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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보는가? 마태복음 15장 10-11절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유대정결예식을 들여다볼 수 있는 이야깁니다. 모든 종교적 예식과 법들은 고대인의 생활, 삶, 죽음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돼지고기를 먹지마라는 종교적 규율은 집단 감염으로 인하여 집단적 죽음을 경험한 고대인들이 그것을 종교적으로 승화시킨 것입니다. 유대 율법에 의하면 어미와 새끼를 동시에 먹지 말라는 규율도 있습니다. 씨를 말리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닭과 계란, 소고기와 유제품을 동시에 먹지 않습니다. 나름 삶의 철학과 신앙이 담겨져 있는 규율들입니다. 손을 씻는 정결예식 역시 전염병으로부터 공동체를 지키려는 정신을 종교적으로 승화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법 정신이 살아있는 사회에서는 언제나 그 법이 관계를 풍요롭게 살려가고 정의를 바로 세우는 데 활용되지만 오늘 본문처럼 누군가를 흠잡고 고발하기 위한 용도로 적용되기 시작하면 그 법은 이미 죽은 법이거나 사람을 죽이는 무기가 됩니다. 오늘 본문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 시비를 거는 장면을 보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야깁니다. 사람을 살리는 법을 사람을 죽이는 무기로 활용하는 것을 보고 예수님께서는 그런 그들의 마음씀씀이를 정확하게 지적하시는 내용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법조차도 악용하는 너희들의 못된 마음 씀씀이, 마음과 생각과 권모술수야말로 삶과 관계를 망가뜨리는 부정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삶의 어느 때든지 문제의 정확한 핵심에 집중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열쇠를 잃어버리면 아무리 어두워도 열쇠를 잃어버린 지점에서 열쇠를 찾아야 합니다. 열쇠를 잃어버린 곳이 어둡다고 환한 곳에 가서 열쇠를 찾으면 아무리 많은 시간과 공을 들여도 절대로 열쇠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자비와 공감을 위한 대화의 여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 중의 하나는 상호간의 연결이 끊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연결되어 있으면 아무리 문제가 많아도 언제든지 예기하고 풀고 해결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연결이 끊어지면 모든 것은 거기서 끝입니다.
상호간의 연결을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상호간의 신뢰와 믿음, 존중하고 아껴주고 함께 하려는 태도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신뢰와 믿음, 존중을 깨뜨리는 요소들이 알게 모르게 우리 삶에 습관화 되어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보고 인식하는 것을 그대로 말하면서 궁금하면 물어보고 그래야 하는데 그 사람의 상황이나 의도는 전혀 고려치 않고 자기 식으로 함부로 판단하고 규정해서 말하는 습관입니다. 그래서 관찰의 중요성을 이야기했구요. 두 번째는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느껴지는 이 느낌의 중요성입니다. 느낌이라는 것은 단순히 마음으로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온몸, 감각 기관 심지어는 심장에 피부까지도 그 느낌이 나타나기에 느낌은 그 사람의 몸과 마음의 상태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안테나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람의 생각은 많이 물어보고 들어보고 그러지만 정작 느낌을 표현하고 물어보는 데는 전혀 익숙하지 않은 문화권에서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오늘 함께 나눌 욕구도 마찬가집니다. 