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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의 시대에 서는 바른 신앙
창세기 18:22-33
아브라함은 자신을 찾아온 세 나그네를 장막 문에서 맞이했고, 급히 달려가며 최상의 섬김으로 모셨습니다. 이 섬김은 형식적인 환대가 아니라, 삶 전체를 내어드리는 전인격적인 헌신이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아브라함의 나그네를 대접한 모습은 이후 신약교회와 교회 역사 속에서 섬김의 표준으로 계승되었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이 장면을 단순한 미담으로만 읽지 않았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분명히 말합니다.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도 있었느니라.” 이것은 창세기 18장을 염두에 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장막에서 일어난 사건은 교회가 낯선 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신학적 근거가 되었습니다.
초대교회는 박해 속에서 흩어지는 나그네 공동체였습니다. 집이 없고, 제도적 보호도 받지 못하던 그리스도인들에게 ‘환대’는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초대 교부들은 아브라함의 환대를 교회의 덕목으로 반복해서 언급했습니다. 교회는 예배당 이전에 식탁이었고, 강단 이전에 나눔의 자리였습니다. 주일의 성찬은 주중의 환대로 이어졌고, 낯선 이들을 맞아들이는 일은 곧 그리스도를 맞아들이는 신앙고백이 되었습니다.
이 전통은 교회사 속에서 구체적인 제도로 발전합니다. 교회를 향한 박해가 끝난 4세기 이후, 교회가 로마제국의 유일한 종교로 인정받고 세워진 수도원과 교회는 ‘나그네의 집’, ‘순례자의 숙소’를 함께 운영했습니다. 대표적인 수도원이었던 베네딕트의 규칙은 “손님은 그리스도처럼 맞이하라”고 명시하며, 모든 손님에게 세족과 식탁의 섬김을 제공하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장막 문에서 달려 나가 발을 씻기고, 식탁 곁에 서서 섬겼던 모습이 교회의 규범으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줍니다. 그런 점에서 아브라함의 섬김은 개인의 미덕이 아니라 교회의 원형입니다. 하나님을 맞이한 장막은 곧 교회의 모델이 되었고, 나그네를 대접한 손길은 교회가 세상 속에서 존재하는 방식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처음부터 ‘머무르게 하는 공동체’였고, 섬김을 통해 하나님을 드러내는 공동체였습니다.
그 섬김의 자리에서 아브라함에게 다시 언약을 확인해 주신 하나님은 이제 발걸음을 소돔을 향해 옮기십니다. 그리고 그 길에서 하나님께서는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이것은 하나님의 독백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향한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더 이상 복만 받는 신앙인으로 머물게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뜻과 결정의 무게 앞에 서는 사람으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분명히 밝히십니다. 아브라함의 자식과 권속에게 하나님의 도를 가르쳐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할 사람으로 세우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오늘의 본문이 시작됩니다. 오늘의 본문은 “아브라함이 기도를 잘했다”는 이야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왜 이 기도를 허락하셨는가를 묻게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당신의 뜻을 듣는 사람으로만 세우신 것이 아니라, 그 뜻 앞에서 책임 있게 반응하는 사람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22절부터 시작되는 아브라함의 중보 기도는 갑자기 등장한 기도의 장면이 아니라, 18장 전체가 이 기도를 향해 흘러오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에서 시작된 아브라함의 신앙은 이제 무너져 가는 소돔을 향한 기도의 자리로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의 본문은 한 사람의 기도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한 사회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과 그 마음 앞에 서 있는 한 신앙인의 책임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소돔의 시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 도시에 살지도 않았고, 그 도시의 죄악에 직접 가담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소돔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침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도망치지 않았고, 외면하지도 않았으며, 하나님 앞에 서서 그 사회를 끌어안고 기도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 역시 혼란과 타락의 징후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는 쉽게 이 사회를 비판하고, 쉽게 절망하며, 쉽게 거리를 두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오늘의 본문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이 죄로 말미암아 가라앉고, 하나님의 심판의 위기 앞에 직면한 것을 알았을 때,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사회적 소명을 감당해야 하는지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에게 맡겨진 사회적 소명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요?
