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은사
고린도전서 12;1-11 2019. 11. 10 (주일 낮 예배)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1절에 “신령한 것에 대하여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신령한 것, 즉 영적인 것에 대해서 잘 알기를 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것에 대해서 잘 모르면, 2절 말씀대로 세상이 유혹하는 대로 끌려가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우상을 따라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것을 잘 알아야 하는데 이 영적인 것을 깨닫게 해주시는 분이 바로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이십니다. 성령(聖靈)은 거룩한 영이지요? 즉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입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는데, 그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 예수님을 우리가 믿고 영접할 때 내 안에 들어오시는데, 육신으로 들어올 수 없으니까 영으로 오셨습니다. 그 분이 바로 성령님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은 똑같은 분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1. 성령님이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우리 안에 성령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 어떻게 알지요? 마음이 뜨거울 때는 계신 것 같은데 식으면 안 계신 것 같고, 이렇게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있을 때는 내 안에 계신 것 같은데, 교회 밖에서 혹 누구랑 다투기라도 한 날은 성령님이 떠나신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령님은 그 때도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우리의 감정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서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신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3절 함께 봉독.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아멘. 만일 예수님을 저주하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 안에는 성령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른다면 성령님이 그 안에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성령님이 그 안에 없는 사람들은 절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물어보세요. “예수님이 당신의 주님이십니까?” 우리야 바로 “아멘” 하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왜 나 주인입니까? 그가 위대한 성인이라는 건 알지만 내 주님은 아닙니다.”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2. 성령님이 우리를 통하여 (행)하십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두 가지 종류의 성도들을 보게 됩니다. 하나는 성령의 능력으로 신앙 생활하는 사람이고, 또 하나는 자기 열심으로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일은 성령의 능력으로 해야 합니다. 예배도, 기도도, 봉사도, 전도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하다가 지치고 힘들어지는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거의 다 성령의 능력으로 하지 않고 내 힘으로 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잘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일이 많아서 힘든 줄 착각합니다. 사실은 일이 많아서가 아니라 그 일들을 내 힘으로 하려고 하니까 힘듭니다. 일이 더 많을 때도 성령의 은혜와 능력으로 할 때는 하나도 힘들지 않고 오히려 기쁘고 즐거웠거든요. 그러니까 지치고 힘들다고 생각될 때는 내가 지금 성령으로 일하고 있는가 돌아보아야 합니다.
때로는 어떤 사람 때문에 힘이 든다고 생각될 때도 있습니다. 사실은 그 사람이 문제가 아닙니다. 성령님을 의지하지 않고 내 감정으로 부딪히고, 내 생각으로 그를 판단하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성령의 힘으로 하면 서로 용서하고 용납하고 함께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성령의 힘으로 하는 게 뭘까요? 내가 지금 성령의 힘으로 하고 있는가 아니면 내 열심으로 하고 있는가? 이걸 분별하는 방법은, 나의 섬김과 봉사를 통해서 성령님이 드러나는가? 아니면 사람이 드러나는가를 보면 압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하면 (성령)님이 드러납니다. 하지만 사람의 열심으로 하면 사람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오래 가지 못합니다.
① (기도)도 내 힘으로 하면 곧 지칩니다. 새벽기도도 내 결단으로는 계속 하기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령의 권능으로 하면 기도시간이 기다려집니다. 새벽에 일어나는 것도 신기할 정도로 힘이 안 듭니다.
또 깊이 뜨겁게 기도하는 것도 내 힘으로는 잘 안 되지만 성령의 권능으로 하면 쉽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한국의 ‘통성기도’가 있습니다. 외국에는 이렇게 온 성도가 소리 내어 기도하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한국에서 생겨서 지금 세계적으로 전파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선교사님들이 가르쳐서 시작된 것이 아니고 어느 날 집회를 하다가 성령이 임하니까 저절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선교 초기에 이길한 목사님이라는 분이 부흥회를 인도할 때의 일입니다. 당시에는 보통 설교가 끝나면 목사님이 “이제 누구든지 성령께서 감동하시는 분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고 요청하면, 누군가가 기도하고 마무리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은 설교가 끝난 후 목사님이 “성령께서 감동하시는 분이 대표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랬는데 너무 많은 사람이 그만 여기저기서 “하나님 아버지” 하고 기도를 시작한 겁니다. 그러다가 서로 주춤하기도 하고 다시 하기도 하고 그러는 거예요. 이 목사님이 성령의 감동하심을 막으면 안 되겠다는 마음이 들어서 “그러면 성령이 기도하게 하시는 분은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그랬더니 많은 사람들이 통성으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기도하는 사람들은 많은 사람이 기도한다고 느끼지 않고 한 사람이 기도하는 것 같이 느꼈다.” “마치 한 성령께서 한 사람에게 기도를 시키는 것 같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한 사람이 울자, 마치 다 울고 싶었다는 듯이 다 함께 울고, 또 어떤 사람이 성령에 감동이 되어 “하나님 내 죄를 용서해 주세요.” 하고 회개하자, 여기저기서 회개의 기도가 터졌습니다. 이렇게 통성으로 회개하며 기도하는 것이 새벽까지 이어졌다고 했습니다. 10분도 기도하기 어렵던 사람들이 성령께서 하게 하시니까 밤새도록 소리를 내어 기도했던 것입니다.
7절 함께 봉독.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 성령이 내 안에 계실 뿐만 아니라 나를 통해 그 능력이 나타나 유익하게 하십니다. 그 실례가 바로 성령의 (은사)들입니다.
8절 이하에 여러 가지 성령의 은사가 나오는데 아마 우리에게 가장 익숙하고, ‘성령의 은사’ 하면 생각나는 것은 ‘방언의 은사’가 아닐까 싶어요. 방언, 다 아시지요? 기도하는데 이상한 말이 막 나오는 거.
