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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Dydf0215-Jc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창세기 18:16-21
우리는 계속해서 창세기 18장을 한 장면씩 천천히 따라오고 있습니다. 18장은 단순히 3,400년 전에 기록된 오래된 이야기의 한 토막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당신의 뜻을 드러내시고, 어떤 사람과 동행하시며, 어떤 사람에게 당신의 마음을 맡기시는지를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찾아오실 때 환상으로, 꿈으로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번개와 천둥 가운데서도 아니었고,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도 아니었습니다. 사람의 모습으로, 나그네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일상 한가운데로 들어오셨습니다. 무더운 여름, 장막 문에 앉아 한낮의 더위를 피해서 쉬고 있던, 그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을 평범한 순간에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특별한 사람만을 특별한 자리에서만 만나시는 분이 아니라, 믿음의 사람의 일상 속으로 조용히 걸어 들어오시는 분이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더운 여름, 한낮의 뜨거운 햇살을 피해 장막 안에 앉아서 쉬고 있던 아브라함은 나그네들을 보자마자 달려 나가 맞이했습니다. 그는 상황을 따지지 않았고, 손익을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급히 장막으로 들어가 아내 사라에게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떡을 만들게 하고, 송아지 중에서도 연하고 좋은 것을 잡아 요리하게 합니다. 말로는 ‘조금’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장막 안에 있는 최상의 것을 내어놓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섬김은 형식이 아니라 마음이었고, 의무가 아니라 기쁨이었습니다. 그는 나그네를 섬기면서 이미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 섬김의 자리에서 하나님은 다시 한 번 약속을 확인해 주십니다. “내년 이맘때에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여기에서 ‘내년 이맘때’라고 번역된 히브리어가 ‘생명의 때에’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되면”이라는 말입니다. 봄이라고 하는 계절의 특성은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입니다. 그 동안 사라는 89번이나 계절적인 봄을 맞았습니다. 그런데 사라의 태는 죽어 있었습니다. 이 말인즉, 사라가 계절적인 봄을 89번 맞았지만, 그 인생이 진정한 의미에서 봄을 맞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년 이맘때쯤”이라는 말이 어떤 의미로 승화됩니까? 만물이 소생하는 내년 봄에 자연만 소생하는 것이 아니라, “사라 너의 태도 소생하고, 네 인생도 소생할 것이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간 속에, 역사 속에, 우리의 삶의 리듬 속에 당신의 약속을 심으십니다. 늙은 아브라함과 생리가 끊어진 사라에게 이 말씀이 들렸을 때, 그들의 현실은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 변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현실 위에 덮였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을 우리의 생각 속에 가두어 두려고 합니다. “이 정도까지만 하실 하나님”, “여기까지는 가능하지만, 그 이상은 불가능한 하나님.” 그렇게 만들어낸 하나님은 더 이상 살아 계신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움켜쥐고 있는 또 다른 우상입니다. 사라의 웃음이 그랬습니다. 장막 뒤에서 들려온 사라의 웃음은 기쁨의 웃음이 아니라, 체념과 불가능의 웃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웃음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웃음을 언약의 자리로 끌어올리십니다. 10절의 약속은 결국 이듬해 봄에 사라의 몸을 통해 이삭의 이름으로 이어집니다. ‘웃음.’ 하나님은 인간의 불신과 절망의 웃음을 언약의 웃음으로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인간의 계산으로는 끝났다고 생각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새 생명의 봄을 시작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분이 당신의 언약으로 우리 곁에 와 계십니다. 그렇다면 이제 더 이상 우리의 생각 속에 하나님을 가두어 두는 하나님의 우상을 움켜쥐지 마십시오. 그리고 온전히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 앞에 우리 자신을 내어드리십시오. 아브라함의 장막에 임하신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삶의 장막에도 동일하게 찾아오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그 자리에서 우리 인생에도 반드시 새 봄이 옵니다. 그리고 그 봄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웃음이 맺힙니다. 세상이 주는 허망한 웃음이 아니라, 눈물 뒤에 찾아오는 언약의 웃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 속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웃음이 아름답게 결실되기를, 그리고 우리의 삶과 가정에 새 봄의 은혜가 충만히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런데 사라는 하나님의 이 말씀 앞에서 속으로 웃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웃음밖에 나올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세월은 너무 흘렀고, 몸은 이미 가능성을 잃은 지 오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웃음을 책망으로 끝내지 않으시고, 질문으로 바꾸십니다.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이 질문은 사라 개인을 향한 질문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장막 전체에 울려 퍼진 하나님의 선언이었습니다. 불가능을 기준으로 살던 인간의 시선을 전능하신 하나님께로 들어 올리는 질문이었습니다.
