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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으로 여겼더라!
창세기 19:12-16
창세기 18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장막에 친히 찾아오셨습니다. 그곳은 교제의 자리였고, 약속의 자리였습니다. 사라에게 “내년 이맘 때에” 아들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선포되었습니다. 웃음의 약속이 울려 퍼진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19장으로 넘어오면 분위기는 급격히 달라집니다. 장막의 따뜻한 교제 대신 성문에 앉아 있는 롯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은 태양이 가장 빛나는 한 낮에 하나님 앞에 서 있었지만, 롯은 어둠이 짙어가는 저녁에 세상의 한복판에 앉아 있었습니다. 두 천사가 저녁 때 소돔에 이르렀고, 그날 밤 소돔의 타락은 극명하게 드러났습니다.
그 날 밤, 롯의 집 문 밖에는 소돔 성에 있는 노소를 막론하고 원근에서 다 몰려와 있었습니다. 그들은 남색을 하기 위해 천사들을 끌어내라고 외쳤습니다. 심지어 그들을 가로막고 있는 롯을 밀치며 문을 부수려고 합니다. 그들에게 죄악은 부끄러움이 없었고, 타락은 일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짓을 하려고 기진맥진할 때까지 문을 찾느라고 헤매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육체적 실명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이미 눈이 멀어 완전히 마비된 타락한 도시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장면은 단순한 고대 도시의 타락상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의 영적 풍경과도 너무 닮아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죄는 구조가 되었고, 타락은 문화가 되었으며, 하나님을 조롱하는 말들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악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죄는 일상이 되고, 타협은 지혜로 포장되며, 거룩은 부담으로 여겨지는 시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과감하게 이 도시를 떠나서 모두가 깊은 산 속으로 피신해야 할까요? 세상을 등지고 격리된 공간으로 들어가야 될까요?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장소가 아니라 중심입니다. 우리 중심이 헤브론의 사람이 되면 됩니다. 우리 중심이 하나님을 향해 있으면 됩니다. 아브라함이 거했던 헤브론은 단순한 지명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리, 하나님 앞에 서는 자리, 제단을 쌓는 자리였습니다. 우리의 중심이 헤브론이면, 비록 내 몸이 소돔과 고모라 한가운데 앉아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열납하시는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내 마음에 헤브론이 자리 잡고 있다면, 내가 소돔 한복판에 살고 있다고 할지라도 내가 소돔의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흑암에 찬 소돔을 밝히는 진리의 빛이 될 수 있습니다. 도시를 떠나는 것이 해결이 아닙니다. 마음의 중심을 바꾸는 것이 해결입니다. 중심이 달라지면 삶이 달라집니다.
반대로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고, 하나님을 따른다고 고백해도, 내 속에 소돔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내가 도시를 떠나 깊은 산 속 수도원에 들어간다고 할지라도 내 예배는 형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장소가 거룩하다고 해서 내 영혼이 거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 속에 소돔이 살아 있으면, 그 수도원에서도 내 영혼은 눈이 멀어 하릴없이 내 인생을 갉아먹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브라함과 롯은 남이 아닙니다. 그 두 사람은 같은 날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인 하란을 떠나서 같은 장소인 가나안 땅에 장막을 쳤습니다. 그런데도 한 사람은 중심이 헤브론으로 향했고, 한 사람은 중심에 소돔이 뿌리를 내렸습니다. 롯은 아브라함의 조카로서 아브라함을 따라다녔고,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도 불렀지만 아주 세속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이해관계를 따질 때는 전혀 신앙이 없는 사람처럼, 자기에게 은혜를 베푼 아브라함도 몰라라 하고 자기 이해만을 챙겼던 사람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은 창세기 18장에서 하나님과 뜨겁게 교제하며,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서 있는 아름다운 삶을 삽니다. 그러나 롯은 창세기 19장에서 세상의 한복판에 앉아 타락한 도시의 영향을 받으며, 형식적이고 무미건조한 인생을 사는 자기 파멸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의 가정은 영적으로 하나 되지 못하였고, 그의 아내와 딸들은 소돔화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같은 출발이었지만, 다른 중심이 다른 인생을 만들었습니다.
