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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으로 넘어갑니다. 1절에서 3절까지의 말씀은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며 그 날을 복 주어 거룩하게 하셨다는 내용입니다.
1절에서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 영원 세계에서의 계획과 작정 그리고 뜻대로 다 이루셨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여섯째 날까지 모두 이루시고 그리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는 것을 2절에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여기서 앞서 정리한 것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강조하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창조에서의 첫째 날부터 셋째 날까지와 넷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의 날(日)의 차이입니다.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계시의 섭리를, 피조된 인간의 지식과 개념으로 단정하기보다는 성경에서 말씀하는 대로 하나씩 해석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셨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 이외의 모든 우주와 만물은 일곱째 날 이전에 모두 완전하게 창조된 것입니다. 피조 세계에 존재하는 어느 것 하나라도 그날 이후에 창조되거나 진화 과정을 거쳐 새로운 것으로 생겨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2절)는 것은 만물을 창조하시는 사역을 더 이상 하시지 아니하시고 쉬신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을 주관하시며 섭리하시는 사역까지 쉬신다는 뜻은 아닌 것입니다.
영원자존하신 하나님은 영원무궁토록 영원한 일을 주관하시며 섭리하시는 분이십니다. 요한복음 5장 17절을 보면,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을 거룩한 안식일이 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만이 안식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창세 전에 작정된 자기 백성들도 안식을 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의 안식은 하나님께서 첫 아담에게 주시는 복으로서,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이루어 주실 영원한 안식의 모형과 언약적 사건이기도 합니다.
3절에,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복’과 ‘거룩’ 그리고 ‘안식’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여기서의 ‘복’은 앞서 1장28절의 ‘복’과 다른 것일까요?
먼저, ‘복’과 ‘안식’은 같은 의미이며 이 단어들이 의미하는 바는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종국적으로 성취하시는 것이며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원히 누리는 삶을 뜻합니다. 또한 그 나라의 정체성은 거룩입니다.
그리고 완성하시는 주체는, 하나님께서 언약하시고 보내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즉 복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시며 그로 인해 그의 나라인 천국에서 그의 백성들의 삶이 거룩하고 영원한 안식이다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하나님의 복의 연결 창1:28 → 창2:3 → 창9:1→ 창12:2→ 창22:17→ 창27:27 |
그래서 이 ‘복’은 1장28절의 ‘복’과 동일한 것입니다. 1장28절에서, 하나님이 복을 주시며 언약하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나라)’는 말씀과, 2장3절에서 말씀하는 ‘복’과 그리고 이어지는 ‘안식’, 이 세 가지는 곧, 〈모형적〉으로 아브라함과 다윗에 의해 세워지고 성취되는 이스라엘 나라를 가리키고 있으며,
〈실체적〉으로는, 마태복음 1장1절에서 밝히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약대로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오심으로 말미암아 세워지는 완전하고 영원한 ‘나라’와 ‘복’ 그리고 예수 안에서 그의 백성들이 누리게 되는 ‘안식’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위의 1장과 2장의 세 가지 〈나라〉 〈복〉 〈안식〉은 이 땅에서 주어지는 것들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율법대로, 언약대로 보내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언약입니다.
결국 이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신부된 교회가 영원히 누릴 복과 안식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앞으로 계속 이어지는 내용들로 계속 확증될 것입니다.
그래서 3절 서두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라는 말씀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창조 사역을 마치신 그 일곱째 날을 일방적이며 절대적인 복으로 주셔서 그 날을 복되게 하셨다는 말씀이며, 이는 하나님께서 ‘복’의 본체가 되시며 구속주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장차 보내실 것에 대한 언약과 모형이며 그림자로서의 예표입니다.
2장 4절을 이어가기에 앞서 먼저 살펴볼 내용이 있습니다. 1장을 시작하기 전 서두에서 네 가지 질문을 드리며, 이같은 질문을 머릿속에 기억하고 창세기 공부를 하면 좋겠다고 말씀드린 것 기억하시는지요?(p5)
그 중 첫 번째가 죄란 무엇인가? 입니다. 곧 선악과는 무엇인가와 같은 맥락입니다. 왜냐하면 인류 최초의 인간 아담에게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고 규정된 사건’이 ‘선악과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죄인들의 죄를 대속하시는 구속주는 언제 어떻게 준비되셨으며 어떻게 확인되어서 죄인들이 믿게 되는 존재가 되었는가? 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그리스도)가 예수님이시다’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일입니다.
