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절에서부터 38절까지의 말씀은 요셉의 형제들이 곡식을 가지고 가나안 땅에 돌아와 아비 야곱에게 만난 일을 자세히 고하고 각기 자루에서 돈을 발견하게 되므로 야곱이 두려워 근심하게 되는 내용입니다.
애굽의 요셉에게서 떠난 형들은 노중 여관에서 나귀에게 먹이를 주려고 어느 한 사람이 자루를 풀었는데 그 자루 아귀에서 돈을 발견합니다(27절). 즉 곡식자루를 풀자마자 입구에 돈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다른 형제들에게 말하기를
“내 돈을 도로 넣었도다 보라 자루 속에 있도다 이에 그들이 혼이 나서 떨며 서로 돌아보며 말하되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는가”라고 합니다(28절). 요셉이 형들을 회개하게 하기 위한 계획은 성공적입니다. 그의 형들은 자루 입구에서 돈을 발견하고 좋아한 것이 아니라 놀라서 ‘혼이 나서 떨며’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과거 요셉을 죽이려 하였다가 애굽에 팔았을 때에는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는가’라고 탄식을 합니다. 돈을 그들의 자루에 실제로 넣은 자는 하나님이 아니라 요셉의 신하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 일을 하나님이 행하셨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모든 만사를 주관하신다는 의미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이 주관하시고 요셉은 청지기에게 명령을 하고 요셉의 청지기는 그 명령대로 행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본문에서 ‘혼이 나서’라는 말에 대하여 다른 번역 성경에서는, ‘얼이 빠져서’ 혹은 ‘기진하게 되므로’ 또는 얼빠진 사람처럼‘ 등입니다. 즉 이 말의 뜻은 ’마음이 그의 몸에서 빠져 나가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떨며‘라는 것은 ’두려워하며‘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즉 이들은 자루 입구에 있는 돈을 발견하고서 마음이 나갔고 그리고 그들은 두려워한 것입니다.
29절에서 34절까지의 말씀은 요셉의 형들이 가나안 땅에 돌아와서 아비 야곱에게 야곱에서 곡식을 가져오기까지의 경위와 말째 아우를 데리고 가야 애굽에 결박되어 있는 시므온을 데리고 올 수 있다는 보고를 하는 내용입니다. 29절에서 형들은 아버지 야곱에게 그들이 애굽에서 당한 일을 자세히 알리는데(29절),
“그 땅의 주인인 그 사람이 엄하게 우리에게 말씀하고 우리를 그 땅에 대한 정탐꾼으로 여기기로 우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는 확실한 자들이요 정탐꾼이 아니니이다 우리는 한 아버지의 아들 열두 형제로서 하나는 없어지고 막내는 오늘 아버지와 함께 가나안 땅에 있나이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30~32절).
자신들의 말을 들은 ’그 땅의 주인인 그 사람이‘ 말하기를 “내가 이같이 하여 너희가 확실한 자들임을 알리니 너희 형제 중의 하나를 내게 두고 양식을 가지고 가서 너희 집안의 굶주림을 구하고 너희 막내 아우를 내게로 데려 오라 그러면 너희가 장탐꾼이 아니요 확실한 자들임을 내가 알고 너희 형제를 너희에게 돌리리니 너희가 이 나라에서 무역하리라 하더이다”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33,34절). 즉 막내를 데리고 오면 누명을 벗겨줄 것이며 그리고 애굽을 편안하게 오고 갈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과거 요셉에 대한 사건에 대하여 아비 야곱을 속인 것과는 달리, 그들은 야곱에게 거짓없는 진실된 보고를 합니다. 이들은 애굽에서 곡식을 사오는 과정에서 범죄가 얼마나 두려운 것인가를 뼈저리게 느꼈고 뉘우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진실한 보고를 가감없이 있었던 그대로 아비 야곱에게 하는 것입니다.
35절에서 38절까지의 말씀은 야곱이 아들들의 보고를 듣고 각기 곡식 자루에서 돈 뭉치를 발견하고 놀라 두려워하며 베냐민을 보내달라는 르우벤의 간청을 거절하는 내용입니다.
