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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들이 문을 닫고
창세기 19:4-11
창세기 18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의 약속을 재확인하시고, 동시에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이 “심히 무겁다”고 선언하십니다. 여기에는 두 장면이 교차합니다. 한쪽에서는 생명의 탄생이 준비되고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죽음 곧 멸망이 준비되고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약속의 웃음이 준비되고, 다른 한쪽에서는 심판의 그림자가 짙어집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서서 중보합니다. 의인 열 명이라도 있으면 멸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 사이에서 떨리는 마음으로 간구합니다.
이제 19장으로 넘어오면, 카메라는 아브라함의 장막을 떠나 소돔의 성문으로 이동합니다. 은혜의 대화가 오가던 장막에서, 타락의 소음이 가득한 성문으로 장면이 바뀝니다. 저녁때에 두 천사가 소돔에 이릅니다. 저녁이라는 시간은 어두움이 시작되는 시간입니다. 빛이 물러가고, 그림자가 길어지는 시간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저녁’이라는 시간은 단순히 시간을 알려주는 정보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저녁은 종종 죄악의 어둠이 밀려오는 시간, 영적 어둠의 시간, 심판이 임박한 시간을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장막에는 한낮의 뜨거운 시간에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러나 소돔에는 저녁때에 천사가 들어옵니다. 영적 빛은 물러가고, 영적 어둠이 도시를 덮고 있었습니다. 그때 롯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는 성문에 앉아 있었습니다. 성문은 도시의 행정과 재판과 권력이 오가는 자리입니다. 그는 더 이상 장막을 치는 떠돌이 나그네가 아니었습니다. 이제는 소돔 사회 안에서 일정한 위치와 영향력을 가진 사람으로 그 사회의 중심에 앉아 있습니다.
롯이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이 있었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타협과 양보를 했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자기 합리화가 있었겠습니까? “나는 여기에서도 믿음을 지킬 수 있다”, “나는 이 도시 안에서도 의롭게 살 수 있다.” 그렇게 조금씩 옮기고, 조금씩 적응하고, 조금씩 물들어 가다가 결국 성문에까지 앉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사회의 중심에 앉아 있었지만, 그는 그 도시를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 도시의 분위기가 그의 가정을 잠식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선택은 점진적이었지만, 그 결과는 결정적이었습니다.
저녁때에 하나님의 천사들이 소돔에 도착합니다. 마침 그때 롯이 성문에 앉아 있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엎드려 간청하여 자기 집으로 들입니다. 그리고 무교병을 만들어 대접합니다. 겉으로 보면 경건한 환대입니다. 그러나 그 환대는 아브라함의 환대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아브라함은 온 집안이 동원되었습니다. 사라와 종들과 가축이 움직였습니다. 하지만 롯은 혼자입니다. 혼자서 식탁을 베풀고, 혼자서 무교병을 구워서 대접합니다.
