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는 “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가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요 이들 후의 네 소생은 네 것이 될 것이며 그들의 유산은 그들의 형의 이름으로 함께 받으리라”(5,6절)고 요셉에게 말하면서, 그의 두 아들을 자기 것으로 삼아 가나안의 기업을 주겠다고 합니다.
‘내 것이 된다’는 것은 야곱의 아들로 삼겠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야곱은 왜 굳이 요셉의 두 아들을 자신의 아들로 삼는 것일까요? 그것은 야곱이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아들로 삼음으로 장차 이스라엘이 열 두 지파에 그 이름이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땅에 들어갔을 때 그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됩니다.
요셉의 두 아들이 열두 지파 중에 므낫세 지파와 에브라임 지파의 조상이 되고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각기 기업을 받았다면 결국 요셉은 다른 형제들에 비해서 두 몫을 받은 결과가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장자권이 요셉에게로 넘어갔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당시 근동 사회의 상속법으로 볼 때 장자는 다른 아들의 유산의 두 배를 받았습니다(신21:16,17).
이것을 역대상 5장 1,2절에서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의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가서 족보에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되지 못하였느니라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에게서 났으나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으로 장자의 명분은 혈통의 순서대로 이어지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장자의 명분은 인간의 조건과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야곱은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할 때 오른손을 차남인 에브라임 머리 위에 얹는 것으로 보여줍니다. 이것은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야곱의 자식으로 삼는 것에서도 드러납니다.
창세기 41장 45절에 보면 바로가 요셉에게 애굽 제사장의 딸 아스낫을 주어 아내로 삼게 합니다. 그리고 아스낫에게서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태어납니다. 그렇게 보면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순수한 이스라엘의 혈통이 아닌 것이 됩니다.
그런데도 야곱이 그들을 자식으로 삼았고 결국 이스라엘 지파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일컫는 이스라엘 또한 인간의 혈통이나 조건과는 무관함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열두 지파는 정통성이나 참된 신앙을 계승 받은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에브라임이나 므낫세를 제외한 다른 지파의 조상이 되는 요셉의 형제들도 요셉에 대해 할 말이 없는 부끄러움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 할 말이 없는 존재로 출발합니다. 하지만 이 같은 사실을 잊어버리고 자신들의 정통성과 신앙을 자랑하는 길로 가게 된 것이 이스라엘이기도 합니다. 에브라임과 므났세 입장에서 생각해도 다르지 않습니다.
혈통을 따진다면 그들은 이스라엘에 속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요셉에게 속한 요셉의 아들이라는 것으로 야곱에게 ‘내 것이라’는 축복의 선언을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땅의 기업을 받지 못하는 레위 대신에 하나님의 언약을 근거로 삼아, 자기의 손자인 요셉의 두 아들을 자기의 아들로 삼고서 언약된 가나안의 열두 기업 가운데 그 형제들과 함께 기업을 받게 된다고 한 것입니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요셉의 아들들이지만 이스라엘이 자기의 아들로 삼았기 때문에 요셉은 두 지파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요셉에게 어미 라헬의 장지에 대해서 “내게 대하여는 내가 이전에 밧단에서 올 때에 라헬이 나를 따르는 도중 가나안 땅에서 죽었는데 그 곳은 에브랏까지 길이 아직도 먼 곳이라 내가 거기서 그를 에브랏 길에 장사하였느니라(에브랏은 곧 베들레헴이라)”(7절)라고 말해 줍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요셉으로 하여금 언약의 땅을 사모하게 하여 그 자손으로 반드시 돌아 갈 수 있게 하려는 생각에서 알려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