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절부터 22절까지의 말씀은 야곱이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축복을 베풀어 주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자기 열조의 하나님, 곧 자기를 기르신 하나님께 요셉을 위하여 두 아들에게 복 주시기를 기원하는데, “그가 요셉을 위하여 축복하여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께서 이 아이들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이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15,16절)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로 하여금 당황하게 하는 것은, 야곱이 요셉을 위하여 두 아들에게 복 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하는 내용 때문입니다. 일반 우리 성도들의 간구 내용과 너무나 다르며 이해할 수 없고 우리의 가슴에 와닿지 않는 복의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대다수의 교회와 성도들의 간구 내용은 자신을 위주로 하며 그리고 자신의 성공으로 인한 자기 확장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고 기대하는 축복과는 거리가 먼 내용으로 간구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요셉을 위하여 비는 복 첫 번째는,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그 복을 요셉의 아들들에게도 같은 복으로 축복을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을 출생 때부터 지금까지 기르신 하나님이 동일한 뜻과 방식으로 요셉의 아들들을 간섭하시고 기르시는 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말하며 빈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인생의 진정한 주인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큰 은혜를 입은 것이며 축복입니다.
야곱도 과거에는 자신이 장자의 직분을 뺏으려고 발버둥을 쳤었으며, 형 에서가 사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올 때에도 가장 뒤에서 자신만은 죽음을 모면하려는 자기 위주의 삶이었으나, 뒤늦게서야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위하여 언약대로 이끄시며 만사를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위의 본문, 야곱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복에 대한 설명에서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정하는 단어 하나가 있는데 그 단어가 ‘기르신’입니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로 ‘하로에(הרעה)’이며 뜻은 ‘기르다’, ‘풀을 뜯기다’, ‘방목하다’ 등으로 쓰이는 ‘라아(רעה)’의 분사형 앞에 ‘하(ה)’가 붙은 형태로서 그 뜻은 ‘그 기르는 자’ 즉 ‘그 목자’입니다. 이는, 목자되시는 하나님께서 양과 같은 자신을 기르셨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이어지는 16절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과 연결됩니다. 목자는 양의 모든 삶과 함께 하며 보호하는 일을 합니다. 양은 목자가 없으면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가축화된 동물이므로 모든 환난을 목자가 책임지게 됩니다.
야곱은 양과 같은 자신을 하나님께서 출생에서부터 지금 이 시간까지 기르셨으며 구원하셨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고백을 이스라엘의 왕 다윗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이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기를 축복을 하는 것입니다.
이는, 요셉의 아들들에게 열조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자신 야곱의 이름으로 불려지고, 열조의 이름이 아들들에게서 살아 있게 하여 주심으로 말미암아 자손이 약속의 땅에서 번성되기를 축복한 것입니다. 즉 열조의 복이 계승되기를 빈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곁에 있는 요셉은 아직 하나님의 축복의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예전의 야곱처럼 하나님의 축복은 장자에게 주어질 몫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손을 바꾸어 축복하는 것을 보고서 아버지 야곱의 손을 다시 바꾸기 위해(17절)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아버지여 그리 마옵소서 이는 장자이니 오른손을 그의 머리에 얹으소서”(18절) 라고 말합니다. 손을 바꾼 야곱의 축복이 요셉의 눈에 부당하게 보인 것입니다.
요셉은 아버지에게 ‘그리 마옵소서’라고 하는데 여기서 ‘그리’는 ‘절대 금지’의 의미가 있는 단어입니다. 즉 안된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이미 복을 빌었음에도 깨닫지 못하고서 자신의 뜻을 관철하려고 다급하게 이스라엘의 복의 계승을 막은 것입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큰 아버지 에서의 장자권을 가진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아직도 장자인 므낫세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그 사실을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야곱은,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의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그 날에 그들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이스라엘이 너로 말미암아 축복하기를 하나님이 네게 에브라임 같고 므낫세 같게 하시리라 하며 에브라임을 브낫세보다 앞세웠더라”(19,20절)고 요셉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사람의 생각과 다르셔서 차자인 에브라임을 장차 북쪽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장자 지파로 사용하시려는 뜻입니다. 그래서 분열왕국 이후에는 북쪽 이스라엘을, 성경은 ‘에브라임’으로 종종 칭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본래 요셉이 생각했던 축복은 장남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축복은 자격과 권한이 있는 사람이 받는다는 것이 요셉의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의 손은 오른손을 차남의 머리에 얹음으로써 하나님의 축복은 인간의 생각이나 자격과 권한이라는 조건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 것입니다.
야곱은 축복에 대한 이러한 내용을 그의 삶의 여정을 통해 배웠습니다.
무엇 하나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았던 삶 가운데서, 삼촌 라반을 떠나 집으로 향할 때에 삼촌 라반의 위험 속에서 자신을 보호하시며 그리고 형을 맞이하기 전 천사를 만나 씨름을 하게 되면서 다리를 절게 됨으로 힘을 잃어버리고, 그리고 형 에서에게서 구원을 얻음으로 말미암아 축복에 대한 자신의 모든 생각이 틀렸음을 배우게 된 것입니다.
