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섶에 스미는 바람이 차 목폴라를 꺼냈습니다. 어디에 숨어있는지 모르겠지만 귀뚜라미의 울음소리가 깊어졌습니다. 단풍 소식과 함께 힘나는 소식 한자락을 기대해보며, 2021년 가을에 어울리는 시 5편을 소개합니다. 이상 둥지의 낭만 DJ였습니다.
나희덕 ‘귀뚜라미’
높은 가지를 흔드는 매미 소리에 묻혀
내 울음 아직은 노래 아니다.
차가운 바닥 위에 토하는 울음,
풀잎 없고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지하도 콘크리트벽 좁은 틈에서
숨막힐 듯, 그러나 나 여기 살아 있다.
귀뚜르르 뚜르르 보내는 타전 소리가
누구의 마음 하나 울릴 수 있을까.
지금은 매미 떼가 하늘을 찌르는 시절
그 소리 걷히고 맑은 가을 하늘이
어린 풀숲 위에 내려와 뒤척이기도 하고
계단을 타고 이 땅 밑까지 내려오는 날
발길에 눌려 우는 내 울음도
누군가의 가슴에 실려가는 노래일 수 있을까.
김경미 ‘비망록’
햇빛에 지친 해바라기가 가는 목을 담장에 기대고 잠시 쉴 즈음, 깨어보니 스물네 살이었다. 神은, 꼭꼭 머리카락까지 졸이며 숨어 있어도 끝내 찾아주려 노력하지 않는 거만한 술래여서 늘 재미가 덜했고 타인은 고스란히 이유 없는 눈물 같은 것이었으므로.
스물네 해째 가을은 더듬거리는 말소리로 찾아왔다. 꿈 밖에서는 날마다 누군가 서성이는 것 같아 달려나가 문 열어보면 아무 일 아닌 듯 코스모스가 어깨에 묻은 이슬발을 툭툭 털어내며 인사했다. 코스모스 그 가는 허리를 안고 들어와 아이를 낳고 싶었다. 석류 속처럼 붉은 잇몸을 가진 아이.
끝내 아무 일도 없었던 스물네 살엔 좀 더 행복해져도 괜찮았으련만, 굵은 입술을 가진 산두목 같은 사내와 좀 더 오래 거짓을 겨루었어도 즐거웠으련만. 이리 많이 남은 행복과 거짓에 이젠 눈발 같은 이를 가진 아이나 웃어줄는지. 아무 일 아닌 듯해도,
절벽엔들 꽃을 못 피우랴. 강물 위인들 걷지 못하랴. 문득 깨어나 스물다섯이면 쓰다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 오래 소식 전하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실낱처럼 가볍게 살고 싶어서였습니다. 아무 것에도 무게 지우지 않도록.
허수경 ‘탈상’
내일은 탈상
오늘은 고추모를 옮긴다
홀아비 꽃대 우거진 산기슭에서
바람이 내려와
어린 모를 흔들 때
막 옮기기 끝낸 고추밭에
편편이 몸을 누인 슬픔이
아랫도리 서로 묶으며
고추모 사이로 쓰러진다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남녘땅 고추밭
햇빛에 몸을 말릴 적
떠난 사람 자리가 썩는다
붉은 고추가 익는다
허영자 ‘감’
이 맑은 가을 햇살 속에선
누구도 어쩔 수 없다.
그냥 나이 먹고 철이 들 수 밖에는
젊은 날
떫고 비리던 내 피도
저 붉은 단감으로 익을 수 밖에는...
Emily Dickinson ‘The Cricket Sang’
The cricket sang, 해가 지고
And set the sun, 귀뚜라미가 운다.
And workmen finished, one by one, 일꾼들은 하나둘
Their seam the day upon. 주어진 하루를 마감했다.
The low grass loaded with the dew, 낮은 풀잎 위로 서리가 내리고
The twilight stood as strangers do 황혼은 나그네처럼
With hat in hand, polite and new, 정중히 모자를 쥔 채
To stay as if, or go. 자고 가려는 듯 발길을 멈췄다.
A vastness, as a neighbor, came, 어둠은 그렇게 친근한 이웃처럼 방문했고
A wisdom without face or name, 얼굴도 이름도 없는 지혜와
A peace, as hemispheres at home, 고향 같은 반구의 평화.
And so the night became. 마침내 밤이 찾아왔다.
첫댓글 귀뚜라미가 안치환씨 노래인데~~원래 시였나요? ㅎㅎ
일간지에 실린 시를 보고 작곡했다네요. 가사는 시를 편집한 셈인데, 작사가를 나희덕으로 표기했으니 (노래 발표 전) 합의가 있었겠죠.
다른 계절엔 싯구가 눈에 안들어오다가 가을이 되면 시가 눈에 좀 들어오는 것 같습니다.
좋은 시 소개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일 하기 전에 '감'을 한 번 써봤습니다.
좋은 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