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절에서 34절 말씀은 요셉의 판결은 들은 유다가 동생 베냐민이 애굽까지 오게 된 동기와 과정을 말하면서 그가 반드시 아버지께 돌아가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며 자기가 그 대신 종이 되기를 자원하는 내용입니다.
베냐민 외에 모두 아버지께로 돌아가라는 판결을 들은 유다가 요셉에게 “내 주여 원하건대 당신의 종에게 내 주의 귀에 한 말씀을 아뢰게 하소서 주의 종에게 노하지 마소서 주는 바로와 같으심이니이다”(18절)라고 하며 간청하는 말을 시작합니다.
유다가 다른 형제들 앞서 베냐민의 사건에 뛰어드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베냐민을 애굽으로 함께 보내는 것을 절대적으로 반대하는 아비 이스라엘에게 반드시 베냐민을 데려 오겠다고 하며 담보로 자신이 평생 그 죄에 대해 비난 받겠다고 하고서 설득하여 데리고 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베냐민을 아비 이스라엘에게로 돌려 보내려고 요셉에게 그 이유를 들어서 간청하는 것입니다.
유다는 19절에서 ’이전에‘라고 하는데 이는 가나안 땅의 기근으로 인해 양식을 구하고자 첫 번째로 애굽에 왔을 때를 가리킵니다.
그 때에 요셉이 형제들에게 그들의 아비와 아우에 대해 물었던 것을 회상시키고 또한 그들의 아버지에게서 베냐민이라는 아들에 대해 설명하며 베냐민을 구하려 간절한 마음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유다가 요셉에게 말하는 내용 가운데, 20절에 ’그 노년에 얻은 아들 청년이 있으니 그의 형은 죽고‘라는 말과 28절의 ’하나는 내게서 나갔으므로 내가 말하기를 틀림없이 찢겨 죽었다 하고‘라는 말은 진실이 아니며, 형들의 거짓말과 아버지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의 말을 듣고 있는 요셉은 그 진실된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그 형제들은 요셉 앞에 어떠한 죄도 전연 숨길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하물며 인간의 마음을 살피시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자기의 죄를 어떻게 숨길 수가 있겠는가 말입니다.
알고 보면,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변명이나 변호도 다 필요가 없고 어떠한 죄도 전연 숨길 수 없는 존재입니다. 다만 인간 스스로의 악함과 죄를 시인하고 겸비한 자세로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을 기다릴 뿐인 존재입니다.
사실 유다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요셉 앞에 입이 열 개가 있다 하여도 할 말이 없는 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너무도 급하고 당황하게 되니까 요셉에게 간절히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는 베냐민을 아비 이스라엘에게 돌려 보내고서 자기가 종이 되어야 하는 이유를 두 가지로 요셉에게 설명하고 있습니다(33절).
먼저는, 베냐민이 아비 이스라엘에게로 돌아가지 아니하면 그 형제들이 그 아비를 흰머리로 슬피 음부에 내려가게 함이기 때문이며(29~31절) 다음은, 자기가 아비에게 베냐민이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죄를 지겠다고 약속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32절).
유다는 요셉에게, ’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거늘‘이라 하며(30절) 아버지에게서 베냐민이 어떤 존재인가를 말하며 탄원하고 있습니다. 즉 ’사랑으로 하나된 관계‘이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야곱의 생명과 아이 베냐민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어서, 만약 베냐민이 돌아가지 못한다면 아버지는 더 이상 살아계시지 못할 것이고, 그렇다면 자신들이 아버지를 슬프게 하고 죽게 한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29절).
형제들이 젊었을 적에 요셉을 버릴 때는 자신들보다 요셉이 아버지로부터 더 사랑 받는 것만 생각하고 시기했습니다. 요셉을 사랑하고 요셉으로 기뻐하는 아버지의 마음보다는, 자신들보다 더 사랑한다는 요셉에 대한 미움과 시기로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형제들은 아버지의 아픔에는 관심도 두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유다는 베냐민이 돌아가지 않았을 때의 아버지의 마음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베냐민 대신 자신을 종이 되게 하고 베냐민은 형제들과 함께 아버지께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탄원하는 것입니다(33절) 유다는 아버지의 마음을 앎으로 해서 ‘베냐민 대신 나’라는 희생을 보이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희생은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만약 유다가 아버지의 마음에 관심이 없거나 몰랐다면 베냐민이 홀로 남는다 해도 자신은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면 희생은 자신의 의지로 다른 누군가를 위해 손해 보는 차원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과 마음을 알고 그 뜻을 자신의 삶의 목표와 방향으로 삼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요17:3참조).
*그렇다면 유다는 어떻게 해서 희생을 알게 되었을까요? 그에 대한 답을 다말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다말 이야기는 38장에 삽입되어 있는데 37장과 39장을 보면 내용의 흐름상 다말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37장부터 요셉 이야기가 시작되고 애굽의 보디발의 집에 팔린 일까지 전개되다가 39장에서 애굽에서의 일이 계속 이어지는 것을 보면 38장에서의 다말 이야기는 불필요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말 이야기는 유다가 어떻게 해서 희생을 배우게 되었는지에 대한 답을 알려주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말 이야기는 알다시피 유다의 며느리인 다말이 창녀로 변장하여 유다와 동침한 일이 주요 내용입니다. 다말이 창녀로 변장하게 된 것은 순전히 유다의 이기적인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다말 때문에 아들이 죽는다고 생각한 유다가 두 아들이 죽은 뒤 하나 남은 아들 셀라를 다말에게 주지 않으려고 셀라가 어리다는 핑계로 다말을 친정으로 보내버린 것입니다.
다말이 창녀가 되어 유다와 동침한 것은 유다 가문을 이어가기 위해서였습니다. 그에 비해 유다는 가문을 이어가야 한다는 것보다 아들을 잃게 되는 것을 염려한 것입니다. 이러한 유다로 인해 다말은 시아버지와 동침하는 창녀와 같은 여인으로까지 스스로를 버려 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다말에게서 유다가 희생을 배운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창 38:25-26절을 보면 “여인이 끌려나갈 때에 사람을 보내어 시아버지에게 이르되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나이다 청하건대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누구의 것이니이까 한지라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고 말합니다.
유다가 다말이 자신보다 옳다고 한 것은 다말의 희생이 자신으로 인한 것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죄로 인해 다말이 창녀가 되는 아픔을 겪게 되었음을 안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는 자신들이 베냐민을 데려 가지 않았을 때 아버지 야곱이 겪을 아픔을 생각하며 자신이 베냐민 대신 종이 되겠다고 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희생을 알게 된 유다가 야곱의 아들들에서 중심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