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사도행전 22:9-13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은 흥분한 유대인 군중들로부터 죽음에 이르는 몰매를 맞은 뒤, 로마 군인들에 의해 두 쇠사슬에 묶인 채 결박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예루살렘에서의 결박은 그가 고린도를 떠나 드로아를 거쳐서 오는 동안에 성령께서 계속 예고해 주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아무리 예고해 주셨다고 해도 지금 바울은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습니다. 흥분한 다수의 군중들이 자신을 죽이라고 괴성을 지르면서 달려드는 절체절명의 순간입니다. 그런데 그처럼 위급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쇠사슬에 묶인 상태에서 천부장에게 자신이 말할 수 있게 허락해 달라고 당당하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정말로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보통 사람들 같았으면 한 순간이라도 빨리 안전한 안토니아 요새로 들어가려고 했을 텐데 말입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난 이후 자신은 살아도 주를 위해 살며, 죽어도 주를 위해 죽기로 작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언젠가 한 줌의 흙으로 사라지고 말 자신의 육체를 위해 살지 않았습니다. 바울에게 있어 그의 모든 인생의 목적은 오직 주님을 향해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에게는 기회만 있으면 주 예수께로부터 받은 사명이었던 복음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그토록 위급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육체적인 안위가 아니라, 어떤 방법으로든지 흥분한 유대인 군중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자기를 죽이고자 하는 성난 군중들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도 있을 기회를 얻은 바울은 그들에게 자신이 경험했던 다메섹의 사건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실 바울이 전하는 말을 듣고 흥분한 군중들 가운데 몇 사람이나 회개하게 될는지, 어쩌면 진주를 개한테 던지는 것과 같이 쓸데없는 짓은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그런 것은 전혀 개의치 않고 자기가 해야 할 말을 담대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 옛날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기 전에 성난 군중들을 향해 설교를 하던 그 모습이 바울의 마음에 역력히 떠올랐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바울에게는 바로 그 시간에 들었던 하나님의 말씀이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지금 바울의 운명은 그야말로 경각에 달려 있습니다. 바울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지금 흥분한 군중들 앞에서 자기가 무사할 것 같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설교를 한 다음에 그 옛날 스데반이 돌로 쳐 죽임을 당했듯이 자기도 그렇게 될지 모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흥분한 군중들이 어떻게 돌변할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에서도 지금이야말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절박한 심정으로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이대로 맞아 죽어도 좋지만 자신이 전하는 말을 듣고 저들 가운데 몇 사람이라도 예수를 구주로 믿고 구원 얻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지금 바울은 추상적인 이야기나 철학적인 이론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예수를 믿게 된 것은 어떤 학문이나 지식을 통달해서가 아닙니다. 그가 예수를 믿게 된 것은 체험이었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그는 하나님을 학문적으로만 알았습니다. 철학적으로만 알았습니다. 어릴 때 부모님 밑에서 종교 생활을 하면서 종교적으로만 하나님을 알아 왔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지금 바울은 순전히 자기가 만난 사건, 그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들도 자신과 같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서 예수를 구주로 믿고 구원 얻기를 바라는 마음만이 간절합니다. 그런 점에서 바울의 설교는 신앙고백적인 설교요, 간증적 설교입니다.
