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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자는 살려 둘 자가 아니라!
사도행전 22:14-23
우리는 계속해서 두 쇠사슬에 결박당한 채 로마 군인들에 의해 안토니아 요새로 옮겨지던 바울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던 예루살렘의 유대인 군중들에게 행한 자기 변명을 듣고 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 이전의 바울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태양 빛 보다 더 밝은 주님을 뵙는 순간, 그는 꼬꾸라지면서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라며 이제부터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겸손하게 묻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그의 모든 삶은 다른 사람들을 이끌어 가는 삶이었습니다. 다메섹을 향해 갈 때만 해도 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갔습니다.
그러나 시력을 상실한 이제는 주님의 지시하심을 받고 다른 사람들에 의해 이끌려 갑니다. 이러한 사실에서 보여주는 것은 진정한 성도의 삶은 내 삶의 주인이 나 자신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기 이전에는 자기 몸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가 있었습니다. 세상 법망을 교묘히 피할 수만 있다면 온갖 못된 짓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나면 이러한 상황은 완전히 반전됩니다. 내 몸이고, 내 생각이지만 내 뜻대로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주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주장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몸과 마음을 주장할 권리가 구주가 되시는 예수님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정통 유대인으로써 가말리엘의 문하생일 뿐만 아니라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은 유대교에 대한 열심이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밝혔듯이 다른 어떤 유대인들보다도 더 열성적으로 조상의 유전을 지키고, 또 그것을 긍지로 알며, 적극적으로 자신의 종교를 사랑해서 보존하고 전파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로서 그리스도교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습니다. 실로 다메섹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 이전까지의 바울은 유대교의 광신도에 가까웠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자신이 하는 말을 믿지 못하겠다면 대제사장과 공회의 장로들에게 물어보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는 감출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이처럼 부끄러웠던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하는 것은 그때는 자신이 무지해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메섹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난 이후 그때까지의 자신의 모든 행위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었음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흥분해서 자신을 죽이려고 달려드는 유대인 군중들도 이전의 자기처럼 무지해서 저렇게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바울은 자기 변명을 통해 자신을 유대인 군중들과 하나가 되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과 공통되는 점들을 먼저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저들이 지금은 뭐가 뭔지를 몰라서 흥분해 있지만, 저들도 자기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달라질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흥분한 유대인 군중들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부모들이여, 형제들이여, 자식들이여! 하나님을 향한 여러분의 열심을 나도 압니다. 나도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 이전에는 여러분 보다 더 열성적이었습니다. 어쩌면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더 많은 사람들을 잡아 옥에 가두고 죽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여러분들과 함께 누군가를 향해 ‘죽여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부활의 주님을 만난 이후로 나는 사람을 죽이는 자가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자로 변했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예수님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나처럼 예수님을 만나보십시오. 그리고 언젠가 한 줌의 흙으로 사라져 버릴 육체가 아니라, 영원히 소멸되지 않을 인생을 사십시오.”
지금 바울은 사랑하는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이 말을 전하고 있습니다. 죄인 중의 괴수였던 바울이 주님을 만난 이후 의인 중의 의인이 되었습니다. 극렬한 핍박자가 최고의 복음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복음을 철저하게 말살시키려고 했던 사람이 그 복음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변화된 것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자신에게 특별하게 다가오신 그 예수님을 흥분한 유대인 군중들에게 소개해 주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저들도 자기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 얻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지금 바울에게는 이 마음 밖에 없습니다.
교회를 짓밟던 폭도였던 자기에게 임한 주님의 구원, 그리고 자기 시력의 상실과 회복에 대해 먼저 밝힌 바울의 자기 변명은 오늘의 본문 14절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본문 14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가 또 이르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그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본문에서 ‘그’는 주님의 지시하심을 받고 바울을 찾아와서 안수하여 시력을 회복시켜 준 아나니아를 일컫습니다. 그 아나니아가 바울에게 임한 주님의 구원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었습니다. 아나니아가 본문에서 언급한 문장의 주어는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입니다. 바울은 당시에 사람들이 믿고 숭배하던 수많은 거짓 우상들로부터 주님을 구별하기 위해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라고 조심스럽게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동안 바울이 잘못 알아왔던 유대교와 하나님을 예루살렘 성전 안에 가두어두었던 유대인들의 그릇된 선민의식이 빚어낸 하나님의 우상이 아니었습니다. 아나니아가 바울에게 일러준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부르셨던 그 하나님, 온 우주 만물을 주관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증인’이 되게 하시려고 바울을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나니아는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베풀어주신 구원의 은혜를 네 단어로 표현했습니다.