첫째로, 우리는 계속적으로 하나님 앞에 서 있어야 합니다.
본문 22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본문은 아브라함의 신앙의 태도, 그리고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의 중심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두 사람은 아브라함의 장막을 떠나 소돔으로 향해 갑니다. 심판의 현장으로, 하나님의 공의가 집행될 자리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자리를 떠나가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멀찍이 물러나 구경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서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말로 ‘그대로’로 번역된 히브리어의 의미는 단순히 ‘움직이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은 ‘계속적으로’, ‘끊임없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앞에’라는 말은 ‘여호와의 얼굴 앞에’, 곧 하나님과 대면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소돔이 내려다보이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과 얼굴을 마주한 채 계속해서 머물러 서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신앙의 자세를 배우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어느 지점에서 멈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남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천사들은 소돔을 향해 떠나갔지만, 아브라함은 떠나지 않았습니다. 상황은 움직이고, 하나님의 일은 진행되고 있지만, 아브라함은 그 모든 일의 중심에서 하나님 앞에 그대로 서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의 위대함은 ‘떠날 줄 아는 신앙’이 아니라, ‘머물 줄 아는 신앙’에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깊이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만나는 사건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진정한 신앙은 하나님을 만난 이후에 시작됩니다. 하나님을 만났다는 감격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 서 있으려는 태도는 삶 전체를 지탱하는 힘이 됩니다. 그렇지만 오늘의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찾기는 합니다. 필요할 때 기도하고, 문제가 생기면 예배의 자리로 나아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오래 서 있지는 않습니다. 기도는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묻기보다는 내 마음을 쏟아내는 데서 멈추고 맙니다. 예배는 드리지만, 예배 이후에도 하나님의 얼굴을 의식하며 살아가지 않습니다.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로부터 “내년 이맘때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천사들과 함께 일어나 장막을 떠나가십니다. 그러면 장막 문 앞에서 “하나님,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하고 돌아서서 아내를 부르고 자축연을 벌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내와 함께 파티를 열고, 그날로부터 태어날 이삭을 위해 준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만 아브라함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는 소돔 성이 내려다보이는 곳까지 하염없이 하나님과 함께 걸어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듣는데서 멈추지 않고, 하나님의 얼굴 앞에 계속 머물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자기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 장면은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입니다. 아브라함은 사건의 현장보다 하나님 앞에 서 있기를 선택한 사람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만난 경험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신앙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지속성입니다. 예배 한 번, 기도 한 번, 은혜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계속 서 있는 삶이 참된 신앙입니다. 아브라함은 소돔의 심판이라는 무거운 현실 앞에서도, 판단과 결론을 자기 손에 쥐지 않고 하나님 앞에 서 있기를 선택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아브라함이 서 있는 위치입니다. 그는 소돔을 내려다보는 자리에서 여호와 앞에 서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세상의 죄악과 심판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그 현실을 하나님 앞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균형 잡힌 자세입니다. 세상을 외면하지도 않고, 세상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지도 않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되,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바라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의 신앙은 어떠합니까? 우리는 소돔을 바라보면서도 여호와 앞에 서 있습니까? 아니면 소돔을 바라보다가 여호와의 얼굴을 잊어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잊지 마십시오.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서 있는 사람만이 중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머물러 있지 않은 사람은 세상을 위해 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계속 서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으로 세상을 끌어안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소돔을 위해 기도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먼저 하나님 앞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죄악의 도성을 변호하지 않았지만, 그 도성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그러므로 상황이 어떻게 변하든지, 하나님의 일이 어디로 흘러가든지, 우리는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서 있기를 결단하십시다. 급히 떠나지 말고, 쉽게 물러서지 말고, 하나님의 얼굴 앞에 계속 머무십시다. 세상이 타락할수록 성도는 세상을 분석하고 평가하는 자리에 서기보다, 먼저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서지 않는 교회는 결국 세상의 기준 앞에 서게 되고, 세상의 논리 앞에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회가 어두워질수록 하나님의 백성은 더 오래 하나님 앞에 서 있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 시대의 소돔을 향한 긍휼의 통로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여호와의 얼굴 앞에 그대로 서 있는 신앙, 끝까지 하나님 앞을 떠나지 않는 신앙, 이것이 오늘 저와 여러분의 신앙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중보 기도의 책임을 감당해야 합니다.
