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내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며 또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지는 더더욱 알 수가 없습니다. 나는 누구인가요?
가장 중요한 질문을 해 주셨어요. 제일 중요한 의문인데 사람들은 그 의문을 놓치고 삽니다. 너무나 당연히 의문스러운 것이니까, 또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핑계로 그냥 내버려 둡니다. 내가 누구인지 잘 모르면 어떻게 해야 하겠어요? 알아야겠지요. 알려고 크게 마음을 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그렇습니다. 내가 누군지 모르고,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르고, 또 어디로 돌아갈 것인지도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냥 이렇게 세상에 떨어졌으니 아무 이유도 모른 채 남들 가는 길로만 그냥 따라 가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열심히 살라고 하니 열심히 살아야 할 것 같기는 하고, 돈을 벌어야 산다고 하니 돈 버는 데 목숨을 걸기도 하고, 명예와 지위를 얻으려 하다 보니 그것들을 얻으려고 발버둥을 치기도 합니다. 그러니 삶이 괴로운 것이고, 온갖 집착과 애욕을 일으키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뿌리는 놓쳐 버리고 가지에만 마음을 두고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살아가다 보면 누구나 인생 근원의 의미를 찾게 되고,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디쯤 가고 있는지, 잘 가고는 있는 건지, 왜 가고 있는 건지, 되묻게 되곤 합니다. 그것이 곧 화두입니다. 그 의심에 사무쳐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실체 없는 꿈입니다. ‘나’ 또한 꿈이며 환영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그 근본 자리는 한없이 고요하고 적적(寂寂)한 자리입니다. 그 녀석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 의문이 생기면 이 의문을 풀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 마음이 바로 보리심(菩提心)이며, 간절한 마음으로 사무쳐 하나가 된 것이 선정(禪定)이고, 끊임없이 의심하며 꾸준히 참구해 나가는 것이 정진(精進)이며, 의문이 확연해 지고 세상과 온전히 하나가 되었을 때를 반야(般若)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의문을 확연히 풀어보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공통적인 삶의 목적입니다. 우리는 그 의문을 풀기 위해 이렇게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의문, ‘나는 누구인가’의 의문을 풀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답은 단순하고도 명료합니다. 자꾸 물어야 합니다. 누구인지 모르니까 물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바깥에, 외부에 물으면 안 됩니다. 내가 누구인가를 왜 바깥에 묻습니까. 나 자신에게 물어야지. 그리고 나 자신의 깊은 본성은 그 물음에 분명히 답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부처님께서 직접 증명해 보이신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내 안에 물으면 그 안에서 답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답이 안 나오는 이유는 끊임없이 우리는 그 답을 바깥에다 묻고, 외부에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종교가 되었든, 선지식이 되었든, 스님들이나 교수님이 되었든, 심지어 부처님이라 할지라도 그 외부적인 것에 전적으로 의지해서는 답을 찾아낼 수 없습니다. 불교의 가르침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라고 했듯이, 손가락만을 볼 것이 아니라 내 안으로 직접 뛰어들어야 합니다.
왜 묻는 것입니까? 모르니까 묻는거예요. 분명히 알아야겠는데 답을 몰라요. 그런데도 스님들은 계속해서 물으라고만 하지 답을 주지 않습니다. 그러니 답답해 죽겠습니다. 갑갑하고 답답합니다. 답은 찾아야겠는데, 답은 안 나오고 미쳐버릴 것 같단 말이예요. 바로 그 답답하고 몰라서 미칠 것 같은 ‘오직 모름’ ‘순전한 모름’ 그것이 바로 화두입니다. 그래도 그 모르는 것이 잘 가고 있는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길 없는 길’을 걸어야 하는 것이 모든 수행자의 길이요, 사실은 인류의 모든 이들이 가야만 하는 길인 것입니다.
자 법우님께서는 이 질문을 이렇게 진중하게 물어오셨으니 이제 그 답을 찾아야 합니다. 이번 생에 돈이니 명예니 하는 그런 사소한 것에 목숨 걸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에 신명을 바쳐 이 의문에 답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그 답은 제가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법우님 스스로 그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법상스님 『 기도하면 누가 들어 주나요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