그 첫째는, 하나님께서 바울을 택하여 주셨습니다.
바울이 먼저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택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다메섹 도상에서의 사건은 어느 인간에 의해서 주도 되어진 일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주도하셔서 되어 진 일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가 이 위대한 작품을 이룬 것입니다. 결코 바울 자신의 선택이 아닙니다. 자신의 지혜도 아닙니다. 자기가 그러하리라고 들은 것도 아닙니다. 바울은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바울 자신의 기대나 경건과 지식, 이런 것들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바울에게는 사실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바울을 택하시고 찾아와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선택이었습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강권적인 선택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라고 말씀합니다. 잊지 마십시오. ‘너희 무리들을 택하여’가 아닙니다. ‘너를’, 개인적입니다. 개인적으로 너를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중요한 사실을 뒤늦게 깊이 깨닫고서 갈라디아서 1장에서 이 선택은 ‘은혜로운 선택’이라며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갈 1:15). 유명한 말씀입니다. 이것은 개인적인 의를 완전히 초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자격도 묻지 않으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저와 여러분, 우리를 전적인 은혜로 선택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성도들에게 참으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은혜로 택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요한복음 15장 1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 그렇습니다. 우리 성도들 모두는 주님께서 먼저 택하여 주신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먼저 예수님의 구주되심을 발견하고, 또 그분의 인품과 능력에 매료되어서 그분을 따르기로 작정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주도적으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친히 불러서 당신의 제자와 친구와 백성으로 삼아주신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에게 신앙의 자존감이 부족하다면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이 여러분을 택하셨다는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그 문제가 단번에 해결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주님과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여러분은 예수님이 “네가 나를 택하지 아니하고 내가 너를 택하여 나의 제자가 되도록 세웠노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게 될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당신과 함께 당신의 나라에서 영원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저와 여러분을 택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 바울로 하여금 당신의 뜻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택하신 뒤에 자신이 택함 받은 하나님의 뜻을 스스로 찾으라고 하시며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아나니아를 바울에게 보내어주시고, 바울로 하여금 아나니아를 통해서 하나님의 비밀, 하나님의 깊은 뜻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바울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바울을 들어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바울을 들어서 이방인의 그릇으로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께서 바울로 하여금 의인을 보게 해 주셨습니다.
아나니아가 말한 ‘의인’은 다메섹 도상에서 정오의 빛보다 더 찬란한 빛으로 다가와 바울을 구원해 주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일반적인 사람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볼 때에 예수님은 저주를 받았고, 중죄인의 모습으로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의인을 보게” 하셨습니다. 절대로 ‘죄인’이 아니라, ‘의인’입니다. 그 의인을 선택된 자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에둘러 ‘그 의인’이라고 표현한 것은 유대식 표현입니다. 바울은 곳곳에서 이런 유대식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 유대인들 중에 어떤 사람도 자신의 말 때문에 자극 받지 않도록 조심했습니다. 이것은 흥분한 유대인 군중들이 자신에 대해서 가진 오해를 풀기 위한 세심한 바울의 지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나 매사에 말에 대한 신중함과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지 않아도 될 사소한 말로 사람들의 감정을 격동시키거나 거슬리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성도들 치고 말을 못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합니다. 성도들은 교회에서 매주 설교를 듣고, 또 성경을 공부함으로써 일반 사람들에 비해 유식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1년에 한 번 교양강좌를 듣기조차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성도들은 매주, 아니 일주일에 몇 번씩 설교를 듣습니다. 설교에는 하나님의 말씀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가지 세상적인 지식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성도들이 유식해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가 하면 성도들은 교회 활동 중에 자기 의견을 발표할 기회도 많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다른 사람들 앞에서 떨지 않고 말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기독교인 치고 말 못하는 사람이 없고, ‘기독교인은 말쟁이’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심지어 “기독교인은 태평양 바다에 빠뜨려 놓으면 그 새를 참지 못하고 고개를 쳐 박고 물 속에 있는 물고기와 대화를 한다”는 우스갯말도 있습니다.
