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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담대하라!
사도행전 23:1-11
우리가 지난 주일에 살펴보았듯이 바울이 태어날 때부터 로마 시민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천부장은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아무 재판도 없이 로마 시민인 바울을 두 쇠사슬로 결박하여 연행한 것도 모자라서 바울을 매달아 채찍질을 하도록 명령했습니다. 만약 바울이 이 사실을 로마 당국에 고발한다면 천부장은 로마 시민에 대한 로마법을 어긴 죄로 가중한 처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천부장은 바울을 그냥 귀가시킬 수도 없었습니다. 바울로 인해서 대소요 사태가 발생했던 만큼 예루살렘의 치안을 책임지는 천부장으로서는 그 진상을 규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턱대고 바울을 심문할 수도 없었습니다. 로마 시민은 정식으로 고소인이 있을 때에만 심문할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로마 군대의 천부장인 글라우디오 루시아가 유대인들과 바울 사이의 소란을 종교적인 문제로 판단하여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하게 된 그 이후의 일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천부장은 이튿날이 되자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왜 그토록 극렬하게 소요 사태를 일으키면서까지 바울을 죽이려고 했는지 그 진상을 밝히기 위해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했습니다. 유대인 최고 의결기구인 산헤드린 공회는 71명의 의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대제사장이 의장이었습니다. 당시 로마제국은 산헤드린 공회에 유대인들의 소송을 심리하고 사형을 판결할 수 있는 권한도 부여하기는 했지만, 사형 판결은 로마 당국의 승인이 있을 때에만 유효했습니다.
본문 1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산헤드린에서 재판이 이루어질 때는 피고를 가운데 세워두고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그 피고를 중심으로 반원을 그리고 둘러앉았습니다. 이러한 법정 구조는 피고에게 강한 위압감을 줍니다. 그런데 20여 년 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 이전까지만 해도 바울은 이 공회의 구성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가말리엘 밑에서 함께 제자로 활동했던 동기들이었습니다.
본문은 그 바울이 한때 같이 했던 공회원들을 한 사람씩 주목하였다는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말로 ‘주목하여’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바울이 산헤드린 앞에서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음을 나타내주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공회원들을 주목한 것은 적대 감정에 의한 기 싸움에서 눌리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에 대한 사랑과 연민이 가득한 눈길이었습니다.
아마 20여 년 만에 한때 자신이 속해 있었던 그 공회에 피고인으로 서 있는 바울의 뇌리에는 여러 생각들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때는 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여 교회를 짓밟고,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옥에 넘기는데 주도적으로 행동했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난 이후 바울은 자신이 그토록 말살시키려고 했던 그 복음을 증거하는 자로 공회원들 앞에 지금 서 있습니다. 산헤드린의 공회원들은 모두가 유대인 사회에서는 소위 가장 출세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에게는 사람을 살리고 죽일 수 있는 막강한 힘과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외형적으로 보면 바울은 유대 최고 사법기관인 산헤드린에 심문을 받기 위하여 출두한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의 눈에는 자신들이 빚어낸 하나님의 우상을 섬기는 공회원들이 실상은 하나님 앞에서는 구원의 진리를 알지 못하는 가장 미련하고 불쌍한 인간들이었습니다. 지금 바울은 철없던 시절에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데 뜻을 같이 했던 그 공회원들을 사랑과 연민이 가득 찬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오늘의 본문을 통해서 가련하고 미련한 공회원들을 주목해서 보고 있는 사랑과 연민에 가득 찬 바울의 눈빛과 마주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비굴하게 “존경하는 산헤드린 공회원 여러분!”이라고 입에 발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71명의 산헤드린 공회원들을 향해 “여러분 형제들아”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말로 ‘여러분 형제들아’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사람들아, 형제들아’라는 뜻입니다. 바울이 공식적인 호칭을 사용하지 않고, “사람들아, 형제들아”라고 부른 것은 바울 자신이 바로 그들의 형제이며,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참된 진리를 알지 못하여서 어그러진 길을 가고 있는 동족에 대한 사랑과 연민이 담긴 안타까운 마음의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공회원들에게 던진 바울의 첫 마디는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이 하나님의 율법과 성전을 모독했기 때문에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지금까지 자신은 모든 면에 걸쳐서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겨왔다고 증언했습니다. 이때 바울은 당시의 평균 수명으로 이미 인생 말년이었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일생토록 가난과 박해와 벗하며 살았던 것도, 죽음을 각오하고 예루살렘을 찾아갔던 것도 양심을 따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며 살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여기에서 ‘양심’은 ‘선한 양심’을 말합니다. 바울의 이 선언은 참으로 대단한 주장입니다. 솔직히 저는 이런 말을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들 가운데 어느 누가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우리도 언젠가 인생의 마지막 문턱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 역시 하나님과 사람들을 향해서 “나는 지금까지 믿음의 선한 양심을 지키면서 모든 면에 걸쳐 하나님을 섬겨왔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하기를 원한다면, 지금부터 당장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인생 말년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그냥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 맞고 있는 오늘의 결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대제사장은 바울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본문 2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명하니.”
