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바로는 가족들 중에서 아이들과 아내와 아버지를 태울 수레를 보내고, 이사를 위하여 집의 물건들로 인해 지체하지 않도록 애굽의 좋은 것으로 주겠다며 내버려 두고 오라고 합니다(19,20절).
고대 근동사회 자료에 의하면, 당시 ‘수레’는 고대 근동 국가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애굽만이 사용했으며 이것을 보냈다는 것은 보낸 자의 신분이 무엇인가를 결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온 애굽이 이스라엘을 애굽으로 오게 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이방에서 사백 년간 객이 되리라고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바로의 마음까지도 주장하시는 것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애굽으로 오면서 바로에게 이런 호의를 받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히려 양식을 구해서 베냐민과 홀로 붙들려 있는 시므온을 구해서 돌아가는 것만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그들이 생각하는 최선의 현실이며 생각의 범위입니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린 현실은 죽은 줄 알았던 요셉을 만나게 되었고, 그 요셉이 총리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셉 덕분에 바로 왕의 환대를 받게 된 것입니다. 형들이 요셉을 만나게 되었을 때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현실은 요셉의 보복입니다. 그래서 형들은 요셉이 자신을 밝힐 때에 놀란 것입니다. 그것이 당연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요셉이 어떤 보복을 해도 야곱의 아들들은 항변할 수 업고 피할 수도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자신이 당한 모든 일을 하나님이 하신 일로 바라봄으로 모든 상황이 우리가 예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간 것입니다.
바로가 요셉의 형제들에게 호의를 베풀었지만 그 호의는 요셉으로 인한 것이지 형제들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이 바로에게 호의를 받고 돌아가는 것이나 요셉에게 한 일에 대해서도 전혀 추궁 받지 아니하는 일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사람 요셉’이 있었던 것입니다.
저들은 받을 수 없는 은혜였고 전혀 예상치 못한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형제들의 행위로는 심판과 보복을 받아 죽어야 하지만 요셉의 용서의 은혜로 살게 된 것입니다. 이 형제들은 곧 ‘나 자신’입니다.
요셉이 자신을 애굽의 주라고 말했는데(8절), 애굽의 주가 된 요셉에게 야곱의 아들들이 잘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요셉은 그들을 여전히 형제로 대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께 잘한 것이 있습니까? 인간으로서 예수님께 잘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제자들조차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버려두고 도망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자신을 버린 제자들을 다시 찾으시고 부르십니다. 때문에 누구도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 앞에서 ‘내가 이렇게 했더니’라는 말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요셉과 그 형제들의 인생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것 하나 그들 뜻대로 된 것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일의 결국은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집니다. 우리 역시 인생을 알 수는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의 뜻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요셉의 인생을 간섭하신 하나님의 뜻은 야곱 가문의 생명을 구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7절).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의해 요셉이 버림받는 고난의 길을 가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요셉은 언약대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며 예표입니다.
요셉과 함께 바로마저 아버지와 가족들로 애굽으로 내려오라 하고는 등, 극진한 대접을 받은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그대로 행합니다(21절).
여기 본문에서 성경 기자는 형제들을 가리키는데 있어서 야곱의 아들들이나 혹은 요셉의 형제들이라 하지 않고 ‘이스라엘의 아들들’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본문 전체의 흐름에서 성경이 무언가 꼭 짚고 넘어가려는 특별한 의미를 전달하고자 함입니다.
그것은 이들이 양식을 얻기 위하여 애굽으로 내려 왔던 것이나 그들의 일가를 애굽으로 데려오기 위해 가나안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단지 가족들을 기근으로부터 살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즉 하나님이 야곱에게 주셨던 ‘이스라엘’이라는 특별한 이름으로서, 하나님께서 열조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말씀을 이루시는 여정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가는 길은 한 가족의 단순한 이민사가 아닌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는 언약사와, 택한 백성들을 향한 구속사의 중요한 사건입니다.
요셉은 바로의 명령대로 수레와 길 양식과 옷을 주되 베냐민에게는 더하여 선물합니다(21,22절). 요셉은 아버지를 위하여 수나귀 열 마리에 애굽의 아름다운 물품을 실리고 또 암 나귀 열 마리에 아버지가 애굽으로 오는 길에 필요한 곡식과 떡과 양식을 실리고 형제들을 보내면서 “당신들은 길에서 다투지 말라”고 당부합니다(23,24절).
요셉은 아버지 집으로 떠나는 노중에서 형제들에게 다투지 말 것을 당부합니다. 그것은 혹시라도 요셉이 형제들에게 준 선물에서 베냐민에게 특별히 더하여 준 것으로 인해 다툴 것을 염려한 듯하며 또한 과거에 요셉 자신을 시기하여 죽이려고 한 것이나 상인에게 판 것 등으로 서로가 잘잘못을 따지고 탓을 하며 다툴까 마음에 걸려 미리 차단한 것입니다.
요셉이 서로 다투지 말라고 한 것은 요셉을 만남으로 주어진 새로운 현실은 죄와 허물을 묻지 않고 덮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세계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덮고 있는 새로운 현실이 예수그리스도의 세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의를 받을 수 없는 우리의 죄를 예수님께 전가시키심으로 우리는 받을 수 없는 호의를 받고 살아가기 때문에, 예수 안에서는 서로를 탓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베푸신 호의에 대해 감사할 뿐입니다
가나안 땅 아버지 집으로 돌아온 형제들은 아버지 야곱에게 애굽에서 요셉을 만난 일에 대하여 알리는데(25절),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어 애굽 땅 총리가 되었더이다”하니 야곱이 그들의 말을 믿지 못하여 어리둥절하였으나(26절),
그들이 아버지 야곱에게 요셉이 말한 그 모든 일들을 말하니 야곱이 자기를 태워 가려고 요셉이 보낸 그 수레들을 보고 나서야 정신이 듭니다(27절). 이에 이스라엘이 말하기를 “족하도다 내 아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으니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고 합니다(28절).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아버지에게 전한 소식은 곧 ‘복음’입니다. 지금까지 요셉이 짐승에게 찢겨 죽은 줄로만 알고 있던 야곱으로서는 아들들의 말이 믿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요셉의 수레를 보고서야 믿으면서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라고 말합니다. 야곱은 그동안 가꾸어 놓은 가나안 땅을 떠나서 그 많은 가족을 이끌고 애굽으로 간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지만 이들은 애굽으로 가야만 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단순히 계속되는 흉년을 피하여 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세우신 언약대로 그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긴다고 하신 말씀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창15:13).
45장 본문을 통한 요셉을 보면서 누군가가 떠오르지 않으신지요? 바로 예수십니다.
유대인들에게 팔리셔서 온갖 고초와 조롱을 당하시다가 언약대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그리고 언약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만왕의 왕으로 좌정하셔서 택하신 당신의 백성들을 부르시고 보호하시며 당신의 나라인 지상천국인 교회로 살게 하십니다. 예수그리스도와 그의 나라에 대한 모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