본문 23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아브라함은 소돔을 바라보며 분노하거나 조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소돔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가볍게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소돔을 바라보기보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서 있습니다. 소돔을 심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심판의 의도를 알아채는 즉시로 하나님의 얼굴 앞에 서서, 그분의 공의 한가운데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붙들고 질문합니다.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아브라함의 이 질문은 하나님을 시험하려는 질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깊이 신뢰하기 때문에 가능한 질문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기에 그분 앞에서 감히 입을 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장면을 오늘 우리의 현실로 가져와 보십시다. 오늘 우리의 사회 역시 구조적인 죄악 속에 놓여 있습니다. 개인의 일탈 차원을 넘어 사회 전체가 죄의 구조 안에서 돌아가고 있습니다. 생명보다 이익을 앞세우는 구조, 약자를 보호하기보다 효율과 성과를 숭배하는 구조, 진실보다 유리한 거짓을 선택하는 구조가 우리 사회 곳곳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경쟁에서 뒤쳐지면 도태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고, 성공을 위해서라면 정직과 양심쯤은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다는 분위기가 공기처럼 퍼져 있습니다.
가정은 무너지고 있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돌볼 여유를 잃어가고, 자녀는 보호받지 못한 채 성과의 도구로 내몰립니다. 학교와 사회는 사람을 사람으로 키우기보다, 쓸모 있는 존재로 분류하는데 익숙해졌습니다. 노동의 현장에서는 땀의 가치는 가벼워지고, 생명의 안전보다 비용 절감이 우선되는 현실을 우리는 수없이 목격해 왔습니다. 정치와 권력의 영역에서는 책임보다 변명이 앞서고, 정의보다 진영이 앞서는 모습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소돔입니다. 우리가 흔히 소돔을 떠올릴 때, 불같은 심판이나 음란한 죄만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눈에 확 드러나는 성적 타락이나 폭력적인 범죄만이 소돔의 죄였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단순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소돔의 죄는 훨씬 더 일상적이고, 그래서 더 무서운 죄였습니다. 잘 살면서도 교만해졌고, 풍족하면서도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을 외면했습니다. 자기 살기에 바빠서 힘없는 사람의 아픔에는 마음을 쓰지 않았습니다. 굶주린 사람,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 도움을 요청하는 이웃의 손을 붙잡아주지 않았던 것이 소돔의 죄였습니다.
오늘의 우리 자신을 돌아보십시다. 우리는 예전보다 훨씬 더 잘 살게 되었지만, 그만큼 이웃의 고통에는 둔감해지지 않았습니까? 힘없는 사람의 울음소리를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지나쳐 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모두가 바쁘다는 이유로, 각자 살아남아야 한다는 이유로 약자의 눈물을 외면하는 사회가 되어 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바로 이 지점에서 중보의 기도는 더욱 절박해집니다. 중보의 기도는 추상적인 사회 비판이 아닙니다. 뉴스 한 줄을 보고 분노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중보의 기도는 하나님과 이 사회 사이에 서서, 이 땅의 죄의 구조를 하나님 앞에 그대로 가져오는 일입니다. “주님, 이 사회가 이대로 가면 안 됩니다. 이 구조 속에서 가장 먼저 희생당하는 이들을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이것이 중보자의 탄식입니다.
