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절은 7절의 ‘애굽으로 갔더라’의 과정으로서,
“야곱이 유다를 요셉에게 미리 보내어 자기를 고센으로 인도하게 하고 다 고센 땅에 이르니 요셉이 그의 수레를 갖추고 고센으로 올라가서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을 맞으며 그에게 보이고 그의 목을 어긋 맞춰 안고 얼마 동안 울매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가 지금까지 살아 있고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족하도다”(28~30)고 말합니다.
본문에서 ‘~인도하게 하고’는 ‘레호로트(לחורת)’인데, 이 동사는 ‘야라(ירה)’의 사역형입니다. ‘야라’의 기본적인 뜻은 ‘던지다’인데, 이는 행동의 주체에 의해 조종된다는 의미가 강한 단어입니다. 대게 불가항력의 운명에 처하게 될 때 이 동사가 사용됩니다.
야곱이 애굽을 향해 떠나오기는 했으나 이제 그는 그의 아들 요셉의 손에 맡길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바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과 요셉에게 꿈으로 계시하시고 이스라엘을 애굽으로 내려오게 하신 것입니다.
이어지는 본문 가운데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을 맞으며 그에게 보이고’에서 ‘보이고’는 ‘라아(ראה)’라고 하는데 뜻은 ‘증명해 보이다’, ‘인지시키다’, ‘제시하다’ 등입니다.
즉 지금까지 야곱은 죽은 줄로만 알았던 요셉에 대해 아들들로부터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야곱 자신은 추측만으로 온 가족으로 기둥을 뽑아 애굽으로 내려온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야곱에게 살아 직접 나타나 보인 것이며 야곱은 눈으로 직접 확인하여 요셉을 만난 것입니다.
위의 본문에서 야곱은 바로 요셉에게 가지 아니하고 유다를 먼저 요셉에게 보내어 알리게 하고서 고센 땅에 이릅니다. 그 곳에서 그는 짐승에게 찢겨 죽은 줄로 알았던 사랑하는 아들 요셉의 얼굴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언약자손 요셉을 끝까지 보호하여 주시고 지켜 주시는데, 이스라엘은 마음에 두었던 그의 꿈 이야기를(창37:11) 벌써 잊어버리고 이전까지 요셉을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택한 백성은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잊어버리게 되면 두려움과 걱정이 있기 마련입니다.
본문 후미에서는 야곱이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던 아들 요셉을 애굽에서 만나, ‘네가 지금까지 살아 있고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족하도다’라고 하며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기쁨의 감격을 누립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아들 요셉으로 인해 그는 생명을 보존하게 됩니다.
보편적 신자의 생각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생명을 보존하고 구원하실 것이라면 그냥 편안하게 가나안 땅에도 풍년을 주셔서 보호하시지, *왜 이렇게 요셉을 노예로 팔리게 하시고 옥중에서 꿈을 해몽하게 하여 총리로 만드시고, 그리고 온 땅에 흉년을 들게 하여 가나안 땅에서 거주하는 이스라엘을 애굽으로 내려오게 하시면서까지 복잡하게 하시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방식은 인간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며 측량치 못한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납득할 수 있는 구원 방식은 구원될 조건을 인간에게서 찾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실천과 행위를 보고 구원할 자를 구원하시는 것이 모든 인간이 받아들이고 납득할 수 있는 방식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 방식은 인간의 조건을 보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그 어떤 요구 조건이 없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조건을 보지 않으신다는 것은 누구도 하나님의 구원 조건을 충족시킬 사람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조건을 보지 않는 하나님의 구원 방식은 ‘언약’이며, 그 ‘언약’으로 인한 긍휼과 자비입니다. 자기 백성에게 언약을 통한 무조건적으로 베푸시는 은혜와 자비가 구원될 수 없는 자를 구원에 있게 한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이로 인해 그 ‘언약’에 의한 긍휼과 자비를 입었다는 것을 깨달은 자가 하는 것이 ‘오직 감사’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열조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아직 자식이 없는 가운데 찾아오셔서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15:5)라고 언약하십니다.
그리고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창15:13,14)고 언약하셨으며
또한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가나안)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창15:18)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무자한 아브라함에게 하신 이러한 언약을, 아브라함의 조건이나 행위와는 상관없이 때가 되어 성취하십니다. 야곱으로 열 두 아들을 주셔서 이방에서 객이 되어 살게 하시고자 그들 모두를 애굽으로 내려가게 하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사라가 죽을 때 사놓은 가나안 땅의 매장지에 아브라함은 물론이고 이삭과 야곱도 들어가며 훗날 결국 약속의 땅 모두를 얻게 됩니다.
고센 땅에서 아버지 이스라엘을 만나 기뻐한 후 형들과 아비의 가족에게 이르되 “내가 올라가서 바로에게 아뢰어 이르기를 가나안 땅에 있던 내 형들과 내 아버지의 가족이 내게로 왔는데 그들은 목자들이라 목축하는 사람들이므로 그들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를 이끌고 왔나이다 하리니 바로가 당신들을 불러서 너희의 직업이 무엇이냐 묻거든 당신들은 이르기를 주의 종들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목축하는 자들이온데 우리와 우리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하소서”(31~34)라고 대답할 것을 당부합니다.
그렇게 대답하시게 되면 “애굽 사람은 다 목축을 가증히 여기나니 당신들이 고센 땅에 살게 되리이다”(34)라고 합니다. 요셉이 형들과 아비의 가족들이 바로에게 할 말을 입에 넣어 주는 내용입니다. 고센 땅은 나일강 하류의 삼각주 지역의 땅으로서 좋은 목축지이기에 이스라엘 자손이 목축하며 살기에 적합한 곳입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이 가까워서 돌아가기에 좋은 위치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그 곳을 이스라엘 자손들의 거처로 정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좋은 위치보다도 본향이며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떠나기에 적합하다는 말이며 출애굽을 위한 지역입니다.
그런데 애굽 사람들이 목축을 가증히 여기므로 요셉의 계획이 이루어질 가능성을 짙게 하여 줍니다. 그래서 요셉은 형제들에게 이 지역을 바로에게서 얻을 것이다고 말을 합니다. 이와 같은 모든 상황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비하여 놓으신 섭리입니다.
이스라엘에게서의 목축은 단순한 직업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목축을 위한 목적으로 좋은 거처인 고센 땅을 구한 것이 아닙니다. 고센 땅은 언약백성들이 잠시 머물 장소였으며 그래서 요셉과 야곱의 입술이 일치했으며 그곳은 출애굽을 위한 자리입니다.
그리고 목축은 선조의 것이며 ‘하나님께 대한 제사’를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총리 요셉으로 인한 풍요와 배부름을 구하기보다도 목축을 유지한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요셉은 여호와 하나님을 확신하고 소유한 백성입니다. 그래서 풍요의 땅인 애굽에 눌러 앉으려는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 땅에서는 나그네 인생임을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은사를 부정하며 애굽 땅에서의 좋은 자리를 얻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곧 언약대로 떠날 것과,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에 가장 적합한 지역을 선택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지체들은 세상의 것을 쓰레기처럼 여깁니다. 세상에 마음을 뺏기지 않고 하늘 양식과 그리스도의 남은 사역에 온 몸과 마음을 다하고자 주어진 삶에 충성을 다할 뿐입니다. 세상은 나의 집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