바울은 흥분해서 자기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유대인들과 자신이 같은 점을 이야기합니다. 즉, 자신은 정통 순수 유대인으로서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육을 받았고, 유대인 군중들처럼 자신도 하나님께 대하여 동일한 열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알아주기를 원했습니다. 심지어 그 열심이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기까지 했었다고 스스로 고백합니다. 그런데, 그랬던 자신이 유대인 군중들과 다른 점이 한 가지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지금 유대인 군중들이 뭔가 몰라서 흥분하여 자신을 죽이려고 달려들지만, 저들도 예수를 만나기만 하면 자기처럼 달라질 것이라는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간절한 마음으로 흥분한 유대인 군중들을 향해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한낮의 햇빛이 가장 눈부신 오정쯤 시각에 태양의 빛 속에서 큰 빛을 분명하게 보았습니다. 그 빛은 자연계의 빛을 초월한 하나님의 빛이었습니다. 바울이 그 빛을 찾아 헤맨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태양의 빛보다 더 눈부신 빛이 있음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영이신 주님께서 바울을 찾아오셔서 당신의 빛으로 바울을 휘감아 주신 것이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유대인들이 죄가 없으신 예수님을 고발했을 때 빌라도 총독이 예수님을 심문했습니다. 빌라도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메시아와 독대하는 특별한 은총을 입은 것입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어이없게도 예수님께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물었습니다. 진리 앞에서 진리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죄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서도 비굴하게 군중들의 압력에 굴복해서 예수님께 십자가의 사형을 선고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요한복음 19장 14절은 그때의 시각이 제6시였다고 밝혀주고 있습니다. 유대 시간으로 제6시는 우리 시간으로 낮 12시, 즉 정오입니다. 빌라도 총독도 바울처럼 정오인 낮 12시에 예수님과 독대를 했지만, 바울과는 달리 예수님과 독대하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얻고서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가련한 인간이 어디 빌라도 한 사람뿐이었겠습니까?
본문 9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땅바닥에 꼬꾸라진 바울은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사울은 바울의 옛 이름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반사적으로 “주님, 누구시니이까?”라고 여쭈었고, 주님께서는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 현장에는 바울 혼자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에게는 다메섹의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오기 위한 체포조 일행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들이 빛은 보면서도 말씀하시는 주님의 소리는 듣지 못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이 증언은 똑같은 장면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사도행전 9장의 증언과는 그 내용에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9장 7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그러니까 사도행전 9장은 바울의 일행이 소리는 들었는데 빛은 보지 못하였다고 하고, 오늘의 본문은 바울의 일행이 빛은 보면서도 소리는 듣지 못했다고 다르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가끔 성경의 오류를 찾겠다는 단 한 가지의 목적을 가지고 성경을 탐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유일한 관심사는 성경에서 오류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만일 오류를 찾아낸다면 그들은 자기들이 믿지 않는 것에 대한 핑계 거리를 얻게 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사람들은 사도행전 9장에 언급된 바울의 진술과 22장에 있는 본문의 진술을 살펴보고는 “결정적인 오류가 여기에 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신앙과 행위에 있어 오류가 없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결코 오류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때로는 원문에 충실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최초의 성경은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영어나 한글로 완벽하게 번역할 수 없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에서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원문을 비교하면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의 증언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증언을 종합하면 당시의 상황을 보다 정확하게 파악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말로 ‘보다’와 ‘듣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동사는 각각 ‘보다’와 ‘듣다’라는 의미와 함께 ‘분별하다’, ‘이해하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본문은 바울의 일행이 뭔가 빛을 보기는 본 것 같은데, 그 빛이 주님이심을 분별하지 못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고, 사도행전 9장은 그들이 뭔가 소리를 듣기는 들었는데 그 소리가 바울을 향한 주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였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두 증언을 종합하면,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이 주님의 구원을 받는 현장에서 바울의 일행은 지금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본문은 아무도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 소리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빛과 말씀이 한 장소에 임했는데도 그 현장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 주님을 만나 주님의 말씀을 듣고 구원의 은총을 얻은 사람은 바울 밖에 없었습니다. 바울은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여 연행해 오기 위한 체포조의 우두머리로써 가장 흉악한 폭도였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의 구원의 은총은 바울 한 사람에게만 임했습니다. 일행들이 그 소리를 들었지만 그 단어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직 바울만 이해를 하고 알아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후에 에베소서를 쓰면서 주님의 구원은 선물이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고서는 일행들 가운데 가장 흉악한 폭도였던 자기 혼자 주님의 구원을 입은 것을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은총을 누구에게 줄 것인가? 누가 구원의 은총을 입을 수 있는가? 그 결정권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빌라도 총독과 바울의 일행이 구원의 선물의 대상에서 제외된 것도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으로 인함이었습니다. 그랬을 때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두고 “하나님도 사람을 차별하시는가?”라고 불평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와 관련하여 종교개혁자 칼빈은 범죄하여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그러한 판단에 대하여 불평할 자격이 없다고 했습니다. 범죄한 인간이 지옥에 가는 것은 너무나도 지극히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범죄하여 감옥에 가야 하는 사람이 “나를 왜 감옥에 보내느냐?”라고 항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받은 자들은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올려드려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영원한 지옥에 떨어져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구원하여 주신 그 은혜는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온갖 허물과 죄악 투성이인데도 불구하고 영원한 생명을 구원의 선물로 받았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해서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죄를 짓고, 하나님을 멀리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벌레만도 못한 나 한 사람을 사랑해 주시고, 찾아와 주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값없이 주신 은혜의 선물인 것입니다.