롯이 무교병을 구울 때, 그의 아내와 두 딸은 그 사실을 몰랐을까요? 작은 집이었을 것입니다. 낯선 손님들이 집에 들어오고, 급히 음식을 준비하면서 발생하는 소리와 냄새로 비롯된 상황을 가족들이 모를 리 없습니다. 갑자기 시끄러워진 분위기에 한 번 쯤은 얼굴을 내밀고 무대에 등장할 법도 합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롯의 가족이 함께 대접했다는 기록을 남기지 않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생략이 아니라, 이미 그의 가정이 영적으로 하나 되지 못하고 있었음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롯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을 따라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함께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걸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점점 소돔 가까이 장막을 치더니, 이제는 성문에 앉는 위치에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는 누가 뭐래도 소돔 사회에서는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는 성공했을는지 몰라도, 그의 가정은 점점 세상의 가치관에 물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가정은 최후의 보루입니다. 그런데 그 보루가 무너져가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손님을 영접하며 믿음의 결단을 하는데, 아내와 딸들은 같은 영적 긴장 속에 서 있지 않습니다. 나중에 롯의 아내가 뒤를 돌아보는 사건은 갑작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이미 마음은 소돔에 붙들려 있었습니다. 롯의 가정은 위기의 밤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그 위기는 어느 날 갑자기 떨어진 벼락이 아니었습니다. 그 시작은 이미 창세기 13장에서 아브라함을 떠나 물과 목초지가 넉넉해 보이던 요단 들을 선택하던 그 순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풍요를 따라 움직였던 롯의 선택 속에 신앙과 현실을 나누는 이중적인 삶을 그의 아내와 딸들은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았습니다. 아버지가 믿음의 사람처럼 보이면서도 동시에 세상의 이익을 좇는 모습을 반복해서 보며, 그들의 마음도 서서히 세상화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소돔의 위기는 단번에 닥친 재앙이 아니라, 오랜 시간 누적된 영적 분열의 결과였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가정이 한 방향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면, 결국 위기의 순간에 함께 서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겉으로는 교회에 나오고, 예배에 참석하지만, 정작 집 안에서는 영적인 대화가 사라지고, 함께 기도하는 시간이 끊어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버지 혼자 신앙생활을 하고, 어머니 혼자 눈물로 기도하고, 자녀들은 각자의 방에서 세상의 소리를 더 가까이 듣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제라도 우리는 식탁을 예배의 자리로 회복해야 합니다. 무교병을 굽는 손길이 혼자가 아니라, 온 가족이 함께 하나님 앞에 서는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소돔 한복판에 살아도 가정이 하나님 중심이면 살 길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정이 분열되면 성문에 앉아 있어도 무너집니다.
롯은 소돔 사회 안에서 일정한 위치와 영향력을 가진 사람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겉으로는 성공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날 저녁, 그의 집 문 앞에서 벌어지는 일은 그의 모든 선택이 어떤 영적 토양 위에 서 있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본문 4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이 눕기 전에 그 성 사람 곧 소돔 백성들이 노소를 막론하고 원근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
천사들이 롯의 집에 들어가고, 무교병을 먹고 눕기도 전에 소돔 성의 사람들이 노소를 막론하고 사방에서 몰려와 롯의 집을 에워쌉니다. 성경은 매우 의도적으로 이 장면을 묘사합니다. “노소를 막론하고.” 원문을 직역하면, “젊은 자로부터 늙은 자까지”입니다. “원근에서 다 모여.” 이것은 일부 타락한 사람들의 일탈이 아닙니다. 도시 전체가 움직입니다. 세대 전체가 움직입니다. 이것은 구조적 타락입니다. 문화가 무너진 상태입니다. 죄가 개인의 문제를 넘어, 사회적 합의와 문화가 되었음을 선언하는 장면입니다. 죄가 문화가 되었고, 문화가 군중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타락의 실상입니다. 부끄러움이 사라지고, 죄가 자랑이 되고, 다수가 정의가 되는 순간, 심판은 이미 문 앞에까지 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긴장으로 가득 찬 그 침묵을 깨뜨리는 외침이 터져 나옵니다.
본문 5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오늘 밤에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여기에서 ‘상관하리라’는 말은 단순히 대화를 나누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상관하리라’는 히브리어 ‘야다’는 문맥에 따라 성적인 관계를 뜻하는 말로 사용됩니다. 이 장면에서는 분명히 성적 폭력을 의미합니다. 더 나아가 남자들이 남자들을 대상으로 한 왜곡된 욕망, 곧 동성간의 성적 행위를 요구하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한 마디로 저들은 지금 동성애를 하겠다는 것입니다.
