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 에스더 : 역사 섭리를 통한 언약 |
창세기 1장 ~ 36장 : 하나님의 언약 섭리 창세기 37장 ~ 민수기 30장 : 자손언약 성취 섭리 |
창37장~출18장 : 언약자손의 번창 |
37장~50장 자손의 보호와 형통 |
37장~38장 언약자손들의 범죄 | 39장~45장 요셉과 형들의 화친 42~43장 형들의 절을 받는 요셉 | 46장~50장 언약자손들의 형통 |
43장1절부터 15절까지의 말씀은 이스라엘이 아들들에게 곡식을 사오라고 갑절의 돈과 예물을 주며 하나님을 의지하고 유다의 간청대로 베냐민을 동행하게 하여 그들로 요셉 앞에 서게 하는 내용입니다. 가나안 땅에는 기근이 계속되고 맹렬하게 심하여졌고(1절) 그리고 이전 요셉에게서 사갖고 왔던 양식도 점점 줄어들어 다 떨어졌을 때에,
“그 아버지가 그들에게 이르되 다시 가서 우리를 위하여 양식을 조금 사오라”고 합니다(2절).
곡식을 사오라는 아비 이스라엘의 말을 듣고 유다가 아버지에게 베냐민을 데리고 가야 곡식을 사가지고 올 수가 있다는 사실을, 42장34절에서 아버지에게 애굽에서의 모든 일정을 고할 때 했던 말을 다시 한 번 아버지에게 상기시키며 말을 합니다(3~5절).
이스라엘은 베냐민을 애굽으로 보내기는 싫고 곡식은 조금이라도 사와야 하는 곤경에 처하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불신앙적인 계획이나 욕망은 반드시 심리적인 갈등을 동반합니다. 인간의 심리적 갈등은 근심과 불안과 괴로움을 동반합니다. 이에 유다는 아비 이스라엘에게 베냐민을 함께 애굽으로 보내어 주어야 곡식을 사가지고 올 수 있다고 역설합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은 힘든 결단을 내려야만 합니다.
본문에서 유다가 요셉의 말을 인용한 것과 요셉이 형들에게 직접 했었던 말과 조금 의미가 다릅니다.
즉 요셉은 ‘너희 형제 베냐민을 데리고 오면 너희가 죽지 아니하리라’라는 뜻으로 말하였던 것입니다(창42:18~20). 그러나 유다가 아버지에게 전달한 말의 의미는, 요셉이 애굽의 모든 곡물을 주관하고 있다는 사실을 근거로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란 요셉의 말을 ‘결코 양식을 얻지 못하리라’는 뉘앙스를 가지는 것으로 야곱에게 전달한 것입니다.
즉 유다는 양식을 사는 것을 빌미로 해서 야곱의 마음을 돌이켜 베냐민을 보내도록 유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반면 요셉은 이미 양식을 그들에게 주려고 작정한 상태였기 때문에 오로지 베냐민을 데려오는 문제를 성취시키기 위하여 이 말을 하였던 것입니다. 요셉은 모든 형제들로부터 섬김을 받는 것을 의미하는 형제들의 곡식 단이 자신의 곡식 간을 향하여 절하였던 꿈 속에 내포된(창37:5~8)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생각이 그의 마음에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셉은 그의 삶 전반에 있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려는 자세를 가지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어떻게 해서, 요셉이 형들에게 한 말의 진의와 그 말에 대하여 유다가 아버지에게 전달하는 그 같은 말의 뜻이 달라졌나 하는 것입니다.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요셉은 형들을 알고 있으며 이미 모든 것을 주려고 작정한 가운데 단지 몇 가지 과정을 거치려고 하는데 있고, 형들은 요셉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단지 목적하는 바 양식과 그리고 할 수만 있으면 형제들의 목숨까지도 구하려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알고’ ‘모르고’의 차이 때문입니다.
계속되는 두려움과 불안으로 야곱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심정을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된 인생 모두에게 불안과 두려움을 주십니다. 성도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방향은 다릅니다. 택한 백성 이스라엘에게 이처럼 초조하게 하시는 이유는 회개케 하시기 위함입니다. 죄를 뉘우치게 하셔서 그리스도께로 다가오고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게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요 섭리입니다. 그러나 불택자에게는 망하게 하시고자 불안과 두려움을 주시는 것입니다.
6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은 이스라엘이 아들들을 책망하자 아들들이 변명을 하고 유다가 그 해결책을 아비 이스라엘에게 제시하며 속히 허락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입니다.
본문에서 ‘야곱’의 이름이 전장과는 달리(창42:36,38) ‘이스라엘’로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지어주신(창32:28,35:10)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본문에서 다시 언급된 것은 앞으로의 내용이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로 전환될 것임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즉 앞으로 전개될 내용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애굽 이주 문제와 관련된 것으로 전개될 하나의 전기가 되는 중요성을 지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 가문의 애굽 이주가 인간 야곱의 계획에 의해서 실행된 것이 아니라 언약을 이루어 나가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섭리 아래서 이스라엘의 순종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본문과 같은 표현이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총리에게 아우가 있다고 진실하게 말한 아들들을 탓하며 괴로워합니다(6절).
인간은 자기들의 계획과 욕망으로 인하여 주어진 심리적 갈등의 해결책을 진실의 왜곡에서 찾으려 합니다. 이스라엘의 경우가 바로 그러한 경우입니다. 이스라엘은 자기를 속인 아들들이 애굽의 총리를 거짓말로 속였기를 바란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스라엘의 태도는 철저히 불신앙적인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불신앙적 태도를 가지고는 이러한 문제의 해결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 이스라엘의 말이 끝나자 그들은 말합니다.
본문 7절에서 ‘그들’은 아들들 모두를 뜻합니다. 지금까지는 르우벤 혹은 유다 개인이 아버지에게 보고하며 간청하다가 본문은 일제히 모두가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변명으로, 애굽의 총리가 자세히 치밀하고 꼼꼼히 묻는 바람에 아우가 있다는 말을 하게 되었는데 갑자기 아우를 데리고 오라는 명령을 하게 될 줄을 몰랐다고 말을 합니다.
그리고 유다는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저 아이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곧 가리니 그러면 우리와 아버지와 우리 어린 아들이 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이다 내가 그를 위하여 담보가 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서 그를 찾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 우리가 지체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벌써 두 번 갔다 왔으리이다”(8~10절)라고 설득합니다.
유다는 베냐민을 향해 ‘저 아이’라고 호칭합니다.
그리고 ‘저 아이’로 인해서만이 ‘우리와 아버지와 우리 어린 아들이 다 살고 죽지 아니한다’라고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말합니다. 그래서 유다는, 동생 ‘베냐민’을 향해 이름을 부르지 않고 지금은 이스라엘 모두의 사느냐 죽느냐하는 생사 연장여부가 달린 자이기에 ‘저 아이’라고 호칭합니다. 그래서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유다 자신을 담보하며 호소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