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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때에 소돔에 이르니
창세기 19:1-3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약속하시며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언제 아이를 낳을 것인지 기한을 지정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24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18장을 통해서 ‘내년 이맘때쯤’에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며 기한을 정해주셨습니다. 웃음의 아들, 이삭의 약속이 분명하게 드러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장막 뒤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사라가 전혀 기뻐하지 않고 속으로 피식 웃었습니다. 말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남편의 나이가 늙었고, 자신은 생리가 다 끊어졌는데, 어떻게 아이를 낳는다는 말인가?”
사라가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하나님보다 내가 나를 더 잘 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나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내년 이맘때쯤 네가 반드시 아들을 낳을 것이다.” 하나님의 이 말씀은 “내가 너보다 너를 더 잘 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의 분기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하나님을 믿어도,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서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버리고 가나안 땅을 향해 가도, 내가 나를 이 세상에서 제일 잘 안다고 믿는 한 우리는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과 무관한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의 분기점은 내가 모르는 나를 하나님은 알고 계신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그분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일 뿐입니다. 그렇기에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분은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망각하면 결코 안 됩니다.
풍성한 은혜의 식탁이 끝난 뒤, 길을 떠나시려는 하나님께서는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라고 하시며, 아브라함에게 당신의 속내를 밝혀주십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왜 아브라함을 부르셨는지, 그리고 아브라함을 왜 강대한 나라로 만들어주시고, 그로 하여금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는지 그 속내를 밝혀주셨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여호와의 도를 쫓아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그저 잘 먹고 잘 살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당신의 자녀로 불러주시면 어떤 삶을 살게 될 것인지를 세상에 보여주는 모델로 아브라함을 불러내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서 정의와 공의를 세상에 흘러 보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지를 세상 사람들 앞에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남보다 더 의롭지 못했음에도 우리에게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해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상을 향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모델이 되라고 선택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삶과 일터에 세상이 들여다 볼 수 있도록 투명한 유리창을 꽂아둬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가정이 이런 모습이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서 정의와 공의를 세상에 흘러 보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부르신 이유입니다.
아브라함의 장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말씀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어서 타락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겠다는 속내를 밝혀주십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향한 하나님의 속내를 듣게 된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그대로 섰습니다. 그는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의인 열 명을 위하여 중보합니다. 그 중보는 하나님을 설득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을 붙드는 믿음의 몸부림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18장은 아직 기회가 있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집행되기 전, 중보의 문이 열려 있던 시간입니다.
특별히 창세기 18장은 하나님과의 대화가 끝난 아브라함이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는 말씀으로 끝이 납니다. 여기에서 ‘자기 곳’은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던 자리이며, 아브라함이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야 할 삶의 자리입니다. 이처럼 중보의 자리는 특별하지만, 신앙은 언제나 일상으로 돌아와 검증됩니다. 아브라함은 소돔의 결말을 보지 못한 채 돌아갔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결정을 눈으로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공의를 의심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계산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신뢰했기에 물러날 줄 알았습니다. 이것이 성숙한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그렇습니다. 끝까지 말하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마지막에 침묵할 수 있는 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용기와 하나님 앞에서 물러나는 겸손을 함께 지닌 성도가 참된 성도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성도들이 흔히 범하는 실수는 기도를 마친 후에도 결과를 붙잡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기도의 끝은 결과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맡김입니다. 오늘 우리는 기도의 사람으로 부름을 받았지만, 동시에 맡김의 사람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기도해야 하지만, 그 결과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말없이 돌아갔고,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이제 19장은 그 중보 이후의 현실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죄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중보가 끝난 뒤에도 회개가 없다면, 하나님의 심판은 역사 속에서 실제로 집행됩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19장은 무서운 장이지만, 동시에 매우 정직한 장입니다. 죄가 가득 찼음에도 불구하고, 그 죄악을 그대로 두고 외면하신다면 그 하나님은 결코 공의로우신 분이 아닙니다. 따라서 19장에서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숨기지 않으십니다.
오늘의 창세기 19장은 두 천사가 소돔에 있는 롯을 찾아가는 이야기로부터 시작됩니다. 본문 1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저녁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아 있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려 절하며.”
본문은 롯이 하나님의 두 천사를 어떻게 영접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언뜻 보면, 헤브론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두 천사를 영접했던 것과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18장과 19장을 자세하게 면밀히 들여다보면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첫째로, 18장과 19장,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일행을 영접한 것과 소돔에서 롯이 두 천사를 영접한 것은 배경 상으로 큰 차이가 있습니다.