당시 대제사장의 이름은 아나니아였습니다. 주후 48년부터 59년까지 대제사장으로 재임했던 아나니아는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그는 대단히 탐욕스러우며 포악하고 성질이 급한 아주 잔인한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제사장으로서 일반 제사장에게 돌아가야 할 십일조를 가로채기도 하였습니다. 때문에 그는 비록 백성들로부터 존경받을 대제사장의 지위에 있었지만 성직을 더럽히는 사람으로 평가를 받았고, 백성들의 조롱을 받았습니다. 그는 대제사장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계속 유대 사회의 유력한 인물로 남아서 영향을 미쳤고, 폭력과 살인마저 불사하는 아주 잔인한 인간이었습니다.
그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바울의 입을 치라고 명령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서 뺨이나 입을 때리는 행위는 그 사람의 인격에 대한 최악의 모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나니아가 이유도 따져보지 않고 즉각적으로 바울의 입을 치라고 명령한 것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바울의 인격을 모독하려는 의도였습니다. 즉,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의 입을 치게 함으로써 믿음의 선한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겨왔다고 선포한 바울의 인격을 공개적으로 짓밟아버린 것이었습니다. 저런 인간의 말이라면 더 이상 들을 필요조차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 3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이 이르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하니.”
바울은 아나니아를 가리켜서 ‘회칠한 담’이라고 불렀습니다. 당시 도시 외곽에는 죽은 사람의 뼈들을 보관하는 바위를 쪼아서 만든 무덤들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 가운데 많은 수의 무덤들을 여러 해에 걸쳐서 반쯤 매장된 상태로 두었습니다. 문제는 누군가 길을 가다가 무심코 잘못해서 그 무덤에 걸려 넘어질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 율법에 따르면, 유대인은 시체나 그 시체에 닿은 어떤 것에도 접촉할 수 없었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우연히 그것에 접촉한다면 그는 부정하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러면 그가 회당이나 성전에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정결 의식을 거쳐야만 했습니다.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그들은 무덤들이 눈에 잘 띄도록 회칠을 했습니다. 그것은 무덤을 치장하기 위함이 아니라 무덤을 부정하게 여기는 유대인들이 무덤을 용이하게 피해 다니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무덤 위에 회를 칠하면 겉은 언뜻 깨끗해 보이지만, 속은 온갖 악취가 나는 더러운 무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겉과 속이 다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회칠한 무덤’이라고 질타하시면서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위선적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저주하시면서 ‘회칠한 무덤’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바울이 아나니아를 가리켜 ‘회칠한 담’이라고 부른 것도 같은 이유였습니다. 율법은 두세 증인들의 증언이 있을 때에만 그 사람의 범죄 사실을 확정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이 없이는 누구든지 피고인의 권리를 보호해 주고, 무죄성을 인정해 주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때까지 심리를 거치지도 않았고, 죄가 발견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범죄를 저질렀다는 명목으로 정식으로 고소조차 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소위 율법을 따른다는 대제사장인 아나니아는 산헤드린 공회에서 도리어 율법을 어기고, 처음부터 바울의 입을 치게 해서 바울을 죄인으로 다루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회칠한 담장이 당장은 보기에 순결해 보이지만, 그 담장 너머에서는 온갖 추잡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빗대어서 아나니아를 ‘회칠한 담’이라고 부르면서 “나는 가만히 있어도 하나님께서 당신을 치실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본문 4절과 5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곁에 선 사람들이 말하되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 바울이 이르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
본래 대제사장이 입는 공식 의복은 따로 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입고 있는 의복만으로도 대제사장이 누구인지 사람들은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아나니아가 대제사장이라고 일러주기 전까지 그가 대제사장인 줄을 알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날의 산헤드린 공회가 천부장에 의해 갑자기 소집된 임시회의였기 때문에 대제사장이 자신의 고유한 복장을 갖추지 않고 그 회의에 참석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후에 20여 년 동안 유대교와 교류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대제사장의 얼굴을 몰랐을 수도 있습니다.