바로 그 은혜의 식탁이 끝난 뒤, 오늘의 본문이 시작됩니다. 은혜의 말씀이 끝나자 하나님은 자리를 떠나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방문을 마치고 돌아가시는 장면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말씀만 남기시고 조용히 사라지시는 분이 아니라, 말씀하신 그 약속을 품고 이제 또 다른 장면으로 아브라함을 이끄십니다. 식탁에서의 은혜가 끝났다고 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끝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식탁은 끝났지만, 하나님의 뜻은 이제 본격적으로 열리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일어나시고, 두 천사도 함께 일어나 소돔 쪽을 바라봅니다. 그 방향에는 하나님의 공의가 기다리고 있고, 동시에 아브라함에게 맡기실 깊은 하나님의 마음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본문 16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나서 소돔으로 향하고 아브라함은 그들을 전송하러 함께 나가니라.”
본문은 매우 짧은 한 절이지만, 창세기 전체의 흐름 속에서는 무게감이 아주 큰 전환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한 가정의 장막에서 온 인류의 역사와 심판의 자리로 시선을 옮기시는 결정적인 순간입니다. 앞선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라에게 약속의 말씀을 다시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웃음으로 반응했던 사라의 마음에 이제 믿음이 새겨집니다. 불가능해 보였던 약속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가능성의 문제가 아니라, 신뢰의 문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라의 내면에 믿음을 각인시키시고 그 장막을 떠나십니다.
그런데 그 다음 행선지가 어디입니까? 소돔입니다. 하나님께서 헤브론에 있는 아브라함의 장막을 떠나 소돔으로 향하신다는 것은 매우 의도적인 동선입니다. 창세기 18장은 헤브론에 있는 아브라함으로 시작하고, 19장은 소돔에 있는 롯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두 장소와 두 사람을 대비시키며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같은 혈통, 같은 약속의 출발선에 있었지만, 삶의 자리와 선택의 방향이 얼마나 다른 결과를 낳는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붙들어야 할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헤브론만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소돔의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헤브론의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시고, 소돔의 하나님은 심판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이 두 모습은 서로 다른 하나님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의 거룩한 두 얼굴입니다.
우리는 흔히 헤브론의 하나님만을 원합니다. 약속하시고, 기다려주시고, 웃음을 회복시키시고, 장막 가운데 찾아오시는 하나님만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시에 소돔을 향해 걸어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죄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불의를 그냥 넘기지 않으시며, 반드시 셈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서 떠나 소돔을 향하시는 이 장면은 아브라함에게 심판을 보여주심으로 구원의 무게를 깨닫게 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아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구원을 바르게 압니다. 심판을 모르면 은혜는 값싼 위로로 전락하고 맙니다. 심판을 모르면 약속은 인간의 욕망을 정당화하는 도구가 됩니다. 오늘 본문 이전의 사라를 보십시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믿음은 여전히 자신의 현실 안에 하나님을 가두어두고 판단하려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웃는 사라에게 다시 말씀하시고, 그 자리를 떠나 소돔을 향하심으로 사라는 비로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배우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죽음을 아는 사람만이 생명의 참된 의미를 압니다. 창세기 4장에서 “에노스의 시대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알았기에 생명의 하나님을 찾은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는 죽음의 족보로 시작합니다. “살았더라, 그리고 죽었더라.” 그러나 신약의 마태복음은 생명의 족보로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끊어지지 않는 생명의 계보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처럼 심판을 아는 사람만이 구원의 하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모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셈하심, 하나님의 상 주심을 모르는 신앙은 결국 하나님을 내가 통제 가능한 분으로 만들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관리하는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그 앞에 서야 할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묻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의 삶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헤브론의 장막입니까, 아니면 소돔의 성문 곁입니까?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헤브론의 하나님만 믿고 있지는 않습니까? 소돔을 향해 걸어가시는 하나님의 발걸음 앞에서, 여전히 여호와 앞에 서 있는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까? 심판을 아는 신앙은 두려움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심판 앞에서 구원의 은혜를 더욱 붙들게 합니다. 소돔을 향해 가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아브라함처럼 중보의 자리로 나아가게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만이 구원의 하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실 수 있습니다.
