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 백수의 전형적인 모습
해가 중천에 뜰 즈음 일어난다. 대충 물만 묻혀 단장을 마치고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밥을 먹는다. (컴을 켜거나) 담배와 약간의 돈을 들고 피시방에 간다. 해가 떨어질 때까지 게임을 한다. 해가 떨어져도 게임을 한다. 허기가 지면 라면을 클릭! 뿌옇게 날이 밝아오면 귀가한다. 식구들이 일어나기 전 자리에 눕는다.
백수(白手)
특별히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는 사람. ‘백수’의 문헌적 기원을 추적해보려 했지만, 1924년 문예동인지 <백조>에 실린 김기진의 시 ‘백수의 탄식’ 이전의 표현은 찾아볼 길이 없다. 물론 ‘백수의 탄식’ 내 白手도 우리가 알고 있는 백수완 뉘앙스의 차이가 있지만 어쨌거나 문헌 상 등장하는 (내가 알고 있는) 최초의 표현이다.
고문헌 상 백수 이미지에 부합되는 표현은 ‘한량(閑良)’이다.
한량은 일정한 직업 없이 돈 잘 쓰고 풍류를 즐기는 사람이다. 조선 초기에는 관직을 가졌던 자로서 향촌에 거주하는 유력계층, 조선 중기 1653년(효종4)이후에는 벼슬하기 이전의 무인을 나타내는 호칭. 벼슬하기 이전의 문인을 의미하는 유학(幼學)과 대비되는 의미로 쓰이게 되었다. 밑줄 그은 돈 잘 쓰고 풍류를 즐기는 부분에서 보편적 백수보다는 상위 스탯에 위치해 있지만, 부모-찬스를 보유한 우리시대의 another 레벨- 금수(金手)를 생각해보면 한량을 백수의 유의어로 보아 큰 무리가 없다.
백수의 제일 충족 요건
특별히 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특별히’다. ‘특별히’가 아니란 것은 ‘해도 그만이고 안 해도 그만’이란 의미다. 백수도 여러 가지 일을 한다. 늦잠 자는 것도 일이고, 게임하는 것도 일이고, 밤을 새는 것도 일이다. 그렇지만 안 해도 그만이기 때문에 ‘특별히’에 해당하지 않는다. 특히 한량에 정확히 부합하는 금 수저 백수- 금수에게 ‘특별히’란 귀차니즘이고 스트레스다. 레저는 즐기는 것이지 하는 것이 아니다. 골프/승마/헬스 등을 특별히 해야 한다면 그 얼마나 피곤할 것인가. 보편적 백수에겐 다른 얘기가 될 수 있겠지만. ㅠ.ㅠ
한편 1백 년 전 백수의 모습은 어땠을까?
기원이 된 시 ‘백수의 탄식’을 보면
카페 - 의자에 걸터 앉아서/ 희고 흰 팔을 뽐내어 가며/ <우·나로-드!>라고 떠들고 있는/
60년 전의 노서아 청년이 눈 앞에 있다……// Cafe Chair Revolutionist,/ 너희들의 손이 너무도 희고나!
특별히 하는 일 없이 카페에서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다. 흰 손을 하고. 알다시피 당시는 일본 제국주의가 한창인 시절. 사명감을 가진 조선 청년으로 만주 등 국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게 아니라면 번민이 많았다. 먹물 좀 만진 이들은 더욱 그러했다. 국내에선 의기를 펼치기 어려운 상황이었으니까. 그저 카페에 죽치고 앉아 얼굴만 쓸어내리고 있는 게 고작이었다. 뭐라도 해야 한다는 자괴감에 우·나로-드! 계몽운동이나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 시절 또 다른 시인 정지용의 시 ‘카페 프란스’에서도 백수의 모습이 포착된다.
