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찬의 의미
고린도전서 10;14~22 2019. 10. 6 (세계성찬주일)
[어느 전도사님이 시골 교회 목회하던 중 강사님을 모시고 부흥회를 하게 되었다. 온 동네를 다니면서 “부흥회 하니까 교회에 오세요.” 귀가 어두우신 어느 할아버지가 오셨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교회에서 붕어회 하니까 오세요.”로 들은 것. 아무리 기다려도 붕어회는 안 주고 마지막 날이 되었다. 그동안 전도사님이라 성찬식을 못하다가 강사 목사님 오신 길에 부흥회 마지막 날 성찬식을 했다. 이 할아버지가 교회 다녀와서 하는 말씀. “붕어회는 지들끼리 다 먹었는지 코빼기도 안 보이고, 술은 고양이 눈물만큼 밖에 안 주고, 떡도 하려면 많이 할 일이지 손톱만큼 밖에 안 주더라.”]
오늘은 세계 성찬주일입니다. 온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성찬식을 통해서 주님과 하나 됨을 경험하는 날입니다. 우리 교회는 한 달에 한 번씩 성찬식을 하는데 사실은 좀 더 자주 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 달에 몇 번을 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한 번을 하더라도 그 의미를 잘 알고 해야 합니다. 성찬을 하면서도 성찬의 의미를 모른다면 그저 ‘왜 빵을 이렇게 조금 주지?’ ‘오늘은 예배 늦게 끝나겠네.’ 이런 생각만 들지도 모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성찬의 의미를 잘 알고, 성찬에 합당하게 사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찬식이 뭐지요?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 설명하면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거예요. 그런데 이 떡은 그냥 떡이 아니고 주님의 몸입니다.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찢겨주신 주님의 몸이에요. 포도주는 뭐라고 했지요? 주님의 피입니다. 나를 위해 다 흘리고 죽어주신 주님의 피에요.
그래서 이 성찬에 참여해서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거예요. 그것을 오늘 본문 16절에는 어떻게 설명하고 있느냐 하면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16절 함께 봉독.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아멘.
1. 성찬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한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①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피는 생명입니다. 그런데 나를 위해 그 피를 다 흘려주시고 나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피에 동참한다는 것은 나도 예수님의 죽으심에 동참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왜 죽으셨지요? 나의 죄 때문에. 내가 죄를 지었으니까 내가 죽어야 하는데, 예수님이 나를 너무 사랑하셔서 내 대신 죽으심으로 내 죄 값을 다 갚아주셨어요. 그래서 더 이상 죄가 나를 조종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가리켜서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표현합니다. 우리 함께 주보를 보시고 베드로전서 2:24 봉독하겠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 무엇에 대해서 죽었다고요?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죽었으면 어떻게 되는 거죠?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합니다. 그러니까 이제 어떤 죄악이 나를 유혹해도, 나는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겁니다. 여러분, 죄가 유혹할 때 “사탄아 물러가라. 나는 이미 죄에 대하여 죽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나는 죄를 지을 수 없다.” 이렇게 선포하며 이기시기 바랍니다.
옆 사람과 인사할까요? “나는 이제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의에 대하여는 살았다는 것입니다. 의로운 줄 알면서도 손해 볼까봐, 왕따 될까봐, 죽은 듯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의로운 일, 생명을 살리는 일에 대하여는 앞장서는 것이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2번,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하는 것은
② 그리스도의 (생명)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한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생명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피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피가 없어 죽어가는 사람에게 수혈을 해주면 그 사람이 살아납니다. 주님께서 죄로 인해 죽어가는 우리에게 당신의 피를 주셨어요.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생명은 영원한 생명, 곧 (영생)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20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했습니다. 나는 죽고 내 안에 누가 사나요?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이 내 안에서 영원히 사시니까 나도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거예요. 그런데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이 바로 나의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이 내 (주인)이심을 인정하고, 예수님의 영원한 삶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인이니까 뭘 하든지 예수님 허락을 받고 해야 하겠지요? 어떤 사람이 나에게 욕을 해서 나도 확 욕을 해주려고 했는데, 내 안에 계신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실까요? “하지 마라.” 그러시겠지요. “사랑하는 내 아들아, 네가 욕을 하면 네 얼굴이 마귀할멈 같이 흉측해진단다. 나는 그런 모습을 보고 싶지 않구나.” 말씀하십니다.
어떤 분은 교회에 다니면서도 술을 못 끊어서,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시곤 했답니다. 그런데 성찬식을 하다가 갑자기 ‘아,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지’ 생각이 나면서, 마치 예수님이 “술 좀 그만 마셔라. 내가 술에 빠져 죽을 지경이다.” 하시는 것 같더래요. 그래서 그날부터 술이 끊어졌다고 합니다.
여러분, 오늘 성찬식을 하면서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심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옆 사람과 인사할까요? “예수님이 제 안에 계십니다.”