한편, 바울의 대답을 들은 바울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바울에게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라고 반문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대제사장을 하나님처럼 떠받드는 그들의 생각이었을 뿐 바울은 아나니아를 욕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입을 쳐서 공개적으로 자기 인격을 짓밟아버린 아나니아의 불법적인 행위에 대한 정확한 지적이요, 정당한 비판이요, 사도다운 경고였습니다. 바울은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다”라고 밝히면서, 출애굽기 22장 28절의 말씀을 인용해서 “너의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 하였느니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유대인 최고 의결기구인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바울 한 사람을 재판하기 위해서 일제히 바울 한 사람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전혀 주눅 들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할 말을 당당하고도 명료하게 피력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바울이 해야 할 말을 다 하고, 항의할 것을 다 항의하고, 비판할 것을 다 비판하고, 경고할 것을 다 경고하면서도, 처음부터 자신을 죄인처럼 취급하여 입을 치게 함으로써 자신을 공개적으로 모독한 대제사장 아나니아에 대해 예의를 잃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때 바울이 자신의 인격이 모독을 당했다는 사실을 두고 흥분해서 자제력을 잃고 자신도 역시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공회원들에게 비인격적으로 대응했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배교자인 바울을 죽이지 못해서 안달하는 유대인들의 대표기구인 산헤드린 공회에서 바울은 영락없이 만장일치로 율법과 성전을 모독한 죄로 극형을 선고받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 경우에는 로마 당국이 유대인들의 종교법을 인정해 주고 있는 한, 천부장도 아무리 로마 시민이라고 할지라도 비인격적인 언행으로 극형을 선고받은 바울을 더 이상 보호해 줄 명분을 찾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을 인간으로 취급조차 해주지 않는 그 공회 석상에서 흥분하거나 자제력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이 자신을 마치 죄인처럼 다루는 그 공회 석상에서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지 지혜롭게 분별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본문 6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이 그 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산헤드린 공회를 구성하고 있는 71명의 의원들은 대부분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이 입고 있는 의복만으로도 구별할 수 있었던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은 신학적 견해와 삶의 방식에서도 완전히 서로 다른 대척점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두개’라는 명칭은 다윗 시대의 대제사장이었던 ‘사독’의 이름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주전 2세기경에 대제사장 사독의 후예임을 자처하는 제사장들이 성전 관리의 기득권을 주장하고 나서면서부터 사두개파가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 바울 당시의 사두개파는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공회 등 유대 사회에서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기득권을 지닌 지배계층으로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모세 오경의 권위만 받아들였을 뿐 다른 구약성경의 권위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단지 율법을 주신 후 인간사에는 관여하지 않으시며, 오직 인간의 자유의지만 있을 뿐 하나님의 섭리는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섭리는 애당초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천사나 영의 존재, 부활과 영생과 같은 내세도 전혀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언제나 눈에 보이는 현실 세계뿐이었습니다. 그 결과 사두개인들은 도덕성과 윤리성을 상실한 물질주의자들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신성해야 할 성전의 제사 의식마저 추악한 상거래로 전락시켜 버렸던 사두개인들은 백성들에게는 혐오와 증오의 대상이었습니다.
