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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을 향한 바울의 자기 변명
사도행전 22:2-8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난 이후로부터 바울의 마음속에 끊임없이 타오르고 있었던 간절한 열망은 자기 동족인 유대인들도 자기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어디를 가든지, 어느 곳에서든지 유대인들과 복음을 나누기를 원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이방인 지역에서 전도를 할 때에도 항상 먼저 유대인들의 회당을 찾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에게서 돌아오는 반응은 시기와 질투요, 핍박과 생명의 위협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이 가는 곳마다 조직적으로 따라다니면서 방해를 하고,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참으로 지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나사렛 출신의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약속하신 그 메시아라는 사실을 자기 민족에게 전하는 사명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에게 필요한 것은 동족 유대인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적절한 기회였습니다. 이제 바울이 그토록 사랑하는 유대인 동족들과 함께 말하고, 어쩌면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믿도록 설득할 수 있는 기회가 왔습니다. 바울은 안토니아 요새의 베란다에 서서 방금 전에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흥분한 유대인들을 향해 말하기 시작합니다.
특별히 오늘의 본문에서 바울은 자기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는지, 그리고 예수를 만나서 그의 삶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었는지를 사실적이고 구체적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내용이 본문에만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도행전 9장과 본문인 22장, 그리고 26장, 세 곳에 기록이 되어져 있습니다. 바울은 똑같은 간증을 무려 세 번이나 반복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다메섹의 경험이 그만큼 중요한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가 이 사건을 세 번 기록했지만, 그러나 솔직히 바울이 전도여행을 하면서 이 사건을 세 번만 이야기했겠습니까? 아닐 것입니다. 사울이 바울이 되고, 바울이 대 사도가 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가 바로 다메섹의 경험이었다고 한다면, 그는 평생을 두고 이 이야기를 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해 봅니다. 어쩌면 이방인 지역을 비롯하여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에도 다메섹의 경험을 빼놓지 않고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다메섹의 경험은 바울의 가치관과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놓은 엄청난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바울은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예루살렘의 흥분한 유대인들 앞에서 자신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던 그 다메섹의 이야기를 전하기 시작합니다.
본문 2절의 말씀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이 그가 히브리 말로 말함을 듣고 더욱 조용한지라 이어 이르되.”
로마 군대 천부장에 의하여 유대인 폭도들로부터 구출 받은 바울은 천부장에게 ‘헬라 말’로 자신을 소개했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을 향해서는 ‘히브리말’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이 이처럼 유대인들의 공용어인 ‘히브리말’로 말하는 것은 이중적인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울의 말을 듣고 있는 유대인들과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당시 바울의 말을 듣고 있는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히브리말을 사용하는 바울 자신도 경건한 유대인이요, 유대 율법과 관습을 존중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흥분한 유대인들은 바울을 배교자이자 민족을 저버린 파렴치한으로 여겨서 분노했었는데, 바울이 자신들을 향해 “부모들, 형제자매들, 자식들”이라고 부르면서 모국어인 히브리말로 말하는 것을 듣게 되자 그들은 더욱 조용하게 바울의 자기변명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바울의 자기변명은 앞서 말씀을 드렸듯이 사도행전 9장에서 확인했던 그 내용으로서 주님께서 어떻게 바울 자신을 구원해 주셨는지를 밝히는 자기 간증인 동시에 복음의 증언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보면 바울의 자기변명에는 크게 두 가지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자신과 자기를 죽이기 위해 달려드는 유대인들과 같은 점을 말씀함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과 자신이 서로 다른 점을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자신을 죽이기 위해 달려드는 유대인들과 같은 점은 무엇입니까?
