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다고 다 좋은 시가 아닌 것처럼,
짧다고 다 나쁜 시가 아니다.
긴 시는 서사와 서정으로, 짧은 시는 함축과 은유로 표현하고 있을 뿐.
시란 무엇인가.
마음을 움직이는 한 문장.
길이는 상관없다. 아니 효율 면에서야 짧을수록 좋겠다. 같은 부피의 감동에 한 음절 한 단어이면 쓰는 입장에서 그 얼마나 뿌듯하랴.
윤동주 ‘편지’
누나
이 겨울에도
눈이 가득히 왔읍니다.
흰 봉투에
눈을 한줌 넣고
글씨도 쓰지 말고
우표도 붙이지 말고
편지를 부칠까요?
누나 가신 나라엔
눈이 아니 온다기에,
윤동주 ‘황혼’
햇살은 미닫이 틈으로
길쭉한 일(一)자를 쓰고...... 지우고......
까마귀 떼 지붕 우으로
둘, 둘, 셋, 넷, 자꾸 날아 지난다.
쑥쑥, 꿈틀꿈틀 북쪽 하늘로,
내사......
북쪽 하늘에 나래를 펴고 싶다.
나태주 ‘풀꽃’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나태주 ‘안부’
오래
보고 싶었다.
오래
만나지 못했다.
잘 있노라니
그것만 고마웠다.
함민복 ‘섣달 그믐’
어머니를 다려 먹었습니다.
맛이 없었습니다.
함민복 ‘반성’
늘
강아지 만지고
손을 씻었다
내일부터는
손을 씻고
강아지를 만져야지
김소월 ‘엄마냐 누나야’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들에는 반짝이는 금모랫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김소월 ‘부모’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겨울의 기나긴 밤,
어머님하고 둘이 앉아
옛이야기 들어라.
나는 어쩌면 생겨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
묻지도 말아라, 내일 날에
내가 부모 되어서 알아보랴?
허영자 ‘감’
이 맑은 가을 햇살 속에선
누구도 어쩔 수 없다
그냥 나이 먹고 철이 들 수밖에는
젊은 날
떫고 비리던 내 피도
저 붉은 단감으로 익을 수밖에는-
허영자 ‘노년의 뜰 10’
-플라스틱 쓰레기
죽지 못하는
늙은 슬픔이 있듯이
여기
썩지 못하는
절망이 있네.
첫댓글 좋은 시가 많네요 ㅎ
글쵸. 이 땅의 시인 ㄴ&ㄴ들, 짧아도 한방이 있다니까요.
하나 하나 다 와닿네요. 감사~~
빈 봉투에 사연 대신 한 줌 눈을 넣는
백 년 전 시인의 감성. 대단하져?
반성. . 은 꼭 동시같으면서 큰 가르침이 있는듯해요.
개인적으론
맛 없는 엄니...
젤 짧은 함민복 '섣달 그믐'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여.
@낭만배달부 전. . 섣달 그믐 시가 잘 이해가 안돼요. .
그믐달과 어머니? 어머니를 다려 먹었다는게 . . 달은 어머니? . . .
@Haemil지훈 저는 이렇게 받아들였습니다.
장가도 못 든 시인은, 한 해의 마지막 날인 어느 섣달그믐, 생각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중에는 어머니에 대한 죄송함이 있었겠지요. 가난한 전업 시인이 된 탓에 평생 어머니의 '등골을 빼 먹은' 죄송함이요.
그래서 어머니를 다리면(달이면) 아무 맛도 없을 거라고...
한편 맞춤법 상 본 시 '섣달 그믐'에는 두 곳에서 오류가 발견됩니다.
'섣달 그믐'은 '섣달그믐'으로 붙여 써야 하고, '다려 먹었습니다'는 '달여 먹었습니다'가 맞죠.
혹자는
'아무리 시라도 어떻게 어머니를 달여 먹을 생각을 했을까'
패륜 아냐? 깜놀할 수도 있겠지만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희생을 이보다 더 함축적으로 표현한 시를 전 아직 발견하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