우리가 바울처럼 단 하루라도 허투루 살아서는 안 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구원으로 인해 자기를 자랑할 수 없습니다. 자기의 의를 주장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만을 자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총을 찬양하고, 그분께 전심을 다해 충성해야 합니다. 이것이 아무 공로 없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은 우리 성도들이 가져야 할 바른 신앙적 자세입니다.
주님께로부터 불가사의한 구원의 은총을 선물로 그저 받은 바울이 주님께 여쭈었습니다. 본문 10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이르되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네가 해야 할 모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구원의 은총을 입은 바울이 주님께 여쭈었습니다.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성경은 성령이 아니고서는 어느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부를 수 없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주로 인정했다는 사실은 그가 다메섹으로 가는 길 위에서 참된 회심을 경험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순간에 그의 삶은 180도로 바뀌었습니다. 극적인 한 순간에 그는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폭행자에서 그리스도의 종으로 바뀌었습니다. 복음의 훼방꾼에서 복음의 증언자로 바뀌었습니다.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바울의 이 질문에는 주님께서 무엇을 명하시든지 그대로 순종하겠다는 자기 고백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제까지 바울의 삶의 주체는 바울 자신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바울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았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고, 자기가 가고 싶은 대로 다녔던 바울이었습니다. 그랬던 바울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부인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자기를 철저히 부인할 때에만 예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 자기 의지, 자기 고집이 자기 안에 남아 있는 한 주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신앙이란 자기의 길을 떠나서 주님께서 가리키시고 인도하시는 그 길을 가겠다고 하는, 곧 삶의 주인을 ‘나’에게서 ‘주님’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구원은 혼자 갖고 노는 장난감이 아닙니다. 구원은 새로운 삶을 향한 출발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우리는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늘 주님께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질문을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의 변화까지 일어나는 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라는 바울의 질문에 주님께서는 바울이 앞으로 행하여야 할 모든 것을 일러줄 사람이 있는 다메섹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무런 계획도 없이 무작정 바울을 구원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에 그 날, 그 시각, 그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을 정확하게 불러 집어내시고, 구원하시기 이전에 이미 바울에게 필요한 모든 조치를 그곳에다 다 마련해 놓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본문 11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그 빛의 광채로 말미암아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