반면에 ‘구별된 사람’, 혹은 ‘분리된 사람’을 뜻하는 바리새인들은 주전 4세기경 유대교 개혁에 앞장섰던 하시딤의 후예들답게 누구보다도 율법에 열심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속적인 것들, 비율법적인 것들, 불경건한 것들로부터 자신들을 구별하여 분리된 삶을 산다는 의미에서 스스로 ‘바리새파’라고 불렀고, 그 호칭에 대한 대단한 자부심을 품고 살았습니다. 그들은 모세 오경뿐만 아니라 구약성경을 모두 정경으로 받아들였고, 조상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유대교적 전통도 존중했습니다. 그들은 천사와 영의 존재를 믿었고, 부활과 영생과 같은 내세도 믿었습니다. 타락한 제사장들이 성전을 장악하고 있는 것에 반대하면서 철저하게 율법을 준수하는 바리새인들은 사두개인들과는 달리 백성들의 존경과 신망을 얻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의 서로 다른 신학적 견해와 삶의 방식의 차이는 평소에도 두 진영 사이에서 늘 다툼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사두개파의 일원이었습니다. 바울은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는 산헤드린 공회 석상에서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일반적으로 헬라어에서는 강조 용법 외에는 주어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일인칭 주어를 사용해서 “나는 바리새인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자신이 바리새인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자신이 바리새인의 아들이라는 사실도 밝혔습니다. 헬라어 원문에 의하면, 이때 바울은 바리새인의 복수형을 사용해서 ‘나는 바리새인들의 아들’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당대에 바리새인이 된 것이 아니라 조상 대대로 바리새인으로 살아왔음을 강조하는 말이었습니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에서는 이 부분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나는 대대로 바리새인 집안에서 태어난 충실한 바리새인입니다.”
바울의 가문이 정통 바리새파였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바리새인 가정에서 태어났을 뿐만 아니라, 많은 바리새인들로부터 철저한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 때문에 자신이 공회에서 이렇게 심문을 받고 있다고 증언했습니다. 바울의 말과 동시에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 사이에 곧장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본문 7절과 8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어지니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 사이에서 일어난 다툼의 원인은 간단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천사와 영의 존재, 부활과 영생을 믿는 반면에, 사두개인들은 그 모든 것을 부정하는 평소의 신학적 견해의 차이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이들 두 집단은 물과 기름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들은 결코 함께 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바울을 성전과 율법을 모독한 자로 처형하는 추악한 일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악을 위해서는 얼마든지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타락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본성적으로 타락한 인간은 사상과 이념과 추구하는 삶의 가치가 전혀 달라도 악을 도모하는 일에는 쉽게 하나가 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우리는 선한 일에는 하나가 되어야 하겠지만, 악을 도모하는 일에 결코 참여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은 바울을 죽이기 위해서 하나가 되었지만, 바울이 언급한 부활 때문에 결국 그들은 분열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사실 바리새인들이 믿는 부활과 바울이 언급한 부활이 동일한 의미의 부활은 아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조상 때로부터 전승되어 온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부활을 막연하게 믿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언급한 부활은 바리새인들을 포함한 유대인들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후 삼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역사적 부활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바울이 공회에서 언급했던 부활이 구체적으로 어떤 부활인지를 전혀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단지 바울이 부활 때문에 심문을 당하고 있다는 그 이유만으로 평소 앙숙이었던 사두개인들에 맞서 바울의 옹호자들로 자처하고 나선 것이었습니다.
본문 9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크게 떠들새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 다투어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냐 하여.”
