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절부터 15절까지의 말씀은 이스라엘이 아들들에게 예물과 갑절의 돈을 주며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베냐민도 함께 동행하게 하여 그들로 애굽의 요셉 앞에 서게 하는 내용입니다.
아들들과 또 유다의 말을 들은 아버지 이스라엘이 고민했음을 11장 서두의 ‘그러할진대’라는 단어에 묻어 있습니다. 뜻은 ‘만약 그렇다면’, ‘민약 그럴 수밖에 없다면’입니다. 그리고 그는 아들들에게
결국 베냐민과 형들이 애굽으로 동행하는 것을 허락하며 이르기를, “이렇게 하라 너희는 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그릇에 담아가지고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예물로 드릴지니 곧 유향 조금과 꿀 조금과 향품과 몰약과 유향나무 열매와 감복숭아이니라”(11절). 즉, 애굽에서 귀하게 여기는 가나안의 소산물인 유향과 꿀과 향품과 몰약과 유향나무 열매 그리고 감복숭아를 예물로 가지고 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돈은 갑절로 가지고 가서 너희 자루 아귀에 도로 넣어져 있던 그 돈을 되돌려 주라며 아마도 그것은 실수였을 것이다며 너희 아우를 데리고 속히 일어나서 다시 그 사람에게로 가라고 명령합니다(12,13절).
그러나 결국 이스라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한 방책은 간단합니다. 그것은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잘 알고 있습니다.
과거에 수많은 난관과 환난 가운데서도 언제나 하나님께서 찾아와 주셔서 해결해 주셨고 형통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으면 잃으리로다”(14절)라고 철저히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인간은 자기 능력의 가능성이 있는 듯싶으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불신앙적인 행동을 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인간 스스로의 능력이 없다고 생각될 때에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신앙적인 행동을 하게 됩니다. 바로 이스라엘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가 ‘자식을 잃으면 잃으리로다’라는 말은 자기 스스로의 철저한 무능력을 표현한 말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의 생각으로는, 사랑하는 말째 아들 베냐민이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게 된다고 판단된 것입니다.
그가 베냐민을 아들들과 함께 애굽으로 보내어 주어도 죽을 것 같고, 그를 보내지 아니하면 곡식을 사오지 못하여 굶어서 죽을 것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결단을 내리는 신앙적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이스라엘은 자신을 포기하는 데 있어서 주체가 자신 스스로가 아니라 ‘전능한 하나님’때문이라고 합니다.
포기가 자기 스스로 자아에 의한 것이라면 더 이상의 답이 없으며 그 자체가 공허이며 무능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때문이라면 달라집니다. 하나님 때문에 자신을 포기했다면 그곳에는 인생의 빛이 임하며 정답으로 응답됩니다.
야곱에게서의 ‘전능한 하나님’은 그냥 소리치며 위안으로 삼고자 지어낸 것이 아닙니다.
이 ‘전능한 하나님’은 열조에게서부터 시작하여 야곱에게까지 이어진 하나님의 속성이며 나타내신 증거입니다. 먼저는 창세기17장1절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나이 99세, 즉 육적 생명이 끊어진 때에 나타나셔서 스스로를 소개하시며 그리고 언약대로 아브라함에게 백세에 아들 이삭을 주셨습니다. 곧 전능하시다고 하신 하나님께서 그대로 성취하심으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믿게 하신 것입니다.
또한 이삭이 야곱을 밧단아람으로 형 에서를 피해 홀로 보내면서, 아버지로서의 인간적 안타까움과 걱정 동시에 지금까지 아버지 아브라함과 자신을 인도하신 하나님을 소개하는데,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시어 네가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가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창28:3)라고 합니다. 이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아버지 아브라함과 이삭 자신을 지금까지 인도하신 것처럼, 반드시 복의 승계자인 아들 야곱과 함께 하셔서 언약대로 야곱으로 말미암아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실 것이다는 말씀으로서, 야곱이 밧단아람으로 가는 길뿐만 아니라 모든 길을 형통케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아들들의 세겜성 살인죄로 말미암아 위험과 두려움에 휩싸여 있는 야곱에게 찾아오셔서 언약의 벧엘로(창28:19) 올라가서 제단 쌓을 것을 명하십니다. 그리고 제단을 쌓은 야곱에게 이름을, 창세기32장의 얍복 나루에서 개명해 주신 것처럼 다시 한 번 반복하여 ‘이스라엘’로 개명해 주신 다음에, 자신을 또다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창35:11)고 언약하십니다. 이는 앞선 창세기 28장3절과 같이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계시하시는 시점과 결과는 한결같이 언약자손에 대하여 하신 ‘그 언약’으로 말미암아,
언약을 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이 흔들리고 낙심하며, 범죄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고 쓰러진 그러한 상태의 언약자손을 찾아가셔서, 보호하시고 위로하시며 제사를 통하여 다시 회복하게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언약자손들에게 일방적으로 하신 ‘은혜언약’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사랑’이라고 하시며 ‘은혜’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아브라함에게서 이삭에게로, 이삭에게서 야곱에게로 승계되고 그리고 ‘이스라엘’에게까지 이어지는 것입니다. 야곱은 이에 대하여 마지막 죽음 직전에 요셉에게 이렇게 생의 고백을 하는데서 확인이 됩니다. “요셉에게 이르되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사 복을 주시며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창48:3~4).
이스라엘은 위험과 위기 때마다 자신을 구해주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생명처럼 여기는 막내 베냐민을 포기하고서 놓아 아들들과 함께 애굽 요셉에게로 보냅니다.
이것을 ‘성령의 내주하심’이라고 합니다. 형제들은 아버지 이스라엘의 허락과 함께 즉시 일어나서 베냐민과 함께 예물을 가지고 그리고 갑절의 돈을 갖고서 시므온이 갇혀 있는 애굽으로 내려가 요셉 앞에 섭니다(15절).
16절에서 34절까지의 말씀은 요셉이 청지기에게 명하여 잔치를 배설하고 형제들로부터 예물과 절을 받으며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으며 즐거워하는 내용인데,
그 중 16절에서 18절은 요셉의 형제들이 청지기에 의하여 요셉의 집으로 인도를 받고서 자루 입구에 넣어 있었던 돈의 일로 두려워하며 받을 형벌을 예측하는 내용입니다. 요셉은 베냐민이 형제들과 함께 있음을 보고서 자기의 청지기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들을 집으로 인도해 들이고 짐승을 잡고 준비하라 이 사람들이 정오에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니라”(16절)고 합니다.
요셉은 자신 앞에 선 형제들 가운데서 동생 베냐민을 보는 순간 너무 감격하여 형제들과 점심을 같이 먹고 싶었고 그래서 청지기에게 명하여 형제들을 자기 집으로 인도하라고 지시한 것입니다.
청지기는 요셉이 말한 대로 그 사람들을 요셉의 집으로 인도하는데(17절),
이에 형제들은 “두려워하여 이르되 전번에 우리 자루에 들어 있던 돈의 일로 우리가 끌려드는도다 이는 우리를 억류하고 달려들어 우리를 잡아 노예로 삼고 우리의 나귀를 빼앗으려 함이로다”고 합니다(18절). 이들은 요셉이 일부러 한 일을 모르기 때문에 그리고 잘못이 있기 때문에 요셉이 잘 대접을 하려는데도 즐거워 하지 못하고 도리어 몹시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죄는 항상 인간을 불안하게 하고 괴롭게 합니다. 그리고 그 죄에 대한 형벌에 대하여 생각하게 하며 괴로움을 더욱 크게 합니다. 바로 요셉의 형제들이 지금 그러한 경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