‘죄란 무엇인가’와 ‘구속주’는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왜냐하면 구속주는 죄인된 자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생각하시면서 다음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4절부터 25절까지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그에게 금령을 주시며 여자를 만들어 주시는 섭리 내용인데, 4절부터 7절까지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지어 생기를 넣어 생령이 되게 하신다는 내용입니다.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역이니~”(4절)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창조하시고 안식하신 창조 사역의 역사를 조금 구체적으로 밝힌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에서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십니다. 이전까지의 말씀에서는 모두 ‘하나님’이라는 일반명사 호칭을 사용하셨으나 본절에서 처음으로 ‘여호와’라는 고유명사 호칭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 말씀에서 종합된 ‘여호와’의 의미는, ‘언약하시고 그 언약대로 이루시는 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당신의 ‘여호와’ 이름대로 역사섭리 가운데 언약하시고 그 언약을 성취하시므로 증거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다음 5절과 6절 말씀은 새로운 창조 기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 여섯째 날에 사람을 만드시려던 때의 땅의 상태를 설명하여 주시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기 전에는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경작할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다고 하십니다. 즉, 식물이 충분히 자랄 수 있는 부족함없는 준비가 되었으나 아직 사람이 창조되지 않았으므로 경작이 시작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됩니다(7절).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방법을 조금 구체적으로 설명하시는 내용입니다.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生氣)를 그 코에 불어 넣으니까 생령체(生靈體)인 사람이 됩니다. 이때의 사람은 현재의 타락한 모습의 사람이 아닙니다.
처음 지음을 받은 사람은 생령으로서의 사람이지만 현재 자연인은 타락으로 인하여 영적으로 죽은 육체적인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따먹고 저주를 받아 영적으로 죽었으니까 현재의 타락한 인간은 죽은 영으로서의 인간입니다. 그러니까 살아 있으나 실상은 죽은 자로서의 인간입니다(엡2:1).
8절부터 17절까지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에덴 동산의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명하시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으신 사람으로 하여금 거주하게 하신 동산의 환경을 설명하여 주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8,9절)
본문에서 ‘동산’은 히브리어로 ‘깐(גן)’이라고 하는데 뜻은 ‘울타리를 치다’, ‘보호하다’라는 뜻으로 ‘울타리가 있는 정원’이란 의미를 지닙니다. 따라서 이 말은 에덴이 다른 지역과는 구별되는 장소로서 분명한 경계가 있는 별도의 장소로서(3:24 참조) 하나님이 특별한 보호의 손길이 미쳤던 곳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거기에 ‘그 지으신 사람’을 두신 것입니다.
에덴동산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신령한 새에덴의 모형입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실현 장소입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통치와 은혜가 충만한 장소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거기에 두시고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십니다. 즉 이곳은, 모든 것이 공급되는 복된 장소임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동산 가운데에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두십니다.
여기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사망과 심판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심판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생명 나무’는 생명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영생을 주시는 왕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이를 이어보면, 십자가에 죽음을 치르시고 대신 살아나셔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실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입니다.
그리고 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네 근원이 되었습니다(10~14절). 이는 장차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예표하며, 생명수 강이 흐르며 생명 나무가 열매를 맺는 새하늘과 새 땅(계21:1)을 바라보게 합니다. 이 점에서 에덴동산은 성전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으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인 에덴동산에서 왕으로서의 다스림과 동시에 섬기며(경작하며, 아바드עבד) 지키게 하시는 직분을 주십니다(15절).
이것이 아담의 제사장직입니다. 이는 장차 언약 백성들을 섬기러 오시는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을 예표합니다. 아담은 왕이면서 동시에 제사장직을 수행합니다. 이 때문에 에덴동산을 ’정죄의 죽음‘과 ’속죄의 용서, 즉 새 생명의 회복‘이 이루어지는 성전의 원형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택한 성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영원한 생명을 주신 분이십니다.
16절과 17절에서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으면 죽으니까 먹지 말라고 명하시는 내용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이 선악과 금령은 율법언약의 원형입니다. 다시 말해 선악과 금령은 하나님 나라를 통치하는 방법, 즉 통치법으로 규정합니다. 이는 이스라엘 역사에서는 모세 언약의 율법으로 구체화합니다. 하나님은 자신만이 만물의 통치자이심을 온 천하에 천명하고, 만약 하나님이 명하신 법을 어기게 되면 사망에 처하게 됨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사망을 상징하는 선악과뿐만 아니라 생명을 상징하는 생명 나무를 동시에 주셨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은 아담으로 하여금 생명의 은혜를 깊이 깨닫게 하기 위하여 사망 가운데 두신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먹으면 죽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왜 나게 하시고 사람으로 따먹지 말라고 하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애당초 그 나무를 나게 하지 아니하시면 사람이 따먹지도 아니하고 타락하지도 아니하였을 것이 아닙니까?
