문인지도 모른 채 군중심리에 휩쓸려 “그를 사형시키라!”고 외치면서 바울에게 위해를 가하려고 밀치고 들어옵니다. 만일 로마 군인들이 없었다면 그들은 아마도 그 옛날 스데반을 돌로 쳐 죽였듯이 그 자리에서 바울을 죽였을 것입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바울을 무조건 죽이려고 달려드는 쪽은 동족인 유대인들이요, 그 바울을 죽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하여 체포하는 쪽은 로마 군인들입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께로부터 이방인의 사도로 세움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동족의 구원을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방의 여러 지역으로 전도여행을 다니면서도 언제나 그곳에 있는 유대인 회당을 먼저 찾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동족인 유대인들이 구원받을 수만 있다면 자신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도 좋다고 선언할 만큼 자기 동족 유대인을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그렇지만 그토록 사랑했던 동족 유대인들로부터 그에게 돌아온 것은 결박과 죽음의 위협뿐이었습니다.
바울이 살인을 하거나 반인륜적인 흉악한 죄를 저지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나라를 일본에 넘겼던 이완용처럼 유대 나라를 로마에 팔아넘기거나 나라를 위기에 빠뜨리는 행동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단지 하나님께서 구약성경을 통해 계시로 말씀하셨던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유대인들도 자기처럼 예수를 믿어서 구원 얻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것 밖에는 없습니다. 동족인 유대 민족의 구원, 그것이 바울이 마음에 품었던 간절한 소망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바울이 가는 곳마다 조직적으로 따라다니면서 훼방을 놓고 박해를 했을 뿐만 아니라 생명을 위협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에베소에서 온 유대인들의 모함으로 흥분한 유대인들에 의해 무자비한 폭행을 당하면서 죽음의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나아가 로마 군인들에 의해 꼼짝달싹도 못하도록 두 쇠사슬에 결박당해 있습니다. 바울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는 다른 피가 섞인 유대인이 아니라, 유대인이라면 모두가 부러워하는 정통 유대인이라는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당시의 모든 세상 사람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태어나면서 로마 시민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바울은 세상에서 잘 나가는 엘리트 출신으로써 세상 모든 사람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지금은 동족 유대인들로부터 처참하게 버림을 당하고 있습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생명의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의 상황을 놓고 본다면 낙심하거나 좌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평생을 주를 위해 헌신하고 충성했던 결과가 동족들에게 미움을 받아서 폭행을 당하고, 쇠사슬에 결박당한 것입니다. 바울은 오늘의 현대인들처럼 시류에 따라서 적당하게 주님을 믿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떠한 악조건 속에서도 주님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충성되게 감당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세상에서 자랑하던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고 다 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바울의 현실은 너무나도 절망적입니다. 자신의 전 생애를 주님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했던 바울의 인생 말년이 이토록 비참하고 억울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억울하고 암담한 마음은 우리가 한 눈만으로 바울이 직면한 현실을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또 하나의 눈으로 바울이 직면한 현실 그 너머를 바라보면 이야기는 전혀 달라질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 바울이 당하는 일련의 모든 사건들이 결국에는 바울을 로마제국 군대의 보호 아래 로마로 이끌어 가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바울이 차고 있는 쇠사슬은 죄인을 결박하는 쇠사슬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울을 위하여 예비하신 은혜의 쇠사슬이었습니다.
하늘의 태양은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고, 빛을 잃은 적도 없습니다. 다만 구름에 가려서 보이지 않을 때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앞의 짙은 먹구름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구름 너머에 찬란히 빛나는 태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내 삶에도 빛이 스며들고, 희망이 드러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때로 당하는 고난과 시련에 내 눈과 마음이 가려지면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늘에 태양이 항상 있듯이 하나님은 항상 그 자리에 계시고, 우리와 함께 하실 뿐 아니라 우리에게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현실에서 눈에 보이는 쇠사슬만을 보고 절망하는 외눈박이가 되지 말고, 또 하나의 눈으로 그 너머에서 우리의 모든 상황을 주관하시고 이끄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우리는 결코 낙심하거나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높이신 하나님께서는 또한 주님의 뒤를 따르는 성도들도 높이사 하늘 영광으로 갚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눈들을 가지고 하늘의 소망을 바라보며, 이 땅이 우리를 어떻게 대우하든지 오직 주님의 제자로서 주님이 가신 그 길을 좇아가기에 더욱 힘쓸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흥분한 다수의 유대인들이 자신을 죽이라고 괴성을 지르며 밀려오는 위기의 순간에 바울로서는 가만히 로마 군인들에게 들려 요새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자신을 쳐 죽이려고 하던 광분한 유대인들의 손아귀에서 안전하게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혼돈의 상황 속에서도 바울은 쇠사슬에 묶인 채 천부장에게 말할 수 있게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정말로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보편적으로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수많은 군중들 앞에 서면 어떻게 해서든지 나 한 몸을 보존하려고 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바울은 지금 흥분한 유대인들의 폭행으로 인해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습니다. 그 순간 로마의 군대가 와서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영내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이럴 경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제 살았구나”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한 순간이라도 빨리 로마 군대가 자신을 안전한 영내로 옮겨주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죽느냐 사느냐, 어떻게 해서 죽느냐 하는 것이 그에게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성난 군중들 가운데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거의가 자신들이 왜 바울을 그토록 미워하고 죽이려고 하는지를 모르고 그저 군중심리에 휩쓸려 있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그 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들로 하여금 바르게 알게 해서 구원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간절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안일보다도 주 예수께로부터 받은 자신의 소명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그토록 위급한 상황 속에서도 자신이 주님의 증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로마의 천부장에게 부탁하여 이동을 멈추게 하였던 것입니다.