본문 3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지금 바울은 본문에서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사실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나는 유대인으로.” 그러니까 나는 당신들과 생각도 같고, 경험도 같고, 마음도 같은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빌립보서 3장에서 자신은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감히 자신과 비교가 되지 못할 만큼 육체적으로 내세울 것이 많았습니다. 그 가운데 그는 유대인의 율법에 따라 태어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모든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다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틀림없이 그들 중 얼마는 이방 세계로부터 개종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 성인이 된 후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는 ‘이스라엘 족속’이라고 하면서 자신이야말로 순수한 이스라엘 혈통을 가진 언약의 백성이라고 했습니다. 나아가 자신은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피 속에 순수한 히브리인의 피가 흐른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즉, 순수한 이스라엘 족속 중에 가장 순수한 자라는 뜻으로, 혈통상으로는 이방인의 피가 전혀 섞이지 않은 순수한 유대인일 뿐만 아니라 언어나 습관에 있어서도 전통 속에 양육된 정통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 가운데는 그 혈통이 의심스러운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에스라 2장 62절 이하에서 보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올 때 그 족보가 분명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더구나 오랜 세월을 세계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다가 귀국한 유대인들 가운데는 그 혈통이 의심스러운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머니는 유대인이면서도 아버지는 이방인이었던 유대인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본문에서 흥분한 유대인들을 향해 “나는 유대인이요”라는 말로 시작한 것은 자신이 혈통상으로는 흠이 없는 정통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굳이 이렇게 자신의 혈통, 즉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사실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에베소에서 온 유대인들의 모함으로 자신을 ‘백성과 율법과 성전을 훼방하는 자’로 오해하고 있는 것을 바로 잡고자 함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자신을 소개합니다.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바울의 고향인 다소는 작은 시골 마을이 아니라 당시 대학의 도시로 유명한 대도시였습니다. 경제와 교육이 발달한 대도시 다소에서 태어났던 바울은 성인이 되기까지 계속해서 그곳에서 살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성경에는 바울의 어린 시절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기 때문에 바울이 언제 예루살렘에 왔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학자들은 대체적으로 바울이 13세, 혹은 14세에 예루살렘에 왔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때 길리기아 다소에서 기초적인 회당 교육을 마치고 보다 본격적인 율법 교육을 받기 위해 당대 최고의 율법학자인 가말리엘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유학을 왔습니다.
가말리엘은 주후 1세기에 활동하였던 매우 유명한 율법사로서 당대의 유대인들에게 큰 영향력을 끼치며 많은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었습니다. 특히 가말리엘은 ‘우리들의 랍비’라는 뜻을 지닌 유대인들이 수여한 최고의 명칭인 ‘라반’으로 불리는 일곱 랍비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정도의 명성을 지닌 랍비에게 직접 율법을 배웠다면 바울이 당대의 어떤 율법사보다도 탁월하며, 그 어떤 정통 유대인들보다 뛰어났을 것이라는 추측은 얼마든지 가능할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바울은 자신이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율법을 그저 대충 배운 것이 아니라 세밀성과 정확성에 따라 철저하게 배웠다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말로 ‘교훈을 받았다’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주로 ‘어린이들을 훈련시키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때리다’, 또는 ‘채찍질하다’라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바울이 매우 혹독하고 엄격하게 율법을 배웠을 뿐만 아니라, 이 단어가 완료 분사로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과거에 엄격하게 배웠던 그 율법의 영향력이 현재에도 여전히 바울에게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금 바울이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육체적인 조건들을 자랑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난 그 순간부터 세상적인 자랑들은 다 배설물로 여기기로 작정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율법 교육을 받았던 과정을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 누구보다도 율법에 정통한 사람이었음을 드러내기 위함에 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지금 흥분한 유대인 군중들과 같이 자신도 같은 히브리 전통을 이어받은 사람으로서 그들의 신념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 군중들처럼 자신도 똑 같은 유대인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 하나님에 대해서도 그들과 동일한 열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들이 알게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씀합니다.