이러한 의문은 창세기를 연구하는 자라면 누구나 제일 먼저 가지게 되는 원초적인 질문일 것입니다. 이러한 의문에 대한 답은 반드시 찾아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이어지는 성경 전체의 뜻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나게 하여 아담에게 먹지 말라는 금명을 주신 것은, 창세 전에 작정하신 뜻대로 모든 일을 섭리하시기 위함입니다. 창세 전에 작정하신 하나님의 뜻은 첫 아담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된 것같이 아담 예수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롬5:19, 엡1:7~9).
즉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에 가두어 두셔서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고 하시는 것입니다(롬11:32).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첫 아담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둘째 아담 예수님을 통하여 긍휼을 베풀어 주시려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나게 하여 아담에게 먹지 말라는 금령을 하신 것은 첫 아담을 비롯한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에 가두어 두시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순종하지 아니한 것은 하나님의 작정하신 뜻대로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첫 아담에게 복을 주시면서 은혜로 나라 세우실 것에 대한 세 가지 언약을 세워주시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나게 하여 그 열매를 따먹지 말라는 금령을 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첫 아담이 금령을 어기게 하여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에 가두어 두시고 첫 아담에게 복주시며 은혜로 세운 나라에 대한 언약을 둘째 아담 예수를 보내어 이루어 주심으로 긍휼을 베풀어 주시려는 것입니다.
선악과 명령은 하나님이 왕적인 ‘심판자이심’을 확증하는 것이며 그리고 ‘인간의 원죄’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 앞에서의 죄의 출발이요 죄의 성질이기도 합니다.
죄의 출발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금령하신 선악과를 불순종하며 따먹음으로 선악을 알고 판단하며 하나님에게서 떠남으로 시작되었고 이어집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기 전에는 선악(善惡)을 몰랐으며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고 순종하며 함께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법을 떠나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인해 죄인이 되고 선악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선과 악을 알게 되고, 그것으로 하나님만의 고유 권한인 판단과 심판하심을 인간이 자기중심에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마저도 판단하게 됩니다(롬2:1,3).
불순종에 의한 선과 악을 아는 지식으로 인간 자체가 ‘죄(원죄)인’이 되었고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가 되었습니다. 【생령체〈生靈体〉에서 사영체〈死靈体〉가 됨】
여기서 두 가지를 기억했으면 합니다. 첫째는, 인생은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범죄). 성경은 아담(원죄) 이후로 모든 인생은 죄를 가지고 태어남을 말씀합니다(시51:5). 사영체가 된 인간이 낳은 인간은 역시 죄인인 것입니다.
둘째는,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고 그리스도 외에는 해답이 없습니다. 사영체가 된 인간에게는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새롭게 하실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인이 되었고 타락했으므로 인간 자신이 왕이 되었습니다. 모든 것으로 나 자신만을 위하고 내 중심과 나 위주로 생각합니다. 또한 육신을 위해 살고 육신에 빠져 살아가며 육체의 힘의 원리대로 살아가는 자가 됩니다. 그리고 창조주시며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은 없고 하나님께서 거저 주신 은혜를 무시하고 빛을 거부하게 됩니다.
성경은 타락하여 육신에 속한 자들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는 자’, ‘사람의 딸들’,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자’, ‘육에 속한 사람’, ‘불의를 따르는 자’ 등입니다. 육은 육이요 영은 영입니다. 육은 육을 낳고 영은 영을 낳으므로 육에 속한 자가 영적 열매를 거둘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둔갑을 잘하고 외식을 하여도 하나님 앞에서는 드러납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판단은 불꽃 같은 눈을 가지시고 어제와 오늘과 내일을 아시는 주께서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일은 육신의 열매를 맺으며 영의 일은 영의 열매를 맺습니다.