문제는 오늘의 한국교회 다수의 성도들이 롯의 길을 따라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극복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는 바로 교회 안에 있는 ‘롯의 길’을 추구하는 명목상의 교인들입니다. 교회는 나옵니다. 예배도 드립니다. 직분도 맡습니다. 교회 생활의 연륜도 있습니다. 교회 분위기에도 익숙합니다. 각종 의식과 행사에도 빠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삶의 중심은 여전히 세상에 있습니다.
주일에는 예배당에 앉아 있지만, 월요일이 되면 어김없이 삶의 자리로 돌아가 성문에 앉아서 신앙과는 전혀 상관없는 지극히 세속적인 가치관과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빛은 드러나지 않고, 세상의 논리가 그대로 적용됩니다. 이들이 바로 롯과 같은 길을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 한국교회의 진정한 생명성을 약화시키는 가장 큰 원인입니다. 겉으로는 교회가 존재하지만, 속으로는 소돔의 가치관이 스며들어 있는 상태, 예배는 드리지만 삶은 분리되어 있는 상태, 이것이야말로 오늘 한국교회가 깊이 씨름해야 할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우리 마음의 중심이 헤브론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힘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결심만으로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는 됩니다. 그 하나님의 영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기억나게 하십니다. 빛으로 우리가 가야 될 길을 비추어주십니다. 우리가 지금도 우리 영혼의 눈만 뜨면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무엇을 듣고, 어디로 가야 하고,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고, 무엇을 붙들어야 하는지 알게 됩니다. 문제는 정보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영혼의 눈이 감겨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말씀을 시작하면서 우리는 이 질문 앞에 서야 합니다. 나는 소돔 성 문에 앉아 있는 사람인가, 아니면 헤브론을 품고 사는 사람인가?
오늘의 본문은 그날 밤의 마지막 순간을 보여줍니다. 더 이상 토론도, 중보도, 협상도 없습니다. 이미 결정은 내려졌습니다. 이제는 실행의 시간입니다. 은혜의 문이 닫히기 직전, 마지막 경고가 올려 퍼지는 순간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단순한 옛날이야기, 한 도시의 멸망 사건이 아닙니다. 이것은 심판 직전의 밤, 하나님의 경고가 선포되고, 한 가정이 마지막 선택의 기로에 서 있는 장면입니다. 성경은 마치 숨을 죽인 채 그날의 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직 해는 떠오르지 않았고, 도시의 사람들은 깊이 잠들어 있거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일상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의 공의는 이미 움직이고 있습니다.
특별히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타락한 오늘의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려면 오늘의 본문을 통해서 붙잡아야 할 교훈은 무엇일까요? 다시 말해서, 지극히 세속화된 교인들, 이해관계에 따라 이리저리 옮겨 다닐 수 있는 지극히 편리주의적이고 실용주의 마인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 땅의 롯의 후예들이 변화되어, 정말 확신과 감격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는 거룩한 성도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첫째로, 결정된 심판 속에서도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본문 12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 사람들이 롯에게 이르되 이 외에 네게 속한 자가 또 있느냐 네 사위나 자녀나 성 중에 네게 속한 자들을 다 성 밖으로 이끌어 내라.”
이제 심판은 확정되었습니다. 더 이상 중보도, 협상도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기도는 이미 지나갔고, 소돔의 죄악은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고, 심판은 이미 확정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먼저 롯에게 묻습니다. “이 외에 네게 속한 자가 또 있느냐?”