2. 성찬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①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주님과 (한 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하고,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라고 말합니다. 머리는 누구라고요? 예수님. 몸은요? 교회. 팔, 다리, 손, 발과 같은 지체는 누구지요? 모든 성도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지체가 되어서 예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은 온 세계, 온 인류를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지체로서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을 때 우리의 할 일은 역시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3장에서 보았듯이 우리는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과 동역자입니다. 옆 사람과 인사할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입니다.”
② (우리)가 다 한 몸이라는 것입니다.
17절 함께 봉독합니다.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 아멘. 우리 각자 각자가 다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으니 우리는 모두 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다 하나가 되어야만 세상을 구원하는 주님의 복음을 전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 되지 못하고 서로 싸우면서 “예수 믿으세요.” 그러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요? “너희나 잘 해라.” 그러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요한복음 13:35에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하셨습니다.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도 다 알지요. 사랑해야 한다는 거 다 압니다. 서로 용서해야 한다는 것도 압니다. 그런데 잘 안 돼요. 그게 문제지요.
‘그 사람이 내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했는데’ 그 생각만 하면 화가 나고, 용서가 안 되는 거죠. 이게 그냥 인간의 마음으로 쉽게 되는 일은 절대 아닙니다. 가장 가깝다는 부부간에도 쉽지 않아요. 그러니 남남 사이야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의 감정으로 좋아하고 하나 되기를 바란다면 그건 영원히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하나 되는 것은 오직 (성령)님이 주시는 마음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런데 너무나 감사한 것은 성령께서 이미 우리를 하나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3에 말씀하시기를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도우심으로 마음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한 그 순간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미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과도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제 이것을 지키기만 하면 됩니다. 어떻게 지킬 수 있지요? 십자가에서 날 위해 죽어주신 예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사랑이 우리의 하나 됨을 지켜줍니다.
여러분, 십자가에서 살이 찢기고, 피를 흘려 죽으시면서 나를 용서해 주신 주님의 그 사랑을 경험하셨습니까? 그 감격이 있는 사람만 그 사랑으로 남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그 놀라운 사랑을 받았잖아요. 우리가 주님의 그 놀라운 사랑 받았으니 이제 그 사랑으로 서로를 대하기 원합니다.
“그래도 저 사람만큼은 안 돼요. 절대 저 사람은 사랑할 수 없어요.” 그런 분이 계실지도 몰라요. 하지만 여러분, 우리가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되고’ 그러면서 서로를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선택한 게 아니잖아요? 하나님께서 한 교우로 선택해 주신 겁니다. 그래서 한 (가족)이에요.
가족은 내가 선택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선택해 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가족은 소중한 겁니다. 여러분 중에 누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저 사람이라면 내 아버지로 적합하겠다.” 하고 아버지를 선택해서 태어나신 분 있습니까? 아니면 자식을 낳을 때 ‘성격도 좋고, 머리도 좋고...’ 그런 아이로 골라서 낳으신 분 있습니까? 그런 아기 낳기를 바라고 기도하기는 했어도, 내가 선택할 수는 없어요. 아무리 부모라도 안 돼요. 하나님이 가족으로 맺어주신 겁니다.
어떤 목사님 아들이 어렸을 때 어디서 무슨 말을 듣고 왔는지 “아빠, 나 친 자식 아니지요? 다리 밑에서 주워 왔지요? 그래서 매일 야단치고 그러는 거지요?” 그러면서 대들더래요. 내 친 아들이라고 아무리 말해도 안 믿어서 참 고민이었는데, 사모님이 딱 한 마디 해주니까 문제가 해결 되었대요. “아들아, 내가 널 어디서 데려 왔다면 너보다 훨씬 착하고 잘 생기고 똑똑한 놈으로 데려왔지 널 데려왔겠냐?” 그랬더니, 지도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엄마” 그러면서 품에 안기더래요.
여러분, 우리는 서로를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맺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가족이라는 의미입니다. 공부를 못해도, 얼굴이 못생겨도 병약해도 자녀는 자녀입니다. 하나님이 바로 우리를 그렇게 받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서로를 그렇게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 마음에 쏙 들어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해 죽어주셨을까요? 나도 내가 마음에 안 들 때가 많은데, 예수님 마음에 들었을 리가 없지요.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나를 주님은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지난 성찬식 때 죄 짓지 않겠다고 다 결단했는데, 한 달 동안 한 번도 죄 안 지으신 분! 없을 거예요. 또 죄를 범했지만 오늘 또 회개하면 또 용서해 주시잖아요. 그러니 우리도 남을 또 용서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뿐만 아니라, 내가 미워하는 그 사람을 위해서도, 십자가에서 살 찢기고 피 흘리며 죽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사랑하시는 사람인데, 내가 판단하고 미워한다면 주님을 아프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서로 (용납)해야 합니다.
228. 오 나의 주님 친히 뵈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