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절에서 9절의 말씀은 요셉의 형제들이 청지기에게 자기들의 결백함을 증거까지 들어 변호하면서 죄가 사실일 경우에 그 죄에 대한 응분의 벌을 감수할 것을 약속하는 내용입니다. 형제들은 청지기에게 “내 주여 어찌 이렇게 말씀하시나이까 당신의 종들이 이런 일은 결단코 아니하나이다”고 대답을 합니다(7절). 요셉의 형제들은 청지기가 정죄하며 책망하는 말을 듣고도 아주 당당하게 대답을 한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요셉의 은잔을 훔치지 아니하엿다 할지라도 전에 요셉을 죽이려다가 애굽에 팔아넘긴 흉악한 죄인들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자세히 알고 있는 요셉이 그들 앞에 살아 있습니다. 이 사실을 만일 그 형제들이 알고 있다면, 그들이 요셉의 청지기 앞에서라도 당당할 수 있을까요? 실제로 요셉이 자기의 은잔을 베냐민의 자루에 넣어서 범인으로 위장을 한 사실을 알았다 하더라도 그 형제들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당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요셉이 그들을 다 죽이겠다 하여도 아무런 할 말이 없는 자들입니다. 아직도 그 형제들은 너무도 뻔뻔스러운 자들입니다. 그것은 지난날 자기들이 요셉에게 행한 악독한 범행이 드러나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모든 인간의 모습입니다. 불꽃과 같은 눈으로 인간의 마음을 샅샅이 살피시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간들은 생활 속에서 드러나는 작은 범행을 하지 아니하였다 하여 얼마나 자고하며 당당하게 생각합니까?
만일 하나님 앞에서 자기 마음에 자리하고 있는 근본 악성이 다 드러난다 하여도 과연 자고하고 당당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요셉의 형제들은 아주 당당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자기들의 큰 범죄는 숨기고 주인의 은잔에 대한 작은 범죄는 하지 아니하였다는 자만심의 결과입니다. 요셉은 그 형제들로 하여금 자기를 애굽에 팔아 넘긴 커다란 범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하여 함께 살게 하려고 청지기로 하여금 그들을 죄인으로 위장을 시켜 정죄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을 구원하시는 모형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을 율법 아래 가두어 정죄를 받아 죄인이 되도록 하게 하시는 것은, 그들로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을 가끔 사단에게 맡겨 범죄하게 하여 괴롭게 하시는 것 또한 그들로 자기가 죄인임을 철저히 뉘우치고 반성하게 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시려는 섭리입니다.
마치 요셉이 그 형제들을 범인이 되게 하여 스스로의 숨겨진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게 하여 함께 살게 하려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로마서11장32절에서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고 하며 또 고린도후서12장7절에서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형제들은 이어서 “우리 자루에 있던 돈도 우리가 가나안 땅에서부터 당신에게로 가져왔거늘 우리가 어찌 당신의 주인의 집에서 은금을 도둑질하리이까 당신의 종들 중 누구에게서 발견되든지 그는 죽을 것이요 우리는 내 주의 종들이 되리이다”(8~9절)라고 더욱 항변하듯이 자신들의 결백을 주장합니다.
여기서 문제는 ’은잔‘입니다. 당시 애굽에서의 ’은잔‘은 점을 치는 도구였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러한 점치는 도구를 훔치는 행위는 고대 근동 사회에서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라는 점에서 사태가 심각한 것입니다. 형제들은 이에 결백하며 훔친 자는 죽음으로 그리고 다른 이들 또한 요셉의 종이 되겠다고 자충수를 두어 버립니다.
본문의 시대적인 상황은, 길어지는 기근으로 인해 양식이 각국마다 고갈된 상태이며 이로 인해 가나안에서의 야곱도 해당되어 애굽으로 양식을 구하고자 온 상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마저 양식빈곤으로 몰아 넣으시고 이방 나라인 애굽에서 양식을 구하도록 하셨습니다. 지금의 양식은 구하고 구하지 못하는 것은 곧 ’생사‘의 갈림길입니다. 그러므로 애굽의 총리는 당시 이스라엘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는 자입니다.