어쩌면 바울은 그 옛날, 스데반이 죽임을 당하던 장면을 생각했었는지도 모릅니다. 스데반은 흥분한 유대 군중들에 의해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으면서도 설교를 했습니다. 그것을 누가 듣겠습니까? 들을 사람이 없을 것 같은데도 성난 군중들 앞에서 천사의 얼굴을 하면서 설교를 합니다. 그리고 돌에 맞아 죽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는 그 순간에도 자신들에게 돌을 던지는 군중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그때 스데반의 그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고 그리스도인이 된 것을 바울은 알고 있습니다. 바울 자신도 그때 죽임을 당하면서 전했던 스데반의 설교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지금 주님을 믿고 복음을 전하다가 스데반과 같은 그 처지가 되어 있습니다. 그 순간 스데반이 순교를 당하던 그 모습이 바울에게서 되살아났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아무리 저들이 성난 얼굴을 하고, 자기에게 돌을 던지려 하고, 죽이려고 달려들어도 오히려 저들을 불쌍히 여깁니다. 저들 가운데에는 모르고 행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사실 자기네들이 잘못된 것을 몰라서 그렇지, 다 알고서야 어떻게 그렇게 하겠습니까? 그러기에 바울은 스데반이 그러했던 것처럼 성난 군중들을 향해서 담대한 마음으로 설교를 합니다. 폭행으로 인해 상처와 피로 얼룩졌을 바울이 자신에게 근거 없는 비난과 폭력을 가하던 군중들, 그러나 지금 이 시간이 지나 로마로 가면 어쩌면 영원히 다시 볼 수 없을 그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눈물로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울의 이 마음은 오늘의 우리 모두가 품어야 할 거룩한 마음입니다. 우리는 언제 주님께서 다시 오실는지 모르는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 역시 오직 구원의 복음 전파에만 관심을 두었던 바울과 같은 모습을 지녀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세상 사람들처럼 자신의 문제, 그것도 땅의 것들만 생각하며 사는 자가 아니라, 하늘의 것들을 찾으며 지금 만나는 사람들이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구원의 복음,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흥분한 유대인들을 향해 변론할 수 있도록 천부장에게 요청하여 자기의 입장을 변론하는 시작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바울은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흥분한 군중들 앞에서 벌벌 떨면서 자기 생명이나 보존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놀랍게도 흥분한 군중들을 구원하려고 하는 열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이런 결박과 환난을 당하게 될 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고린도를 출발해서 예루살렘에 도착할 때까지 성령께서 계속 예고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예루살렘에 왔던 것은 로마 전도를 마치기까지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이 있을 것을 믿었던 까닭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결박을 당하고 있는 처지에서도 그는 그 사실을 확신했던 까닭에 조금도 굴함이 없이 사명감에 넘쳐 담대히 복음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37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을 데리고 영내로 들어가려 할 그 때에 바울이 천부장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느냐 이르되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바울을 들어서 층계 위로 올린 로마 군인들이 안전한 로마군의 요새로 바울을 옮기려고 할 바로 그때였습니다. 바울이 천부장에게 헬라어로 격식을 갖추어서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느냐?”라고 정중하게 말했습니다. 원문으로 보면, 이때 바울이 천부장에게 한 말은 매우 정중합니다. 폭행을 당하여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했을 뿐만 아니라, 억울하게 로마 군인들에 의하여 중죄인처럼 쇠사슬에 결박된 그 비참한 상황 가운데서도 바울은 조금도 평정을 잃지 않았던 것입니다. 흥분한 군중들이 악을 쓰듯이 아람어로 괴성을 지르는 가운데 이러한 바울의 정중한 표현의 헬라 말은 천부장의 주의를 환기시키기에 충분하였을 것입니다.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 이것은 바울이 헬라 말을 할 줄 아는지 의문이 나서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미 바울은 유창하면서도 정중하게 헬라 말로 천부장에게 자신의 말을 들어줄 것을 요청하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형식상으로는 의문형이지만, 내용상으로는 감탄문으로 보아야 합니다. 