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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보존하라!
창세기 19:17-22
우리는 한 달 째 창세기 19장의 소돔 성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런데 ‘소돔’이라는 말은 영어로 ‘소도미’(sodomy)라고 해서, ‘남색’, 곧 동성 간의 성행위, 혹은 인간과 동물 사이에서 행하여지는 ‘수간’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sodomy’라는 단어는 단순한 성적 일탈을 넘어 하나님께서 창조 때에 세우신 남자와 여자의 질서를 거스르는 행위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소돔은 단지 옛날 지도 위에 있었던 한 도시가 아닙니다. 소돔이 멸망당하여 역사에서 사라졌음에도, 그 도시의 이름이 오늘날까지 단어가 되어 남아 있다는 사실은, 그 도시의 타락이 얼마나 극심했고, 얼마나 대표적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소돔은 죄가 문명이 되고, 타락이 문화가 되고, 부끄러움이 자랑이 되고, 하나님의 질서를 거부하는 것이 자유로 포장되는 시대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런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아예 타락한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채 현실을 등지고 산 속으로 숨어 들어가 살아야 할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도피자로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영광을 보이신 후, 제자들을 데리고 다시 산 아래로 내려오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교회를 영광의 체험 속에만 머물게 하지 않으시고 병든 아이가 있고, 귀신 들린 자가 있고, 갈등과 눈물이 있는 세상 한복판으로 다시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 한가운데서 빛과 소금으로 부르셨습니다. 빛은 어두운 곳에 있어야 빛이고, 소금은 썩어 가는 자리 속에 들어가야 역할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장소가 아니라, 마음의 중심입니다. 신앙은 결국 중심의 싸움입니다. 겉모습이 아니라 중심, 형식이 아니라 방향, 말이 아니라 애착의 문제입니다. 지금 우리의 마음이 붙들고 있는 것이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아직도 소돔의 어떤 조각입니까? 오늘 이 질문 앞에 정직하게 서지 않으면, 우리는 성 밖으로 끌려나와 있으면서도 마음은 여전히 성 안에 남아 있는 롯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천사들로부터 소돔 성을 멸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롯은 사위들에게 가서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곳에서 떠나라.” 그런데 사위들은 장인의 그 말을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이것이 소돔의 영적 상태입니다. 심판의 경고가 농담처럼 들리는 시대, 하나님의 말씀이 가벼운 이야기처럼 취급되는 시대, 영원한 문제가 현실의 유머보다 가볍게 여겨지는 시대, 그것이 바로 소돔의 영적 공기였습니다.
롯의 사위들이 장인의 말을 농담으로 여긴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그 동안 롯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고, 입술로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지만, 실제 그의 삶은 적당하게 타협하고, 적당하게 어울리고, 적당하게 소돔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며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그의 말과 삶 사이에는 간격이 있었습니다. 그의 신앙고백과 실제 선택 사이에는 확연한 틈이 있었습니다. 결국 삶이 뒷받침되지 않는 경고는 공허한 소리로 들립니다. 거룩이 뿌리내리지 않은 입술의 외침은 설득력을 잃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은 단지 롯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교회가 심판을 말하고, 거룩을 말하고, 회개를 말하지만, 오늘의 세상은 그것을 진지하게 듣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우리의 삶 속에서 그 말의 무게를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과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살면서 세상을 향해 회개를 외칠 때, 세상은 그것을 농담처럼 듣습니다. 우리가 돈을 대하는 방식이 세상과 다르지 않고, 성공을 추구하는 방식이 세상과 다르지 않고, 관계를 맺는 방식이 세상과 다르지 않으면서 ‘거룩’을 말하면, 세상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우리와 무엇이 다릅니까?”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의 말은 힘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러므로 이 장면은 우리에게 날카롭게 묻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말에는 무게가 있습니까? 우리의 삶에는 우리가 선포하는 복음을 증명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예배당 안에서만 하나님을 경외하고, 세상 속에서는 다른 기준으로 살고 있지 않습니까? 만일 우리의 가정과 직장과 관계 속에서 거룩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의 경고는 공중에 흩어질 뿐입니다. 삶으로 증명되지 않는 메시지는 메아리로 사라질 뿐입니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은 그런 우리를 보고 조롱하고 비웃을 것입니다.