중보의 기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서는 일입니다. 이 자리는 결코 편안하지 않습니다. 한쪽에는 죄악으로 굳어져버린 사회 구조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 사이에 서는 사람은 언제나 긴장 속에 서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자칫하면 “왜 사회 문제에 교회가 나서느냐?”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고, 자칫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가볍게 여긴다”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 불편함을 감수하며 서 있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아브라함은 그 자리를 피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침묵으로 물러서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왜 내가 묻느냐?”며 책임을 내려놓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서서 떨리는 마음으로, 그러나 물러서지 않고 질문했습니다.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이것이 중보자의 용기입니다. 중보자는 사회를 단번에 바꾸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이 사회의 아픔과 죄의 구조를 붙들고 버티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의 교회가 사회를 향해 가장 먼저 회복해야 할 사명은 날카로운 비판의 언어가 아니라, 무릎 꿇는 중보의 기도입니다. 우리는 말하는 데에는 익숙하지만, 울며 기도하는 데에는 서툽니다. 분노의 댓글에는 참여하지만, 밤새 이 땅을 위해 기도하는 자리에는 쉽게 남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도 교회를 향해, 저와 여러분을 향해 묻고 계십니다. “내 앞에 서서 이 땅을 위하여 중보할 자가 어디 있느냐?” 이 질문은 과거 소돔을 향한 질문이 아니라, 오늘의 한국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질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소돔을 변호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소돔의 죄를 합리화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철회해 달라고 떼를 쓰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소돔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죄를 미워하되 사람을 포기하지 않는 자리, 구조적인 악을 직시하되 긍휼을 끝까지 붙드는 자리, 바로 그 자리가 하나님께서 오늘 이 시대에도 찾으시는 중보의 자리입니다.
셋째, 우리는 의인들을 찾아 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 24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 성 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
아브라함이 왜 오십 명에서부터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어떤 성경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집단을 카운트할 때 기본적인 단위가 백 명이었다고 합니다. 백 명 중에서 아마 절반인 오십 명을 생각했을는지 모릅니다. “하나님, 절반만 찾을 수 있다면, 이 도시를 좀 봐주십시오.” 아브라함의 마음속에는 그런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한 사회에서 절반은커녕 10%만 의로워도 그 사회가 아주 건강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닷물은 소금 4%만 있어도 절대로 썩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한국 땅에 기독교인의 숫자만 약 19%, 천주교까지 합해서 27%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총체적인 부패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 땅의 현실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책임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적으로 말해, 의인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여전히 의인의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의인’이라는 말이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강조하는 의인은 어떤 사람일까요? 본문에서 우리말로 ‘의인’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차디크’입니다. 이 단어는 단순히 ‘착하다’는 도덕적 평가의 언어가 아닙니다. 히브리어 ‘차디크’는 법정적 언어입니다. 다시 말해, 어떤 기준 앞에서 ‘옳다’고 인정받은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특별히 구약 성경에서 ‘의인’은 언제나 관계적 개념입니다. 절대적 완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 앞에서 바르게 서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의인은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을 기준으로 자기 삶을 내어드린 사람입니다.
성경에서 의인은 언제나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정의됩니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께서 의인의 길은 아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도 의인의 핵심은 ‘길’입니다. 삶의 방향이 하나님을 향해 있느냐, 자기 자신을 향해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은 소돔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 소식을 들으면서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가까이 나아갑니다. 이것이 의인의 모습입니다.