먼저는 장소가 다릅니다. 아브라함이 있는 곳은 헤브론의 마므레입니다. ‘헤브론’이라는 말은 ‘교제의 자리’이고, ‘마므레’는 ‘활발한’이라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뜨겁게, 강하게, 깊게 교제하는 자리에 앉아 있다는 말이 됩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이 소돔을 향하여 떠나간 이후로부터 지금까지 헤브론 마므레를 떠나지 않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믿음의 자리를 지켰습니다. 그런데 소돔은 타락의 도시, 환락의 도시, 향락의 도시, 죄악으로 가득한 도시입니다. 지금 거기에 롯이 있습니다.
다음으로 두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천사를 만난 시간이 전혀 다릅니다. 18장 1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일행을 만난 시간은 ‘날이 뜨거울 때’였습니다. 태양이 가장 뜨거울 때, 빛이 가장 강렬할 때입니다. 아브라함의 장막에는 뜨거운 빛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한낮에 하나님을 뵈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고, 약속의 말씀이 선포되었으며, 생명의 웃음이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아브라함은 한낮의 사람입니다. 그 영혼이 한낮의 빛 가운데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롯의 경우는 ‘저녁 때에’라고 해서, 해가 저문 뒤입니다. 성경에서 저녁 때, 해가 진 뒤, 밤이라는 문구가 나올 때, 이것은 단순한 시간의 정보를 알려주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시간’은 언제나 하나님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저녁은 하루의 끝자락입니다. 더 이상 새로운 시작을 기대하기 어려운 시간입니다. 빛이 서서히 물러가고, 어둠이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종종 저녁과 밤을 인간의 영적 상태와 연결해서 영적으로 어두워졌을 때와 저녁을 동일시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따라서 소돔은 더 이상 미래를 기대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회개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회개를 거부해 온 결과로 저녁을 맞이한 것입니다. 해는 갑자기 지지 않습니다. 서서히 기울다가 결국 사라집니다. 소돔의 죄악도 하루아침에 쌓인 것이 아닙니다. 오랜 시간 반복된 무시와 외면, 고집과 완악함의 결과였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가볍게 여기고, 회개를 미루고, 타협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저녁이 찾아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의 시간은 어떻습니까? 아직 말씀이 환히 비치는 낮입니까? 아니면 이미 귀가 닫혀 가는 저녁입니까? 우리의 하나님은 인내하시는 분이십니다. 충분히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 인내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그 기다리심을 무시할 때 결국 저녁은 찾아옵니다. 소돔의 저녁은 하나님의 성급함이 아니라, 인간의 완악함이 만들어낸 시간입니다. 소돔의 저녁은 하나님의 인내를 거부한 결과였습니다. 아브라함이 한낮의 사람이라면, 롯의 영혼은 밤의 사람, 어둠의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셋째로, 하나님을 만난 장소입니다. 아브라함은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하나님의 일행을 만났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은 워낙 더운 날씨이기 때문에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일을 하다가 해가 뜨거울 때는 밥을 먹고 잠시 쉽니다. 그러면 나무 그늘 밑에서 쉴 수도 있습니다. 동굴 속에 들어가서 쉴 수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막대한 가축을 가진 목축업자입니다. 그러니까 동굴이나 나무 밑에서 쉬어도 됩니다. 그런데 장막, 자기 집에 와서 쉬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지극히 가정적인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훌륭한 신앙인은 반드시 좋은 가정인입니다. 가정사를 다 내팽개치고 교회에 와서만 사는 사람을 훌륭한 신앙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시간상으로 밖에서 일을 더 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인은 집에 들어가서 수고한 아내와 가족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사람입니다. 그 한마디의 격려에 가족들은 서로 원기를 회복합니다. 아브라함은 그런 사람입니다. 모든 것을 가정 중심으로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롯은 저녁 때에 소돔 성문에 앉아 있다가 두 천사를 만납니다. 분명히 해가 졌는데, 그래서 집에 돌아가야 하는데, 집에 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문에 앉아 있다가.” 여기 ‘성문’은 단순히 사람들이 오가는 출입구가 아닙니다. 고대 근동사회에서 성문은 일종의 사교장으로 재판이 이루어지고, 행정이 집행되며, 도시의 가치와 질서가 결정되는 자리였습니다. 말하자면, 소돔의 성문은 이 도시의 정신과 방향이 응축된 공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도시의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이 바로 ‘성문’입니다. 