이 질문은 단순한 정보 확인이 아닙니다. 이 질문 속에는 공의 이전에 긍휼이 있고, 심판 이전에 구원의 초청이 있습니다. 심판의 칼이 들려 있기 전에 먼저 가족을 챙기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무자비하게 쓸어버리시는 분이 아니라, 마지막 한 사람이라도 더 건져내기를 원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이미 멸망은 결정되어졌지만, 은혜의 문은 아직 닫히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긴장입니다. 공의는 확정되었으나, 자비는 여전히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롯에게 시간을 주십니다. 가족을 부르라고 하십니다. 그들을 데리고 나오라고 하십니다.
이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도 들려오는 질문입니다. “네게 속한 자가 또 있느냐?” 그렇다면 묻습니다. 내 가정은 어떻습니까? 내 자녀는 어떻습니까? 내 부모와 형제는 어떻습니까? 솔직히 우리는 내 구원만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는 교회에 나오고,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듣고 있지만, 내게 속한 자들의 영혼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은 롯에게 개인 구원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네게 속한 자들을 다 데리고 나가라!” 구원은 개인적이지만, 동시에 가정적이며 공동체적입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의 믿음을 통해 가정을 살리기를 원하십니다.
롯의 집에는 롯의 아내와 두 딸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두 천사가 롯에게 “이 외에 네게 속한 자가 또 있느냐? … 네게 속한 자들을 다 … 이끌어 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이끌어 내라’는 히브리어는 단순히 ‘나가라’는 권면이 아닙니다. 선택지를 주는 제안이 아닙니다. 명령입니다. 그리고 그 명령은 ‘나중에’가 아니라, ‘지금’입니다. “지금 밖으로 내보내라”는 강한 뉘앙스를 가진 명령형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이처럼 강하게, 단호하게 말씀하십니까? 그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시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소돔의 심판은 ‘언젠가’가 아니라, 이제 ‘곧’ 임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심판은 예고편이 길게 붙는 영화가 아닙니다. 심판은 어느 날 갑자기 임합니다. 그리고 은혜의 문은 어느 순간 닫힙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주 ‘미룸’이라는 유혹에 빠집니다. 회개도 미루고, 순종도 미루고, 결단도 미룹니다. 자녀 신앙교육도 미루고, 전도도 미루고, 끊어야 할 죄도 미룹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떤 순간에 우리에게 명령형으로 말씀하십니다. “지금 이끌어 내라!” “‘언젠가’가 아니라 ‘오늘’이다. ‘나중’이 아니라 ‘지금’이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약해진 이유는 세상이 강해서가 아닙니다. 교회가 약해진 이유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롯처럼 지체하기 때문입니다. 주일에는 예배당에 앉아 있지만, 월요일에는 소돔의 가치관 속으로 너무 자연스럽게 들어가 버리는 신앙. 구원의 확신 없이 종교 생활에만 익숙해진 신앙. 그럴 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끌어 내라!” 그 말은 곧 이렇게 들립니다. “너 자신부터 소돔에서 나와라!” 내가 나오지 않는데, 어떻게 가정을 이끌어 냅니까? 내 중심에 소돔이 살아 있는데, 어떻게 자녀를 건질 수 있습니까? 내 예배가 형식인데, 어떻게 누군가를 살릴 수 있습니까? 먼저 내가 나와야 합니다. 먼저 내가 깨어야 합니다. 먼저 내가 결단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결단은 느슨한 다짐이 아닙니다. 명령에 대한 즉각적인 응답입니다.
명령은 우리를 부담 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명령은 우리를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긴급 구조 신호입니다. 불난 집에서 “천천히 나와도 됩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불난 집에서는 소리칩니다. “지금 나와! 당장 나와! 빨리 나오라니까!” 그 외침이 거칠어 보여도, 그것이 생명을 살립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끌어 내라!” 이 명령의 긴박한 은혜가 오늘 우리 가정과 교회를 살리고, 이 시대 속에서 구별된 성도로 서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본문 13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에 대한 부르짖음이 여호와 앞에 크므로 여호와께서 이곳을 멸하시려고 우리를 보내셨나니 우리가 멸하리라.”
