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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여자 하나님
고린도전서 11;1-16 2019. 10. 20 (주일 낮 예배)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유난히 많이 나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남자'와 '여자'라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여자 입장에서는 좀 불평등하다는 느낌이 들 수가 있습니다. 사실 그런 분위기는 오늘 본문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느껴집니다.
하지만 이해해야 할 것은, 오늘 본문만 해도 지금으로부터 약 2천 년 전에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불과 백 년 전까지만 해도, 아니 오늘날에도 우리 사회에 아직도 남성우월주의적인 요소가 많이 있잖아요. 그러니 이 성경이 기록된 2천 년 전에야 더 말할 것도 없었겠지요.
오늘날 우리의 눈으로 보기에는 흡족하지 않은 부분이 많이 있지만, 당시의 사회적 여건을 감안한다면, 성경은 파격적일만큼 여성을 존중하고, 남녀가 똑같이 중요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시키려고 무척 애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감리교 교단 법에 보면 “총회 대표를 뽑을 때 정회원 목사와 동수의 평신도 대표를 뽑고, 그 중의 30%는 여성으로 한다.”는 조항이 있습니다. 여권신장, 남녀평등을 위해서 이런 법을 제정한 것입니다. “아니 목사님 남자대 여자 50:50으로 해야지 남녀 평등한 거지, 70:30이라고 해놓고 남녀평등을 위한 법이라니요?” 그런데 이 법이 제정된 이유를 알고 나면 고개가 끄덕여져요. 우리가 알다시피 여자 장로님들이 거의 없잖아요? 우리 지방에 장로님이 60여분 계시는데, 그 중에 여자는 두 분밖에 안 계셔요. 장로님이 평신도 대표인데 여자대표가 너무나 없어서 10%도 안 되니까 법을 제정해서라도 여자 대표를 가능하면 더 많이 보내라는 의도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성경을 보면 그 동안 남성위주라고 생각했던 부분들도 “당시 상황에서는 그 정도만 해도 대단한 거였구나.” 하고, 이해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아니 왜 남자가 여자의 머리야? 여자가 남자를 낳았으니 여자가 남자의 머리 아니야?” 혹은 “왜 여자만 귀찮게 머리에 뭘 써야 한다는 거야? 남자는 안 쓰면서.” 이런 각도에서만 본다면 말씀의 진의를 이해하기가 더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물론 오늘 성경에 나오는 고린도교회의 실제적인 문제는 “여자가 예배 중에 머리에 무엇을 쓰는 게 맞나? 안 쓰는 게 맞나?” 하는 겁니다. 결론은 “머리에 쓰는 게 맞다.”는 겁니다. 심지어 6절에 보면, 머리를 가리지 않고 예배를 드리는 여자들은 머리를 깎아버리라고 했어요, 오늘 예배드리는 여자 성도님들 큰일 났습니다.^^ 나가실 때 머리를 다 밀어드려야 할까요?
성당에서는 여자들이 머리에 뭐 쓰고 예배드리잖아요? 아마도 이 말씀에 근거한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도 꼭 베일을 쓰고 예배를 드려야 할까요?
성경을 읽을 때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이 본문을 통해서 오늘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진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서 그것을 해야지, 진의를 모르고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때로 엄청난 문제를 일으킵니다.
예를 들면, 아버지가 아들에게 야단을 치다가 하도 말을 안 들으니까 “야 이놈아, 그 따위로 하려면 차라리 나가 죽어.” 그랬더니 아들이 진짜 나가서 강물에 뛰어들어 죽었어요. 그럼 이 아들은 아버지 말을 아주 잘 들은 효자일까요? 아니지요. 아버지 말은 죽으라는 게 아니고 행실을 바르게 하라는 거지요.
오늘 본문의 핵심은 “여자들은 머리에 베일을 쓰고 예배를 드려야 한다(?)”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 머리를 가리라고 했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3절 말씀 봉독합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아멘.