바리새인들의 이와 같은 집단적인 바울 옹호를 사두개인들이 가만히 보고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본문 10절은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 사이에 큰 분쟁이 일어났음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말로 ‘분쟁’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완력을 동원한 다툼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10절은 이 사태를 ‘큰 분쟁’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이 서로 주먹을 휘두르고 뒤엉킨 것이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은 자기들끼리만 주먹을 휘두르면서 뒤엉켜 싸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완력으로 바울을 붙잡고 자기네들 쪽으로 끌어당기면서 주먹질을 하고 싸웠습니다. 우리말로 ‘찢겨질까’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는 ‘박살나다’, ‘산산 조각나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그 분쟁이 너무 격렬해서 그들의 격돌 속에 바울을 그냥 내버려두었을 경우 바울의 생명이 위태로울 것이 확실했습니다. 결국 천부장은 부하들에게 명령해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극렬한 충돌 속에서 바울을 빼앗아오게 했습니다. 그리고 천부장은 부하들로 하여금 바울을 안전하게 로마군의 요새 안으로 옮기게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울도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의 마음에도 기쁨과 슬픔이 있습니다. 담대함과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로마 군인들에 의해 안토니아 요새 안으로 들어가면서 자기 뒤로 요새의 문이 닫힐 때 바울의 마음속에는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사실 바울은 고린도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오는 여정에서 예루살렘에서 일어나게 될 여러 가지 일들로 큰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죽을 것을 각오하고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전날 바울은 그가 그토록 사랑하는 동족 유대인들에게 자신을 사울에서 바울로 변화시킨 예수님의 복음을 함께 나누려고 했지만, 그들은 오히려 바울을 배척했을 뿐만 아니라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그는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는데,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가말리엘 밑에서 함께 제자로 활동했던 동기들이었습니다. 만일 기회만 있다면 그는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하신 그 메시아임을 그들에게 확신시킬 수 있다고 자신했습니다. 하지만 이 날도 그 전날만큼이나 처참하게 끝이 났습니다. 바울은 그의 유대인 형제들의 철저한 거부에 직면했을 뿐만 아니라 심한 고초를 당해서 몸이 둘로 찢겨질 뻔했습니다. 그가 그토록 간절하게 원하고 꿈꾸었던 예루살렘 여행이 너무나 처참하게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거기에서 바울은 머리를 떨구며 “이제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까?”라고 생각하던 순간이 틀림없이 있었을 것입니다. 만일 일이 악화되기라도 한다면 그는 정말 예루살렘에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생각도 들었을 것입니다.
본문 11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바울이 산헤드린 공회에서 곤욕을 치르고 봉변을 당했던 바로 그날 밤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날 밤에도 전날 밤처럼 로마군의 요새 감방에서 밤을 맞았습니다. 바울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후에 자신의 전 생애를 주님께 바쳤습니다. 자신의 젊음도, 열정도, 세상에서 출세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도 아낌없이 주님께 송두리째 다 바쳤습니다. 하지만 이미 인생 말년에 접어든 노년의 바울은 그날 밤에 차디찬 감방 속에서 혼자 밤을 맞았습니다.
본문에서 ‘그날 밤’은 시간적인 밤을 가리키지만, 암울하고 어두운 상황을 나타내는 비유적인 용법으로도 사용됩니다. 그날 밤은 파티가 있었던 날 밤이 아니었습니다. 즐거웠거나 재미있었던 날 밤도 아니었습니다. 그날 밤은 유대인들에게 붙들려 두들겨 맞다가 천부장으로 인해 겨우 목숨만 건졌던 다음 날이요, 산헤드린에서 변론 끝에 유대인들에 의해 찢김을 당할 위기에서 건짐을 받은 날 밤이었습니다. 또한 그날 밤은 다음 주일에 살펴보겠지만 40인의 암살단이 바울을 암살하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맹세하던 날 전날 밤이었습니다.
바울의 사역 가운데 많은 다른 실망의 순간들과 외로운 밤들과 이해할 수 없는 의문과 의심의 시간들이 있었지만, 그날 밤은 특히 바울에게 가장 어두운 밤이었을 것입니다. 그날 밤은 바울의 인생에서 다시는 없을 외롭고 힘들고 너무도 지쳐서 두려움이 엄습하는 절망스러운 밤이었을 것입니다. 때문에 그날 밤은 그 어느 때보다 바울에게 위로와 따뜻한 격려가 필요한 때였습니다. 비록 그의 가슴에 주님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식지는 않았지만, 육체적으로 겪은 고통으로 인해 좌절할 수도 있는 때였습니다. 그날 밤에 차디찬 감방 속에 바울 홀로 있었다면 그날 밤은 암울과 절망의 밤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러한 바울을 차디찬 감방 속에 홀로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까지 늘 그렇게 해 오셨던 것처럼 차디찬 감방에 홀로 갇혀 있는 바울을 찾아오셨습니다. 바울의 인생에서 어두운 그늘이 엄습하였을 때 주님께서는 친히 낙심과 두려움에 빠져 있는 그에게 위로자로 찾아오셨습니다. 바울에게 이것보다 더 큰 위로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날 밤 주님께서 바울과 함께 하고 계셨기에 그날 밤은 암울함과 절망의 밤이 아니라 밝아오는 여명을 향한 소망의 밤이었습니다. 