이러한 애굽의 총리 앞에 있는 형제들은 자신들의 생사를 쥔 자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그런데 그 총리가 동생 요셉인데 아직 모르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요셉의 계획대로 당하고 꼼짝달싹할 처지가 못됩니다. 이에 대해 야곱은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이다‘(창43:14)고 하면서 결국 베냐민을 형제들과 함께 보내고 맙니다. 지금 요셉은 형제들을 마음대로 조종하며 권세를 부리고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창조주시며 전능자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모든 것을 선하신 뜻대로 이끌어 가십니다. 여기에 인생들도 포함됩니다. 자연 만물 풀 한 포기마저 주장하시고 날아다니는 새 한 마리도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세상 어느 무엇도 그들 마음대로 행하거나 비켜 갈 수가 없습니다(행17:24~28). 요셉이 베냐민의 자루에 몰래 은잔을 넣기도 하고 그리고 그를 죄인되게 만들어서 결국 회개케 하여 화해하고 화목하려는 뜻입니다. 이를 요셉은 계획자이므로 모두 알지만 형제들은 모릅니다. 요셉만이 이 모든 것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어진 10절부터 13절의 말씀에서 청지기가 요셉의 형제들의 말을 다짐하고 베냐민의 자루에서 주인의 은잔을 발견하자 그들이 옷을 찢고 성으로 다시 돌아오는 내용입니다. 살펴보면, 10절에서 청지기는 “그가 이르되 그러면 너희의 말과 같이 하리라 그것이 누구에게서든지 발견되면 그는 내게 종이 될 것이요 너희는 죄가 없으리라”고 하고서는 형제들의 각각의 자루를 급히 내려놓고 풉니다(11절).
청지기는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도 모르는 체하고서 명하였고, 형제들은 스스로 형량까지 정하면서 결코 무죄함을 확신했기에 속히 벗어나고자 신속하게 행동하여 확인절차에 들어갔습니다만 그 잔이 베냐민의 자루에서 발견되고 맙니다(12절).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이 발견되므로 형제들은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옷을 찢고’ 각기 짐을 나귀에 싣고서 다시 요셉에게로 돌아갑니다(13절). 요셉의 원하는대로, 계획대로, 하게 하는대로 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확인하고 넘어갔으면 합니다. 그것은, 야곱 즉 이스라엘 가문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무엇일까요?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창46:3-4절에서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창세기15장13절의,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라는 말씀과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가문을 애굽으로 가게 하시고 애굽에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신 후에 하나님이 인도하여 다시 올라오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었습니다. 그런데 야곱 가문을 애굽으로 가게 하셨다가 다시 가나안 땅으로 올라오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굳이 그렇게 하실 이유가 있는가라는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답은 애굽으로 가게 하셔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고 다시 올라오게 하시는 과정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그러한 과정을 겪게 하심으로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고자 하신 것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은 스스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존재임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아는 백성이 되게 하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만약 야곱 가문이 가나안 땅에 그대로 거주한 채 큰 민족을 이루었다면 그들에게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당연한 것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거주할 자격이 없음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스라엘이 아니었기 때문에 애굽으로 가게 하셔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신 후에 애굽에서 나오게 하시고, 다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는 과정에서 이스라엘의 모든 불의와 악함이 드러나도록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들을 정탐꾼이라고, 도둑이라고 몰아넣으며 모함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요셉이 형제들 앞에서 감당하고 있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요셉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믿지 않고 요셉 자신이 한다고 생각했다면, 형제들이 아버지에게서 받아 갖고 온 예물과 베냐민을 보는 순간 그 자리에서 울었거나 아니면 형제들을 그냥 놔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당당하던 그들의 기세는 씻은 듯이 사라졌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의 과오가 드러나면 당당하던 기세가 사라지고 겸비하여 집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인간의 죄가 드러나게 하시는 것은,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겸비하게 낮아지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 범죄가 사실로 드러난 요셉의 형제들은 청지기에게 끌려 요셉이 거하는 성으로 도로 돌아갈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