천사들이 사람의 모습을 하고 왔으니까, 요즘 말로 꽃미남처럼 잘 생겼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소문이 그냥 삽시간에 온 소돔 성에 퍼졌습니다. 그리고 젊은이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성 안의 모든 남자들이 다 몰려왔습니다. 성경은 “소돔 백성들이 노소를 막론하고 원근에서 다 모여 왔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전부 다들 남색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것은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도시 전체가 집단적으로 타락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도시의 민낯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소돔이 처한 죄의 본질입니다. 단지 개인 몇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죄를 정상으로 받아들이고, 죄를 즐기며, 죄를 요구하는 상태입니다. 더 무서운 것은 그 죄가 이제 롯의 집 문 앞에까지 왔다는 사실입니다. 집 안에는 하나님의 사자가 있고, 집 밖에는 집단적 타락이 있습니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거룩과 타락이 맞서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시대는 어떻습니까? 성적 혼란과 왜곡은 더 이상 숨겨진 문제가 아닙니다. 죄가 문화가 되고, 죄가 권리가 되고, 죄를 거부하는 자가 오히려 비난받는 시대입니다. 마치 소돔 성처럼, 젊은이로부터 노인에까지 죄의 물결에 휩쓸려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이것을 죄라고 분명히 선언합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가정을 세우신 창조 질서를 무너뜨리는 행위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에 대한 반역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질문은 단순한 도덕적 결단을 요구하는 질문이 아닙니다. 이것은 영적 전쟁의 한복판에서 우리가 어느 편에 설 것인가를 묻는 질문입니다. 다시 묻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로, 우리는 죄를 죄로 분별해야 합니다.
지금의 세상은 동성애자들을 가리켜 ‘성적 소수자들’이라고 하면서 그들의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동성애는 성 정체성의 다양성 가운데 하나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이전에는 숨어서 하던 짓들이 이제는 퀴어축제라는 명목으로 아예 드러내놓고 타락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세상이 아무리 그것을 권리라고 말하고, 다양성이라고 포장하고, 사랑이라고 미화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은 분명히 죄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창세기 1장 27절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성별을 구분하셨습니다. 남성과 여성, 이 양성의 질서 안에서 가정이 세워지고, 생명이 이어지도록 하셨습니다. 남성과 여성은 차별이 아니라 질서입니다. 억압이 아니라 창조의 설계입니다. 그런데 소돔의 사람들은 그 질서를 무너뜨렸습니다. 그들은 욕망을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쾌락을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성(性)이 더 이상 거룩한 언약의 도구가 아니라, 욕망의 배출구가 되어 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분명히 해야 합니다. 교회는 죄를 미워하지만 죄인은 미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정죄하기 위해 존재하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회개와 회복의 길을 제시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창조 질서를 선포하되, 동시에 복음의 소망을 전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이 시대 속에서 말씀을 분명한 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분별은 감정이 아니라, 말씀에서 나옵니다. 성경을 붙들지 않으면, 우리는 시대의 흐름에 밀려 죄를 죄로 인식하지 못하는 자리까지 내려가게 됩니다.
둘째로, 우리 가정의 문을 지켜야 합니다.
소돔의 죄는 성문에서 시작되어 결국 롯의 집 문 앞까지 밀려왔습니다. 오늘 우리의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미디어를 통해, 문화와 교육을 통해 수많은 사상과 가치관이 우리의 자녀들의 마음 문을 두드립니다. 부모가 깨어 있지 않으면 가정은 순식간에 세상의 가치에 잠식당하고 맙니다. 말씀으로 가르치고, 기도로 가정을 덮고, 예배로 집안을 세워야 합니다.
셋째로, 타락한 세상 속에서 거룩을 붙들어야 합니다.
거룩은 도피가 아니라 구별입니다. 세상 한가운데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는 삶, 사람은 사랑하되 죄와는 타협하지 않는 삶, 그것이 거룩입니다. 손해를 보더라도, 비난을 받더라도 하나님의 기준을 붙드는 사람,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선택하는 사람, 바로 그런 사람들이 이 시대의 의인입니다.
