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배달부의 추억-팔이.
“왜 이래. 나, 이대 나온 여자 카투사 나온 남자야.”
언제고 한번은 써보려 했다.
카투사에 대해서.
내 팔팔했던 청춘의 1년 5개월을 잡아먹었던, 그 양놈 뒤치다꺼리 부대에 대해서.
너무 오래 전 일이라 가물거리지만... 그래도 소환해 본다. 36년 전의 기억을.
1986년 5월이었다.
집 떠나와~ 열차타고~ 훈련소로 가는 날.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가 흘러나올 법한 논산 훈련소 입구의 허름한 이발소, 윤기 흐르고 찰랑거리던 머리칼이 바리깡에 밀렸다.
뭐, 큰 걱정은 없었다.
자대 배치만 받으면 달에도 몇 번씩 외박을 나온다는 당나라 군대- 카투사로 입대하는 거였으니.
배웅하겠다는 부모님&여친. 거절했다. 곧 보자며 당당히 손을 흔들어주고 혼자 나섰다.
논산에서 4주간 우리식 교육을 받고, 평택에서 몇(6주?) 주간 아메리칸 스타일 교육을 받고, 키가 좀 된다고 헌병으로 차출됐다.
자대는 경북 왜관의 camp캐럴에 있는 260th 헌병대였다.
OJT 일주일 동안 졸라 맞았다. 싱겁게 생겼다고, 고참 계급&이름 못 외운다고, 면회 올 여친의 여친들 없다고. ‘86 아시안게임 때도 계속 맞았다. 우리 축구/배구/야구/농구/탁구...팀이 졌다고. 이슈가 없어도 맞았다. 비 온다고, 바람 분다고, 하늘이 너무 맑다고. 일주일에 두어 번은 ‘집합’이란 명목 하에 꼭 맞았다. 실탄을 차고 근무하는 헌병이라 평소에도 군기가 바짝 들어있어야 한다나 어쨌다나. 온몸의 피멍을 (양놈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이등병은 샤워 시간이 따로 있었다. 지금 같으면 모두 영창이었다. 때린 고참님들.
나머지는 좋았다.
군복과 장비도 나쁘지 않았고, 메스-홀 음식은 제법 입에 맞았고, 방엔 침대며 옷장에 사물함까지 있었으니. 듣던 바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몇 가지 어려운 점은 있었다. 3인실 내 방엔 황-흑-백 3색 인종이 다 있었고, 방을 나눠 쓰는 그 놈들에게서 생판 처음 맡아보는 냄새가 났다. 적응하느라 아니, 적응이 안 돼 버티느라 꽤 고생을 했다. 놈들이 여자를 데려오는 것도 진절머리가 났다. 처음엔 기웃거리고 킥킥거렸지만 반복되니 그것도 고역이었다. wall locker 문 한쪽만 젖혀두고 달뜬 소리를 뱉어대니 도대체 쉴 수가 없었다. 참! 음식이 바뀌면 똥-색도 바뀐다는 걸 그때 알았다. 처음 녹색 똥을 쌌을 땐 몹쓸 병에 걸린 줄 알았다. 에이즈가 한창 문제가 되었던 시절이라 더 그랬다. 혹시... 같이 쓰던 변기에서 tiny bubble이 튀었나? 한동안 고민이 많았다.
근무는 쉬프트였다.
분대(squad)별 4주 단위로 돌아가며, Day-Swing-Mid-Off가 각 1주다. 데이~미드엔 계급에 따라 게이트나 페트롤을 맡는다.
쫄따구는 무르팤 뻗뻗해지는 게이트 근무다.
자신보다 한 계급이라도 높은 양놈과 2인1조로, 맡겨진 게이트에서 경비/검색의 임무를 수행한다. 말이 그럴싸해 M.P.지 걍 경비다, 양놈부대 경비. 출입하는 사람&차량을 통제한다. 데프콘 상황이 아니면 크게 할 일이 없다. 물론 평범한 일상이 깨질 때도 있다. 술에 떡이 된 양놈이 난동을 부린다거나, 화대를 떼인 클럽-걸이 상대방을 호출해 달라거나, 고위 장교들이 줄줄이 방문한다거나 하는.
가장 고약한 임무는 블랙마케팅 방지다.
캠프 내 물품의 불법반출을 막는 것인데, 이게 이현령비련령이라 고약한 상황이 자주 벌어진다. 뭐에 기분이 잡쳤는지 굳은 표정의 양놈 하사관(sergeant)이 ‘원칙대로’를 강조하면, 차량의 밑바닥은 물론 출입 민간인의 가방까지 뒤져야 한다. 한번은 캠프내 공사장에 일 다니러 온 아주머니의 도시락 뚜껑까지 열어야 했다. 아무리 명령에 죽고 사는 군인 신분이라지만 얼마나 죄송했던지.
고참은 차로 순찰하는 페트롤 근무다.
말이 근무지 그냥 바람을 쐬는 거다. 예쁜 처자가 근무하는 민간사무실에 들러 커피를 얻어 마시고, 으슥한 곳에 짱박혀 잠이나 자다가, 심심하면 게이트에 와 쫄따구도 갈구고. 드물긴 하지만 캠프 밖 클럽에서 소란이 벌어지면 권총도 뽑아보고.
당나라 군대에선 고참이 왕이다.