즉, “네가 어떻게 그렇게 헬라 말을 유창하게 잘 구사할 수 있느냐?”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무엇보다 군중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하던 바울을 범법자로 생각하였던 천부장은 뜻밖에도 그가 격식을 갖추어서 자신에게 정중하게 헬라 말로 말을 하자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바울의 말에 깜짝 놀란 천부장이 바울에게 두 가지의 질문을 연이어 던졌습니다. 천부장의 첫 번째 질문은, “네가 어떻게 고급 헬라어를 구사할 줄 아느냐?”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 질문은, “그렇다면 네가 폭동을 일으키고 자객 4,000명과 함께 광야에 잠적한 그 애굽인이 아니라는 말이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본문 38절인데,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네가 이전에 소요를 일으켜 자객 사천 명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애굽인이 아니냐.”
본문에서 우리말로 ‘자객’으로 번역된 헬라어 ‘시카리오스’는 ‘자신의 외투자락 아래에 단검을 가지고 다니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긴 외투자락 안에 단검을 숨기고 다니다가 매국노나 표적 인물을 만나면 살해해 버리는 칼잡이들을 뜻했습니다. 이러한 자객은 당시 유대 지방에서 많이 활동했습니다. 이들은 종교적인 명절에 많은 사람들 틈에서 요인들을 암살했습니다. 그들은 유대의 광신적 애국자들인 젤롯당의 일원으로서 로마 관리들뿐만 아니라 로마에 우호적인 유대인 인사들도 암살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자객들은 겉으로 보아서는 지극히 평범하기 때문에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많은 군중들 가운데 누군가가 칼에 찔려 죽었다면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하나는 이곳에 젤롯당의 자객이 왔었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죽임을 당한 사람은 매국노이거나 마땅히 죽임을 당해야 할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객들 중에 애굽 출신의 한 유명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바울이 결박과 환난을 당하기 6년 전인 주후 54년에 폭동을 일으키고 자신을 자칭 선지자, 혹은 메시아로 부르면서 자신이 로마제국의 압제로부터 유대를 구해낼 것이라고 말하고 다녔습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그 애굽인에게 현혹 당해서 자기 재산을 바치고, 그를 추종했던 유대인들의 수가 무려 3만 명에 달했습니다. 그는 자기를 추종하는 사람들을 감람산으로 모은 뒤에 자기의 말 한마디면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질 터인데,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성벽이 무너지면 진격하여 로마 수비대를 무찌르고 유대를 통치하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사전에 탐지한 벨릭스 총독이 먼저 군대를 급파하여 난에 가담하려고 했던 자들을 처형하거나 투옥시켰다고 합니다. 그때 그 난을 주동했던 애굽인은 자객 4,000명과 함께 광야로 잠적해 버렸습니다. 자신이 명령만 내리면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져 내리고, 로마제국으로부터 유대인들이 해방될 것이라고 큰소리치던 그 애굽인이 하루아침에 종적을 감추어버리자, 전 재산을 바쳐 그를 믿고 추종하던 유대인들은 애굽인에게 극심한 반감을 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로마 당국의 입장에서도 자객을 4,000명이나 거느리고 광야로 잠적한 애굽인은 요주의 위험인물이었습니다.
온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 보고를 받은 천부장이 현장에 출동해서 유대인들로부터 몰매를 맞고 있던 바울을 무엇보다 먼저 두 쇠사슬로 결박시켰던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천부장은 유대인들로부터 몰매를 맞고 있던 바울을 평소 반감을 품고 있던 유대인들이 그 애굽인을 붙잡아서 폭력을 가하고 있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로부터 몰매를 맞고 있는 바울이 광야로 잠적했던 그 위험인물이 틀림없다면 천부장으로서는 당장 바울을 쇠사슬로 결박시키는 것보다 더 시급한 일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정중하게 격조 높은 헬라 말로 “내가 당신에게 한 말씀을 드려도 좋겠습니까?”라고 말을 하자 천부장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혹세무민하는 폭동을 일으킨 폭도의 언행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부장이 바울에게 되물었던 것입니다.