“나는 당신들과 같이 태어났고, 당신들과 같이 자랐고, 당신들과 같이 교육을 받았고, 당신들과 같은 행동을 했었습니다. 만일 내가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어쩌면 나도 당신들과 함께, 당신들의 무리 가운데 서서 누군가를 향해 ‘죽여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흥분한 유대인 군중들을 향해 그들과 자신이 똑 같다는 사실로부터 말씀을 시작합니다. 특별히 예수를 핍박했던 것이 같다는 사실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여기에서 우리말로 ‘열심이 있는 자’라는 헬라어는 ‘열심이 불타는 자’라는 매우 강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즉,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께 대하여 불타오르는 열심을 품고 있었던 자임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바울은 ‘너희 모든 사람처럼’이라고 해서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유대인 군중들도 그들이 행한 것이 율법에 대한 강한 열정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도 군중들 못지않게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자기 소개서를 보면 참으로 대단합니다. 더구나 식민지 출신으로서는 여간해서 얻기 어려운 로마의 시민권을 태어나면서부터 가졌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본문에서 바울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군중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자신의 지난날의 부끄러운 과거를 이야기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한 마디로 자신은 태어나면서부터 이방인의 피가 섞이지 않은 순수한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도 전에는 당신들보다 조금도 뒤지지 않는 열렬한 율법주의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율법이 금하는 모든 것을 지키는데 열심이었고, 율법이 명하는 모든 일을 행하는데 열심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스스로 자신을 가리켜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그는 완전무결하고 철저한 율법주의자였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훌륭한 혈통과 교육을 받았던 바울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본문 4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본문에서 ‘이 도’는 구원의 유일한 길인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기독교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 도’를 직역하면 ‘그 길’입니다. ‘길’이라는 표현은 ‘삶의 도리’, 혹은 ‘진리’를 가리키는 유대적 표현입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라든지, ‘기독교’라는 직접적인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유대인들에게 익숙한 ‘길’이라는 단어로 ‘기독교’를 표현한 것은 유대인들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기독교가 사실 그들과 그들의 조상들이 추구하던 그 진리인 것을 설득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즉, 흥분한 유대인들과 바울 자신이 서로 다른 것을 추구하는 다른 부류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계시하신 바로 ‘그 길’이라는 것을 설득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다메섹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 이전에는 자신이 ‘이 도를 박해했던 자’였습니다. 본문에서 우리말로 ‘박해하다’라는 헬라어는 부정과거 능동태로서 무슨 방법으로든지 누군가를 지독하게 괴롭히는 데에 주로 사용된 단어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바울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직접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과거에 자기가 유대교에서 얼마나 열성 분자였는지를 스스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다른 어떤 유대인들보다도 더 열성적으로 조상의 유전을 지키고, 또 그것을 최고의 긍지로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예수를 믿기 이전의 바울은 기독교에 대한 무서운 박해자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하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잡아서 옥에 넘겼습니다. 심지어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기까지 했다고 스스로 고백합니다. 바울은 스데반을 죽일 때에 우두머리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바울에 대하여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사도행전 9장 1절에서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였다.” 그는 이렇게 교회와 성도들에게 최대의 박해자였습니다. 훼방자였고, 파괴자였습니다. 그리고 죄인 중의 괴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바울이 흥분한 유대인 군중들을 향해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무엇입니까? “당신들이 예수를 핍박했습니까? 나도 당신들 못지않게 예수를 핍박했던 사람입니다.” 지금 바울은 자신을 박해하고 죽이려고 하는 군중들을 향해서 이 점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흥분한 군중들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나도 전에는 당신들보다 훨씬 더 지독한 박해자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들이 지금 나를 이렇게 죽이려고 하는 심정을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도 그들처럼 똑같은 유대인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 하나님에 대해서도 그들과 동일한 열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들이 알게 되기를 원했습니다. 본문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그의 의도는 이러했을 것입니다.
