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이 무르익더니 그예 여름이 올 모양입니다.
아카시아 나무 그늘에 퍼질러 앉아도 이젠 향기가 나질 않습니다. 제일 편애하는 향기가 없으니 새 글도 없습니다. (이렇게라도 핑계를...)
새 글이 없으니 묵은 글로나마 무글방지위를 가동합니다.
20년 전 일간지 화보 사진 한 장에 마음이 동해 긁적여보았던 글인데... 연탄 시 하나 첨부해서 올려봅니다. 최악보단 차악! 시답잖은 것이라도 없는 것보단 나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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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동도 안 지난 때 이른 추위가 겨울을 재촉하는 가운데 배달된 모 일간지. 부쩍 늘어난 정치면을 시큰둥하게 넘기는 와중에 툭하고 바닥에 떨어진 별지 경제면의 시커먼 기사가 눈에 띈다. “대성산업, 연탄사업서 손떼기로” 연탄 때가 까맣게 내려앉은 50대 중반의 체크무늬 아저씨와 더 새까만 지게작대기. 지게 위에 가지런히 올려진 21공탄 20장의 인상적인 화보가 흑(黑)빛의 향수를 아련히 불러일으킨다.
나와 같은 연탄세대에겐 괴로운 기억이 있다. 밸브만 돌리면 집안 구석구석을 덥혀주는 천연의 도시가스 보일러를 거슬러 올라, 하얀 백등유통이 손수레에 얹혀 굴러가는 석유보일러를 지나면, 까만 연탄아궁이가 나온다.
한겨울의 연탄아궁이는 밤새 두장의 연탄을 잡아먹는다. 자리에 눕기 직전 새로 연탄을 갈아도 선잠 든 새벽에는 다시 한 장을 더 갈아주어야 했다. 만약 시간을 놓칠라치면 새끼 연탄 모양의 납작한 번개탄에 신문지불을 붙여 살려내거나, 새연탄 한 장을 탄집게에 꿰고 식전부터 옆집 대문을 두드려야 했다. 탄을 갈기 위해서는 들러붙은 두장의 연탄을 갈라놓아야 하는데, 빈 소주병을 이용할 줄 아는 노련한 주부가 아니라면 보통 골치아픈 문제가 아니었다. 탄집게로 애꿎은 연탄만 박살내거나 신발 밑창을 홀랑 태우는 경우가 비일비재 했다.
연탄화덕을 밀어넣기 위해서는 구들장 밑으로 길다란 터널을 뚫어놓아야 했다. 만약 시공이 부실하여 구들장 사이로 스며든 연탄가스(주로 일산화탄소)가 갈라진 방바닥을 타고 스며들면 난리법석을 피워야 했다. 다행이 소량이라면 며칠 뒷골이 땡기는 것으로 그치지만 그게 아니라면 꼭두새벽에 앰뷸런스를 부르는 도리밖에 없었다. 때문에 연탄은 종종 세상을 등지고 싶은 이들의 유용한 자살도구로 이용되기도 했다.
초저녁 연탄 두장을 실은 화덕이 구들장 밑으로 들어가고 온 식구가 곤히 잠들 쯤이면 바닥은 절절 끓어대기 시작한다. 오랜 세월을 견뎌낸 노인들이야 뜨끈한 아랫목이 그만이지만 어린 것들에게는 보통 곤욕이 아니었다. 아침에 일어나보면 종아리께가 벌겋게 익어있는 경우도 흔했다. 탄불은 방바닥은 물론 그 위에 깔려있는 장판이라고 하는 바닥재도 밤새도록 달궜는데, 합성수지로 만든 장판은 어느집이고 할 것 없이 거무누릇하게 익어 손끝만 닿아도 크래커 부스러기처럼 떨어져나가 흉물스런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마당 한켠에는 탄을 쌓아두는 창고를 마련해야 했다. 있는 집에서는 수백 장을 쌓아두고 겨우내 탄불을 지폈고, 변변히 쌓아둘 공간이 없는 집에서는 수십 장 단위로 배달을 시켜야했기 때문에 혹 날이라도 추워지면 연탄집 아저씨에게 공연한 눈총을 받곤 했다. 대문 밖 콘크리트 쓰레기통 옆엔 항시 타고 남은 탄재를 모아두었다가 길바닥이 눈비로 얼어붙게 된 날 유용하게 사용했다. 해서 날이 푹해지고 눈과 얼음이 녹으면 골목길은 온통 연탄구정물로 시커멓게 변했고 마른 날은 탄먼지가 폴폴 날리기도 했다.
이렇게 우리의 겨울을 따스하게 덥혀주었던 연탄이 석유와 천연가스에 자리를 내주고 사라진다고 한다. 2001년 서울시가 실시한 가정용 연료사용 현황조사 결과, 연탄 사용가구는 2000년 1만8천가구에서 1만가구로 44% 줄어든 반면, 도시가스를 쓰는 가구가 크게 늘어 전체의 77%(266만가구)를 차지하고 있단다.
한푼의 외화를 위해 앞만 보고 뛰어왔던 시절, 가정과 공장을 하얗게 태워가며 경제발전에 절대적 기여를 했던 연탄. 지난 50년간 30조 원어치가 생산되고, 80조원 가까운 연료비 절감효과로 서민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었던 석탄산업. 사양고개를 완전히 넘어서 이제는 시야 밖으로 가물가물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지켜보자니 사뭇 감회가 깊다.
안도현 ‘너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반쯤 깨진 연탄
언젠가는 나도 활활 타오르고 싶은 것이다
나를 끝닿는 데까지 한번 밀어붙여 보고 싶은 것이다
타고 왔던 트럭에 실려 다시 돌아가면
연탄, 처음으로 붙여진 나의 이름도
으깨어져 나의 존재도 까마득히 뭉개질 터이니
죽어도 여기서 찬란한 끝장을 한번 보고 싶은 것이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뜨거운 밑불위에
지금은 인정머리 없는 차가운, 갈라진 내 몸을 얹고
아래쪽부터 불이 건너와 옮겨 붙기를
시간의 바통을 내가 넘겨받는 순간이 오기를
그리하여 서서히 온몸이 벌겋게 달아오르기를
나도 느껴보고 싶은 것이다
나도 보고 싶은 것이다
모두들 잠든 깊은 밤에 눈에 빨갛게 불을 켜고
구들장 속이 얼마나 침침하니 손을 뻗어 보고 싶은 것이다
나로 하여 푸근한 잠 자는 처녀의 등허리를
밤새도록 슬금슬금 만져도 보고 싶은 것이다
첫댓글 어렸을적 연탄갈던생각나네요
아하~ 인호님도 연탄을 갈아보셨구낭.
어릴적 연탄 갈면서 우 아래로 들러붙은 연탄 두장 붝 칼로 쑤셔서 때내던 생각나네요. ㅎ ㅎ ㅎ
동시대를 지내 온 사람들의 추억 소환
집집마다 들러붙은 연탄 떼는 스킬이 다양하겠습니다만,
붝 칼로... 쑤셔?
상당히 터프한 스킬이로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