그날 밤 주님께서 바울과 함께 하고 계셨기에 차디찬 감방은 로마 황제의 궁궐 보다 더 따스하고도 평안한 보금자리였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주님께서는 차디찬 감방 속의 바울 곁에 그냥 계시기만 하셨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날 밤 주님께서는 차디찬 감방에 갇혀 있는 바울에게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님을 증언했던 것처럼 제국의 심장인 로마에서도 당신을 증언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쩌면 바울은 자신의 사역이 이제 끝났다고 생각했을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렇지 않다고 그에게 단언하십니다. 이미 인생 말년에 접어든 노년의 바울을 주님께서 계속해서 당신의 증인으로 사용하시겠다고 언약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바울이 로마에서 복음을 증거하기까지는 결코 죽지 않는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생 말년의 자신을 주님께서 계속 당신의 증인으로 사용해 주시겠다는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된 바울에게는 얼마나 큰 위로요 격려였겠습니까! 그래서 그날 밤 차디찬 감방 속에서 바울이 맞았던 그 밤은 기쁨과 감격이 넘치는 은혜의 밤이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고대광실 높은 집이나 많은 소유, 안락한 거주지가 아니라 주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고 계시느냐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높은 지위나 많은 소유, 안락한 거주지는 도리어 자신의 생명을 고갈시키는 족쇄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함께 하고 계신다면 차디찬 감방도, 초가삼간도, 거친 들도 소망과 감격이 가득한 하늘나라가 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11절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그날 밤 차디찬 감방에 갇혀 있는 바울에게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은 “너는 담대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우리말로 ‘담대하라’라고 번역된 헬라어 동사는 ‘용기를 가진다’는 의미입니다. 그 차디찬 감방에 갇혀 있는 바울이 절망에 빠지지 않고 다시 용기를 내어서 담대해야 함은 더없이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이런 질문을 제기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차디찬 감방에 갇혀 있는 인생 말년의 바울에게 “너는 담대하라”라고 말씀하시기 전에 아예 바울이 차디찬 그 감방에 갇히지 않게 해주시는 편이 훨씬 더 낫지 않았겠습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노년의 바울이 차디찬 그 감방에 갇히는 것을 가만히 내버려두셨다가 뒤늦게야 “너는 담대하라”라고 그를 격려하시는 것입니까?
그날 밤 예루살렘에서 로마군의 요새의 감방이 아니고서는 바울이 로마제국의 심장인 로마에서도 주님의 증인이 되어야 할 새로운 미래를 얻을 수 있는 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음 시간에 살펴보겠지만, 이때 예루살렘에는 유대인들 40여 명이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굳게 맹세를 하면서 암살단을 만들었습니다. 사실 바울을 죽이려는 유대인들의 음모는 그가 다메섹의 체험을 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온 후에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선포하던 20여 년 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그날 밤에 바울이 예루살렘의 어느 민가에서 편안하게 잠을 잤더라면, 바울은 그날 밤에 쥐도 새도 모르게 암살단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그날 밤 로마군 요새의 감방만이 바울이 로마에서도 주님의 증인이 되어야 할 그의 새로운 미래를 보장해 주는 유일한 징검다리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루살렘에서 바울이 갇혀 있던 로마군 요새의 차디찬 감방만을 보면 그것은 인생 말년의 바울에게는 참으로 고통스러운 환난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우러러 뵈면 그 차디찬 감방은 바울이 전혀 다른 차원의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징검다리였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차디찬 감방에 갇혀 있는 바울에게 “너는 담대하라”고 말씀하셨고, 바울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담대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누구에게나 고난이나 위기가 닥쳐올 수 있습니다. 항상 해가 빛날 수 없고 궂은 날도 있듯이, 늘 콧노래만 부르며 살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환난과 고난의 밤은 우리에게 다양한 경로로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그 환난만을 바라보다가 환난에 질식당하는 환난의 노예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환난과 고난만을 바라보면 낙심하거나 좌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바로 이러한 환난과 고난의 밤에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전능하신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그 환난의 징검다리에 담대하게 두 발을 내디딤으로써 주님으로 말미암은 위로와 격려를 체험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려는 전혀 다른 차원의 새로운 미래를 누릴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