왜 지금 빨리 이끌어 내라고 합니까? 지금 하나님께서 심판을 시작하신다는 것입니다. 심판하시려고 우리를 보내셨기 때문에 이제 곧 심판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빨리 내보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판의 이유가 그들에 대한 부르짖음이 여호와 앞에 크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어 원문을 그대로 직역하면, “그들에 대한 부르짖음”이 아니라, “그들의 부르짖음”입니다. 그들의 부르짖음이 크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의 부르짖음은 도대체 누구의 부르짖음이고, 어떤 부르짖음이겠습니까? ‘부르짖음’이라는 히브리어 ‘차아크’라는 단어에는 두 가지 뜻이 있는데, 첫째는 ‘원성’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압제 당하는 자, 고통당하는 자들의 원성이 하늘에 울려 퍼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소돔에서 횡포를 부리는 자들에 의해서 억압받고 고통받는 자들의 원성이 하늘에 사무쳐서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었을 때 롯의 가족 이외에는 구원받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압제 당하는 사람들의 원성 때문에 그 성을 심판하셨다면, 압제 당하는 자는 지켜주시고 구원해 주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단 한 사람도 구원받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거기에는 이 소리는 원성의 소리가 아니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차아크’라는 히브리어에는 두 번째 뜻이 있는데, 그것은 죄와 악이 가득 섞인 시끄럽고 잡다한 더러운 소리를 의미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광란의 소리입니다. 그러니까 소돔에서 인간들이 죄짓는 소리가 하늘을 울렸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소돔 사람들이 소리를 질러대면서 죄를 지었던, 아니면 은밀하게 아무도 모르게 들판에서 죄를 지었던, 그 죄 소리가 하늘에 울려 퍼졌습니다. 내가 만약에 남이 보지 않는다고 해서 은밀한 곳에서 죄를 지으면서 이 죄 소리가 하나님께 울려 퍼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하나님을 믿지도 않는 사람입니다. 믿으면서도 그런 소리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어떤 죄이든지 죄의 소리는 하늘을 때립니다.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아는 순간부터 우리의 삶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곳을 멸하시려고 우리를 보내셨나니 우리가 멸하리라.” 여기에 ‘멸한다’는 동사가 두 번이나 반복됩니다. 히브리어에서 같은 말이 한 문장에 두 번 반복되면, 그것은 강조하는 것입니다. 사실 천사가 이렇게 말해도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서 멸하러 왔노라.” 아니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켜서 멸하실 거야.” 이러면 됩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이곳을 멸하시려고 우리를 보내셨나니 우리가 멸하리라.”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심판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판 속에서도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둘째로, 주님의 말씀에 대해 좀 더 진지하게 반응할 줄 알아야 합니다.
본문 14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
천사의 말을 듣자마자 롯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사위가 될 사람들에게 가서 “너희는 일어나 이곳에서 떠나라”고 합니다. ‘떠나라’고 하는 것은 같이 가자는 말입니다. 그 말을 제일 먼저 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의 울부짖음이 크기 때문에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내가 보러 간다고만 말씀하셨지, “내가 심판한다, 내가 멸한다”는 동사는 한 번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소돔의 주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소돔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헤브론에 사는 아브라함이 소돔을 위해서 기도한다고 하면, 두 천사가 정확한 동사로 ‘멸한다’라고 선언한 이상 롯은 자기가 살고 있는 소돔을 위해서 가장 먼저 하나님 앞에 무릎부터 꿇어야 됩니다. 기도부터 해야 합니다. 그런데 롯은 기도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기도만이 하나님과 우리를 긴밀하게 엮어주는 끈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데 그 하나님을 그저 피상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긴밀한 관계가 중요합니다. 기도를 통해서 그 긴밀함이 맺어진 사람만이 내 삶 속에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늘 의식합니다. 기도만이 우리의 삶을 바로 잡아주는 하나님의 힘이요, 능력입니다. 그런데 롯은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천사의 말을 듣고 위기감을 느낀 롯이 급히 사위가 될 사람들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얘들아, 하나님께서 이 성을 심판하신단다. 얼른 이곳에서 일어나서 같이 나가자”라고 설득했습니다. 그래도 롯은 사위들과 대화를 하다가 설득되지 않으니까, 장인의 권위를 가지고 사위들에게 강한 명령조로 말합니다. “너희는 일어나 이곳에서 떠나라!” ‘일어나라’는 말은 더 이상 머뭇거리지 말고 과감히 일어나라는 말입니다.