사도행전 9장 1절에 보면,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결박하여 끌고 오기 위해 예루살렘을 떠날 때의 바울은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예루살렘을 떠날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메섹에 들어갔습니다. 즉 예루살렘을 떠날 때 바울은 마음과 눈에 살기가 가득하여 지독하게 화가 나 있었습니다. 하지만 살기가 등등해서 다메섹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러 가던 그 바울은 이제 혼자의 힘으로는 방향을 잡아 걸어갈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능동적이며 주체적인 의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눈이 멀어진 그는 자기를 인도하는 사람들에게 의지한 채로 다메섹에 도착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갔을 때는 그의 분노와 증오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빛이신 주님을 만난 바울은 그 순간부터 더 이상 세상을 볼 수 없었습니다. 주님을 만난 바울이 더 이상 세상을 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은 주님께서 바울에게 지금까지 야망의 눈으로 보아왔던 모든 것들, “네가 살아온 너의 인생은 무효야!”라고 하시면서 바울의 인생에 낙인을 찍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을 등지고 교회를 짓밟으면서 살아왔던 바울의 지난 세월 동안에 대체 무엇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유효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그 동안 무엇을 추구하며, 어떤 인생을 살아오셨습니까? 그 결과 지금 무엇을 얼마나 지니고 있습니까?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코끝의 숨이 멎는 그 순간에 하나님 앞에서 무효로 낙인찍힐 것들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영원히 유효한 것들입니까? 단 한 번 밖에 없는 인생을 열심을 다해 살고서도 하나님 앞에서 무효라고 낙인이 찍힌다면, 그보다 더 허무한 인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더 이상 앞을 볼 수 없게 된 바울은 다른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서야 겨우 다메섹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조금 전까지 바울은 분명히 자신의 두 눈들로 세상을 보았지만, 실은 빌라도 총독처럼 주님과 무관한 영적 맹인일 뿐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바울은 육체적으로는 비록 맹인이 되었을망정 영적으로는 주님 안에서 그의 영안이 활짝 열린 것입니다. 조금 전까지 바울은 다메섹의 그리스도인들을 결박하여 연행하기 위해서 자기 의지로 보무도 당당하게 다메섹을 향해 나아갔지만, 바울의 그 모든 인생은 하나님 앞에서 무효였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세상을 볼 수 없게 된 바울이 지금은 비록 다른 사람의 손에 이끌려서야 다메섹으로 향하고 있지만, 주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기 시작한 바울은 이제야 비로소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유효한 인생길에 접어든 셈이었습니다.
사도행전 9장에 의하면, 다시는 앞을 볼 수 없는 바울이 다른 사람의 손에 이끌려서 다메섹에 들어간 지 사흘 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본문 12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바울이 주님을 만나기도 전에 주님께서 바울을 위해 다메섹에 예비해 두셨던 사람은 그곳의 모든 유대인들로부터 칭찬을 듣는 경건한 아나니아였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바울은 그 아나니아를 소개하면서 그가 ‘믿는 자’라는 것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만 아나니아가 ‘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이며, 다메섹에 거하는 유대인들 가운데서도 평판이 좋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원문에서 보았을 때 ‘율법’은 단순한 율법이 아니라 ‘그 율법’입니다. 여기에서 ‘그 율법’이란 바울이 지적했던 율법 즉, ‘조상들의 율법’과 바울 앞에 선 ‘유대 청중들이 열심인 율법’을 가리킵니다. 바울이 아나니아를 소개하면서 ‘율법에 따라’라고 한 것은 자신에게 기독교를 소개해 주었던 사람이 율법 파괴자가 아닌, 율법에 따라 살아가는 경건한 유대인이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기독교에 대한 청중들의 적대감을 완화시키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그 아나니아가 다메섹의 직가라 하는 거리에 있는 유다의 집에 머물고 있는 바울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바울에게 이렇게 말하는데, 13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내게 와 곁에 서서 말하되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하거늘 즉시 그를 쳐다보았노라.”