욕구도 느낌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욕구를 드러내고 표현하는 게 뭔가 옳지 않은 것만 같은 사회에서 자랐기 때문에 욕구를 들여다보는 훈련이 거의 안되어 있습니다. 뭘 원하니가 뭐 때문에 그러니 그 이유와 행동의 동기를 묻는 문화보다는 그래서 그사람의 에너지를 활성화시켜주는 문화가 아니라 ~~해야해 권위주의 사회에서 뭔가에 맞추도록 강요되어져 살아왔기 때문에 삶의 다양성과 그 다양성으로인한 풍요로움이 억제되었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욕구나 필요 이런 거에도 계급이 있어서 개인적 욕구는 사회적 욕구에 비해 중요하지 않고 자식의 욕구는 부모의 욕구에 비해 중요하지 않고 개인의 욕구는 가정의 욕구에 의해 희생되어져야 하고 그런 사회에서 자랐기 때문에 개인 안에서 끊임없이 올라오는 욕구/필요를 활성화시키지 못하며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심리학자 머슬로의 욕구 5단계를 말하면서 모든 인간은 가장 밑바닥에 원초적인 욕구으로보면 생리적인 욕구(배고프면 먹고 싶고, 사랑하는 사람을 보면 섹스하고 싶고, 피곤하면 쉬고 싶고하는)가 있고 이런 것들이 채워지면 위험과 위협으로부터 안전하고 싶고 평안하게 보호받고 싶고 불안으로 벗어나고 싶은 안전에 대한 욕구가 있고 이것이 채워지면 가족 친구 공동체에 속해서 연결, 존중, 소통, 인정받고 싶은 애정과 소속의 욕구가 있고 이것이 채워지면 인권이죠 더불어 함께 살면서 존중받고 자존감을 회복하고 존경받고 싶은 존중의 욕구가 있고 더 나아가서는 자아실현, 그리고 이 단계를 넘어서서는 자기 초월의 욕구 즉 자기 완성을 넘어 타인과 세계에 기여하고자하는 평등 평화의 세상을 향한 메타 욕구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런 욕구들은 어린 아이에서 어르신에 이르기까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고 그래서 보편적이며 우리는 이런 욕구를 통해 삶의 에너지가 표현되고 모든 행위의 기저에는 이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시도라고 까지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모든 행동과 행위의 기저에는 뭔가의 욕구가 있고 우리가 갈등상황에서 그 사람의 행동이나 말이 아니라 그사람이 정말 원하는 욕구에 집중하다보면 훨씬 더 부드럽게 연결이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비폭력 대화공부를 하면서 제일 큰 도움을 받은 것이 이 부분입니다. 그렇다고 지금은 문제없이 잘 사냐 그렇지는 않구요. 그래도 갈등상황에서 그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왜 저렇게 행동하는가에 집중하다보면 많은 것이 공감이 되고 이해가 되요.
어느 날 어떤 분이 두릅을 잔뜩 주셨어요. 그래서 이분 저분 나눠주고도 남아요. 그래서 장아찌 담으려고 집에 나머지를 갖다 놓았는데 바쁘다보니 하루가 그냥 지나갔어요. 다음날 아침에 그날도 일정이 아침 일찍부터 있어서 그냥 나오려고 하는데 “저거 어떻게 할거냐”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순간 감정이 확 올라오는 거예요. “아니 걱정되면 자기가 하면 되지 아침부터 바쁜 사람붙잡고 저거 어떻게 할거냐고 하면 어쩌라구” 그런 거죠. "어떻하긴 어떻게해 걱정되면 걱정되는 사람이 하세요." 하고는 딱 부딪히는 거죠. 그러니 아침부터 화를 냈으니 저라고 기분이 좋겠습니까. 그런데 차를 타고는 가만히 생각해보는 겁니다. 아내의 말이 아니라 아내가 그렇게 말을 하는데 있어서 아내의 욕구는 뭐였을까? 차분히 앉아서 생각해보니 아내는 그 귀한 정성으로 키워서 준 두릅이 상해서 먹지도 못하고 버려질까봐 걱정인거죠. 유학시절 함께 했던 사모님이 정성스레 보내주신 거거든요. 두릅이 아깝기도 하지만 그 정성을 날려버릴 수 있다는 불안감, 죄스러움이 있는 거죠. 딱 아내의 말이 아니라 그 말을 했던 이면의 욕구를 들여다보니 공감이 가는 거예요.