롯의 집 문 앞에 선 소돔 사람들처럼, 오늘도 세상의 문화는 우리의 가정 문을 두드립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문을 열어줄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문을 지킬 것입니까? 오늘의 시대는 적당히 타협하는 교회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구별된 교회를 찾으십니다. 오늘의 시대는 침묵하는 성도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진리를 붙드는 성도를 찾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죄가 문 앞까지 왔을 때, 우리는 물러설 수 없습니다. 더 분명하게 진리를 붙들고, 더 뜨겁게 거룩을 사모하며, 더 간절히 우리의 가정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흐름을 따라가지 않고 창조의 질서를 붙들고,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는 성도가 되기를 결단하십시다. 그리하여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우리의 문을, 우리의 가정을, 우리의 교회를 거룩으로 지키는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본문 6절과 7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롯이 문 밖의 무리에게로 나가서 뒤로 문을 닫고 이르되 청하노니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하지 말라.”
소돔의 밤은 이미 깊어졌고, 죄악은 극에 달했습니다. 두 천사가 롯의 집에 들어와 있고, 소돔 사람들은 집을 에워싸고 문을 두드리며 악한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그때 성경은 말합니다. “롯이 문 밖의 무리에게로 나가서 뒤로 문을 닫고.” 얼마나 담대한 행동입니까? 그는 집 안의 손님들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밖으로 나갑니다. 그리고 뒤로 문을 닫으면서 말합니다.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하지 말라.”
얼마나 멋집니까? 여기까지만 보면, 롯은 참으로 의로운 사람처럼 보입니다. 책임감 있는 가장처럼 보입니다. 손님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는 용기 있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 다음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겉으로는 의로워 보였지만, 그 안에는 이미 무너져버린 기준이 있었습니다. 보십시오. 롯은 분명히 악을 꾸짖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서 있는 자리, 그가 살아온 선택, 그가 만들어놓은 가정의 영적 분위기는 이미 소돔에 깊이 물들어 있었습니다. 그는 문은 닫았지만, 마음은 이미 열려 있었습니다. 그는 겉으로는 의를 말했지만, 실제 삶의 방향은 세속과 타협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롯의 비극입니다. 겉으로는 의로운 말, 그러나 속으로는 무너진 기준. 겉으로는 단호한 행동, 그러나 이미 오래 전부터 타협해온 삶. 우리는 이 장면을 보면서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문을 닫고 있는가? 아니면 이미 마음의 문을 세상에 열어놓고 있지는 않는가? 롯은 문을 닫았지만, 그 문은 너무 늦게 닫힌 문이었습니다. 이미 소돔은 그의 가정 안으로 깊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참된 의로움은 순간적인 용기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오랜 순종에서 나옵니다. 한 번의 꾸짖음이 아니라, 평생의 방향에서 나옵니다. 겉으로는 강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타협하고 있는 신앙은 결국 시험 앞에서 무너집니다. 그래서 롯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진솔하게 묻습니다. 당신의 신앙은 겉모습입니까? 아니면 실제 삶의 기준입니까? 오늘 이 시간, 우리 각자의 심령 안에 있는 소돔의 흔적을 회개하며, 겉모습이 아니라 본질이 살아 있는 신앙으로 돌아가는 결단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본문 8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내게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청하건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 내리니 너희 눈에 좋을 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일도 저지르지 말라.”