심판의 시대에 가장 무서운 일은 불과 유황이 아닙니다. 정말 가장 무서운 일은 말씀이 가볍게 들리는 것입니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이 어느 개그맨의 농담처럼 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경고가 아니라 하나의 의견처럼 들리는 것, 복음이 절박한 소식이 아니라 여러 선택지 중 하나처럼 여겨지는 것, 그것이 진짜 위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농담처럼 들리는 영적 무감각, 거룩이 과장처럼 들리는 시대적 냉소, 그것이 바로 소돔의 진짜 멸망이었습니다. 불과 유황은 그 결과였을 뿐입니다.
16절에서 성경은 아주 짧고도 무겁게 기록합니다. “롯이 지체하매.” 이 한 문장에 롯의 영적 상태가 다 들어 있습니다. 소돔은 이미 심판이 선고되었습니다. 하늘에서는 불과 유황이 준비되어 있고, 심판의 시간표는 멈추지 않고 흘러가고 있습니다. 소돔은 이제 곧 심판을 받아 사라질 것입니다. 그런데도 롯은 지체를 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말로 ‘지체하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단순히 천천히 움직였다는 뜻이 아닙니다. 떠나야 할 것을 알면서도 붙들고 있는 상태입니다. 결단해야 할 순간에 머뭇거리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분명한데, 마음이 따라가지 않는 상태입니다.
롯이 왜 지체를 했을까요? 소돔에 남겨둔 것들 때문입니다. 그가 쌓아올린 삶의 자리, 재산, 인간관계, 그 도시에서 얻은 사회적 위치 ….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계산과 투자와 타협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성을 심판하신다고 하니, 그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다 무너집니다. 머리로는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마음은 아직 그 도시에 붙어 있었습니다. 어쩌면 사위들이 자신의 말을 농담으로 여겼듯이, 롯의 마음속에도 “설마 정말 멸망하겠는가?”하는 안일함이 있었을는지 모릅니다. 이것이 바로 지체의 본질입니다. 지체하는 것은 행동의 문제가 아니라, 애착의 문제입니다. 발이 묶인 것이 아니라, 마음이 묶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롯을 쉽게 정죄하지만, 실은 그 안에서 우리의 모습을 봅니다. 롯만 미적거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그렇습니다. 말씀으로는 떠나야 할 줄 압니다. 설교를 들을 때는 결단해야 할 줄 압니다. 기도할 때는 끊어야 할 죄가 무엇인지 분명히 압니다. 그런데 예배당 문을 나서는 순간, 다시 계산이 시작됩니다. “조금만 더 있다가, 이번 일만 정리하고 ….” 그렇게 우리는 지체합니다. 떠나야 할 소돔을 붙들고, 잠시 후면 불타 없어질 것을 품에 안고 머뭇거립니다. 지체는 단순한 느림이 아닙니다. 지체는 마음이 아직 소돔에 남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롯을 향해 묻는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 던져야 합니다. “나는 지금 무엇 때문에 지체하고 있는가?”
그런데 바로 그 지체의 순간에 놀라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에 두니.” 여기에서 인도했다는 것은, 단순히 손을 잡고 “자, 이리로 오세요”라고 하면서 안내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손을 낚아채듯이 붙들어 성 밖으로 끌어낸 것입니다. 스스로 걸어 나오지 못하니까, 손을 낚아채서 강권하여 끌어낸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구조 장면이 아닙니다. 이것은 심판의 한복판에서 번쩍이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불과 유황이 임박한 그 자리에서, 멸망이 코앞에 다가온 그 순간에 인간의 결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가 먼저 움직이고 있습니다. 롯이 잘 나서가 아닙니다. 롯이 누구보다 의로워서가 아닙니다. 롯이 믿음이 커서가 아닙니다. 롯이 결단이 빨라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지체했습니다. 머뭇거렸습니다. 계산하고 있었고,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붙드셨습니다. 롯이 하나님을 붙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롯을 붙드셨습니다. 롯이 손을 내민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손을 내미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구원의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봅니다. 구원은 인간의 결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도적인 은혜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롯이 지체할 때 그대로 두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의 망설임은 그의 무덤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의 계산은 그의 종말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는 인간의 연약함보다 더 강했습니다. 하나님의 손은 인간의 머뭇거림보다 더 신속했습니다. 이것이 은혜요, 구원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붙들고 살아야 할 복음의 능력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의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결코 완전한 결단으로 주님께 나온 사람들이 아닙니다. 눈물로 단번에 세상을 끊어내고, 흔들림 없이 주님만을 붙들었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수없이 망설였고, 수없이 뒤돌아보았고, 여전히 한 손에는 세상을 붙들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주일에는 은혜를 사모하지만, 월요일이 되면 다시 소돔의 계산법으로 살아가던 연약한 존재였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오늘 여기에 서 있습니다.