그러면서 내 욕구를 들여다봤어요. 제 상황이 아침시간이 널널했으면 어 그래 장아찌 담글까 했을 겁니다. 그런데 제 상황이 아침부터 일정이 많았던 거예요. 교인들과의 약속에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중의 하나가 신뢰인데 늦게 생긴 거예요. 그래서 맘이 급해 죽겠는데 거기에 일거리가 하나 던져지는 느낌이 드니까 확 올라온 거죠. 제가 아침 시간이 널널했으면 이참에 내 요리솜씨좀 발휘해볼까 하면서 즐거움과 행복함의 느낌이 저에게 올라왔겠지요. 그런데 화와 짜증이 올라온 건 지금의 제 욕구는 실력발휘가 아니라 다른 지점에 있었던 거죠. 그래서 서로의 욕구의 지점을 정확하게 알고 이해했다면 아 내가 지금은 바뻐서 정신이 없으니까 바쁜 거 지나고 저녁 때 해볼게 그래도 귀하게 준건데 버리면 안되잖아(그 짧은 시간에 아내의 욕구까지 읽어줄 수 있는 거죠) 그런데 내 욕구도 상대의 욕구도 인식을 못하고 표면적으로 드러난 거스리는 말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니 화가 나서 그럼 걱정되는 사람이 하셔! 이러면서 아침을 다 망치는 거죠.
그래서 마셜은 사람이 어떤 말이나 행동을 거칠게 할 때는 자신의 욕구의 가장 비극적이고 극단적인 표현으로 나타난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내 욕구가 잘 충족이 되었는지 않되었는지는 무엇으로 알수 있다면 바로 지난 시간에 함께 한 느낌을 통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 느낌이 즐겁고 편안하고 행복하고 좋으면 내 욕구가 이해되고 지원되고 수용되어 충족되고 있다는 것이고 그렇지 않고 화가나고 짜증나고 불안하고 우울하다면 내 욕구가 충족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죠. 그때 그 느낌을 통해 욕구를 찾고 그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것들을 찾아나서는 길은(나도, 타인도) 서로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라는 것이죠.
한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은 건 그렇게 욕구를 충족시켜나가는 방법에 있어서 풍부한 상상력에 열려있으면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삶을 더 풍요롭게 해나가지만 한가지 수단/방법만 옳다고 주장하다보면 그것이 갈등의 또다른 원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에서 설명해드린 것처럼 아이는 화가가 되고 싶은데 부모는 아이가 의사가 되기를 원하는 상황이죠. 부모는 어떤 욕구가 있는 거죠? 아이가 안정된 생활을 하고 행복하길 바라는 거죠. 부모는 의사가 되면 안정되고 행복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아이의 욕구는 자신이 하고 싶은 꿈을 마음껏 펼치고 싶은 자기 실현, 성취, 행복하길 바라는 거죠. 이럴 때 부모는 직접적으로 솔직하게 걱정되는 자신의 욕구를 드러내라는 거죠. 나는 네가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고 살았으면 좋겠어 화가가 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사실은 매우 불안해. 그러면 아이가 난 화가가 될 거야 내 삶에 간섭하지마 하겠습니까? 아 엄마는 내가 화가가 된다고 하니 걱정이 되어서 불안한 거구나 생각하겠지요. 엄마의 맘에 공감이 가겠지요.
아이도 엄마에게 난 화가 될 거야 내 삶에 대해 간섭하지마가 아니라 엄마 나에게는 뭔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성취하고 싶은 욕구가 있어 지금은 그게 화가 인데 살다보면 뭐가 될지 몰라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응원하고 지지받았으면 좋겠어! 아이에게는 부모로부터 지지와 응원을 받고 싶은 욕구가 있을 거예요. 그럼 부모가 의사 안될 거면 나가 하겠어요? 아 우리 아이가 자기가 하는 일을 응원지지 받고 싶어하는 구나 하겠지요.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욕구 이면으로 들어가다 보면 누구나 그러고 싶은 보편적인 욕구들을 만나게 되고 그러다보면 공감과 이해와 수용의 넓은 지대가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종교지도자들의 위세와 휘두르는 칼날앞에서도 차분하게 문제의 정확한 지점을 바라보시며 집중하시는 모습이 놀랍습니다. 세파에도 바람에도 삶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마찬가집니다. 우리는 수없이 많은 갈등상황을 만납니다. 그때는 부정적인 에너지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그때마다 올라오는 느낌을 상대에게 책임지우는 식으로 갈등을 더 키우는 것이 아니라 느낌을 타고 그 근원지에 집중하고 그 욕구들을 이해하고 지원하고 수용하고 아름다운 상상력으로 채워갈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의 에너지는 훨씬 더 풍요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 은총이 함께 하시길 빕니다.