그러나 그 성문에 한낮에는 사람들이 많지만, 해가 지면 다 집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롯은 아직도 안 들어갔습니다. 롯은 철저하게 세상 중심의 사람입니다. 자기 집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해가 져서 집안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18장과 19장은 이처럼 배경과 세팅이 완전히 다른 상황 속에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아 있다가.” 이 말을 원문 그대로 직역하면, “성문에 계속 앉아 있다가”입니다. 이는 천사들이 올 때에 마침 그가 거기에 앉아 있었던 것이 아니라, 평소에 늘 하든대로 그곳에 앉아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롯이 성문에 ‘앉았다’는 말은 롯이 더 이상 나그네가 아니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한때는 장막을 옮겨다니던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한 도시에 뿌리를 내리고, 그 사회의 일원이 되었으며, 어느 정도 영향력과 지위를 인정받는 위치에까지 이르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성공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안정된 자리, 인정받는 위치, 세상 속에서 자리 잡은 삶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장면을 결코 긍정적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리는 매우 위험한 자리였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여전히 장막 문에 앉아 있었습니다. 장막 문은 언제든지 떠날 준비가 된 자리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면 즉시 순종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장막 문은 세상에 고정되지 않은 자리이며, 하늘을 향해 열린 자리입니다. 반면에 성문은 떠날 수 없는 자리입니다. 이미 구조 안에 들어온 자리입니다. 세상의 질서와 적당히 타협해야 유지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장막 문과 성문 사이의 차이는 단순한 공간의 차이가 아니라, 신앙의 방향성의 차이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리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을 바라보는 자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롯은 악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창세기 12장에서 그는 아브라함과 함께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가나안으로 왔습니다.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단순한 이사가 아니라, 삶의 가치와 방향을 바꾸는 결단이었습니다. 롯도 그 결단에 동참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삼촌 아브라함과 함께 하나님의 약속의 여정에 발을 내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출발이 아니라, 방향의 지속이었습니다.
창세기를 따라가 보면, 롯의 이동 경로가 선명하게 보입니다. 처음에는 아브라함과 함께 장막을 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목초지의 문제로 갈라선 이후, 그는 요단 들을 바라보며 물이 넉넉한 땅을 선택했습니다. 그때 성경은 이미 그 땅을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고 증언합니다. 그럼에도 롯은 점점 소돔 가까이 옮겨 장막을 치더니, 마침내 오늘의 본문에서는 성문에 앉아 있습니다. 그가 성문에 앉아 있다는 것은 그 사회의 한복판에 들어가 있었다는 뜻이며, 영향력을 가진 위치에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롯은 이제 소돔의 주변인이 아니라, 소돔의 중심부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는 나그네가 아니라, 그 도시의 시스템 안에 편입된 사람이었습니다. 한 걸음, 한 선택, 한 타협이 그를 여기까지 데려왔습니다. 타협은 언제나 이렇게 조금씩 서서히 진행됩니다. 어느 날 갑자기 믿음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리를 옮기다보니 어느새 성문에 앉아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지금 어디에 앉아 있습니까? 장막입니까, 성문입니까? 솔직히 우리는 장막보다 성문에 앉아 있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성문에 앉아 있다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안정적이고, 성공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영향력 있는 자리, 편리한 삶, 인정받는 위치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가 하나님 앞이 아니라 세상의 중심이라면, 그 신앙은 매우 위태롭습니다. 롯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점점 세상의 중심으로 이동해 갔습니다. 하지만 롯은 소돔을 얻었지만 제단을 잃었습니다. 재산은 얻었지만 가정을 잃었습니다. 세상 중심에 앉았지만, 하나님 중심에서 멀어졌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롯의 비극을 보게 됩니다. 그는 옳은 일을 하려고 애쓰지만, 그가 앉아 있는 자리가 이미 잘못된 자리이기에 그의 신앙은 끊임없이 위협을 받고, 그의 선택은 점점 더 궁지에 몰립니다. 타협의 자리에 오래 앉아 있을수록 신앙은 점점 더 위태로워집니다.