물론 말을 잘한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단순히 말만 잘하는 말쟁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 말이나 잘한다고 다 유익한 것이 아닙니다. 쓸데없는 말, 해서는 안 될 말을 함부로 하게 되면 다른 사람은 물론 자기에게도 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을 함에 있어 늘 신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혜로워야 합니다. 나와 다른 사람에게 유익한 말, 진리만을 말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골 4:6)고 했습니다. 바울은 흥분해서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유대인들을 향해 자기 고백적인 설교를 하면서도 저들을 격동시키는 말이 아니라, 가급적이면 유대인들의 공감을 얻기 위해 매우 신중하게 단어를 선택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돌아와서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의인이신 예수님을 보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다메섹 도상의 바울을 찾아가셨을 때 바울과 동행하던 일행들은 무엇인가 보이는 것 같기는 한데 누구도 그곳에 임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바울만은 큰 빛으로 임하신 예수님을 분명히 볼 수 있었습니다.
네 번째는, 하나님께서 바울로 하여금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하셨습니다.
본문에서 우리말로 ‘듣게 하셨으니’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앞서 9절에서 말씀을 드렸듯이 ‘이해하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정오의 태양 빛보다 더 찬란한 빛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소리를 바울과 함께 있던 다른 사람들도 무슨 소리를 듣기는 들었지만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는 예수님의 음성을 정확하게 듣고 이해를 했습니다. 그것은 결코 바울의 자기 의지나 노력의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베풀어주신 크고 놀라운 은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택하시고 바울로 하여금 보게 하시고, 바울로 하여금 알게 해 주시고, 바울로 하여금 듣게 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일체의 사건들은 이미 하나님께서 영원하신 작정과 계획 속에서 바울을 들어 쓰시기로 선택하셨고, 그 뜻을 알게 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이처럼 예수님과 만나 말씀을 들은 경험으로 인하여 복음의 진리를 확신하게 되었고, 복음 전도의 일선에 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본문 15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네가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우리말 성경에는 번역이 빠져 있지만, 헬라어 원문에 의하면 본문 15절은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호티’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영원하신 계획과 작정 속에서 바울을 택하셨으며, 그로 하여금 당신의 뜻을 알게 하시고, 예수님을 보고 듣게 하신 이유가 본문 15절에 밝혀져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 앞에서 바울을 당신의 증인으로 삼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마가복음 13장에는 예수님께서 임박한 예루살렘의 멸망과 장차 있을 종말에 대해 예언하신 내용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그 마가복음 13장의 마지막 절인 37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말씀을 끝맺으셨는데,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지금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은 열두 명의 제자들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들에게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명의 제자들에게 하신 그 말씀은 실은 모든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모든 사람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과거와 현재, 미래를 총망라해서 이 땅을 거쳐 가는 모든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지금부터 4,000년 전부터 2,000년 전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특정 지역의 특정인들에게 하신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그 말씀이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자신들을 위한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들을 위한 말씀이고, 그 모든 사람들 속에는 우리 개개인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그때 기록된 쉐마의 말씀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오늘 우리들에게 주시는 레마의 말씀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나니아가 바울에게 말했고, 바울이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에게 자기 변명을 위해 인용했던 본문 14절과 15절의 말씀 역시 우리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으로써 오늘 이곳에 이렇게 앉아 있을 수가 있게 되었습니까? 우리의 노력이나 의지로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선택했기 때문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하신 계획과 작정 속에서 당신의 은혜로 우리를 먼저 택하여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뜻을 알게 해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보게 해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말씀을 듣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까닭인 즉, 우리를 당신의 증인으로 삼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나 모세, 바울과 같은 위대한 신앙인의 하나님이신 것만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개개인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우리를 택하시고, 알게 하시고, 보게 하시고, 듣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 속에서 얼마든지 아브라함과 모세와 바울과 같은 하나님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언제나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16절에서 아나니아가 바울에게 마지막으로 이렇게 명령했는데,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제는 왜 주저하느냐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하나님의 증인으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에게 이제 남은 것은 주님의 이름으로 죄 사함의 세례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에게 세례는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본질적 문제였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에서 세례를 그리스도와 합하여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즉 세례란 자신의 전존재를 갈아치우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자신의 인생 가치관, 성품, 인격, 목적, 이 모든 것을 예수님의 그것으로 바꾸는 것이 바로 세례입니다.
