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한 몸입니다
고린도전서 12;12-31 2019. 11. 17 (주일 낮 예배)
미국 제44대 대통령이자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버락 오바마는 자신의 저서 <담대한 희망>(The Audacity of Hope)에서 자신의 가치관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가치관의 핵심은 공감(共感)하는 것이다. 나는 항상 상대방의 처지를 헤아리며, 상대방의 눈으로 생각하고, 상대방을 이해하려 애쓴다.” 예. 우리 사자성어 중에 “처지를 바꾸어서 생각한다.”는 뜻의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이 있는데, 이 역지사지의 지혜를 터득한 정치인인 것 같습니다.
실제로 대통령 경선 초기에 민주당은 이라크 전쟁 문제로 찬반이 나뉘어져 있었는데,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오바마는 이렇게 연설했습니다. “우리 민주당에는 두 그룹의 애국자가 있다. 하나는 이라크전을 반대하는 애국자이고, 다른 하나는 이라크전을 찬성하는 애국자이다.”
지금 사람들이 “내 생각이 맞고 네 생각은 틀렸다.”고 서로 싸우는 와중에 오바마는 “우리가 생각은 다르지만 나라를 위하는 마음은 같지 않냐? 그러니 우리는 적이 아니라 동지다. 조금만 더 노력하고 이해하면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다.” 이러면서 적을 동지로 만들고 서로를 하나로 만들어 갔습니다. 이렇게 서로 공감하려고 하는 그의 가치관이 그를 미국 대통령이 되게 하고, 노벨 평화상을 받게 했다고 생각됩니다.
‘우리는 하나다.’라고 하는 말씀은 이미 성경이 계속해서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이상해요.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라고 계속해서 말씀해 주시는데 우리는 그렇게 못 느낄 때가 많다는 게 문제입니다.
1. (느낌)에 관계없이 우리는 한 몸입니다.
‘저 사람과 나는 너무나 달라. 우리는 이미 서로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주고받았어. 그러니 우리는 사랑할 수 없어. 하나가 될 수 없어.’ 이렇게 느껴지는 경우가 있지요? 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느낌일 뿐입니다. 느낌이나 감정이 진리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한 성령으로 세례 받아 한 몸이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13절 봉독할까요?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였느니라.” 아멘. 심지어 같은 민족도 아니고, 또 종과 상전이라는 신분의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몸이 되었다면, 한 지역에 살고, 같은 교회 다니는 우리는 더 말할 것도 없지요. 한 성령으로 세례 받고 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우리는 분명히 하나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4장 3절에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이제부터 하나가 되자’고 노력하는 게 아니라, 이미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걸 인정하고 한 몸답게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느끼는 감정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 사람하고 나하고는 마음이 너무 안 맞는데, 지난번에도 싸웠는데, 여전히 밉고 용서가 안 되는데. 상처가 덧나고 더쳐서 이제 화해하기도 어려울 것 같은데....’ 이런 느낌과 감정을 통해서 사탄이 우리를 속이는 겁니다. 여러분, 절대로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없어요!”라고 말하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라고 하셨는데 우리가 하나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사탄에게 속아서 하나님께 대항하는 게 되어버립니다. 아무리 사탄이 까불어도 우리는 이미 하나입니다. 부부가 하나요, 가족이 하나요, 온 교우가 하나입니다. 형제간에 서로 다투었다 할지라도 이미 형제인 것을 바꿀 수 없는 것처럼 우리도 이제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미 하나님이 하나 되게 하셨는데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지 미워하면 나만 손해입니다. 왜요? 누군가를 미워하면서 (행복)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사탄에게 속아 하나 됨을 지키지 못하고 (분열)하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사탄은 우리가 하나가 되면 얼마나 엄청나고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지 잘 알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의 하나 됨을 깨뜨리려고, 서로 미워하고 오해하도록 계속 이간질을 합니다. 하늘나라에 가서야 ‘아! 우리가 속아서 서로 싸우느라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이루지 못했구나!’ 깨닫는다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지금부터 잘 알고 사탄을 대적해야 합니다. 이제부터 가족이나 교우를 향해서 섭섭한 마음이 생기거나 미운 마음이 생기면 ‘아하, 사탄이 이간질하는구나.’ 깨닫고, “사탄아 까불지 마라. 우리는 하나다.” 하고 선포하십시오. 그렇게 우리가 깨닫고 더욱 사랑하면 사탄이 설 자리를 잃어버리고 도망가게 되어 있습니다.
15절 말씀 함께 봉독합니다.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아멘. 발이 “나는 손이 아니기 때문에 손과 한 몸이 아니다,”고 주장한다고 해서 한 몸이 아닐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16절에도 똑같이 귀와 눈도 서로 다르다고 해서 한 몸이 아닐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는 너무 달라서 하나가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눈과 귀, 손과 발이 다 달라도 그러니까 오히려 한 몸이다.” 말씀하십니다.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그렇지요. 얼굴에 다 코만 있거나 눈만 있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괴물이지요. 눈도 있고 코도 있고 입도 있고 그러니까 조화가 되어서 아름다운 거지, 다 눈만 있거나 입만 있다면 끔찍하지요. 여기(손)에 손이 아니라 발이 달려 있어 봐요. 안 됩니다. 다 다르지만 하나가 되어서 머리가 시키는 대로 하니까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겁니다.