그랬더니 사위들은 어떻게 받아들였다고 했습니까? “농담으로 여겼더라.” 이 한 문장은 참으로 비극적인 문장입니다. 심판은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동이 트면 불과 유황이 하늘에서 쏟아질 것입니다. 몇 시간 후면 이 화려한 도시, 이 안정된 삶의 터전, 이 익숙한 거리들이 한순간에 사라질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긴박한 순간에 사위들은 웃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말로 ‘농담으로 여겼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비웃었다’는 말입니다. “아버님, 혹시 오늘 뭐 잘못 드셨습니까?” 롯이 단호하게 명령했음에도 불구하고, 롯의 사위들은 장인의 말을 계속 비웃으며, 심지어는 장인을 조롱하기까지 했습니다. 설마 망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아무 일 없었는데, 왜 갑자기 멸망이 오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노아의 홍수 때를 생각해 봅니다. 노아가 멀쩡한 대낮에 방주를 지으니까, 세상 사람들은 다 미쳤다고 비웃었습니다. 예, 세상 사람들은 얼마든지 비웃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노아의 아내와 노아의 자식들과 며느리들이 노아를 비웃었습니까? 아닙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당신 남편 미쳤다. 너희 아버지 제정신이 아니야”라고 비웃고 조롱해도, 노아의 아내와 세 아들과 며느리들은 믿었습니다. 노아의 말이 권위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소돔에 사는 롯의 말은 자기 혈족에게도 전혀 권위가 없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까? 먼저는 이것이 죄에 무감각해진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심판이 코앞에 있어도 위기의식을 느끼지 못합니다. 보십시오. 현실은 너무 평온해 보입니다. 도시는 여전히 돌아가고 있습니다. 상점은 문을 열고, 사람들은 결혼을 준비하고, 내일의 장사를 계산하고, 미래의 계획들을 세우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징조가 없으니 경고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사위들에게는 장인 롯의 말이 현실감 없는 종교적 과장처럼 들렸을 것입니다. 롯은 오랫동안 소돔 성문에 앉아 있었습니다. 사위들에게 비춰진 그의 삶이 세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평소에 적당하게 타협하며 살던 장인이 갑자기 찾아와서 심판을 말하니 더더욱 설득력이 없었을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말씀을 전하는 사람의 삶과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 자체는 진리였습니다. 그들이 믿지 않았다고 해서 심판이 취소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심판의 날이 오기 전에, 은혜의 문이 닫히기 전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구원은 우연히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기도와 눈물의 본이 되는 삶을 통해 흘러갑니다. 내가 먼저 깨어 있어야 가정을 깨울 수 있습니다. 내가 먼저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자녀에게 길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농담이 아닙니다. 복음은 선택과목이 아닙니다. 경고는 협박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겁주기 위해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살리기 위해 말씀하십니다. 웃으면서 던지는 가벼운 말이 아니라, 눈물로 토해내는 아버지의 음성입니다. 우리가 가볍게 여기는 그 한 마디 말씀이, 사실은 우리를 건지기 위한 마지막 외침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셋째로, 주님의 강권하심이 은혜인 줄 알아야 합니다.
본문 15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동틀 때에 천사가 롯을 재촉하여 이르되 일어나 여기 있는 네 아내와 두 딸을 이끌어 내라 이 성의 죄악 중에 함께 멸망할까 하노라.”