사도행전 9장은 이때의 상황을 보다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9장 17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본문의 표현만 보면, 아나니아가 그저 단순히 바울 곁으로 다가간 것으로 보여 집니다. 그렇지만 내용인즉 그렇지가 않습니다. 아나니아가 바울 곁으로 가기 위해서는 먼저 ‘직가’라는 거리를 찾아 헤매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거리에 있는 유다의 집을 찾아서야 비로소 바울을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아나니아에게 어떤 존재였습니까? 사랑스러운 존재였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공포스러운 존재요, 원수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아나니아에게 바울은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친” 존재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나니아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앞을 보지 못하는 처지에 놓여 있는 바울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바울을 향해 “형제 사울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얼마나 따뜻한 부름입니까? 그러면 아나니아가 이렇게 따뜻하게 부르기만 했습니까? 아닙니다. 안수하여 다시 보게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십자가 사랑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후에 에베소서를 쓰면서 예수님께서 달리신 십자가를 모든 원수된 관계를 소멸시키는 사건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든 원수된 관계, 높은 담보다도 더 높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가로막힌 장벽을 일거에 다 허물었습니다. 바로 이것을 알았기에 아나니아도 선뜻 바울을 찾아 나설 수 없는 상황에 있었지만, 그래도 먼저 찾아가서 인사도 하고, 형제라고 불러주고, 안수도 해 주고, 눈도 낫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십자가의 사랑으로 주 안에서 서로 하나 되기에 힘쓰십시다. 십자가 없이는 우리의 참된 신앙도 없습니다. 따라서 십자가로 원수에 대한 모든 미움과 증오와 다툼의 감정을 다 소멸시키고, 사랑과 우애와 평화로 여러분의 심령을 가득 채울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앞을 볼 수 없는 바울을 찾아온 아나니아가 바울 옆에 선 채로 바울을 내려다보며 바울 머리 위에 손을 얹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아나니아 자신을 바울에게 보내신 것은 바울로 하여금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 충만하게 해 주시기 위함임을 밝혀주었습니다. 주님께서 아나니아를 통해서 바울을 성령 충만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성령 충만은 단지 내적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아나니아는 본문 13절에서 바울에게 “다시 보라”고 명령했고, 그 즉시 바울은 아나니아를 쳐다보았습니다. 바울의 성령 충만은 쳐다보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드러났습니다.
우리말로 ‘쳐다보다’는 ‘치어다보다’의 준말로 ‘치어다보다’는 얼굴을 들어 올려다보는 동작을 뜻합니다. 이것은 헬라어 동사의 정확한 번역입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아나니아가 바울에게 “다시 보라”라고 명령했고, 이에 바울이 아나니아를 쳐다본 것으로 해서, ‘다시 보다’와 ‘쳐다보다’가 별개의 두 동사로 사용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헬라어 원문을 보면 우리말 ‘다시 보다’와 ‘쳐다보다’로 각각 번역된 원어 동사가 실제로는 하나의 동사인 ‘아나블렙포’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아나니아가 바울에게 ‘아나블렙포’하라고 명령했고, 이에 바울이 아나니아를 ‘아나블렙포’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나블렙포’라고 하는 동사는 ‘다시 보다’라는 뜻도 있지만, ‘위로 올려다보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즉 아나니아는 바울에게 ‘위로 올려다보라’고 명령했고, 그 명령에 따라서 바울은 얼굴을 들어 위로 올려다본 것입니다.
우리가 머릿속으로 이 장면을 한 번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앞을 볼 수 없는 바울이 의자 위에 앉아 있습니다. 그 바울을 찾아온 아나니아가 바울 곁으로 다가가서 바울 곁에 선 채로 바울을 내려다보면서 그의 머리 위에 자기 손을 얹었습니다. 그리고 아나니아가 바울에게 ‘아나블렙포’, ‘자기를 올려다보라’고 명령했고, 그와 동시에 바울이 ‘아나블렙포’, 자기 얼굴을 들어 아나니아를 올려다보았습니다.
사흘 만에 시력을 회복한 바울이 얼굴을 들어 위로 올려다본 것에는 자기를 내려다보는 아나니아의 얼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인간 아나니아의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아나니아’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하나냐’의 헬라어 음역으로서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살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암시해 줍니다. 사흘 만에 시력을 회복한 바울이 얼굴을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을 때 자신을 내려다보고 계시는 은혜의 하나님, 하나님의 은혜와 마주친 것입니다.