본문 17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아브라함의 장막에 찾아오신 하나님께서 약속의 말씀을 새롭게 확인해 주시고, 이제 길을 떠나십니다. 아브라함은 그 하나님을 전송하기 위해 함께 길을 따라 나섭니다. 그런데 이 짧은 동행의 길 위에서 하나님은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우리말 성경에는 “내가 하려는 것”이라고 해서 흔히 미래형으로 들리지만, 히브리어 원문 자체는 “내가 지금 행하려고 하는 바로 그 일”이라는 현재적 뉘앙스가 강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어떤 추상적인 계획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이미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를 아브라함에게 숨기지 않겠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신뢰하고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하심의 현장 속으로 아브라함을 초대하시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홀로 일하시고, 인간은 결과만 통보 받게 하시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당신의 역사 속으로 불러들이시는 분이십니다.
솔직히 우리는 서로에게 많은 것을 숨기며 살아갑니다. 부모도 자녀에게 다 말하지 않습니다. 자녀들도 부모에게 감추는 것이 많습니다. 형제간에도, 친구 사이에도, 심지어 부부 사이에도 말하지 못하는 영역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은 완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끄러운 것이 있고, 떳떳하지 못한 것이 있고, 상처와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르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온전하신 분이십니다. 숨길 것이 없으십니다. 거리낌이 없으십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당신의 뜻과 계획을 숨기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주인이 종에게 모든 계획을 다 밝히겠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권력과 지위의 차이는 늘 ‘정보의 차이’로 유지됩니다. 다시 말해서, 권력과 지위는 언제나 정보를 독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리고 아브라함으로 대표되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당신의 뜻을 감추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종으로만 대하지 않으시고, 동역자로 세워주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방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숨기지 않으시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감추지 않습니다. 사랑은 나눕니다. 사랑은 마음을 엽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단순히 명령을 수행하는 존재로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 하나님의 뜻을 함께 품는 사람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당신의 심판의 계획조차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향한 하나님의 판단까지도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특권을 주신 동시에, 책임을 맡기신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알게 하심은 기도의 자리로 부르심이며, 중보의 사명으로의 초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숨기지 않으신다는 것은 인간을 높여주시는 행위입니다. 이것은 인간을 교만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존귀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당신의 뜻을 알고 반응하는 인격적 존재로 대하십니다. 명령만 듣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듣고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하는 존재로 세우십니다. 이것이 믿음의 관계입니다. 믿음은 무조건 따르는 맹목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 앞에서 순종하며, 때로는 눈물로 중보하는 깊은 관계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그 하나님은 오늘도 숨기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말씀을 통해, 성령의 감동을 통해, 그리고 시대의 징조를 통해 당신의 뜻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숨기시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들으려고 하는가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내가 행하는 것을 숨기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싶어 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당신을 감추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멀리서 바라보는 주변 신앙에 머물지 마십시오.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듣는 자리로 나아가십시오. 그리하여 숨기지 않으시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며 중보자로 서는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숨기지 않으시고 말씀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아브라함의 장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본문 18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이 말씀은 축복의 약속인 동시에,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어떻게 쓰시는지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창세기 12장에서 갈대아 우르에 있는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부터 이미 밝히셨던 말씀입니다. 지금 하나님은 소돔을 향해 가는 길 위에 계십니다. 구원의 현장이 아니라, 심판의 현장으로 향하는 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발걸음을 멈추시고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왜입니까? 아브라함은 단순한 구경꾼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해야 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장래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강대한 나라의 뿌리’로 세우셨습니다. 본문에서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아브라함 개인의 성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통해 한 민족을 세우시고, 그 민족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세상 가운데 드러내십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강함’은 군사력이나 경제력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세워지는 영적 강함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아직 아들이 없습니다. 아직 나라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는 유목민입니다. 뜨내기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미 완료형으로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하나님의 약속은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 위에 서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보이는 현실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실제로 붙드는 사람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복의 종착지’가 아니라, ‘복의 통로’로 부르셨습니다. 본문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복은 아브라함에게서 멈추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을 통과하여 흘러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축복하실 때, 언제나 그 사람 너머를 바라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많은 것을 맡기십니다. 축복만이 아니라 책임도 맡기십니다. 