자기 집에 들어온 손님들을 보호하려는 모습은 고대 근동사회의 환대 문화를 생각하면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그 다음 말이 우리를 충격으로 몰아갑니다. “남자들하고 남색하는 것은 절대 안 된다. 그런데 내게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한 두 딸이 있으니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 내리니 너희 눈에 좋을 대로 행하라.” 손님은 보호해야 하지만, 자기 딸은 희생해도 된다는 것입니까? 남색은 안 되지만, 강간은 괜찮다는 것입니까? 이 장면은 소돔의 타락만이 아니라, 롯의 가치관이 이미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소돔은 성적으로 완전히 무너진 도시였습니다. 남자와 남자 사이의 관계를 요구하는 이 군중은 부끄러움도, 죄의식도 없습니다. 젊은이로부터 늙은이에 이르기까지 다 모였습니다. 도시 전체가 집단적으로 타락했습니다. 그런데 더 비극적인 것은, 그 한복판에 서 있는 롯입니다. 그는 소돔의 성문에 앉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회의 중심에 들어가 있었고, 어느 정도 영향력을 가진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는 그 도시를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 도시가 그의 가치관을 조금씩 잠식해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성애는 안 되지만, 자기 딸을 내어주는 것은 괜찮다고 말하는 왜곡된 도덕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면적인 타락입니다. 부분적인 의로움으로 전체를 덮으려는 모습입니다. 겉으로는 경건해 보이지만, 속은 이미 세상과 타협해 버린 상태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시대를 보아야 합니다. 오늘날도 성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 안에 있는 거룩한 선물이라는 인식이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쾌락은 권리가 되고, 욕망은 표현의 자유가 되었습니다. 부끄러움은 뒤떨어진 가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더 무서운 것은 교회 안에 있는 ‘롯’입니다. 세상을 비판하면서도, 정작 자기 가정은 지키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세상의 죄를 말하면서도, 자기 자녀의 영혼은 세상에 내어주는 모습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결단해야 합니다. 소돔 중심에 앉아 있는 신앙을 버리십시다. 부분적인 의로 스스로를 위로하려는 신앙을 내려놓으십시다. 우리의 가정을, 우리의 자녀를, 우리의 성을 하나님의 말씀 아래 다시 세우십시다. 십자가 앞에 서면 타협은 무너집니다. 그리스도의 피 앞에서 우리는 다시 거룩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타락한 도시 한복판에서도 의인을 건져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이 거룩한 결단이 우리 안에 다시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본문 9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이 이르되 너는 물러나라 또 이르되 이 자가 들어와서 거류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 이제 우리가 그들보다 너를 더 해하리라 하고 롯을 밀치며 가까이 가서 그 문을 부수려고 하는지라.”
쉽게 말하면 이런 말입니다. “아니, 어디서 굴러온 돌이 재판관 노릇을 하려는 것이냐?” 이것이 세상의 본심입니다. 평소에는 롯을 성문에 앉혀주고, 그를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주는 것처럼 보였지만, 정작 자기들의 죄를 지적하니까 본색이 드러납니다. “너 같은 주제에 감히 우리를 판단하느냐?”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그들보다 너를 더 해하리라.” 여기에서 “더 해하리라”는 말은 단순한 위협이 아닙니다. 우리가 먼저 너를 범하겠다는 뜻입니다. 너를 먼저 남색의 대상으로 삼고, 그 다음에 네 집에 있는 자들을 범하겠다는 것입니다. 죄는 이렇게 잔혹합니다. 죄는 지적당하면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더 흉포해집니다. 그래서 그들은 롯을 밀치고 문을 부수려고 합니다. 이 장면은 단순히 한 집의 문이 부서질 위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질서와 거룩함을 지키는 마지막 경계선이 무너지려는 순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소돔 사람들이 이렇게 분노했습니까? 롯이 평소에 그들과 어울려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요단 들을 바라보고 선택했고, 점점 장막을 옮겨 소돔 가까이 가더니, 마침내 소돔의 성문에 앉는 위치에까지 올라갔습니다.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그는 소돔의 사람들과 적당하게 타협하고, 그들의 비위를 맞추며 어울렸습니다. 그 결과 세상 한복판에서 성공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그는 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말에는 권위가 없었습니다. 그의 삶에 일관성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성도가 세상과 섞여 살 때는 박수를 칩니다. 그러나 죄를 지적하는 순간, “네가 무슨 자격으로 말하느냐?”며 공격합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세상과 타협할 때는 환영을 받습니다. 그러나 성경적 가치와 거룩을 외치면, “시대에 뒤떨어졌다, 판단하지 말라”고 공격합니다. “어디서 굴러온 돌이 재판관 노릇을 하려는 것이냐?” 이 말 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교만이 들어 있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기준이 되겠다는 선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세상에서 재판관이 되려고 부름 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빛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빛은 스스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다만 비출 뿐입니다. 그런데 어둠은 빛을 미워합니다. 빛이 오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소돔 사람들은 문을 부수려고 했습니다. 오늘 이 시대도 교회의 문을 부수려고 합니다. 가정의 문을 부수려고 합니다. 다음 세대의 문을 부수려고 합니다. 성적 타락, 쾌락주의, 중독 문화, 왜곡된 가치관이 거칠게 문 안으로 밀어닥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문을 지켜야 합니다.