왜 입니까? 우리가 강해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결단이 빨라서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 손을 낚아채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를 끌어내셨기 때문입니다. 피 흘리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그냥 두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구원은 우리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집요한 사랑의 결과입니다. 우리가 죄에서 스스로 걸어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죄의 자리에서 우리를 번쩍 들어 올리셨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냥 두셨다면, 우리는 죄와 함께 멸망했을 것입니다. 붙들어 끌어내셨기 때문에 살았습니다. 흔들어 깨우셨기 때문에 살았습니다. 길을 막으셨기 때문에 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오직 은혜입니다. 오직 자비입니다.
“주님, 제 손을 더 세게 꼭 붙잡아 주십시오. 제가 놓치지 않겠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기도요,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본문 17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 사람들이 그들을 밖으로 이끌어 낸 후에 이르되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물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
롯은 소돔에 남겨져 있는 세상의 것들 때문에 미적거리고 지체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통해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고 하십니다. 지금 롯의 관심은 소돔에 남겨둔 것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생명입니다. 재산이 아닙니다. 집이 아닙니다. 사회적 지위가 아닙니다. 오직 생명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에 그 무엇으로 생명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온 천하를 얻고도 생명을 잃으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은 생명입니다. 육신의 생명만이 아니라, 하나님과 연결된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생명을 수단으로 삼고, 세상을 목적으로 삼습니다. 영혼을 메마르게 하면서도 세상의 박수를 얻으려고 합니다. 그렇게 매일매일 생명을 갉아먹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 생명을 보존하라.” 이 말은 단순히 “죽지 않게 조심해라”가 아닙니다. 죄의 자리에서 즉시 탈출하라는 것입니다. 멸망의 자리에서 지체하지 말고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심판의 불길이 떨어지기 전에 몸을 빼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생명’은 단순한 육체적 호흡이 아닙니다. 단지 심장이 뛰고 숨이 붙어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적 사고에서 ‘생명’은 언제나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의 존재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을 때 그것이 생명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번영은 생명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떠난 성공도 생명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떠난 생존은 그저 연명일 뿐입니다.
소돔 안에서도 롯은 살아 있었습니다. 숨 쉬고 있었고, 재산도 있었고, 지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 그 도시는 이미 죽은 도시였습니다. 불이 떨어지기 전이었지만, 영적으로는 이미 사망이 선고된 상태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생명’은 단순히 불을 피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존재로 옮겨지는 문제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롯에게 단순히 “살아남으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환경에서 빠져나와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리로 옮기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이것이 참된 생명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생명으로 회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특별히 본문 17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생명을 보존하는 방법으로 세 가지의 구체적인 명령을 하십니다. 이것은 단순한 행동 지침이 아니라, 구원의 방향을 분명히 하는 영적 단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어떤 결단이 필요할까요?
첫째는,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히브리어로 직역하면, “너의 뒤에 더 이상 관심을 보이지 말라”는 뜻입니다. 단순히 고개를 돌리지 말라는 물리적 동작의 문제가 아닙니다. 마음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미련을 남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소돔은 멸망하는 자리입니다. 거기에 마음을 두면 함께 멸망합니다. 그런데 롯은 이미 소돔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물이 넉넉한 요단 들을 보고 선택했습니다. 그러다 점점 장막을 소돔 성 가까이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결국 소돔 성의 성문에 앉았습니다. 그 사회의 중심에 들어갔습니다. 세상의 구조 속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도시를 심판하신다고 하니, 그의 마음은 아직도 그곳에 묶여 있습니다. 그래서 미적거렸습니다. 그가 지체했던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뒤에 남겨진 것들에 대한 미련 때문입니다. 아직도 그 달콤함을 기억하고, 아직도 그 안전과 편안함을 아까워하는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생명의 길은 과거를 돌아보는 사람에게 열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 뒤에 관심을 보이지 말라.” 소돔은 멸망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그 멸망의 자리를 아름답게 기억하고, 거기에 마음을 두고 그리워한다면 생명의 길을 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앞을 향하여 나아가야 하는데, 앞보다도 뒤에 관심이 많으면 결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광야를 지날 때, “마실 물이 없다, 먹을 것이 없다”고 불평할 때마다 그들의 관심은 뒤쪽이었습니다. 애굽이었습니다. 자꾸 뒤에 관심을 두다 보면, 그 뒤가 훨씬 부풀려져서 미화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인생의 모든 것인 것처럼 착각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가 좋았다.” 여러분, 그 사람들은 애굽에서 자유인이 아니라, 노예들이었습니다. 노예생활이라는 것은 죽지 못해 생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꾸 뒤를 돌아보니까 애굽이 지상낙원이었던 것 같고, 그때가 좋았다고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몸은 애굽을 빠져 나왔지만, 그들의 중심은 여전히 뒤에 관심을 갖다가 결국 그들은 모두가 가나안에 못 들어갔습니다. 다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생명은 앞을 향해 달려가는 자에게만 주어집니다. 우리가 새로운 헤브론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소돔의 삶을 뒤돌아보지 말아야 됩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다”(눅 9:62)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번째 명령은, “들에 머물지 말라”고 하십니다.