그러므로 이 장면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엄중하게 묻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의 시간은 아침입니까, 낮입니까, 아니면 저녁입니까? 아직 하나님의 말씀이 새롭게 들리는 시간입니까? 아니면 이미 귀가 닫혀 가는 시간입니까? 그리고 여러분이 머물고 있는 자리가 어디입니까? 장막입니까, 성문입니까? 오늘의 본문은 저녁이라는 시간과 성문이라는 장소를 통해 회개의 마지막 순간이 얼마나 엄중한지를 우리에게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롯의 모습은 오늘의 교회와 성도들의 자리를 정직하게 비추는 거울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제단으로 돌아오십시오. 다시 하나님의 얼굴 앞에 서십시오. 그 자리가 생명의 자리이며, 참된 안전의 자리입니다.
본문 2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르되 내 주여 돌이켜 종의 집으로 들어와 발을 씻고 주무시고 일찍이 일어나 갈 길을 가소서 그들이 이르되 아니라 우리가 거리에서 밤을 새우리라.”
본문에서 아브라함과 롯이 나그네들을 영접하는 차이를 보게 됩니다. 앞선 18장 3절에서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지나가는 세 사람을 본 아브라함의 영접은 적극적입니다. 그는 세 사람을 보자마자 달려갑니다. 엎드립니다. 간청합니다. 그는 상대가 누구인지 완전히 알기 전부터 ‘주’로 부르며, 자신을 ‘종’으로 낮춥니다. 그리고 최상의 것을 내어놓습니다. 최상의 가루로 급히 떡을 굽고, 가장 좋은 송아지를 잡고, 버터와 젖을 가져옵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아브라함은 계산하지 않습니다. 손익을 따지지 않습니다. 그의 영접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에서 흘러나온 자발적인 헌신이었습니다.
본문에서 롯도 두 천사를 보고 일어나 영접하며 땅에 엎드려 말합니다. 겉으로 보면 아브라함과 매우 비슷해 보입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라고 했습니다. 이 말인즉, 아브라함이 물을 떠 와서 나그네의 발을 씻겨 드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롯은 “종의 집으로 들어와 발을 씻고 주무시고”라고 했습니다. 롯은 물을 가져다 줄 의사가 추호도 없습니다. “우리 집에 들어오면 저기 우물이 있으니까 거기서 발을 씻으세요.” 이 말입니다.
더구나 롯의 영접에는 ‘머무름’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당신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라고 말합니다. 이 말인즉, 원기가 회복 안 되면 하루든 이틀이든, 한 달이든 두 달이든 계셔도 좋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상쾌해지지 않으시면 상쾌해지실 때까지 언제가 되든지 계시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지금 나그네들을 영접하고 모셔 드리려고 하는 중요한 목적은 그분들을 내 집에 머물게 하고 싶은 것입니다. 쉬게 하고 싶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지금 ‘머물게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렇지만 롯은 ‘하룻밤’만을 허락합니다. “일찍이 일어나 갈 길을 가소서.” 롯이 지금 자기 집에 들어오라고는 하는데, 무게가 ‘가라’는데 있습니다. 눈에 보였으니까 내가 의무를 안 할 수는 없는데, 우리 집에 와서 발을 씻고, 주무시고, 아침 일찍 가라는 것입니다. 하루 이틀 있으면 큰일 나는 것입니다.
이 차이는 단순한 표현의 차이가 아니라, 삶의 자리와 신앙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드러내는 차이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자기 삶의 중심에 모시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롯은 하나님을 환영은 하지만, 오래 머물게 하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소돔이라는 도시 한가운데서 살아가던 롯에게 하나님의 임재는 편안함보다는 부담이었을는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두 영접의 장면은 오늘 우리의 신앙을 정직하게 비추는 거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영접하고 있습니까? 아브라함처럼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우리의 시간과 물질과 계획의 중심에 모시고 있습니까? 아니면 롯처럼 필요할 때는 모시되, 일정 시간이 지나면 다시 떠나시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지는 않습니까? 결국 아브라함의 집은 약속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그의 영접의 자리에서 이삭의 탄생이라는 구속사의 약속이 선포되었습니다. 그러나 롯의 집은 심판 직전의 임시 피난처에 불과했습니다. 같은 영접이었지만, 그 결과는 너무도 달랐습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과 천사들의 반응이 대조적입니다. 18장 5절에 보면, 아브라함의 간청에 “그들이 이르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단순한 동의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영접, 그의 마음, 그의 믿음의 자리에 기꺼이 머물겠다는 응답입니다. 아브라함의 장막은 늘 열려 있었고, 그의 삶은 하나님을 향해 열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간청은 단순한 예의가 아니라, 하나님을 모시는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네 말대로 그리하라”고 하시며, 그 믿음의 자리에 기쁨으로 머무신 것입니다.