가정의 문, 교회의 문, 내 마음의 문을 지켜야 합니다. 여기서 ‘문’은 단순한 나무 문짝이 아닙니다. 문은 경계선입니다. 안과 밖을 가르는 자리입니다. 무엇이 들어오고, 무엇이 들어오지 못하는지를 결정하는 자리입니다. 롯의 집 문이 무너지면 그 안에 있는 가족이 무너집니다. 오늘 우리의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음란한 문화, 왜곡된 가치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상이 아무 여과 없이 들어오도록 방치한다면 문은 이미 열린 것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문지기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문지기가 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내 마음의 문을 지켜야 합니다. 죄는 항상 문 밖에서 두드립니다. 그러나 문을 여는 것은 결국 우리의 선택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로 문을 잠그고, 말씀으로 빗장을 걸고, 성령의 분별력으로 지켜야 합니다.
둘째, 세상과 타협하려는 성문 신앙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세상 중심에 앉아서 인정받는 것보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롯은 성문에 앉아 있었습니다. 성문은 권력과 영향력의 자리였습니다. 그는 소돔 사회 안에서 일정한 위치를 얻었고, 인정받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결정적인 순간에 그는 그들 편도 아니고, 하나님 편에서도 분명히 서 있지 못하는 애매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어디에 서 있습니까? 세상의 박수를 받기 위해 진리를 희석시키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람의 눈치를 보느라 말씀을 낮추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 서 있는 한 사람의 믿음이 성문에 앉아 있는 열 사람의 인기보다 귀합니다. 인정받는 자리보다 순종하는 자리가 더 안전합니다.
셋째, 핍박을 각오해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죄를 죄라고 말하면 미움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성도가 걸어야 하는 길입니다. 소돔 사람들은 롯을 향해 “더 해하리라”고 위협했습니다. 진리를 말하는 자를 먼저 공격하겠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거룩을 말하면 배타적이라 하고, 회개를 외치면 시대착오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빛은 결코 어둠과 타협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둠이 빛을 미워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미움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서는 것입니다. 핍박을 피하려고 침묵하는 교회가 되지 말고, 사랑으로 그러나 분명하게 진리를 말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길이며, 그것이 성도의 영광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인정받는 종교인이 아니라, 하나님께 인정받는 성도로 서기를 결단하십시다. 타협하는 종교인이 아니라, 거룩을 지키는 신앙인으로 서기를 결단하십시다. 그리하여 문이 부서질 듯 흔들려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사람으로 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본문 10절과 11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 사람들이 손을 내밀어 롯을 집으로 끌어들이고 문을 닫고 문 밖의 무리를 대소를 막론하고 그 눈을 어둡게 하니 그들이 문을 찾느라고 헤매었더라.”
천사들이 손을 내밀어 롯을 집 안으로 끌어들였습니다. 그리고 문을 닫았습니다. 그리고는 밖에서 지금 행패를 부리고 있는 소돔의 모든 대소를 막론하고 그 남자들의 눈을 어둡게 만들어버렸습니다. 만약 여러분들의 눈이 갑자기 어두워졌다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제일 먼저 해야 될 것은 눈을 다시 뜨는 것입니다. “내 눈이 왜 어두워졌는가?”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돌아봐야 합니다.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그리고 빨리 그 길을 포기해야 됩니다.
그런데 소돔 사람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이 문을 찾느라고 헤매었더라.” 지금 이 사람들이 롯의 집에 들어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문을 부수고 들어가려고 하다가 갑자기 눈이 어두워졌습니다. 그 먼 눈으로 롯의 집 문을 찾겠다고 지금 헤매고 있습니다. 뭘하려고? 그 눈먼 눈으로 남색하겠다고 말입니다. 언제까지 이 짓을 했을까요? 지쳐서 쓰러질 때까지 할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무서움입니다. 죄는 사람을 멈추게 하지 않습니다. 죄는 사람을 더 집요하게 만듭니다. 영적 눈이 멀어도, 욕망은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거부하면서도 쾌락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진리가 차단되어도 욕망은 계속 문을 두드립니다. 지쳐 쓰러질 때까지 욕망을 좇습니다.