애굽에서의 모든 일들에 대해 말을 마친 형들은 각기 자루를 비우며 보니, 각 사람의 돈뭉치가 그대로 들어 있는 것을 보고 모두 다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35절). 집으로 오는 도중 여관에서 보게 된 하나의 자루에만 돈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으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충격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아들들이 행한 일도 아닙니다. 아들들도 전혀 몰랐던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아들들을 향하여 “너희가 나에게 내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라고 합니다(36절). 본문에서 ‘너희가 나에게 내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는 원문에서 ‘너희들이 나를 잃게 했다’로서 ‘내 자식들을’이란 말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로 번역한 원어(עלי היו כלנה)는, ‘모든 일들이 내 위에 있다’로 직역되는데 이는 ‘이 모든 일들이 나에게 대적하고 있다’ 또는 ‘이 모든 일이 나에게 일어났다’라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본문은 자식에게 일어나는 일련의 모든 일들은 야곱이 홀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무겁다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당시 야곱이 헤어나올 수 없는 일을 당했다는 매우 절망적이고 참담했던 심정의 고충을 그대로 실감나게 전달해 주는 표현입니다. 아버지 야곱과 아들들 모두가 두려움과 절망가운데 처해진 상태입니다.
이때에 르우벤이 아버지 야곱에게 말하기를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오지 아니하거든 내 두 아들을 죽이소서 그를 내 손에 맡기소서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리이다”라고 합니다(37절). 당시 고대 근동 사회에서는 아들을 자신의 분신으로 생각하여 생명처럼 귀한 존재로 여겼으며 또한 자식이나 가족의 생명이 가장의 손에 달려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는 소돔 성에 살던 롯이 두 딸을 폭도에게 내어주려 했던 사건에서나(창19:8), 다말 사건(창38:24) 등에서도 확인됩니다.
르우벤의 요청을 들은 야곱은 “내 아들은 너희와 함께 내려가지 못하리니 그의 형은 죽고 그만 남았음이라 만일 너희가 가는 길에서 재난이 그에게 미치면 너희가 내 흰 머리를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 되리라”고 말하며 거절을 하면서 슬퍼하고 괴로워 합니다(38절).
본문에서 ‘그만 남았음이라’라는 것은 야곱의 아내들 중 가장 사랑한 라헬이 남겨 놓은 두 아들 중에서 남아 있는 아들이 베냐민뿐이라는 뜻입니다.
본문에서 ‘스올’이라는 것은, 육체에서 분리된 죽은 자들의 영혼이 머무는 장소로서 한 번 들어가면 스스로는 결코 되돌아 나올 수 없는 처소를 가리키는데,
‘내 흰 머리를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로다’에 대해 다른 번역 성경에서는, ‘백발이 된 나를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하는 것이다’ 또는 ‘나의 흰머리를 슬픔과 함께 무덤으로 떨어뜨리리로다’ 혹은 ‘백발이 성성한 이 늙은 아버지가 슬퍼하며 죽어서 스올로 내려가는 꼴을 보겠다는거냐’로 되어 있습니다.
야곱의 슬픔이나 괴로움은 모두가 불신앙의 결과로 주어진 것입니다. 야곱의 슬픔은 사랑하는 요셉이 죽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그의 괴로움은 애굽에 있다는 시므온을 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베냐민을 보낼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과거 마음에 두었던 요셉의 꿈 이야기를 잊고 있는 것입니다(창37:11).
야곱이 자기와 아들들이 요셉에게 절을 하는 꿈이 여호와께서 그대로 이루어 주실 계시라고 믿고 기억하고 있었다면, 요셉으로 인한 슬픔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이 지난날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나타나셔서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지며”(창28:14)라고 언약하시고, 과거 어려움 중에서도 아들들을 다 보호하여 주신 사실을 잊지 아니하고 믿고 있었다면, 시므온이나 베냐민 때문에 괴로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언제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을 가진 자는 근심과 슬픔과 괴로움을 느끼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