오늘 한국 사회와 교회를 돌아볼 때,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은 여전히 ‘의인’입니다. 완벽한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숫자가 많은 사람을 찾으시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서기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 세상의 죄악 앞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향해 서 있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잊지 마십시오. 의인은 자기 의로 서 있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에 기대어 서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는 소돔을 향해 서 있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소돔을 등지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입니까? 나는 세상과 타협하면서도 스스로를 의인이라 착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의인은 여전히 하나님의 얼굴 앞에 그대로 서 있는 사람입니다.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 사람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가 그런 의인으로 하나님 앞에 서기를, 그래서 이 시대를 살리는 남은 거룩한 자로 쓰임 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브라함의 기도는 점점 숫자가 줄어듭니다. 오십에서 시작하여 사십오, 사십, 삼십, 이십, 그리고 마침내 열 명에 이르기까지 내려갑니다. 이 장면을 겉으로만 보면, 마치 하나님 앞에서 숫자를 두고 흥정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흥정이 아닙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은 다수가 모여 있기 때문에 도시를 붙드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서 있는 한 사람 때문에 공동체를 보존하시는 분이시라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아브라함은 숫자가 줄어들수록 하나님의 뜻이 더 분명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중요한 것은 많고 적음이 아니라, “어떤 사람인가?”였습니다. 하나님은 군중을 찾지 않으시고, 의인을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여론의 크기를 보지 않으시고, 한 사람의 중심을 보십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끝까지 내려갑니다. “열 명만 있어도 멸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이 말 속에는 의인 한 사람, 한 사람의 무게를 믿는 아브라함의 신앙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사회는 숫자를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습니다. 숫자가 많으면 옳고, 숫자가 적으면 틀린 것처럼 여겨지는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진리는 언제나 다수의 손에 있지 않았고, 역사는 언제나 소수의 의인들을 통해 움직여 왔습니다. 하나님은 노아 한 사람, 엘리야 한 사람, 예레미야 한 사람을 통해 시대를 흔드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묻고 계십니다. “이 시대에 의인은 어디 있느냐?” 교회는 숫자를 늘리는 데만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규모가 커졌다고 해서 반드시 건강한 것은 아니며, 사람이 많다고 해서 자동으로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서 있는 사람, 진리 앞에서 타협하지 않는 사람, 손해를 보더라도 의를 선택할 줄 아는 사람을 세우는 것이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사명은 세상을 닮은 사람을 대량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살아갈 한 사람을 세워내는 데 있습니다. 가정에서 부모로, 학교에서 학생과 교사로, 직장에서 노동자와 경영자로, 정치와 경제의 자리에서 책임 있는 시민으로, 그 자리에서 의인으로 살아갈 사람을 길러내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교회에 맡기신 사회적 사명입니다.
넷째, 우리는 우리 사회가 의와 사랑의 공동체가 되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본문에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얼굴만 나타나 있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나타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의인 오십을 찾아 세운다면, 이 성을 용서해 주시지 않겠습니까?”라고 용서를 호소합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께서 뭐라고 대답을 하십니까? 본문 26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만일 소돔 성읍 가운데에서 의인 오십 명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역을 용서하리라.”
하나님께서 용서하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왜 용서하십니까?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자비와 긍휼이 풍성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용서하십니다. 단, 회개할 때 용서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죄를 돌이키고 주 앞에 나와서 용서를 구한다면, 주님은 이렇게 기쁘게 선언하십니다. “내가 용서하리라!”
특별히 본문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이 만나는 그 자리에 아브라함이 서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소돔의 죄악이 심각하다는 사실을 아십니다. 하나님은 그 죄를 그냥 넘어가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죄는 반드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집행되어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죄를 보시고서도 눈을 감으신다면, 그분은 더 이상 거룩하신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공의로우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렇게 묻습니다.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중보는 점점 더 깊어집니다. 오십 명, 사십오 명, 사십 명, 삼십 명, 이십 명, 그리고 열 명까지 내려갑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 질문을 끝까지 들어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공의의 하나님께서 사랑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짚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유예하시는 것은 공의를 포기하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공의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죄는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그냥 용서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불의한 인간, 죄를 범한 인간을 그냥 넘어가신다면 하나님의 공의는 무너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전 인류의 죄를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짊어지우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을 십자가에서 심판하셨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사건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공의가 집행된 사건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공의는 만족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보배로운 피는 죄의 값을 위한 대가였습니다. 이것이 공의의 만족입니다. 죄는 심판을 받았고, 하나님의 정의는 손상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깊이 드러내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멸망시키는 대신, 독생자를 내어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소돔을 위해 간구했던 그 자리에, 하나님은 인류 전체를 위해 독생자를 내어놓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의인 열 명을 찾았지만, 하나님은 단 한 분의 의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 세상을 살리셨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에서 충돌하지 않고, 완전하게 하나로 만났습니다.