“나도 예수를 믿기 전에는 당신들과 똑 같았습니다. 오히려 당신들보다 더 극성스러운 유대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당시 최고 엘리트로서의 자격을 다 갖추고 있었던 바울이 한 일은 고작 사람을 잡아 죽이는 일이었습니다. 그것도 전혀 죄가 없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죽이는 일이었습니다. 선한 일에 그토록 열심이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무고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죽이는 일에 집요할 정도로 열심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가문을 자랑하고, 학문적 배경을 의지합니까? 그런가 하면, 좋은 대학교에 들어가지 못해서 얼마나 안달이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까? 그러나 좋은 가문, 좋은 대학이 좋은 사람을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이것을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부모들은 아이들이 공부만 잘하고, 좋은 대학교에만 들어가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되고 문제가 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그 이후가 더 문제입니다. 좋은 대학교를 나와서 좋은 자리에 앉아서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사회적으로 더 큰 죄를 저지르기 일쑤입니다. 사회적으로 큰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대개가 좋은 가문을 자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좋은 대학교를 나온 사람들입니다. 소위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가문, 좋은 학벌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 자체가 거듭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른 신앙이 들어가고, 바른 가치관이 세워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삶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관계를 인격적이고 직접적인 관계로 이어가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예수님과의 이 한 번의 만남이 사울이 바울이 되게 했다고 한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을 깊이 만나는 체험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본문 5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그들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
바울이 교회를 짓밟는데 얼마나 열심이었는지는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공회의 모든 장로들이 증인들이었다고 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는 누구의 증인이든 두 사람 이상의 증인만 있으면 사실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 유대 사회에서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공회의 장로들은 가장 큰 권위를 지닌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모두 바울의 증인이었으니 바울이 교회를 짓밟는데 얼마나 앞장섰었는지는 재론의 여지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바울은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공회의 장로들로부터 공문을 받아 가지고 예루살렘에서 213km나 떨어져 있는 다메섹의 그리스도인들까지 체포해서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오기 위해 다메섹으로 갔습니다. 열심도 이런 열심은 없습니다. 바울이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자기를 죽이기 위해 달려드는 유대인 군중들과 자신을 동일시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대한 열심으로 나를 죽이려고 하지만 나도 예전에는 하나님께 대하여 여러분들보다 더 열심이었습니다.” 지금 바울은 이 말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이야기하려고 자신이 과거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었던 일과 공문을 받아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려고 다메섹에까지 갔던 이야기를 합니다. 즉, 지금 자기를 죽이기 위해 흥분해서 달려드는 당신들과 이전의 내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는 유대인 군중들과 자신이 다른 점이 한 가지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그것뿐입니다. 그것 외에는 그들과 자신이 달라질 아무 이유도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군중들을 향해 자신이 이렇게 변할 수밖에 없었던 궁극적이고도 가장 중요한 이유를 들어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전에는 훼방자요 박해자였던 자신이 지금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생명을 바쳐가면서 이방인의 사도가 된 이유가 무엇인가? 과거에 자신도 열심히 산다고 살았는데, 그것이 잘못된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메섹에서 한 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나를 완전히 바꾸어놓았습니다. 그가 바로 부활의 주님이었습니다.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가 지금의 나를 나 되게 했다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나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그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본문 6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가는 중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
바울이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기 위해 일행들과 함께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시각은 오정쯤 되었을 때입니다. 그 시각에는 태양의 빛이 가장 빛날 때로서 이 세상의 어떤 빛도 눈부신 태양의 빛 앞에서는 빛이 될 수 없는 시각입니다. 바로 그때 주님께서 바울에게 ‘큰 빛’으로 임하셨습니다. 바울이 주님을 ‘큰 빛’으로 표현했던 것은 태양이 가장 눈부시게 빛나는 오정의 그 눈부신 빛 속에서도 주님의 빛을 정확하게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꾸어 말씀을 드리면, 주님의 빛 앞에서 태양의 빛은 어둠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울은 주님의 빛이 자기를 둘러 비치었다고 증언합니다. 주님의 빛이 바울을 일행들로부터 격리시켜서 그를 휘감은 것이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땅바닥에 거꾸러진 바울의 귀에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는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사울’은 바울의 옛 이름입니다. 유대인들은 상대를 친근하게 부를 때 상대의 이름을 두 번 연거푸 불렀습니다. 바울을 찾아오신 주님께서도 바울의 이름을 그렇게 두 번씩이나 친근하게 부르셨던 것입니다. 바울은 땅바닥에 꼬꾸라진 채로 반사적으로 “주님, 누구십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본문에서 우리말로 ‘박해하다’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집요하게 괴롭히다’를 뜻하는 현재 능동태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시는 동안에 단 한 번도 예수님을 직접 뵌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평생토록 예수님을 직접 뵌 적이 없었던 바울로서는 사도의 자격이 없다는 비판론자들의 비난에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바울이 이 땅에서 예수님을 직접 만난 적이 없었으니 그가 예수님을 직접 박해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 나사렛 출신의 예수는 자신이 신봉하는 유대교 지도자들에 의해 신성모독죄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한 흉칙한 범죄자일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를 메시아라고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척결해야 할 이단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열렬한 유대 율법주의자였던 바울은 이단 척결에 자기의 젊음과 인생을 걸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실제로 예수님을 만난 적도 없었고, 그 예수님을 박해한 일도 없었습니다. 바울은 단지 교회를 박해했고,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바울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주님께서는 바울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척결하려고 했던 그 그리스도인들과 당신 자신을 동일시하신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 제자들과 당신을 동일시해서 말씀하신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마태복음 10장 4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전도훈련을 시키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그러니까 너희를 핍박하는 자는 너희를 핍박하기 전에 나를 핍박하고 있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심지어는 마태복음 25장에서 달란트 비유를 통해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께서는 그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셔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제자들과 항상 함께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지 제자들을 영접하는 것은 그 제자들 속에 임재해 계신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었고, 제자들을 배척하는 것은 그들 속에 계신 주님을 배척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교회를 박해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박해하는 것임을 몰랐었는데, 이것을 이제야 깨달은 것입니다.