“네가 어떻게 고급 헬라어를 구사할 줄 아느냐? 그렇다면 네가 폭동을 일으키고 자객 4,000명과 함께 광야로 잠적했던 그 애굽인이 아니라는 말이냐?”
본문 39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이 이르되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시의 시민이니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 하니.”
천부장의 질문에 바울은 먼저 “나는 유대인이라”고 자신의 혈통에 대하여 분명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괜히 쓸데없는 오해와 누명으로 인해 처형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작은 마을이 아닌 길리기아의 대도시 다소 출신임을 밝혔습니다. 다소는 당시 로마와 아테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와 거의 같은 수준의 유명한 도시였습니다. 로마제국의 황제 줄리어스 시저는 다소의 시민들에게 로마 시민권자의 모든 권리와 특권들을 부여했습니다.
바울이 자신이 큰 도시의 다소 출신임을 밝힌 것은 다소가 당시 많은 사람들이 선망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부유했고, 교육 수준이 높았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습니다. 당시는 출신 성분이 신분을 나타내는 중요한 척도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님이 나사렛 출신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무시의 대상이었으며, 사람들이 갈릴리 지역을 그리스도나 선지자가 출현하기에 마땅치 않은 곳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도 입증이 됩니다. 그래서 경제와 교육이 발달한 대도시의 다소 출신인 바울 자신은 혹세무민의 폭동을 일으킨 그 애굽인과는 같지 않음을 강조한 것이었습니다. 천부장은 바울의 이러한 자기소개를 듣고 바울의 요구를 흔쾌히 승낙하여 그에게 변론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본문 40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천부장이 허락하거늘 바울이 층대 위에 서서 백성에게 손짓하여 매우 조용히 한 후에 히브리 말로 말하니라.”
바울을 죽이려고 했던 유대인들은 그때까지도 “바울을 죽이라”고 함성을 지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천부장의 허락을 받은 바울이 층계 위에서 격분해 있는 군중들을 내려다보면서 손을 흔들자 이내 쥐 죽은 듯이 잠잠해졌습니다. 본문에서 우리말로 ‘서서’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어떤 위치에 흔들림 없이 굳게 서 있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사실은 극한 상황 속에서도 조금의 물러섬도 없이 당당하게 서 있는 바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몰매를 맞아 가누기조차 힘든 몸을 이끌고 자신을 구타했던, 그리고 여전히 자신을 향해 살기를 드러내고 있는 군중들 앞에 자신의 무죄를 입증함과 동시에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담대히 섰던 것입니다.
어쩌면 바울은 말하기 전에 성난 군중들을 바라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을는지도 모릅니다.
“나는 당신들 모두가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알고 있소. 나 또한 이전에는 당신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소. 나는 당신들의 열심을 이해하고, 또한 현재의 상황을 위협하는 자에 대한 당신들의 증오를 이해하오. 만일 내가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나도 당신들과 함께 죽이라고 외치는 군중들 가운데 있었을 것이오.”
바울이 비록 로마 군인들에게 체포당하고 두 쇠사슬에 결박당해 있을망정 그의 카리스마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쳐 죽이려고 했던 흥분한 유대인들에게 친근감을 나타내기 위해서 모국어인 히브리어로 입을 열었습니다. 22장 1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부형들아 내가 지금 여러분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바울은 그 동안 어디에서 설교를 하던 청중들을 향해 항상 “형제들이여”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이례적으로 “부형들아”라고 말을 시작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말로 ‘부형들아’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사람들아, 형제들아, 그리고 아버지들아’라는 뜻입니다. 바울이 말한 ‘아버지들’이 아버지와 어머니들, 즉 부모들을 뜻한다면, ‘형제들’은 형제자매들을, 그리고 ‘사람들’은 자식들을 뜻했습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Brothers and fathers”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세 부류의 사람들을 각기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청중들과의 동질성을 부각시키면서도, 최상의 존칭어를 사용해서 그들을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자기 앞에 있는 유대인들이 방금 자신을 쳐 죽이려고 했을지라도 같은 유대인인 바울에게 있어 모든 유대인들은 다 부모들이요, 형제자매들이요, 자식들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울은 지금 자신을 죽이려고 결심하고 몰려든 군중들 앞에 서 있습니다. 저들이 언제 어떤 모양으로 돌변하게 될는지 알 수 없는 긴급한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군중들을 향해서 “부형들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불렀습니까?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지금 여러분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일반적으로 결론이 바뀔 수 있는 이야기가 ‘토론’이라고 한다면, 결론이 이미 나 있는 상태에서 말하는 것은 ‘변명’입니다. 