여자의 머리가 남자라고 해서 여자가 기분 나쁠 것도 없고, 남자가 우쭐할 것도 없습니다. 여기서 머리라고 하는 것은 주종관계를 나타내는 단어가 아닙니다. 3절에 그리스도의 머리는 누구라고요? 하나님.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삼위일체 동등한 분이세요. 빌립보서에는 그리스도를 가리켜서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라고 표현했어요. 누가 우월하고 열등한 관계가 아니고 한 몸이라는 말입니다. 근본적으로는 하나인데 역할 상 하나님의 권위에 그리스도가 복종하여 낮고 낮은 땅위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 순종으로 인하여 인류 구원의 대업을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머리인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마찬가지로 남자가 여자의 머리라고 할 때 그것은 남자가 여자보다 우월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남자와 여자는 (하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그러셨던 것처럼 여자가 남자의 권위에 순종하고, (하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남자는 여자를 존중하여 모든 것보다 귀하게 여기는 그런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아내는 남편의 권위에 순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가장 귀하게 여기고 존중하고 높일 때, 그 가정 그 부부는 가장 행복하게 될 것입니다.
3절 말씀을 통해서 남자와 여자, 남편과 아내의 관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왜 여자는 수건을 쓰고 남자는 안 쓰는지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간단합니다. (인간)의 영광은 가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예배 중에 여자는 머리를 수건으로 가려요. 왜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인데 남자가 드러나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남자는 머리를 안 가려요. 왜요?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인데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려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분명해졌지요?
머리에 무엇을 쓰냐. 안 쓰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은 가려지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를 소원합니다. 특별히 예배 중에 우리가 높여드리고 나타내기 원하는 분은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설교도 말씀 속에 하나님이 드러나야 합니다. “그 목사, 설교 잘하네.” 목사가 드러나서는 안 됩니다. 찬양을 드릴 때도 내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노래로 하나님을 높여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 노래와 다른 점입니다. 세상의 노래는 가수가 드러나고 높임을 받습니다. 또는 노래하는 사람이 기분이 좋아지고, 스트레스가 해소되고 그러면 됩니다. 하지만 찬양은 하나님이 드러나고 하나님을 높여 드리는 것입니다.
성가대가 가운을 입는 것도 그런 이유라고 생각이 됩니다. 멋지고 아름다운 가운을 입고 우리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가운으로 우리는 가리고 하나님을 높여 드리는 겁니다. 만일 성가대원들이 가운을 안 입는다면 주일 아침마다 무척 고민이 많을 거예요. 사람들이 다 나를 보는데 무엇을 입어야 멋있어 보일까? 그러다가 성가연습시간 늦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찬양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높여 드리는 것입니다.
성가대가 아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모두가 찬양으로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입니다. 예배의 모든 순서가 다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시간 하나만 들라면 찬양하는 시간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 각자가 온 마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시간이요, 찬양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배 시간은 물론이고 일상의 삶 속에서도 자신은 가리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주의 백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자신은 가리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계속해서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특별히 요즘 하나님께 감사 편지를 쓰시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계신 줄 믿습니다. 어떤 절기에 뿐만 아니라 언제나,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드림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11절과 12절 말씀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이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음이라.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아멘.
당시 세상은 남성 우월주의에 완전히 젖어 있을 때였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남자 없이 여자 없고, 여자 없이 남자 없다.”고 말합니다.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를 만들었기 때문에 아담이 우월하다고 주장한다면, 모든 남자는 여자인 어머니가 낳았으니 여자가 더 우월하다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남자나 여자나 누가 우월하다고 주장할 것 없습니다. 모두 하나님에게서 났으니 모두가 (하나)요, 우리의 근원은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안에서 서로를 존중하고, 귀하게 여기며 살아가야 합니다. 특히 (부부)는 더 그렇습니다. 남편을 왕으로 생각하고 잘 섬길 때 나는 시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때 비로소 내가 왕비가 됩니다. 남편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를 왕비처럼 존귀하게 여길 때 비로소 자신이 왕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부부를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부부간에 “여보” “당신”이라고 부르는데 알고 보니 단순한 호칭이 아니고 다 뜻이 있는 단어더라고요. 여보(如寶)는 같을 如(여)자에 보배 보(寶)자를 쓴답니다. 보배와 같이 소중하고 귀중한 사람이라는 의미지요. 그런데 여보라고 불러놓고 상대방을 비하하는 말을 한다면 앞뒤가 안 맞는 거죠?