여기에서 들은 단순한 평지가 아닙니다. 요단 골짜기의 비옥한 둥근 지역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어로 직역하면, “요단의 둥근 지역에 서 있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곳은 가나안 땅에서 살던 아브라함과 롯이 서로 가축이 많아져서 헤어질 때, 롯이 처음 선택했던 곳입니다. 그때 롯이 요단 들을 바라보면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동산과 애굽은 정반대입니다. 여호와의 동산이라면 에덴이요, 하나님 나라의 모형입니다. 반대로 애굽은 죄와 사망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롯에게 이 구별이 흐려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롯이 요단 들을 선택할 때부터 세상의 욕망으로 거기를 향해 갔던 것입니다. 그곳은 눈에 보기 좋고, 물이 넉넉하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땅이었습니다. 그의 계산과 판단이 시작된 자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곳에 머물러 있지 말라.” 단지 소돔 성에서 빠져 나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가다가 요단 들의 비옥한 땅을 보더라도, 그곳에서 멈춰 서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요? 거기에서 멈춰 선다는 것은 여전히 소돔의 영향권 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성을 떠났다고 다 떠난 것이 아닙니다. 몸은 나왔는데, 마음이 아직 들에 머물러 서 있으면, 우리는 여전히 소돔 안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소돔을 비판하면서도, 요단 들의 풍요로움은 포기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신앙은 붙들고 싶고, 세상의 안전장치도 붙들고 싶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곳에 서 있지 말라.”
들은 소돔도 아니고, 산도 아닌 중간지대입니다. 완전히 하나님께로 가지도 않고, 완전히 세상을 떠나지도 않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회색지대를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회색지대는 오래 버틸 수 있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적당히 신앙적이고, 적당히 세속적인 상태는 결국 다시 소돔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처음에는 잠시 숨을 고르는 자리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영적 무감각이 자리 잡습니다. 예배는 드리지만 회개는 없고, 기도는 하지만 결단은 없고, 말씀은 듣지만 삶은 변하지 않는 상태가 됩니다. 그러므로 중간지대는 안전지대가 아니라 가장 위험한 자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애매한 곳에 두시지 않고, 분명한 방향을 요구하십니다.
세 번째 명령은, “산으로 도망하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피하라는 것이 아니라, 목적지를 분명히 하라는 것입니다. “산으로 도망하라.” 여기서 산은 하나님의 임재와 계시의 장소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기 위해 올라갔던 곳이 모리아 산이었습니다. 모세가 율법을 받았던 곳이 시내산이었습니다. 엘리야가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었던 곳이 호렙산이었습니다. 그래서 산은 언제나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였습니다. 낮은 곳, 사람들로 붐비는 성읍이 아니라, 하나님만 바라볼 수 있는 자리, 세상의 소음이 차단되는 자리, 그곳이 바로 산입니다.
소돔은 낮은 평지에 있었습니다. 물이 넉넉하고, 상업이 활발하고, 문화가 번성한 곳이었습니다. 롯은 그 비옥함을 보고 요단 들을 선택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유익을 따라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올라가라, 산으로 가라.” 이것은 단순한 도피가 아닙니다. 타락한 문명에서 벗어나 거룩의 자리로 올라가라는 명령입니다. 세속적 안정에서 벗어나 하나님 의존의 자리로 올라가라는 초청입니다.