지금 바울은 흥분한 군중들 앞에서 ‘토론’하자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단 한번이라도 좋으니 자신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보라는 간구와 간청의 의미가 담긴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바울은 유대인들이 선입관을 배제하고 진지하게 자신의 말을 듣는다면 자신의 무죄함은 물론이고, 복음이 참된 진리임을 그들도 깨달을 것이라는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가에 관한 진리에 대해 하나님이 바울의 눈을 열어 주신 그 순간부터 계속 바울의 마음에 타오르고 있었던 열망은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 특히 예루살렘의 유대인들과 복음을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바울이 그토록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말하고, 어쩌면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믿도록 설득할 수 있는 기회, 바울의 시간이 왔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 모두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당시 상황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바울 앞에 선 군중들은 격렬한 폭풍과 같이 감정이 격앙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불문곡직하고 바울을 무조건 죽이겠다고 몰려든 사람들입니다. 과연 바울에게는 복음을 전할만큼 여유가 있었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지금 자신을 적대시하는 유대 군중들로부터 부당하게 집단 폭행을 당해 목숨까지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로마 군인들에 의해 간신히 도움을 받아 안토니아 요새 안으로 들려 가는 중이었습니다. 아마도 그의 얼굴에는 피가 흐르고, 정신을 차리기도 어려운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이런 상황 속에서도 복음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여유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기회가 되어서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복음을 증거하는 대상이 사랑스러워서도 아닙니다. 그들은 자기를 죽이려고 한 자들입니다. 그러한 유대인들을 향해 바울은 어떻게든 기회를 만들어서 복음을 전하고자 한 것입니다. 왜입니까? 무엇이 바울로 하여금 이렇게 자신을 죽이려고 한 자들에게까지 어떻게든 복음을 전하려 하게 한 것입니까?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바로 소명 의식 때문입니다. 복음 전파자로서의 소명 의식이 바울로 하여금 위기 앞에서도 복음을 전하게 한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한다 해도 자랑할 것이 없는 것은 그것이 내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자기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자신에게 맡겨진 복음 전파의 사명을 다하지 않으면 결국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이기 때문에 부득불 최선을 다해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난 이후로부터 소명 의식에 사로잡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열중했습니다. 바울의 약 12년에서 13년에 걸쳐 이루어진 세 번의 전도여행을 총망라하면 그 기간 동안에 아시아 대륙과 유럽 양 대륙에서 58개 도시를 방문하고, 13,300km를 누비고 다녔습니다. 지금처럼 교통이 발달되었던 것도 아니어서 극히 일부 구간에 배를 탄 것 외에는 걸어서 다녔습니다. 그로 인해서 바울은 젊음을 잃었고, 건강을 잃었습니다. 세상적으로 출세할 수 있었던 모든 기회와 가능성도 다 잃었습니다.
바울이 주님을 만난 이후 주님을 위해 헌신하고 충성했던 일생의 전도여행을 통해서 얻은 것이 있기는커녕, 오히려 잃은 것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언젠가 무덤에 묻혀서 한줌의 흙으로 사라져버릴 자신의 육체에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의 관심은 오직 주 예수께로부터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사명을 다 마칠 수만 있다면 자신의 목숨은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말대로 생명을 다 바쳐서 모든 생명을 살리는 생명의 복음인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죽음을 얼만 남겨두지 않은 상황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
얼마나 자기 사명에 충실하였으면 이렇게 당당하게 고백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는 참으로 자기 사명에 충실한 복음 증거자였습니다. 그렇다면 복음 증거의 사명은 바울에게만 주어진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하늘로 승천하시기 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주님의 이 지상 대 명령은 당시의 그 제자들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라,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그리스도의 제자된 성도들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과 같이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미치리라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해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않겠다는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얼마나 복음 증거에 최선을 다하고 계십니까? 주님이 여러분에게서 열매를 찾으시는 날, 여러분은 어떤 열매를 주님 앞에 내어놓으시겠습니까? 바울은 어떠한 타협도 없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전함으로써 세상으로부터 갖은 오해와 심지어 목숨까지 위협받는 고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자기를 죽이려는 자들을 향해서 마지막까지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붙잡고 하나님께서 이 땅에 머물게 하시는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할 수 있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리하여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그날 하나님이 예비하신 영광의 면류관과 함께 밤하늘에 빛나는 별들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는 영광스러운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