우리 각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다르지만 우리의 머리이신 (예수님)의 말씀에 하나가 되어서 순종할 때 아름다운 교회와 가정을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2. (약)하게 보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열등)감, 혹은 낮은 자존감이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우리 몸의 지체 중에, 어떤 것은 더 중요한 것 같고 어떤 것은 덜 중요한 것같이 생각될 때도 있습니다. 또 어떤 것은 약하고 어떤 것은 강한 것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 안에서도 혹 ‘목사님 장로님들은 중요하지만 나야 뭐 별 비중이 없지 뭐’ 이렇게 생각해 보신 적은 없습니까? 하나님은 절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22절 함께 봉독할까요? “그 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아멘. 약해 보이는 지체가 더 요긴하다고 하십니다. 24절에는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신다.”고도 하셨습니다. 예. 하나님은 약한 자를 들어서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혀가 강해요 이빨이 강해요? 이빨이 강하지요. 혀는 종종 이빨에게 물려서 피가 나고 아파도, 이빨을 한 번 때려보지도 못해요. 오히려 이빨 사이에 뭐라도 끼면 갑갑할까봐 그거 빼주려고 애쓰는 게 혀에요. 그렇게 연약하고 속도 없어 보여요. 하지만 나이 7,80 돼 봐요. 이빨은 다 빠져서 틀니를 해도, 혀는 끄떡없습니다. 이빨 부러지는 사람은 많아도 혀가 부러지는 사람은 못 봤어요. 그렇게 연약한 것 같아도 죽는 날까지 요긴하게 쓰이더란 말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법칙이에요.
세상은 ‘나는 약하고, 공부를 못했고, 돈이 없고, 지위가 낮고....’ 이런 것들 때문에 열등감을 느끼게 해요. 하지만 이 열등감은 사탄이 주는 마음이란 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노라.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고 늘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열등감을 가질 필요도 없고, 또 반대로 뭐 좀 잘 한다고 (교만)할 것도 없습니다. 25절 말씀대로 (봉독)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아멘. 그냥 서로 같이 (돌보)는 겁니다.
저는 “긍휼히 여긴다.”는 말을 좋아하는데, 서로 같이 돌보려면 서로를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우리는 사실 다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누구나 잘 하고 싶지만 잘 안 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서로에게 잘하기를 요구하기 보다는 ‘저 사람도 잘 하려고 하는데 잘 안 되는 거지.’ 이렇게 이해하고 긍휼히 여기면서 격려하고 돌봐주면 좋겠어요.
학생들에게도 물어보세요. 자기들도 다 공부 잘하고 싶지요. 그런데 안 되는 걸 어떻게 해요. 아이는 아이대로, 어른은 어른대로 나름 애를 쓰는 건데, 조금 더 긍휼히 여겨주시기 바랍니다. 교우들을 볼 때도 긍휼의 눈으로 보고 서로 이해하고 돌봐주면 좋겠습니다. 그 사람도 나름대로 잘 해보려고 했는데 그 정도인 거거든요. 그러니까 내가 조금 더 가까이 가고, 내가 조금 더 보완해 주고, 서로 돌봐주면 머지않아 관계도 좋아지고 좋은 결과가 올 줄 믿습니다.
핵심은 서로 돌봐주며 함께 가는 겁니다.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안 한다고 비난 할 것도 없고, 내가 잘 한다고 우쭐 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영광도 고난도 (함께) 받는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3. (각자) 맡은 일이 있습니다.
28절 말씀 함께 봉독할까요?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아멘.
각자 은사와 직임에 따라서 자기 일을 하면 됩니다. 28절 말씀 중에 여러분은 어떤 직임, 어떤 은사를 받으셨습니까? ‘난 해당 되는 게 없는데....’ 그런데 다른 건 몰라도 ‘서로 (돕는) 것’ 이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 돕고, 교회 밖의 어려운 사람을 돕고.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오늘 김장 축제를 합니다. 하는 사람은 하고 안 하는 사람은 안 하고, 그게 아니라 작은 것이라도 힘닿는 대로 서로 도와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서로 도와 김장을 해서 또 나눔의 동산을 돕고, 이게 바로 주님이 기뻐하시고 우리에게는 복된 일인 줄 믿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야! 우리가 하나 되기만 하면 못 할 게 뭐가 있냐? 하나만 되면 두려울 게 없지.” 그러더라고요. 하물며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 안에서 하나 되기만 하면 세상에 두려울 게 없고, 못할 게 없죠. 어떤 상황 속에서도 행복을 누리며 놀라운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로마가 기독교를 박해하던 시절에, 많은 성도들이 지하무덤인 카타콤에서 살았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타콤 벽에 새겨있는 글들은 절망이 아니라 행복과 소망의 글들이었다고 합니다. 일례로 “나는 행복합니다. 그것은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는 사랑 받지 못하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당시의 성도들은 지하 무덤에 살면서도, 사랑 받는 것보다 오히려 사랑 하는 것에 관심을 가졌고, 사랑하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하였습니다. 그 행복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늘의 행복, 천국의 기쁨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누리며 살았을 뿐 아니라 그들로 인해서 마침내 로마가 복음화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하 무덤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산, 에덴의 성도들 아닙니까?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 되어 하늘의 기쁨과 행복을 마음껏 누리고, 함께 주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찬양 : 기대 (주 안에 우린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