‘동틀 때에’, 지금 해가 떠오르려고 하는데, 천사가 롯을 재촉했습니다. 여기에서 ‘재촉하여’라는 말은 단순히 권면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뒤에서 등을 떠미는 듯한, 더 이상 머물 수 없도록 몰아붙이는 긴박함이 담겨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미적거리는 것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과단성 있게 민첩하게 움직여야 할 때인데, 미적거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천사가 재촉했습니다. “너, 잘못하면 여기에서 함께 멸망한다. 빨리 네 가족들을 데리고 나가라.”
이미 하늘의 판결은 내려졌습니다. 소돔의 죄악은 하늘에 상달되었고, 하나님의 공의는 집행 직전에 와 있습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지체할 여유가 없습니다. 이 새벽은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시작이지만, 소돔에게는 마지막 유예의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감정이 아니라 거룩한 결정이며, 이미 확정된 선언입니다. 그러므로 이 재촉은 분노의 표현이 아니라, 멸망 직전에서 한 가정을 건져내시려는 하나님의 마지막 은혜의 손길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16절에서 우리는 충격적인 모습을 보게 됩니다. 본문 16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그 사람들이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에 두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자비를 더하심이었더라.”
“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이 한 문장이 얼마나 무거운지 모릅니다. 성경은 길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변명도 붙이지 않습니다. 단 한마디입니다. “지체하매.” 왜입니까? 미련 때문입니다. 소돔에서 쌓아온 세월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재산이 있었고, 인간관계가 있었고, 사회적 지위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두고 가기가 아쉬운 것입니다. 미련이 남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천사의 말에 롯이 머리로는 이해를 했습니다. 이해를 했으니까 나가서 사위들에게 “빨리 나가자”라고 한 것입니다. 머리로는 이해를 했습니다. 그런데 몸은 안 움직입니다. 왜요? 마음이 안 따르는 겁니다. 머리로는 이해를 했는데, 지금 이 많은 것들을 놓고 가려고 하니 마음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니 몸도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마음까지의 여행”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깊이 새겨볼 말입니다. 여러분이 이 방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머리로 다 이해를 해도, 그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새겨지고, 여러분의 마음이 동하지 않으면 그것 다 필요 없습니다. 왜? 소돔에서 지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생명의 시간은 지금도 1시간, 2시간 흘러가는데, 소돔에서 미적거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소돔의 타락은 밤새 드러났습니다. 천사들이 그들의 눈을 어둡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이 있었습니다. 하늘의 판결은 확정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롯은 지체합니다. 여기에서 ‘지체하다’라는 말 속에는 머뭇거림, 망설임, 마음이 갈라진 상태가 담겨 있습니다. 몸은 움직여야 하는데, 마음은 아직 거기에 묶여 있는 상태입니다. 발은 성 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시선은 여전히 성 안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롯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인간의 영적 실상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설교를 듣습니다. 경고를 듣습니다. 성경을 읽습니다. 심판의 경고를 압니다. 죄의 결과를 압니다. 그런데도 지체합니다. 회개를 내일로 미룹니다. 결단을 다음 기회로 넘깁니다. 끊어야 할 습관을 붙들고, 떠나야 할 관계를 정리하지 못하고, 타협해서는 안 될 자리에서 한 발만 더 있으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직 미련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 계산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직 손해를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리의 현실을 더 크게 보고, 하나님의 약속보다 눈앞의 안정을 더 붙듭니다.
어쩌면 롯의 눈에는 소돔이 여전히 기회의 땅이었을는지 모릅니다. 그는 아브라함을 떠나 요단 들을 바라보며 선택했던 사람입니다. 물이 넉넉하고, 목초지가 풍성하고, 경제적으로 유리해 보였던 땅을 택했던 사람입니다. 그 선택의 연장선상에서 지금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오랜 세월 투자한 삶이 거기에 있습니다. 피와 땀으로 쌓아올린 재산이 거기에 있습니다. 성문에 앉을 정도로 한 도시의 지도층에 속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과 투자가 있었겠습니까?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했겠습니까?