그리고 당신(當身)이라는 말은 마땅할 당(當)자와 몸 신(身)자를 쓴다고 해요. 내 몸과 네 몸이 하나라는 뜻이랍니다. 그러니 “당신 때문이잖아. 당신이 잘못했잖아.”고 하면서 싸우는 건 바로 “나 때문이잖아, 내가 잘못했잖아.” 이런 말과 똑같습니다.
“여보! 당신!” 부를 때마다 “여보는 정말 보배 같아요.” “당신이 바로 나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부른다면 부부사이가 점점 좋아지겠지요?
연습! 남편들이 먼저, 아내를 생각하면서 “그대는 나의 보배입니다.” 하는 마음을 담아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여보!” 하고 불러보실까요? 혹시 아내가 옆에 있다면 손을 꼭 잡고. 시작 “여보!” / 이제 아내가 남편을 향해서 “그대가 곧 나입니다. 내 몸처럼 아끼고 사랑하겠습니다.” 하는 마음을 담아 예쁜 목소리로 불러주세요. “당신!” 시작 “당신!” 어색^^
요즘 “여보, 당신”의 의미가 제대로 살아있는 가정이 많지 않은 것 같아요. 언젠가 지방 목사님들 모임이 있었는데, 밥을 먹으면서 어느 목사님이 아주 웃픈(웃긴데 슬픈) 이야기를 하세요.
목사님들이 색소폰 부는데 함께 하고 싶어서 사모님께 “100만 원 정도 하는데 하나 살까?” “아니 100만원이 어디 있다고 그걸 사요?” 며칠 후 아들이 “엄마 클라리넷 배우고 싶은데 100만 원쯤 한대요.” “그래? 엄마가 사줄게!”
자식 위한 엄마의 마음이니까 남편이 좀 이해해야 되겠지요? 그래도 자식도 물론 소중하지만 부부간에도 잘 하시기 바랍니다. 자식은 다 떠나가고 결국 부부만 남잖아요. 부부간에 잘해야 합니다.
어느 남편이 퇴근해서 집에 왔는데 아내가 이불을 덮고 누워 있더랍니다. 이마에 손을 얹어보니 열이 펄펄 끓어요. 독감에 걸린 거예요. 입맛이 없어서 밥도 못 먹는 아내를 위해서 남편은 직접 죽을 끓여 보기로 했습니다. 쌀을 듬뿍 퍼서 냄비에 담고 쌀을 씻어 물을 붓고 뚜껑을 닫았어요. 잠시 후 김이 모락모락 나는 걸 보니 죽이 다 된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먹어보니 물만 졸아 들고 생쌀이에요. 다시 물을 붓고 끓였지만 이번에는 물이 넘쳐요. 잠시 후 열어 보면 또 물이 부족하고. 점점 자신감이 사라집니다. 그러기를 여러 차례, 쌀들이 지쳤는지 퉁퉁 불어터진 죽을 그릇에 담아 방으로 들고 갔습니다. “뭐 했어요?” “응, 죽 좀 만들었어.” ‘당신이?’ 하는 표정으로 깜짝 놀라는 아내에게 죽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대주니, 그 죽이 맛이 있겠어요? 그런데도 맛있다며 받아먹는 아내를 보니 고마움이 밀려들었다고 합니다. “야! 내가 아플 때마다 아내가 끓여주던 죽이 이게 보통 정성이 아니었구나.” 하면서 남편은 아내로 인해 고맙고, 아내는 남편으로 인해 고맙고. 이게 행복이지요.
여러분! 우리는 (모두) 하나님에게서 났습니다. 부부간에는 물론이고 주님 안에 하나 된 우리가 서로 존귀하게 여기고 서로 (고마워)하면서 행복한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어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만남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