옮겨다 심은 종려나무 밑에/ 비뚜루 선 장명등,/ 카페 프란스에 가자.// 이놈은 루바쉬카/ 또 한놈은 보헤미안 넥타이/ 삐쩍 마른 놈이 앞장을 섰다.//
특별히 할 것도 없는 먹물들이 루바쉬카를 입고 보헤미안 타이를 매고 종려나무에 장명등 불빛이 내려앉는 카페에 죽치고 있다. 차 내오고 말 상대 해주던 울금향 아가씨는 ‘나는 자작의 아들도 아무것도 아니란다. 남달리 손이 희여서 슬프구나!’ 궁상이나 떨고 있는 모습에 곧 흥미를 잃고 졸고 있다.
팔팔한 나이의 백수가 궁상 떠는 모습은 그로부터 50년 후에도 마찬가지다.
김수영 시 ‘그 방을 생각하며’를 보면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일하라 일하라 일하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나의 가슴을 울리고 있지만/ 나는 그 노래도 그 전의 노래도 함께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독재의 암흑기에 백수가 할 수 있는 건 여전히 많지 않다. 투사가 되지 못한 자괴감에 녹슨 펜을 던져버리고 방이나 바꾸는 정도로 울분을 해소하고 있다. 전형적인 먹물 백수의 모습이다. 물론 자괴감조차 못 느끼거나 변절자 김기진처럼 아예 잘못된 길로 들어서는 모습보다야 덜 민망하겠지만.
살펴보니 외관적으론 50년 전이나 100년 전이나 지금의 백수와 별반 차이가 없다. 그럼 내면적으론? 다시 말해 왜 그들은 백수가 되어야 했나? 100년 전엔 나라가 없어서, 50년 전엔 자유가 없어서. 그럼 지금은?
후~ 여기서부턴 어려워진다.
나라도 있고, 자유도 있는데 여전히 백수가 많다. 카페나 방구석 대신 피시방에 앉아 밤을 새는 젊은이들이 넘친다. 독립을 하고, 민주화를 이루고, 먹고 살만해졌지만 백수에게 세상은 딱히 달라진 게 없다. 구조적 모순에 의한 비자발적 백수에게든, 혹은 금 수저를 물고 태어난 자발적 금수에게든.
결론적으로
100년 전에도 백수는 존재했고, 100년 후에도 백수는 존재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여,
너무 딱한 눈빛은 삼가시라.
독립 혹은 민주화에 버금가는 시대의 고뇌를 안고 사는 백수들에게.
첫댓글 저는 정말 이제는 홀가분한 백수가 되고 싶습니다.
백수가 되어 책 읽고 음악 들으며 시대를 고민하고 인류를 고민하는 삶을 살고 싶은데....
이거 백수 맞죠??
시대/인류를 고민하며... 백수 실격입니닷!
백수로는 실격이 맞는 듯 사료되옵니다.
기간제 백수 🙋🏼
기간제... 실격입니닷!
(수정)저는 정말 이제는 홀가분한 백수가 되고 싶습니다.
백수가 되어 책 읽고 음악 들으며 텃밭을 일구는 삶을 살고 싶은데....
이거 백수 맞죠??
땡! 실격입니닷.
텃밭 일구면... (흙-물 들어) 백수가 아닌 흑수입니다.
(재수정)저는 정말 이제는 홀가분한 백수가 되고 싶습니다.
백수가 되어 책 읽고 음악 들으며 철딱서니 없는 삶을 살고 싶은데....
이제는 백수 맞지예??
머 그렇게까지 원하시는디... 하세여, 백수!
@낭만배달부 이번에도 불합격하므는 백수 포기할라켔는데 합격시켜 주셔서 고맙습니다. 정성을 다 하면 이루어진다는 정조대왕의 중용 인용문이 떠오르기는 하는데 아마 그것과는 관계없이 합격된 듯하여 'Exsultate Jubilate' 스러운 마음입니다. 그리고 저는 가끔 철 들고 싶을 때 듣는 음악이 몇 개 있는데 앞으로 그런 음악들은 끊고 살랍니더. 철 없고 온전한 백수의 표준이 되는 그런 백수가 되겠습니다. (제가 시방 조큼 치해ㅆ심ㄷ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