그런데 하루아침에 그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나가야 합니다. 집도, 재산도, 명예도, 인간관계도 다 내려놓고 나가야 합니다. 머리로는 이해를 합니다. 심판이 온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래서 나가야 한다는 것도 너무 잘 압니다. 그러나 마음은 떨어지지 않습니다. 익숙함이 붙잡고, 체면이 붙잡고, 손해에 대한 두려움이 붙잡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체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단지 롯의 이야기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 좀 더 솔직해지십시다. 하나님께서 떠나라고 하시는 그 자리에서 우리는 계산기를 두드립니다. 손익을 따집니다. 체면을 생각합니다. 주변의 시선을 의식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조금만 더 있다가.” 바로 그 ‘조금만’이 우리를 멸망 가까이에 붙들어 두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그 다음을 보십시오. “그 사람들이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에 두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자비를 더하심이었더라.”
롯이 결단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롯이 준비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자비를 더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자비’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하나님의 긍휼, 불쌍히 여기심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자비를 더하심이었더라”를 히브리어로 직역하면, “그의 위에 있는 여호와의 자비로 말미암아”입니다. 따라서 롯이 강권적으로 구원되어질 수 있었던 것은 이 순간뿐만 아니라, 처음부터 롯 위에 하나님의 자비가 지속적으로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손을 잡아’라는 표현은 단순한 인내가 아니라, 붙들어 끌어내는 강한 동작입니다. 그러니까 롯이 스스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손에 붙들려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강권하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강권하심을 부담스러워합니다. 내 계획을 막으실 때, 내가 붙들고 있는 것을 흔드실 때, 관계를 끊으실 때, 실패를 경험하게 하실 때, 우리는 묻습니다. “왜 이렇게까지 하십니까?” 그러나 오늘의 본문은 말합니다. 그 강권하심이 은혜라고 말입니다. 붙들어 주지 않으셨다면, 롯은 소돔에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강권하여 끌어내지 않으셨다면, 롯은 소돔 사람들과 함께 불과 유황에 타버렸을 것입니다. 강제라도 끌어내셨기에 살았습니다.
돌이켜 보면, 우리의 인생도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사건이 우리를 그 자리에서 밀어냈습니다. 어떤 실패가 우리를 무릎 꿇게 했습니다. 어떤 질병이 우리의 교만을 꺾었습니다. 어떤 관계의 단절이 우리를 말씀 앞으로 나오게 했습니다. 그때는 아팠지만, 지나고 나니 압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비였다는 것을.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주님의 손이 내 인생을 흔드실 때, 그것을 거부하지 마십시오. 회개의 자리로 이끌어내실 때, 그 손을 뿌리치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의 이 말씀은 단순한 옛 이야기의 교훈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우리는 소돔을 정죄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는 혹시 말씀을 농담처럼 듣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회개를 미루며 지체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몸은 교회에 있으면서도 마음은 여전히 세상을 향해 미련을 두고 있지는 않은가?
잊지 마십시오. 심판은 갑자기 임합니다. 그러나 은혜도 지금 열려 있습니다. 문이 닫히기 전에 나와야 합니다. 재촉하실 때에 순종해야 합니다. 오늘 이 예배가 감동으로만 끝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이 자리가 결단의 자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으십시다. 세상과 구별된 삶으로 응답하십시다. 타협을 끊어내십시다. 미련을 내려놓으십시다. 지체하지 마십시다. 이 시대가 소돔과 같을지라도, 교회는 소돔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이 농담으로 여길지라도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처럼 붙들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은혜의 시간이 지나가기 전에, 영혼의 밤이 지나가기 전에, 구원의 문이 닫히기 전에 우리의 심령이 깨어 일어나 이 시대 가운데 거룩하고 구별된 성도로 굳게 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