물론 산은 힘든 곳입니다. 오르막입니다. 숨이 차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그곳은 안전한 자리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예비하신 피난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소돔 성 안에서 구원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들판에서도 머물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반드시 산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소돔에서 멀어지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하나님께로 옮겨가야 합니다. 죄를 끊는 것만으로 끝나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을 붙드는 신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산으로 도망하라는 것은 완전한 분리와 분명한 결단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롯에게 “조금 떨어져 있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적당히 안전한 거리”를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산으로, 하나님께로, 더 높은 자리로 올라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왜입니까? 타협은 반드시 다시 붙잡기 때문입니다. 죄는 한 번 허락하면 다시 문을 두드리고, 한 번 눈감아 주면 다시 자리를 넓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애매한 거리를 허락하지 않으시고, 분명한 방향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중간지대에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죄와 거룩 사이에 서 있을 수 없습니다. 생명은 아래로 내려가는 데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위를 향해 달려갈 때 얻어집니다. 중간 지대는 없습니다. 어중간한 신앙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 시대에도 하나님은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산으로 도망하라!” 이것은 세상을 떠나라는 말이 아닙니다. 중심을 옮기라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중심을, 예배의 중심을 하나님께로 올려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솔직히 오늘 우리의 삶은 너무 평지에 익숙해져 있지 않습니까? 편리함, 안정, 타협, 적당함에 안주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더 높은 자리로 부르십니다. 거룩의 산으로, 기도의 산으로, 말씀의 산으로 올라오라고 하십니다.
본문 17절은 단순한 행동 지침이 아닙니다. 이것은 미련과 중간지대를 단호하게 끊어버리라는 영적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롯에게 물리적인 이동만을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마음의 방향 전환을 요구하셨습니다. 신앙은 늘 여기서 갈립니다. 거대한 사건에서 갈리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이런 선택의 자리에서 갈립니다. 미련을 남기느냐, 과감히 끊느냐? 중간에 머무르며 스스로를 위로하느냐, 산을 향해 숨이 차도 올라가느냐? 잊지 마십시오. 결국 신앙은 방향의 문제입니다. 소돔을 향해 서 있느냐, 산을 향해 서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본문 18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롯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 주여 그리 마옵소서.”
“내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한 마디 속에 롯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이미 은혜로 끌려 나왔습니다. 이미 불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 주저합니다. 겉으로는 “내 주여”라고 부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따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산으로 도망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는데, 롯은 사실상 거절합니다.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 성이 멸망할 테니 산으로 도망을 가라고 하면, 그 말대로 하면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자기는 산으로 도망을 못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19절에 나오는데,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주의 종이 주께 은혜를 입었고 주께서 큰 인자를 내게 베푸사 내 생명을 구원하시오나 내가 도망하여 산에까지 갈 수 없나이다 두렵건대 재앙을 만나 죽을까 하나이다.”
롯은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롯이 두려워했다는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은 누구나 두려워합니다. 문제는 그 두려움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 명령은 너무나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롯은 그 말씀 앞에서 순종으로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계산합니다. 따져 봅니다.
어쩌면 그는 하란을 떠나 가나안에 들어왔을 때를 기억했을 것입니다. 원주민들의 박해와 차별, 생존의 위협 속에서 결국 아브라함과 함께 산지로 올라가야 했던 시간들. 그리고 밀리고 밀려서 남쪽 네게브 사막에까지 내려가야만 했던 일들. 그 산에서의 불편함과 불안함이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내가 산으로 도망하여 재앙을 피하지 못할까 두려워하나이다.” 롯의 이 말 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마음이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보다 자신의 계산이 앞서는 것, 하나님의 약속보다 자신의 판단을 더 신뢰하는 것, 이것이 롯의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온전히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하실 때 떠났습니다. “헤브론에 거하라”고 하시면 거했고, 서라면 섰습니다. 왜입니까? 그는 엘 샤다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충분자 하나님은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준으로 판단했습니다.
그렇지만 롯은 달랐습니다. 그의 삶은 늘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판단이었습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요단 들을 선택했고, 계산을 따라 소돔 가까이로 장막을 옮겼고, 결국 성문에 앉는 자리에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충분자이신 것을 못 믿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완전한 분리를 명령하셨음에도 롯은 현실적인 타협을 제안합니다.
본문 20절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보소서 저 성읍은 도망하기에 가깝고 작기도 하오니 나를 그 곳으로 도망하게 하소서 이는 작은 성읍이 아니니이까 내 생명이 보존되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산으로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선택 사항이 아니었습니다. 생명을 위한 절대 명령이었습니다. 그런데 롯은 그 말씀을 곧장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의 눈에 산은 멀어 보였습니다. 높아 보였습니다. 험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거기까지 가는 동안 자신이 안전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습니다.