방언을 한 마디로 말하면, 내 (혀)를 성령께서 쓰시는 겁니다. 방언이 희랍어로 글로사(γλώσσα)인데 ‘혀’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어떤 영어성경은 방언을 그냥 tongue이라고 번역했어요. 내 혀를 통해서 성령님이 자신을 나타내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냥 “주님 내 혀를 성령님께 맡깁니다. 사용하시옵소서.”하고 성령님께 드리면 성령님이 사용하십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한얼산 기도원에서 방언의 은사를 받았는데 은사를 소홀히 여기고 사용을 안 해서 그만 잃어버리고 말았어요. 목사가 되고 난 후에야 방언의 은사가 회복되기 구했는데 잘 안 됐어요. 그러다가 안산에서 부목사로 있을 때 부흥회 기간이었어요. 강사님이 방언의 은사를 사모하시는 분 앞으로 나오라고 안수해 주겠다고 하세요. 목사가 돼서 방언도 못해서 어떻게 목회를 하겠나 싶어서 앞으로 나갔지요. “하나님 그래도 내가 목사인데 ‘라라라 따따따’ 이런 애기 같은 방언이 아니라 좀 유창한 방언을 주십시오.” 그런 마음으로 기도를 하고 있었어요. 담임목사님이 제가 안쓰러웠는지 오랫동안 안수해 주시면서 간절하게 기도를 해주시는데 제 마음에 ‘그래. 하나님께 다 맡기는 거지 유창한 방언이 다 뭐냐?’ 하는 생각이 들어서 “하나님, 저의 교만을 용서하시옵소서. 이제 모든 것을 주님께 맡깁니다.” 하고 기도하자마자 20년 만에 다시 제 입에서 방언이 터져 나오는 거예요. 얼마나 감사하던지, 그때 비로소 ‘아, 모든 걸 다 내려놓고 하나님께 맡길 때 하나님이 하시는구나.’ 하는 걸 깨달았습니다.]
기도할 때뿐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도 성령님께 맡깁시다. 성령님께서 우리 입술을 사용하셔서 많은 사람을 격려하고, 구원하실 줄 믿습니다.
② (전도)도 성령의 힘으로 합니다. “나는 전도 못해요.” 그런 분들도 많지요? 그런데 그냥 “나를 쓰시옵소서.” 하고 성령님께 나를 맡기면, 성령님이 하세요. 우리 전도대도 전도 잘 하는 사람이 나오는 게 아니고, 그냥 하나님이 하라고 하셨으니까 순종하는 사람이 나오는 겁니다. 모여서 “하나님 우리가 순종하여 전도하러 나갑니다. 오늘도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여 친히 말씀하시옵소서.” 기도하고 나가면 성령님이 하세요. 성경에도 “무슨 말을 할지 걱정하지 말라. 할 말을 생각나게 해 주시겠다.”고 했잖아요. 하나님께 맡기고 (순종)하면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일하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③ 예배도 그래요. 여러분 (예배) 중에 성령의 임재가 느껴지십니까? 오늘도 ♫ “주님의 성령 지금 이곳에 임하소서.” 찬양했는데, 성령님이 임하신 것이 믿어지십니까? 느껴지십니까?
성령이 충만한 분, 성령의 임재를 믿으시는 분은 예배드리는 자세가 달라져요. 찬양을 드릴 때도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다 드립니다. 그런 분들은 찬양하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감동이 돼요. 그 은혜를 경험하는 분들은 한 시간을 찬양해도 힘들지 않고 감동이 넘쳐요. 사실 그럴 때는 설교가 필요 없어요. 간혹 청년들 찬양집회에서 말씀을 전할 때면, 찬양 가운데 얼마나 성령의 임재가 강한지 계속 찬양만 하고 싶을 때가 있어요. 그러다가 설교하러 나가면 오히려 제가 성령의 임재를 가로막지나 않을까 두려울 정도예요.
교회에서뿐 아니라 가정생활에도, 일하는 데도, 공부하는 데도, 우리의 모든 삶 가운데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기를 축원합니다!
8절 이하에 보면 성령의 은사가 (똑같은) 방법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침, 능력 행함, 예언, 영 분별, 방언, 통역... 여러 가지 은사로 나타나요. 여러분 성령님을 제한하지 마시고 은사에 대해서 마음을 여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방법으로 임하든지 성령님께 (맡겨)야 합니다.
성령님이 어떤 분에게는 조용하게 임하기도 하고, 불같이 요동치며 역사하기도 합니다.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이런 은사는 조용히 옵니다. 그러나 그 능력은 엄청납니다.
반대로 병 고침, 능력 행함, 예언, 방언 이런 은사들은 눈에 드러납니다. 조용하게 받든지 드러나게 받든지 다 그 권한은 성령님께 있습니다. 이왕이면 화끈하게 받고 싶다고 요구하다 보면 성령 받는데 오히려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이미 조용히 임했는데, 그걸 모르거나 무시하게 될 수도 있거든요.
이 은사가 영어로 gift, 선물이에요. 선물은 주는 대로 받는 거지, 이거 달라 저거 달라 떼쓰는 게 아니잖아요. 사실 가장 강력한 성령의 능력은 (사랑)입니다. 모든 사람이 사랑스러워지기 시작할 때 성령이 가장 충만한 거예요. 옆에 있는 사람이 사랑스러워 보이지요?
여러분, 이미 우리 가운데 성령이 부어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내 힘으로 하다가 지치고, 낙심하는 자가 아니라, 성령님께 맡기고 순종하며 나갈 때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고 성령의 은사로 쓰임 받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191장. 내가 매일 기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