정기 휴가를 제외한 외출/외박은 고참이 보내준다. 더욱이 우리 같은 경우엔 보직 특성상 외박과 휴가에 큰 차이가 없었다. 외박증만으로도 위수지역을 넘어 활보할 수 있었다. 족보는 달라도 동종업자 신분이라 한국 M.P.도 문제를 삼지 않았다. 외박증 끊어간 놈이 외지에서 술 처먹고 문제를 일으켜 잡혀가도, 사복 차림 특수임무 중 불상사란 고참의 전화 한통이면 대부분 해결되었다. 그러므로 (다른 보직은 모르겠으나) 적어도 260th 헌병대 까투리는 당나라 군대가 맞았고, 이곳에선 고참 까투리가 왕이었다.
Off 주간이라고 매번 탱탱거리는 건 아니다.
이때 훈련 스케줄이 잡히면 개고생을 한다. 한미 연합훈련 외에도 자잘한 부대별 컴피티션이 종종 있는데... 분칠한 람보(ranger)가 되어 헬기에서 하강하고, 다리 위에서 점프하고, M60 무장으로 산&들을 뛰고, 참호를 파고 밤을 새야한다.
작대기 세 개- corporal(상병)이 되자 대우가 달라졌다.
일단 몸의 멍이 없어졌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집합에서 열외가 됐다. 대신 고참의 보호막도 사라졌다. 이때부턴 양놈들과 직접 맞장을 떠야 했다. 카투사들이 정부재산(government issu)이라 놀리는 GI는 월급쟁이들이다. 신분이 군인이어서 월급 받아먹을 동안엔 규율에 따르지만, 밸 꼴리면 아무 때나 때려치울 수 있어 징병제 까투리하곤 처지가 다르다. 둘의 관계가 원만할 때는 장난치고 시시덕거리고 외출도 같이 하고 동료처럼 지낸다. 문제는 결정적 순간에 본색을 드러낸다는 것.
한번은 중대장 명령으로 반-무장 스탠바이가 걸렸다.
무기고(Arms-room)에서 실탄만 불출하면 바로 출동 가능한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Standby였다. 헌데 고참들과 GI들은 보이지 않았고, 2시간이 지나도 다음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다. 알아보니 스탠바이를 가장한 상병 이하 카투사에 대한 하드타임이었다. 신병 한 놈이 rec-센터에서 46수송대 미군 선임상사를 보고도 경례를 하지 않았고, 현장에서 주의를 주었음에도 반성(?)을 하지 않았고, 이에 항의가 들어왔다는 이유였다. 쫄따구를 다그치니 도통 무슨 얘기인지 못 알아들었다고 한다. 반성문 같은 경위서를 제출하고도 40분이 더 지나서야 스탠바이가 풀렸다. 기분이 묘했다. 우리가 억울한 일이 있을 땐 아무리 항의해도 눈 깜짝 않더니, 타 부대 전화 한통에 졸병 카투사만 콕 집어 하드타임이라니. 캠프는 우리 땅에 있지만, 한국 땅이 아니었다. (이때 뚜껑 열린 낭만배달부가 대형 사고를 치고, 정신병원&영창을 거쳐 한국군으로 원대복귀 한다.)
몸으로 때우는 임무/사역/훈련에 대해 뺑이를 치는 것은 대부분 카투사다.
중대 인원 중 카투사 비율은 30%가 고작인데 장거리 야간 호송(Convoy)이나 고달픈 유격훈련의 참가비율은 오히려 까투리가 높다. 부당한 거 아니냐고 문서까지 제출하며 컴플래인 해봐도 그때뿐이거나 유야무야로 끝난다. 명목상 카투사병 관리를 위해 우리 군에서 파견 나온 하사관은 어차피 허수아비다. 웬 떡이냐, 술&키트 챙기기에 바빠 도움이 안 된다. 설령 카투사 권익을 위해 나선다 해도 지휘계통 라인 상 비껴있는 존재라 양놈 중대장에게 커피나 얻어먹고 나올 뿐이다. 불쌍한 까투리들이 참을 수 있는 이유는 오직 하나, 국방부 시계가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첫댓글 카투사 대선배님이시군요. 저는 2002년 미2사단 지원여단본부에서 복무 했습니다.
덕분에 저도 사진 뒤지다보니 부대 사진 하나가 있네요. 당시 레이건 대통령 서거로 조기계양을 했는데 한국군에서 밤사이 별도 지침이 없어 아침 계양식 때 어쩌지? 어쩌지 하다가 끝까지 국기 올려버렸을 때 사진이네요 ㅋ꙼̈ㅋ̆̎
댓글은 원래 보름 넘어 올라오는 게 찐댓이죠. ㅋㅋ
p.s.
국기 계양대 앞 저 달구지의 정체는? 박박 긴다는 쎄컨 디비젼의 상징인가여??
@낭만배달부 ㅋㅋ꙼̈ㅋ̆̎ 저희 부대가 지원 여단이라 군수품 지원 하는 마차 symbol입죠 ㅋ꙼̈ㅋ̆̎
군대 이야기를 알고 보면 재밌는 글이에요!! 잘봤습니다!! 양캐 냄새의 한복판을 겪는 일과 이등병의 두드려 맞음 등이 진솔하네요!!
아, 모야. 이 철 지난 댓글은.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