사흘 만에 시력을 회복한 바울이 얼굴을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을 때 하나님께서 당신의 은혜로 벌써부터 바울 자신을 품고 계심을 확인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바울은 더 이상 무의미한 삶이 아니라, 영원히 유효한 삶을 살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주님을 만난 바울의 성령 충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바울은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로운 존재가 될 수 있었으며, 나아가 주님께로부터 새로운 사명을 부여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후로부터 바울은 일평생토록 주님 안에서 자신의 얼굴을 들어 은혜의 하나님을 올려다보며 살았습니다. 전능하신 은혜의 하나님을 올려다보며 사는 한 바울에게는 넘지 못할 산이 없었고, 건너지 못할 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후에 고린도후서 4장 8절부터 10절을 통해 이렇게 고백했는데,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본문에서 우리말로 ‘우겨쌈을 당한다’라는 말은 헬라어 원문으로 볼 때 ‘즙을 짜기 위해 포도를 짓누르다’라는 뜻입니다. 즉 환난과 고통이 사방에서 자신을 압박하는 상태가 바로 우겨쌈을 당하는 상태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여러분, 한 인간이 일평생 수고하고 애쓰며 산 결과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한 처지이고, 매사에 답답한 일투성이이고, 주위 사람들의 박해로 그의 인생이 거꾸러뜨림을 당한 것도 모자라서 죽음이 턱 밑에까지 이르렀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기구하고도, 무의미한 것이 틀림없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바울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어떤 경우에도 스스로 절망하여 자포자기에 빠진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비굴하게 죽음의 노예로 전락한 적도 없었습니다. 바울은 사망이 사방으로 자신을 우겨싸는 위기를 많이 당했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 은혜의 하나님을 바라보는 가운데서 위로를 받았고, 모든 문제를 해결 받았습니다. 은혜의 하나님, 하나님의 은혜를 올려다보기만 하면 그 모든 것은 누군가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신비로운 섭리였고, 주님을 위해 죽음마저 두려워하지 아니하면 아니할수록 누군가를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생명이 자기를 통해 더 강하게 역사하시는 것을 바울은 매번 확인하며 살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그 은혜 속에서 일평생 유효한 삶을 추구한 진정한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동기는 바울 자신에게 있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영으로 바울에게 임하셔서 빛으로 휘감아 주시고, 아나니아를 통하여 ‘아나블렙포’, 얼굴을 들어 위를 올려다보며 살도록 청해 주셨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은혜의 하나님,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자는 우겨쌈을 당하여도 결코 질식하지 않습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거꾸러뜨림을 당하는 환난을 맞이하면 절망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성도들은 절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할 때에 우리의 보호자가 되시는 은혜의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동남풍이 불고 서북풍이 불어도 낙심하지 말고, 은혜의 하나님께 간구하십시오. 그리하여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는 바로 그때가 은혜의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나는 때임을 믿으시고, 그 기적을 증언하는 우리들의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바울을 찾아간 아나니아가 바울에게 말했습니다.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주님께서 아나니아를 바울에게 보내신 것은 바울로 하여금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 충만한 삶을 살게 해 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말로 ‘다시 보게 하시고’라고 번역된 헬라어 동사 역시 ‘아나블렙포’입니다. 그래서 아나니아는 주님의 뜻을 따라서 바울에게 ‘아나블렙포’, ‘올려다보라’고 명령했고, 그 명령에 따라 바울도 역시 ‘아나블렙포’, 올려다보는 삶을 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일평생 성령 충만한 삶으로 주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충성되게 감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성령을 받아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얼굴을 들어 은혜의 하나님, 하나님의 은혜를 올려다보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본문에서 아나니아가 바울에게 한 이 명령은 2,000년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우리를 향한 주님의 명령이심을 알고 계십니까?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나블렙포’, 얼굴을 들어 위를 올려다보며 성령 충만한 삶을 살 것을 명령하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 은혜의 하나님, 하나님의 은혜를 날마다 올려다보며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가십시다. 그래야 세상에 휘둘리거나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는 주님 안에서 우리 자신의 인생을 의미 있는 삶으로 소신껏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은혜의 하나님을 바라보며 성령 충만함으로 주님께로부터 받은 소명을 붙잡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미 있는 제자의 삶을 살아드릴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