18절부터 20절까지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홀로 있는 아담을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려 하시고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새를 지어 아담으로 이름을 짓게 하시는 섭리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독처하는 것을 좋지 못하게 여기시는 것은(18절) 하나님 만이 홀로 자존하시는 절대자이시기 때문입니다(출3:14). 그리고 아담이 독처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복주시며 아담에게 명하신 나라에 대한 언약이(창1:28) 성취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들짐승과 새를 사람과는 달리 흙으로만 지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은 흙으로 지으시고 생기를 불어 넣어 생령체가 되게 하셨으나 짐승은 흙으로 지으셔서 사람에게 인도하여 이름을 짓게 만드셨습니다(19절).
이와 같은 사람과 짐승은 근본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결과도 서로 다른 것입니다.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전3:21).
21절부터 25절까지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담의 갈빗대를 취하여 여자를 만들어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는 섭리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20절) 그를 깊이 잠들게 하시고 그의 갈빗대 하나를 취하여 사로 대신 채우십니다(21절). 그리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셔서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는데(22절) 이 여자를 본 아담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릅니다(23절).
앞서 모든 들짐승과 새의 이름을 지은 아담이 지었습니다. 이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셨으므로 아담이 부르는 이름대로 곧 그 이름이 되었습니다(19절).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끌어 온 하와도 아담은 ‘여자’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잠들게 하고서 하신 일들에 대해 정확하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아담에게 그대로 전달되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23절에서 아담이 여자에 대해 하는 고백은, ‘하와는 자신과 하나다’는 것입니다. 아담의 몸으로 하와를 만들었으므로 그 역시 아담이기도 합니다. 이는 결코 하나라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 관계는 교회의 시작이요 교회의 실체요 교회의 본질입니다. 즉 이 하나 됨은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신부된 교회의 모습입니다.
이 하나 됨은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몸된 교회의 모습입니다. 세상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결혼해도 각각으로 두 명이라고 표현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법은 하나입니다. 신랑되신 예수님과 신부된 교회가 자녀를 생산하여서 셋이 되어도 역시 하나입니다.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모두가 사랑으로 하나가 된 나라입니다.
또한 신랑과 신부에 의해 자녀가 생산되고 번성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아니하다고 하시며 하와를 산 영이 된 아담에게서 만드십니다. 여자를 아담의 몸에서 만드셨다는 것은 한 몸이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여자로 인하여 아담과 한 몸인 관계를 만드신 하나님께서는, 장차 모형적으로 만드시는 이스라엘과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에 대한 섭리를 모두 보여주신 계시입니다. 즉 신랑인 아담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며 신부인 하와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에 의해서 세워지는 교회에 대한 모형입니다.
2장까지는 아직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지 아니한 생령체의 상태입니다. 이러한 이들에게 하나님은 장차 만드실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약속하십니다. 이와 같이 신부를 신랑의 몸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곧, 신부된 교회(성도)가 예수의 씨로 거듭나서 한 몸이 될 것에 대한 모형으로서의 예표요 그림자적인 언약입니다.
그리고 이 한 몸의 관계는 후에 어떠한 일이 발생하고 문제가 생겨도 끊어지거나 떨어지지 않는 관계임을 보여줍니다. 사람이 자신의 어느 한 지체가 죄를 지었다고 끊어 버리는 자는 없듯이 말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아마도 얼마 지나지 않아 남아 있는 지체는 하나도 없어질 것이며 곧 공중분해가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관계에 대해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교회에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24절에서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 하신 언약대로(1장28절) 아담의 자손을 번창하게 하여 주시려고 아담에게 여자를 만들어 아내로 주어 한 몸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섭리는 장차 보내시는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지체인 지상 교회가 한 몸이 되게 하실 것에 대해 언약하여 주시는 계시적 사건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엡5장31절)라는 말씀으로 본문을 인용한 바 있는데, 이 내용을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지체인 성도가 교회를 이루는 원리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담을 지어서 그의 갈빗대로 하와를 만들어 한 몸을 이루게 하시는 섭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택한 백성을 불러 그리스도와 한 지체를 이루게 하여 주실 것을 언약하시는 계시 섭리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룬다’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를 떠나 아내인 지상 교회와 한 몸을 이루실 것에 대한 언약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도의 가정을 교회로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에덴동산에 아담의 가정은 인류 최초의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가정과 교회는 아주 밀접한 관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가정생활을 통하여 교회의 비밀을 많이 터득하게 됩니다.
그 당시는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습니다(25절). 이들은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말씀따라 살았다는 의미입니다. 선악은 하나님의 것이었으므로 피조된 이들은 알지 못하였으며 자신들의 벌거벗음에 대해서도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고서 자신들의 벌거벗음에 대해 부끄러워하고 가리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