복의 사람에게는 복의 책임이 따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소돔의 이야기를 미리 알려주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침묵하는 사람이 아니라, 중보하는 사람이 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뜻을 아는 사람으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을 아무에게나 공유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맡길 수 있는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이었고, 그 마음 앞에서 무릎을 꿇을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소돔을 향해 손가락질하지 않고, 소돔을 위해 기도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뜻을 안다는 것은 특권이지만, 동시에 무거운 책임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사람은 결코 방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사람은 시대의 아픔 앞에서 외면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서서 눈물로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오늘 우리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의 교회를 바라보시며 묻고 계십니다. “내가 하려는 일을 너희에게 숨기겠느냐?” 하나님은 여전히 말씀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말씀을 맡길 교회를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이 시대를 향해 중보할 교회를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감당할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묻습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은 어디에 서 있습니까? 복을 누리는 데서 멈춘 신앙입니까, 아니면 복을 흘려보내는 신앙입니까? 교회는 안전한 피난처가 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세상을 향해 열려 있는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복을 붙잡는 신앙에서 복을 나누는 신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데서 멈추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살아내야 합니다. 이 시대 가운데 아브라함처럼 서서 중보하며, 복의 통로로 쓰임 받는 우리 교회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본문 19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앞 절에서 아브라함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말씀하신 하나님께서는 본문에서 아브라함을 택하신 이유를 분명하게 밝히십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아브라함 개인의 신앙 이야기로 끝나는 말씀이 아니라, 오늘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까지 깊이 비추는 말씀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왜 택하셨다고 말씀하십니까? 부유하게 하시려고? 이름을 크게 하시려고? 편안하게 살게 하시려고?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결코 “너희들끼리 잘 먹고 잘 살아라”고 끝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믿음이라는 선물을 주시고, 믿지도 못할 약속을 주시고, 웃음조차 믿음이 되지 못했던 그 자리에서 ‘이삭’이라는 은혜의 아들을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브라함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에게 맡겨질 다음 세대를 위해서였습니다. 아브라함 한 사람의 신앙이 가문을 지나 세대를 향해 흘러가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특별히 본문에서 중요한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명하여’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제안이나 권면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분명하게 방향을 제시하는 영적 책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가정의 제사장으로, 신앙의 교사로,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대리인으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로로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흘러가는 입이 되게 하셨고, 하나님의 뜻이 전달되는 손이 되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생각을 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를 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집과 그의 권속들은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배우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삶의 내용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에서 ‘여호와의 도’는 ‘여호와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의’는 ‘정의’인데, 인간이 생활 가운데서 마땅히 지켜야 할 윤리적, 도덕적 기준과 조화를 의미합니다. 그런가 하면, ‘공도’는 ‘공의’를 말하는데, 이는 인간이 마땅히 행해야 할 바른 판단과 다스림이라는 의미로 쓰였습니다. 따라서 ‘의와 공도’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행하여야 할 하나님의 명령으로서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하나님의 자녀된 인간이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이쪽에서의 정의, 저쪽에서의 정의가 아니라 모두에게 통용되는 공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우리를 강대한 믿음의 백성으로 세워주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서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행하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사람만이 사람을 바르게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을 사랑하면 정의와 공의를 지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은 마음속에만 머무는 추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도는 삶 속에서 지켜져야 하고, 정의와 공의는 관계 속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가정에서, 공동체에서, 사회 속에서 하나님 백성다운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저와 여러분을 선택하신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복의 종착지가 아니라 복의 통로로 사람을 부르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은혜를 독점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다음 세대에 전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의 이 말씀은 우리 자신을 향한 질문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 가정, 직분, 물질, 자리들은 어디를 향해 흐르고 있습니까? 나 하나 편안하게 신앙생활 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자녀와 다음 세대가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의와 공도를 배우도록 주신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오늘도 아브라함을 찾으십니다. 말씀을 가르칠 입을 찾으시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할 손을 찾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단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수혜자로 머물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통로로 살아갈 것인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숨기지 않으시고 말씀하신 두 번째는, 옆에 있는 이 세상 나라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본문 20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을 막연하게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죄악이 심히 무겁다”, “그 죄가 매우 무겁다”고 두 번이나 강조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말로 ‘부르짖음’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차아크’는 ‘원성’을 의미하는데, 이는 하늘을 향한 억울한 사람들의 애절한 호소를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단순한 도덕적 타락을 넘어 하나님 앞에서 더 이상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는 하나님의 진단입니다. 그리고 소돔의 심판은 하루아침에 떨어진 벼락이 아니라, 이미 그 죄악이 쌓이고 쌓여서 이제는 그 무게가 한계에 이른 상태입니다.