“그들이 문을 찾느라고 헤매었더라.” 여기서 ‘헤매었더라’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육체적인 피곤으로 인하여 심신이 기진맥진해 있음을 의미합니다. 죄를 좇는 열정은 결국 사람을 탈진하게 만듭니다. 욕망을 채우기 위해 몸부림칠수록 영혼은 더 황폐해집니다. 이것이 심판의 모습입니다. 심판은 단지 불과 유황이 쏟아지는 사건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열정이 스스로를 소진시키는 것, 빛을 거부한 결과로 어둠 속에서 헤매는 것, 이것 자체가 이미 심판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 없는 열정은 결국 그 인생이 헤매다가 끝납니다. 은혜 밖에 있는 삶은 결국 탈진으로 끝납니다. 그들은 지금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한 채 자기 생명을 갉아먹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지금 본문에서 눈이 어두워졌는데도 자기 정욕을 해소하겠다고 문을 찾아 헤매는 이 사람들과 같은 형국은 아닌가요? 욕망에 눈이 어두워서 우리에게 지극히 제한된 한 번밖에 없는 이 인생의 소중한 시간들을 허망하게 갉아먹고 있는 존재들은 아닌가요? 인생은 한 번입니다. 시간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정욕과 탐욕에 눈이 멀어 우리의 생명을 갉아먹고 있다면, 우리는 이미 심판의 그림자 속에 서 있는 것입니다.
롯은 이미 밖에서 밀쳐지고 있었습니다. 문은 부서질 위기에 있었습니다. 그때 천사들이 손을 내밀어 롯을 끌어들입니다. 롯이 스스로 안으로 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천사들이 손을 내밀어서 롯을 끌어들였습니다. 그리고 문을 닫았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개입입니다. 롯이 잘해서가 아닙니다. 롯이 완전해서가 아닙니다. 그는 이미 타협했고, 소돔 성문에 앉아 있었고, 가정은 영적으로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기억하셔서 롯을 건지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의 본문은 단지 소돔의 마지막 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거부한 문명, 하나님 없이 즐기려는 문화, 은혜 없이 채우려는 인생이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문은 중립지대가 아닙니다. 안과 밖은 분명히 갈립니다. 노아의 방주 안에 있는 자는 살았고, 밖에 있는 자는 홍수에 휩쓸려 죽었습니다. 교회는 방주와 같습니다. 교회는 세상과 타협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문을 활짝 열어 세상의 문화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생명의 경계를 지키는 공동체입니다. 진리의 문을 지키는 공동체입니다. 그 문은 값없이 열려 있지만, 아무렇게나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아닙니다. 회개와 믿음으로 들어가야 하는 문입니다. 자아를 내려놓고, 죄를 인정하고,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는 자만이 들어가는 문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말씀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이리로 들어오너라!” 성령으로 우리의 어두운 눈을 열어 주십니다. “밖에서 헤매지 말고 안으로 들어와!” 그러나 결단은 우리의 몫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가정은 어디에 서 있습니까? 자녀들의 방 문 안에는 무엇이 들어와 있습니까? 우리의 마음 문 안에는 무엇이 자리 잡고 있습니까? 더 이상 미루지 마십시오. 더 이상 두 문 사이에서 헤매지 마십시오. 세상과 하나님을 동시에 붙들 수는 없습니다. 소돔과 방주를 동시에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문을 닫으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를 가두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보호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문이 닫히기 전에 들어오십시오. 그 문 안에는 참된 자유가 있고, 그 문 안에는 참된 기쁨이 있고, 그 문 안에는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소돔과 같은 이 시대의 문화 속에서 문 안에 거하는 교회, 거룩의 경계를 지키는 가정,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성도로 서겠다고 결단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