그런가 하면, 로마서 6장에서는 세례를 주님과의 연합으로 정의했습니다. 우리의 죗값을 대신 치러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의 제물로 돌아가신 주님의 죽음과 연합해서 우리의 옛사람이 죽고, 죽음을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주님과 연합해서 새 생명으로 거듭나는 것이 세례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세례는 주님의 은혜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우리가 우리의 삶으로 하나님의 증인으로 살아가기 시작하는 첫 번째 관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나니아의 명령에 따라 즉석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상의 법정에서 증인은 오직 말로 증언하지만, 하나님의 증인은 자신의 삶으로 증언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 바울은 로마에서 참수형을 당해 죽을 때까지 주님 안에서 새로워진 자신의 삶, 주님의 십자가와 사랑을 증언하는 삶을 중단 없이 살았습니다. 만약에 바울이 말과 입으로만 증언하려고 했다면, 바울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경에 기록되기는커녕 이미 2,000년 전에 그의 말은 허공 속에서 이내 사라져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을 위한 바울의 자기 변명은 17절에서 21절의 말씀으로 연결됩니다. 바울은 지금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의 구원을 입은 이후 3년만에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떠나갔던 그 바울이 3년만에 도리어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되돌아왔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유대교의 배신자로 되돌아온 그 바울을 가만히 내버려둘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바울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주도적으로 교회를 짓밟고, 심지어 주님의 증인인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 데에도 앞장섰던 바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유대인들은 그런 바울의 이력은 조금도 고려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유대교를 배신한 배신자 바울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제거의 대상일 뿐이었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바울을 이방 지역의 이방인을 위한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신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그로부터 20년의 세월이 흘러서 지금 바울은 본문 속에서 다시 예루살렘의 유대인들 앞에서 자기 변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 속의 예루살렘의 유대인들 역시 20년 전의 예루살렘의 그 유대인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자기 변명을 듣고 있는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바울이 이방선교의 정당성에 대해서 언급하자 소리 소리를 지르면서 바울이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나섰습니다. 본문 22절과 23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 말하는 것까지 그들이 듣다가 소리 질러 이르되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 하여 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니.”
바울이 다메섹에서의 자기 경험을 이야기했을 때 유대인 군중들은 조심스럽게 귀를 기울였습니다. 이 시점까지 바울의 자기 변명은 상당히 잘 진행되었습니다. 어쩌면 바울의 생애 가운데서 가장 신났던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고 주님이 말씀하셨다고 바울이 선언하는 순간, 갑자기 가장 처참한 실망으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유대인 군중들은 분노를 표출하며, 또 다시 바울의 죽음을 요구했습니다. 이 모든 일은 ‘이방인들’이라는 단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유대인이 아닌 모든 사람들을 적대시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과 교류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선택하셨다는 선민의식에 사로잡혔던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지옥 불의 땔감으로 사용하시려고 이방인들을 창조하셨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방인들이 구원받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이방인들에게 구원을 선포하시려고 바울 자신을 부르셨다는 선언을 듣는 순간 유대인 군중들은 난폭해졌습니다. 바울이 이방인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자 말자 유대인 군중들이 분노를 터트린 것은 이방인을 짐승처럼 부정하게 여기는 유대인들의 독선적이고도 그릇된 선민의식으로 인함이었습니다. 짐승처럼 부정한 이방인들도 구원의 대상이 된다는 말은 짐승처럼 부정한 이방인과 하나님의 선민인 유대인들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그와 같은 바울의 자기 변명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바울의 입에서 ‘이방인’에 관한 말이 오는 순간 그들은 느닷없이 고함을 지르고,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뿌렸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행동을 했던 것은 이방인이 구원을 받는다든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든지 하는 말은 차마 두 눈을 뜨고는 들을 수 없다는 태도입니다. 당시 최고의 신앙인이라고 자부하며 선민의식에 빠져 있던 유대인들은 바울의 그 말이 자신들을 모욕하는 소리로 들렸을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일제히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달려들었습니다. 한 마디로 죽여 버리자는 말입니다. 그리고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렸습니다. 이것은 극도의 분노를 표출하는 유대인들의 관습이었습니다. 이때 바울이 자기 자신의 말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자신을 찾아오신 주님으로부터 들었던 주님의 그 말씀, 다메섹에서 아나니아로부터 전해 들었던 하나님의 그 말씀, 자신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해 주셨던 하나님의 그 말씀을 유대인 군중들에게 전한 것이었습니다. 그 모든 말씀은 바울 한 개인을 위한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주신 그 모든 말씀은 모든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즉 바울이 증언한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 바울 앞에 있는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유대인들 가운데에 바울의 증언을 누구라도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다면, 그 사람도 역시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하나님의 증인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일제히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바울을 죽여 버리라고 했습니다.
