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절에서 22절 말씀은 요셉의 형제들이 자기들의 죄에 대한 형벌이 두려운 나머지 그 청지기에게 나아가 자루 속에 넣어져 있던 돈에 대한 모든 일을 사실대로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돈에 대한 일을 사실대로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누구의 행동인지는 모르더라도 각자의 돈들이 그대로 자루 속에 넣어져 있었던 것은 사실이고 그러한 사실을 애굽의 총리나 청지기가 모를 리가 없을 것이라는 판단을 하였기에 모든 일을 소상하게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택함을 받은 성도가 하나님께 자가의 죄를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자기의 죄를 하나님이 자세히 다 알고 계시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는 자는 자기의 죄를 숨기려 하고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도 자신의 속은 모르겠지 하고 감춘 채, 겉의 외식으로 나아가며 형식과 의식으로만 행동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차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들을 회개케 하여 돌아오게 하시고자 오신 것입니다(눅5:32). 그렇지만 이 ‘회개’라는 것은 결코 스스로 안됨을 성경은 말씀하며 회개하는 자의 앞과 안에, 회개케 하시는 절대적인 ‘힘’(전능,말씀)과 그가 행하시는 ‘열심’(성령)이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요셉이 아니면 결코 형들은 자신의 죄를 드러내는 회개는 없습니다.
23절에서 24절 말씀은 요셉의 청지기가 그 형제들의 고백을 듣고 그들을 위로하고 시므온도 그들에게로 이끌어 내고 요셉의 집으로 인도하여 환대를 하는 내용입니다. 도둑 혐의를 벗고자 돈을 내놓으며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형들의 말을 들은 청지기는 “너희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재물을 너희 자루에 넣어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 너희 돈은 내가 이미 받았느니라” 하고서 시므온을 옥에서 이끌어 내어(23절) 그들을 요셉의 집으로 인도하고 환대합니다(24절).
본문에서 ‘안심’은 ‘샬롬’입니다. 즉 청지기는 이들에게, 세상의 일상적인 위로나 괜찮다하는 식의 안심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에 의한 샬롬을 말하며 그래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하여 형제들이 마음으로 화답할 수 있는 더 확실한 것으로 전하는데, ‘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전하는 것입니다.
아들들은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하나님’에 대해 직접 경험하며 지금까지 지내왔었습니다. 나라와 민족이 아닌 가족들로 지금까지 밧단아람에서부터 가나안 땅까지 하나도 상치 않고 보호받으며 살아왔었습니다. 그런데 이들 앞에 말하는 애굽 총리 요셉의 청지기가 ‘아버지의 하나님’이 하셨으며 그리고 이전 양식의 값은 이미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하셨으므로 비록 받지 않고 도로 자루에 넣었으나 받은 것으로 되었다는 뜻입니다.
요셉의 청지기는 지금 상황에 대해서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샬롬’이라고 했으며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했으며 그리고 형제들 중 하나인 시므온마저 아무런 일이 없었음을 보여주며 이끌어내어 형제들과 함께 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형제들을 환대함의 표시로 발을 씻게 하며 이들의 나귀에게도 먹이를 줍니다. 여기서 발을 씻도록 하는 것은 고대 근동의 일상적인 손님 접대법이었습니다.
25절에서 30절까지의 말씀은 요셉이 형제들로부터 예물과 함께 절을 받고 그들과 그들 아비의 안부를 묻고 동생 베냐민을 확인하고 마음이 타는 듯하여 안방으로 들어가 우는 내용입니다. 장만해 온 성물을 정돈하고서 정오에 올 요셉을 기다리는데(25절) 요셉이 집으로 오니 형제들은 준비해 온 예물을 내어 놓고서 땅에 엎드려 절을 하였고(26절),
요셉은 그들의 안부를 묻고 난 다음에 “너희 아버지 너희가 말하던 그 노인이 안녕하시냐 아직도 생존해 계시느냐”고 묻습니다(27절). 이에 형제들은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평안하고 지금까지 생존하였나이다”하고서 머리 숙여 절을 합니다(28절). 본문에는 연거푸 형들이 동생 요셉에게 절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이는 과거에 하나님께서 요셉으로 꿈꾸게 하시며 계시하신 것에 대한 성취입니다.
요셉이 꾼 꿈에 대하여 적대감을 가지고 그 꿈을 무산시키고자 시도했던 요셉의 형들의 계획이(창37:18~20) 오히려 요셉으로 하여금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였으며 꿈을 성취시키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인간이 계획을 세우고 이를 이루려 아무리 애를 써도 하나님의 뜻이 그곳에 있지 않으면 이룰 수 없고 또한 인간의 노력이 아무리 집요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무산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자기 어머니 라헬의 아들, 곧 자기 동생 베냐민을 보고서 “소자여 하나님이 네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노라”고 축원하며 너무 감격하여 울음을 억제하지 못하고 급히 울 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서 웁니다(29,30절). 어릴 때에 베냐민과 함께 아버지 집에 있다가 헤어져 긴 시간을 보지 못했으므로 얼굴마저도 알 수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31절에서 34절의 말씀은 요셉이 음식을 차리게 하여 형제들을 장유의 차서대로 앉게 하고 자기 식물로 그들에게 주는데, 베냐민에게는 오배나 더 주고 함께 먹으며 즐거워하는 내용입니다. 울고자 방으로 들어갔었던 요셉은 얼굴을 씻고 다시 나와서 그 정을 억제하고 청지기에게 밥상을 차리라고 지시합니다(31절).
밥상을 차리는 사람들은 요셉에게 상을 따로 차리고, 그의 형제들에게도 따로 차리고, 요셉의 집에서 먹고 사는 애굽 사람에게도 따로 차렸습니다. 이는, 애굽 사람들은 히브리 사람들과 함께 먹으면 부정을 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상을 같이 차리지 않은 것입니다(32절). 이에 대하여 고고학 자료는 많지 않습니다. 다만, 애굽인들은 외국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정도에서 벗어난 부정한 것, 혐오스러운 것으로 간주한다라고도 하고, 또 애굽 종교를 숭배하지 않는 이방인, 특히 히브리인과는 식사를 같이 하지 못하도록 애굽 규례에 의한 것이라고도 합니다.
형제들은 요셉 앞에서 앉았는데, 앉고 보니 맏아들로부터 막내 아들에 이르기까지 나이 순서를 따라서 앉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형제들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하며 어리둥절하며 놀랐고 서로가 이상하게 여겼습니다(33절). 형제들은 아직도 총리가 저들의 동생 요셉인 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스스로 밝히지 않는 이상 저들 형제는 도저히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열어 보여 밝히지 않으시면 피조물인 인간은 결코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죄인된 인간들이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구약 율법에 약속하신대로 아들을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알지 못했고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죄인들로 구주를 알고 믿도록 하시고자 언약대로 십자가에 못박으셨고 그리고 부활하게 하신 것입니다.
요셉이 음식을 자기 앞에서 들어 그들에게 주는데 베냐민의 음식은 다른 사람들보다 다섯 배나 많았습니다. 그들이 요셉과 함께 마시고 즐거워하게 됩니다(34절). 고대 근동 사회에서는 특별한 손님에게 더 많은 음식을 제공하는 것은 그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경의를 표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애굽인들의 숫자 개념에서 ’5‘라는 숫자는 ’완전함‘, ’충만함‘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함께 음식을 먹으며 즐거워 하였다는 것은, 요셉의 마음에 형들에 대한 미움 등이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