예수님과 믿음의 성도들은 이 세상의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연합의 관계에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의 아픔을 당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이십니다. 우리가 나가서 박해를 받을 때에 당신이 박해를 받는 것으로 간주하십니다. 아니, 단순히 간주하시는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보다 당신이 더 아파하십니다. 박해만이 아닙니다. 어떤 고민과 아픔과 슬픔도 예수님은 당신의 것으로 여기시고 동참하십니다. 엄밀히 말해서, 예수님은 당신과 우리 사이를 구분하지 않으십니다. 때로는 우리가 무뎌서 느끼지 못하는 우리 자신의 영적인 문제들을 예수님께서는 더 아파하시고, 고통스러워하시며,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십니다.
주님과 성도들과의 연합의 관계는 단순히 교리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활과 밀접히 관련이 있는 진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늘 임마누엘의 주님이 함께 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아파할 때에 주님은 더 아파하시고, 내가 기뻐할 때에는 주님께서 더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에 우리 자신이 변하고, 가정이 변하고, 우리를 통해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변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울은 지금 어떤 신학적인 논문을 가지고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체험했던 개인적인 간증을 나누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당신 안에서 일으키신 모든 변화들과 당신의 삶 속에서 그분이 행하신 모든 선한 일들을 알지 못해서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유대인들과 나누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들도 자신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서 구주로 믿고 구원받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다른 누군가에게 전해 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증언이 될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남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경험한 내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남이 변화된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예수를 믿고 변화된 삶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입니다. 모름지기 간증이라는 것은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난 체험적인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세상 속에서 자신의 변화된 삶을 이야기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바울은 평소에 누구보다도 자기가 하나님에 대해 열심이라는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이렇게 정작 중요한 것에 대해서는 무지한 인간이었습니다. 가장 무기력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나사렛 예수가 인간의 죗값을 대신 치러주신 메시아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것은 그들 속에 임재해 계신 주님을 박해한 것이요, 나아가 그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을 박해한 중범죄라는 사실을 그는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자기를 먼저 찾아오신 주님의 은혜로 그 무지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습니다.
그 이후에 바울이 일평생 빚진 마음으로 사람들을 섬기면서 살았던 것은 그 사람들 속에 주님께서 임재해 계신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죽음의 몰매를 맞고 두 쇠사슬에 결박당해 안토니아 요새로 끌려가면서도 자신의 동족, 자신의 부모들과 형제자매들, 그리고 자식들에게 전해 주려고 했던 메시지였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바울 자신을 박해하는 것은 예수님을 박해하는 것임을 이야기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누구든지 가진 것이 없고 보잘 것 없다고 해서, 자기와 다르다고 해서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것은 그 사람들 속에 임재해 계시는 주님을 박해하는 것임을 저들에게 일깨워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에게 정말로 중요한 것은 체험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났느냐, 안 만났느냐? 그것만이 문제입니다. 예수를 만나는 순간에 운명이 달라지고, 세계관이 달라지고, 인간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 예수님의 복음, 예수님의 능력, 예수님의 생명력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오늘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렇듯 삼엄하고 중요한 시간에 자신의 생명을 걸고 나사렛 예수로 인하여 자신이 변화된 삶을 증거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