반면에 롯의 간청에 두 천사의 대답은 차갑고 단호합니다. “아니라 우리가 거리에서 밤을 새우리라.” 안 들어가겠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저라도 이렇게 대접하면 자존심 상해서 안 들어갈 터인데, 천사가 왜 거기에 들어가겠습니까? 그런데 인간의 눈으로만 본다면 머물기에 더 좋은 곳은 분명히 롯의 집이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장막은 바람이 그대로 드나드는 임시 거처였습니다. 천으로 덮인 장막은 밤이 되면 차가웠고, 낮에는 뜨거웠습니다. 가구도, 벽도, 문도 제대로 없었습니다. 반면, 롯의 집은 성읍 안에 있는 집이었습니다. 벽이 있었고, 문이 있었으며, 비와 바람을 막아주는 안정된 공간이었습니다. 오늘식으로 말하면, 장막은 불편한 임시 텐트였고, 롯의 집은 단단한 주택이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천사들이 머물기에 더 안락하고 편한 곳은 아브라함의 장막이 아니라, 롯의 집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간청에는 “네 말대로 그리하라”고 하시던 분들이, 롯의 간청 앞에서는 “아니라 우리가 거리에서 밤을 새우리라”고 하십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유는 환경에 있지 않습니다. 집의 구조나 편의성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편안한 곳을 찾으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머무시는 기준은 ‘안락함’이 아니라, ‘거룩함’입니다. 아브라함의 장막은 초라했지만, 그 장막 안에는 제단의 향기가 있었습니다. 그 장막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의 방향이 있었습니다. 그 장막은 하나님께 열려 있었고, 세상으로는 닫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은 비록 불편해도 하나님이 머무시기에 합당한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롯의 집은 단단했지만, 그 집은 죄악의 도성인 소돔의 문화와 가치관 한복판에 놓여 있었습니다. 외형은 안전해 보였지만, 영적으로는 가장 위험한 자리였습니다. 벽은 있었지만, 거룩함의 경계는 무너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천사들은 그 집에 들어가는 것을 주저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집 크기를 보지 않으십니다. 인테리어를 보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재정 상태나 생활수준을 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 공간이 무엇을 향해 열려 있는지를 보십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편안함은 있지만, 제단은 있습니까? 안정은 있지만, 하나님 앞에 머무는 시간이 있습니까? 삶은 정돈되어 있지만, 믿음의 방향은 분명합니까? 아브라함의 장막은 불편했지만 하나님이 머무셨고, 롯의 집은 안락했지만 하나님은 거리에서 밤을 새우려고 하셨습니다. 이 차이가 바로 신앙의 본질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우리에게 분명한 도전을 줍니다. 하나님을 예배당 안에서만, 주일의 시간 안에서만 잠시 모셔두는 신앙이 아니라, 우리의 삶 한가운데로 모셔 들이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머무실 수 없는 편안함이라면, 그 편안함은 결국 우리를 지켜주지 못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오래 머무르실 수 없는 집, 오래 말씀하실 수 없는 삶이라면, 그것은 결국 롯의 집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머무르시기에 기뻐하시는 삶, 하나님의 임재가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가정과 교회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본문 3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롯이 간청하매 그제서야 돌이켜 그 집으로 들어오는지라 롯이 그들을 위하여 식탁을 베풀고 무교병을 구우니 그들이 먹으니라.”