소돔은 인간들이 세상의 것들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짓밟았던 곳입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짓밟히는 곳에 인간의 인간에 대한 사랑이 가능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짓밟히는 곳에서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을 채워주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시라면, 그 정의와 공의를 짓밟는 인간을 하나님께서 가만히 두신다면 그 하나님이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이 되시겠습니까? 심판하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소돔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본문 21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
“내가 이제 내려가서 … 보고 알려 하노라.” 이것은 단순히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이 사실인지 여부를 알아보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전지하신 하나님께는 모르는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따라서 이 말에는 이제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을 심판하시겠다는 매우 강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내게 들린 부르짖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죄는 단순히 개인의 윤리적 문제에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그 도시는 약자가 짓밟히고, 정의가 무너지고, 인간의 존엄이 철저히 유린되던 곳이었습니다. 억울한 자들의 신음, 울부짖음, 피눈물이 하늘에 사무쳤습니다. 하나님은 그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권력자의 목소리보다 고통 받는 자의 신음에 먼저 귀를 기울이십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창세기 18장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대비를 보여줍니다. 바로 헤브론에 있는 아브라함과 소돔에 있는 롯입니다. 한쪽에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하나님을 떠난 공동체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장막에서는 웃음의 약속이 들려오지만, 소돔에서는 억울한 울부짖음의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올라가는 두 소리, 약속의 소리와 죄악의 부르짖음이 극명하게 대비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헤브론과 소돔의 운명에 대해서 그 미래를 보여주시는 것은 결국 인류 전체의 미래를 보여주시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개인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결국은 어느 나라에 속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헤브론이요, 다른 하나는 소돔과 고모라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있어서 아브라함이 거한 헤브론과 롯이 거한 소돔은 절대로 공간적으로 구별된 곳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입고서 아브라함처럼 그 은혜에 내가 바르게 대응한다면, 내 심령이 바로 헤브론입니다. 내가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나를 믿음의 백성으로 세우시고 나를 복의 통로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서도 받은 것으로 세상의 것들을 섬기느라 하나님을 외면하게 된다면 내 마음은 소돔입니다. 소돔과 헤브론은 절대로 멀리 있지 않습니다. 내 속에 있습니다. 오늘은 헤브론인데, 내일은 소돔일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동시에 두 개가 다 공존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내 심령을 헤브론으로 일구어 가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복의 통로로, 사랑의 통로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아브라함에게 들려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중보의 자리로 부르시기 위함입니다. 죄악의 무게를 아는 사람만이, 심판의 현실을 아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중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본문에서 아브라함은 담대히 하나님 앞에 서서 소돔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심판 선언은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중보자로 세우시는 부르심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께 올라가는 소리는 무엇입니까? 감사와 기도의 소리입니까, 아니면 억울한 자들의 탄식과 죄악의 부르짖음입니까? 하나님은 여전히 듣고 계십니다.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일 뿐, 결코 무관심하지 않으십니다. 이 말씀은 단지 소돔과 고모라의 과거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말씀은 오늘의 교회, 오늘의 사회, 오늘의 우리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질문입니다. 죄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의 구조가 될 때, 그 죄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 ‘부르짖음’이 됩니다. 하나님은 정의와 공의가 무너진 자리에서 울부짖는 약자들의 소리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17절에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여기에서 ‘아브라함’에다가 자기 이름을 넣어서 한 번 읽어보십시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오주철에게 숨기겠느냐?” 하나님은 오늘의 교회에도, 오늘의 성도들에게도 당신의 뜻을 숨기지 않으십니다. 말씀을 통해, 시대의 아픔을 통해, 억눌린 이웃의 부르짖음을 통해 하나님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하나입니다. 우리는 듣고 있습니까? 아니면 듣지 않으려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알면서도 침묵하는 신앙,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안전한 자리에 머무는 신앙은 더 이상 성경적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려가실 만큼 심각한 세상 한가운데에서 교회가 눈을 감고 귀를 막는다면 누가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증언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시간 우리 모두 결단하십시다.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로 살 것인지, 아니면 모른 척하며 신앙의 책임을 회피할 것인지 ….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는 이 하나님의 질문 앞에서 우리 교회와 저와 여러분들이 다시 중보자의 자리로 일어나기를, 세상의 부르짖음을 끌어안고 하나님 앞에 서는 용기 있는 신앙인으로 결단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