복에 대한 것을 깨닫게 된 야곱은 앞서 15,16절에서 ‘그가 요셉을 위하여 축복하여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께서 이 아이들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이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하며 복을 비는 것입니다.
야곱이 임종을 앞두고 아들 요셉에게 ‘자신은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면서, 형에게 쫓겨 라반의 집으로 도망하던 중 겪었던 루스에서의 경험을 이야기해 줍니다.
즉, 자신에게 주어진 사건과 환경과 고난과 시험들이 결국 야곱 자신이 하나님을 찾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사건들과 상황들에 개입을 하심으로 하나님의 존재와 믿음을 선물하셨고, 결국에는 야곱 자신으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항복과 주권을 인정하고 순종하는 자로 완성해 가셨다는 것입니다.
지난 날들을 돌아보니 그것이 하나님의 끊임없는 복의 순간들이었으며 이로 인해 자신은 하나님께로부터 복있는 자였음을 아들 요셉에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셉의 아들들에게 비는 복에서 그것이 그대로 나타납니다.
진정한 복이란, 자신의 야심과 욕망과 비전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비록 그러한 것들이 하나님에 의해 꺾이는 험악함을 경험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로 지어져 가는 것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즉 복이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만 의지하며 하나님께만 순종하는 자로 완성이 되는 것임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위의 본문에 대하여 신약성경 히브리서 11장 21절에서 기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요셉이 아들들을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팡이라는 단어 앞에 ‘그’라는 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팡이에 특별한 의미가 있음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야곱이 아들들을 축복한 후 그 지팡이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경배를 드렸다는 데서, ‘축복과 지팡이와 경배’가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인가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지팡이를 의지하여 축복을 하고 지팡이를 의지하여 하나님을 경배한 것은, 야곱에게 진정한 복은 자기의 두 다리로 펄펄 뛰며 자신의 욕망을 성취하려 애쓰던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환도뼈를 가격 당한 후 지팡이를 짚고서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한 발 한 발 걸었던 그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자녀들을 축복하는데 굳이 지팡이를 의지하여 축복을 했고 그 지팡이를 꼭 붙들고 하나님께 감사의 경배를 드렸던 것입니다. 야곱에게 있어서는 바로 그 지팡이가 복이었으며 그 지팡이 때문에 자신의 꿈과 야망이 아닌, 다른 말로 ‘나’라는 우상이 아닌,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굳이 야곱의 경배에 ‘그 지팡이’를 끼워 넣은 것입니다. 믿음의 선진들을 소개하는 그 대목에서 ‘믿음은 지팡이를 의지하는 것’임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지팡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하나님의 축복하심은 인생의 순서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또한 장소와도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고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도 없습니다. 무지한 자와 유식한 자의 차이도 없습니다. 재력과 지혜가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차이 역시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하나님의 뜻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언약대로 그리스도에 의해 하늘나라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거저주신 은혜’라고 합니다.
성경은 철저하게 인간들의 생각을 깨부숩니다. 인간들 스스로는 사람 사이에 계층과 차이를 두려고 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상대방 위에 서려고 하고 자신의 말에 복종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나는 언제나 상대방보다 잘되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나의 말을 인정해 주어야하고 내 말에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위선을 하고 외식을 하고 자신의 부족함을 감추려고 애씁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
그리고 이스라엘은 요셉에게 이어서 이르기를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려니와 내가 네게 네 형제보다 세겜 땅을 더 주었나니 이는 내가 내 칼과 활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서 빼앗은 것이니라”(21,22절)고 말을 합니다.
여기서 ‘세겜 땅을 더 주었나니’라는 것은, 야곱이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돌아오다가 세겜 성 앞에 머물게 되었을 때에 딸 디나가 강간을 당한 사건으로 인하여 시므온과 레위의 간계로 그 성을 쳐서 빼앗은 것을 말합니다(34:25~29 참조).
위의 구절에서,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려니와’라는 것은, 야곱이 곧 죽음을 앞둔 인생 말년의 총체적 자기 신앙이 드러내는 고백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다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신다는 신앙입니다. 이 신앙을 아들 요셉에게 계승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게 하신 것이며 이 줄기를 타고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위의 본문에서 ‘돌아가게 하시려니와’는 원문에서 ‘슈브(שׁוּב)’인데, 뜻은 ‘(되)돌아가(오)다’, ‘회복하다’ 등입니다. 여기서 ‘하시려니와’는 미래종결형 동사로서, 반드시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게 한다는 확신을 나타냅니다. 야곱은 하나님으로부터 이러한 확신이 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약하시고 그 언약대로 이루심을 눈과 몸으로 확인하고 믿어지므로 인해 확신이 온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에 보내는 서신에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들음으로서 믿음이 발생하게 됩니다.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3장14~15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