두 쇠사슬에 결박당한 채 로마군의 요새에 연행을 당하면서도 온 삶을 다해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한 바울을 살려둘 자가 아니라고 단정해 버렸던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는 바울을 죽이려고 하기 이전에 이미 살아 계신 하나님을 죽여 버린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당신을 계시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옛날의 바울처럼 예루살렘의 성전 안에 가두어 놓은 하나님의 우상, 하나님의 허상에 불과할 따름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당신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의 증언처럼 하나님께서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말씀이신 하나님께서는 말씀 가운데에 거하시고, 말씀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의 그 말씀을 좇아 살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에게 하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 틀림없습니다. 반면에 몸은 교회에 다니면서도 삶이 하나님의 말씀을 좇으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에게 하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기 필요에 의해 만든 수많은 우상들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구태여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아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심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아야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입니다.
요즘 한국교회의 부패와 타락상에 대해 염려하고 질타하는 염려와 비난의 소리들이 많이 들려옵니다. 예전에는 그래도 교회에 다니는 교인이라면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는 좀 더 깨끗하고 정직하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배우자의 불륜이나 탈선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도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는 훨씬 나았습니다. 그렇지만 요즘에는 교회 교인들의 불륜이나 탈선행위가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낫다는 평가는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나 믿지 않는 사람들이나 도덕적 삶에 대한 평가는 부끄럽게도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좇아 거룩하게 구별된 삶을 살 것을 우리들에게 일관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은 교회에 다니면서도 삶으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불륜을 저지르고 탈선행위를 한다면, 그 사람에게 하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 아닙니다. 나아가 성경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모든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일 수도 없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자신의 삶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짓밟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는 바울을 살려둘 자가 아니라고 부정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부정했던 본문 속의 어리석은 유대인들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야 어떻게든 자기의 유익만 구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들과는 차원이 달라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진정으로 믿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그 믿음은 여러분의 삶에 의해 입증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 예배당 안에만 갇혀 계신다는 하나님의 허상, 하나님의 우상을 깨뜨려 부수기 전까지는 우리의 삶은 결코 살아 계신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말씀이시고, 말씀 가운데 거하시며, 말씀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삶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부정하는 어리석은 유대인들이 되지는 마십시다. 언제든 자신의 삶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고, 자신의 삶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을 경배하고, 자신의 삶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좇는 우리 시대의 바울이 되십시다. 그리하면 바울을 통해 로마 제국을 새롭게 하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통해서도 다가올 우리의 미래를 반드시 새롭게 해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일주일 내내 하나님과 무관하게 사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 아닙니다. 예배당 밖에서는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예배당 안에만 갇혀 있는 하나님의 우상, 하나님의 허상일 뿐입니다. 일상 속에서 나의 삶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하는 사람에게 성경은 나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는 바울을 향해 살려둘 자가 아니라고 단정하면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부정했던 예루살렘의 유대인들과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말씀이시고, 그 말씀 가운데 거하시며, 그 말씀으로 말씀하심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하여 우리 각자의 삶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고, 하나님을 경배함으로써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입증하는 하나님의 증인들이 다 되어서 우리 시대의 바울로 쓰임 받는 기쁨을 누리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