아브라함의 기도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한 번 묻고 물러서지 않았고, 한 번 간구하고 체념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반복해서 하나님께 나아갔고, 숫자가 줄어들수록 오히려 더 낮아진 자세로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아브라함의 기도를 귀찮아하지 않으시고, 조급해 하지 않으시며, 끝까지 인내로 받아주십니다. 이 장면은 하나님께서 소돔을 쉽게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사실, 그리고 이 사회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마음인지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오늘 교회의 자리가 분명해집니다. 오늘 교회는 세상을 떠나는 공동체가 아니라, 세상 한복판에서 버티는 공동체이어야 합니다. 세상이 타락했다고 해서 등을 돌리고 숨어버리는 공동체가 아니라, 그 타락한 현실 한가운데에 서서 하나님 앞에 계속해서 기도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을 피해 도망치는 피난처가 아니라, 무너지는 세상을 붙들고 하나님께 매달리는 마지막 보루와 같은 존재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타락한 사회를 향해 돌을 던지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정죄의 언어로 담을 쌓고, 의로움의 이름으로 거리를 두는 공동체도 아닙니다. 교회는 공의와 사랑으로 이 사회를 붙드는 공동체입니다. 불의에 대해서는 침묵하지 않되, 사람을 향해서는 끝까지 소망을 놓지 않는 공동체입니다. 죄에 대해서는 분명히 말하되, 죄인에 대해서는 끝까지 기도의 손을 내미는 공동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정의를 말하되 사랑을 잃지 않는 것, 사랑을 말하되 진리를 포기하지 않는 것, 이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쪽으로 치우치면 정의가 없는 사랑이 되고, 다른 한쪽으로 치우치면 사랑이 없는 정의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교회는 늘 긴장 속에 서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서서 끊임없이 자신을 점검하고, 방향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공동체는 하루아침에 세워지지 않습니다. 한 번의 결단으로 완성되지도 않습니다. 지속적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기도가 필요하고, 눈에 띄지 않아도 포기하지 않는 헌신이 필요하며, 당장 열매가 보이지 않아도 순종의 걸음을 멈추지 않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소돔을 쉽게 포기하지 않으셨던 것처럼, 교회 역시 이 사회를 쉽게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반복된 기도가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아브라함은 소돔에 살지 않았지만, 소돔을 위해 울었습니다. 그는 그 사회의 죄를 즐기지 않았고, 그 사회의 멸망을 방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안전한 자리에서 비판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 앞에 서서 그 시대의 무게를 끌어안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계속 서 있었고, 중보의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으며, 의인 한 사람의 가치를 끝까지 믿었고, 무너진 사회가 다시 의와 사랑으로 회복될 수 있다는 소망을 놓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오늘의 교회와 성도들이 다시 붙들어야 할 모습입니다. 우리는 이 사회의 죄를 지적하는 데에는 익숙하지만, 그 죄를 끌어안고 하나님 앞에 울며 기도하는 데에는 점점 서툴러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세상의 타락을 말하면서도, 정작 그 타락한 세상을 위해 내 시간과 무릎을 내어드리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외면한 채 사랑만 말할 수도 없고,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린 채 심판만을 외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결단하십시다. 편안한 신앙에 머물지 않고, 안전한 종교생활에 안주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마음이 아파하시는 자리로 다시 나아가십시다. 하나님 앞에 계속 서는 교회, 중보의 자리로 다시 돌아오는 교회, 숫자가 아니라 사람을, 성공이 아니라 의를, 결과가 아니라 순종을 선택하십시다. 그리고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의 각 자리에서 의인으로 살아가겠다는 결단을 하십시다. 손해를 보더라도 정직을 선택하고, 침묵하는 것이 편할 때에도 진리를 붙들며, 모두가 외면할 때에도 약자의 편에 서겠다는 결단을 하십시다. 그리하여 이 땅의 교회가 다시 한 번 아브라함처럼 하나님 앞에 서는 교회가 되기를, 중보의 자리로 돌아오는 교회, 의인을 세우는 교회, 의와 사랑으로 이 사회를 품고 끝까지 버티는 교회로 다시 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