18장에서 아브라함은 고운 가루 세 스아로 떡을 만들고,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게 하고, 엉긴 젖과 우유도 준비하게 합니다. 말 그대로 아브라함으로서는 목축업자로서 자기가 대접할 수 있는 최상의 것으로 대접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대접하는데 아브라함과 사라와 집에 있는 하인들, 그러니까 집안사람들을 다 동원시켰습니다. 아브라함이 얼마나 가정을 중요시하고 그 가정에서 가장으로서의 위엄이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가족들을 다 동원해서 하나님을 영접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환대의 규모 문제가 아니라, 신앙이 가정과 공동체 전체로 흘러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개인의 경건에 머물지 않았고, 가정과 집안의 영적 분위기를 형성하는 중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소돔 성문에 앉아 있던 롯은 두 천사를 맞이할 때 혼자서 대접을 합니다. 앞서 말씀을 드렸듯이 롯이 성문에 앉아 있었다는 것은 그가 더 이상 외부인이 아니라, 소돔 사회의 한복판으로 들어가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는 영향력을 가진 자리, 인정받는 위치에까지 올라가 있었습니다. 그 자리는 하루아침에 그저 주어진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낯선 땅 소돔에서 외지인으로 시작한 롯이 그 도시의 중심인 성문에 앉기까지는 수많은 시간과 계산, 그리고 적지 않은 희생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그 도시의 규칙을 배웠고, 그들의 언어와 문화에 익숙해졌으며, 신뢰를 얻기 위해 애썼을 것입니다. 거래와 관계 속에서 손해를 감수했을 것이고, 때로는 신앙의 기준을 잠시 접어두는 타협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조금씩, 그러나 분명하게 그는 소돔 사회 안으로 깊이 들어갔고, 마침내 성문에 앉는 자리에까지 올라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사회의 중심에 앉아 있던 롯의 신앙은 점점 가정의 중심에서 밀려나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롯이 두 천사를 맞이할 때 아내를 부르거나, 집안사람들을 동원했다는 기록을 남기지 않습니다. 그는 어둠이 짙어진 밤에 혼자서 두 천사를 대접합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롯은 소돔의 중심에서 영향력을 얻었지만, 그의 믿음은 가정에서 더 이상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롯의 신앙은 철저히 개인화 되어 있었고, 가정과 공동체를 변화시키는 힘을 잃어버린 신앙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점진적 타협의 무서움입니다. 장막을 조금씩 옮길 때는 문제가 없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는 도시의 중심인 성문에 앉아 있으면서도 집 안에서는 홀로 믿음을 지키는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두 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신앙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급히 달려가 가장 좋은 송아지를 잡고, 고운 가루로 떡을 만들게 합니다. 풍성함과 기쁨이 담긴 대접입니다. 그러나 롯은 천사들을 위해 식탁을 베풀었는데, 무교병을 구워 드렸습니다. ‘무교병’이라는 것은 누룩을 넣지 않은 빵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교병을 출애굽한 날을 기리는 유월절에만 먹습니다. 왜냐하면 무교병은 맛이 없어서 못 먹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손님한테는 절대로 줄 수 없는 빵입니다.
그렇다면 롯은 왜 이렇게 손님에게 줄 수 없는 누룩도 넣지 않은 무교병을 만들어서 드렸을까요? 그것이 시간이 빨리 걸리기 때문입니다. 두 천사를 위해서 괜히 시간을 오래 걸리는 것이 귀찮은 것입니다. 그래서 간단한 무교병을 구워서 놓습니다. 한 마디로 무교병은 급히 떠나야 할 사람의 음식이며, 머물 수 없는 자의 식탁입니다.
그렇다면 롯이 가난해서, 그 집에는 소나 양떼가 없어서 무교병만 드렸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본래 아브라함과 롯이 같이 살다가 갈라지게 된 이유가 두 집에 워낙 짐승 떼가 많아져서 한 초장에서 같이 거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롯의 집 우리에 가면, 양떼와 소떼가 가득 차 있습니다. 한 마디로, 롯은 지금 한 마리는커녕 한 부위도 대접할 의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교병을 구워주면서 이것을 드시고 내일 아침에 일찍 떠나가라는 것입니다. 롯의 대접에는 머물러 달라는 간절함이 아니라, 빨리 떠나가 주기를 바라는 불안함이 묻어 있습니다.
“저녁 때에 … 소돔에 이르니.” 이 말씀은 단순한 역사 기록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영적 상태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묻습니다. 시간을 보십시오. 지금은 낮입니까, 저녁입니까? 자리를 보십시오. 우리는 장막에 앉아 있습니까, 성문에 앉아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오래 머물게 하는 신앙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하나님의 임재가 떠나기 전에 결단하십시다. 머뭇거리는 신앙을 내려놓고, 분명한 자리로 옮기십시다. 소돔의 성문에서 일어나 다시 여호와의 얼굴 앞에 그대로 서는 교회가 되십시다. 그리하여 시대를 닮은 교회가 아니라, 시대를 깨우는 교회로. 세상과 적당하게 타협하며 살아남는 종교인이 아니라, 빛으로 서서 거룩하신 부름에 응답하는 성도로 서기로 결단하십시다. 이 거룩한 결단이 오늘의 우리 교회와 우리의 삶 가운데 실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