여기에서 롯의 계산이 다시 시작됩니다. “저 산은 너무 멀다.” “혹시 가다가 재앙을 만나면 어쩌지?” “하나님의 능력이 거기까지 미칠까?” 그는 겉으로는 하나님의 심판을 인정합니다. 소돔이 멸망할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의 보호하심은 자기 계산 안에 가두어 둡니다. 이것이 롯의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저 작은 성으로 가게 해 주십시오.” 왜 작은 성입니까? 작으니까 통제가 가능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가까우니까 안심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산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겨야 하는 자리이고, 작은 성은 자기 판단이 조금이라도 개입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본문 22절은 롯이 가고자 했던 곳을 가리켜 이렇게 말씀하는데,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리로 속히 도망하라 네가 거기 이르기까지는 내가 아무 일도 행할 수 없노라 하였더라 그러므로 그 성읍 이름을 소알이라 불렀더라.”
‘소알’이라는 글자 앞에 1)이 있어서 밑에 관주난에 보니까, ‘작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그 성의 규모가 작다는 뜻이 아닙니다. 소알은 롯의 믿음의 크기를 드러내는 상징과도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롯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산으로 도망하라.” 산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피난처였습니다. 그러나 롯은 말합니다. “나는 산으로 못 가겠습니다. 저 작은 성으로 가게 해 주십시오.” 그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계산을 앞세웠습니다. 산은 멀어 보였고, 힘들어 보였으며, 위험해 보였습니다. 반면에 소알은 가까워 보였고, 안전해 보였으며, 감당할 만해 보였습니다.
여기에서 롯의 신앙의 본질이 드러납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천사의 손에 이끌려 나올 만큼 은혜를 입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능력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되, 자기 생각의 테두리 안에서만 믿었습니다. 하나님을 전능하신 분으로 인정하기보다, 자기 판단에 맞는 범위 안에서만 인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그 작은 믿음까지도 받아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네가 거기 이르기까지는 내가 아무 일도 행할 수 없노라.” 하나님은 롯의 연약함 속에서도 그를 기다려 주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러나 소알은 안전한 영적 거처가 되지 못했습니다. 롯은 나중에 산으로 올라가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처음에 말씀하신 그 자리로 가게 됩니다. 잊지 마십시오. 돌아가게 될 길이라면, 처음부터 순종하는 것이 복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롯은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거부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대로 순종하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이 타협입니다. 이것이 계산하는 믿음입니다. 타협은 언제나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나님, 말씀은 알겠습니다. 그런데 제 형편을 좀 봐주십시오.” “하나님, 순종은 하겠습니다. 그런데 제 방식대로 하겠습니다.” 그러나 계산하는 믿음은 결국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 이해의 범위 안에 가둬두는 것입니다.
롯은 아브라함을 떠날 때부터 계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눈에 보이는 조건을 따라 움직였습니다. 그의 신앙은 믿음 위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늘 계산 위에 서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즉시 순종합니까? 아니면 머릿속에서 먼저 손익 계산을 합니까? “이렇게 순종하면 내가 손해가 아닌가? 이 정도는 타협해도 괜찮지 않을까?” 그 순간 우리는 산이 아니라, 소알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산은 믿음의 자리입니다. 소알은 타협의 자리입니다. 산은 전적인 신뢰입니다. 소알은 조건부 신뢰입니다. 계산하는 신앙은 결국 우리를 더 작은 자리로 몰아넣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전능자로 믿는 사람은 산을 향해 달려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롯의 타협과 계산이 우리 안에도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를 더 큰 자리로 부르십니다. 전적으로 맡기고, 그대로 순종하고, 끝까지 의지하는 믿음으로 나아가라고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계산을 내려놓으십시다. 타협을 끊어내십시다. 작은 성을 버리고 산을 향해 나아가십시다. 산은 힘든 자리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이 하나님이 지정하신 생명의 자리입니다. 완전한 구원은 완전한 순종에서 옵니다. 그것이 이 땅에서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바르게 보존하는 길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생명을 영원하신 진리 안에서 영원히 가꾸는 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믿음에도 역사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작은 믿음에 머물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를 더 큰 믿음의 자리로, 더 높은 순종의 자리로 부르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그 부르심 앞에 “주님, 제가 산으로 가겠습니다”라고 고백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영원한 진리 안에서 바르게 회복하고 보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